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상용(尙容)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 썼다.
저서에
〈청음집〉·
〈야인담록 野人談錄〉·
〈풍악문답 豊岳問答〉 등이 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61년
효종 묘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洪翼漢(홍익한)
1586(선조 19)~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습(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운옹(雲翁).
병자호란 때 주전파(主戰派) 삼학사 (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로 끌려가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는 진사 이성(以成)이며 어머니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아버지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이정구(李廷龜)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공주행재정시문과(公州行在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사서·장령 등을 역임했다.
1636년
청나라가 제호(帝號)를 쓰면서 사신을 보내 모욕적 조건을 제시하자,
상소를 올려 사신들을 즉각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의 화의론(和議論)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사위 등은 모두 난중에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화친을 배척한 자들을 내놓으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반청(反淸)의 자세로 버티다가
다른 2명의 학사와 함께 사형당했다.
광주 현절사(顯節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포집 花浦集〉·
〈북행록 北行錄〉·
〈서정록 西征錄〉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吳達濟(오달제)
1609(광해군 1)~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다.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전적·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정언·지평·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부교리로 있을 때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청나라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추증했다.
광주(廣州) 현절사(顯節祠), 평택 포의사(褒義祠), 홍산 창렬서원(彰烈書院),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영주 장암서원(壯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으며,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