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구수골 못 위 폭포에 사슴이 떨어져 죽은 것을 마을 사람이 매고 왔다. 잘 몰라 노루 같다고도 했다. 큰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좁은 골짝을 지나면서 절벽이 깎여 폭포를 만들었다. 산짐승이 이리저리 내달으며 지나다가 낭떠러지에 그만 내리박힌다. 멧돼지도 토끼도 그리 떨어진다. 숲이 우거져 감싸 구렁이 있는 줄 모르는가. 감쪽같아 그냥 지나다 구른다.
그곳 위아래 논밭이 있는 사람들은 다닐 때마다 두리번거려 뭣이 있나 살핀다. 칡넝쿨이나 철사로 올가미를 놓거나 구덩이를 파 덫을 만들어 산짐승을 잡으려 하는 데 저리 저절로 굴러들어오니 뒤돌아보게 된다. 겨울에 돌을 들어 웅덩이 돌을 치면 버들치가 떠오른다. 피라미와 가재 미꾸라지도 있다. 곧추선 깎아지른 절벽 폭포를 어찌 올랐을까 궁금하다. 푹 고아 때아닌 마을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당리 아파트에 살면서 뒤 승학산 기슭에 텃밭을 만들었다. 고라니가 내려와선 고춧대를 싹싹 자르고 시금치 윗부분도 모조리 다 갉아먹었다. 둘레에 그물을 치고 막았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봤던 고향 큰 골 논밭에는 그런 게 없었다. 멧돼지나 사슴, 노루가 농작물을 해치지 않았다. 그땐 고라니라는 이름을 못 들었다. 지금에서야 그것도 고라니일 것이란 생각이다. 그 넓은 밭을 무슨 수로 다 막나.
산에 오르노라면 갑자기 아래로 달음질치는 고라니다. 덩치는 커서 저러다 나무나 바위에 부딪히고 내리꽂힐라. 저를 해치려 하지 않는데도 지레 놀란다. 뒷밭에 가자면 돌아 한참 가는데 마침 옆에다 철조망을 뚫어놨다. 쉬 갈 수 있어 좋다. 그리로 나가는데 후다닥 풀숲에서 튀어나와 치빼는 고라니다. 그보다 내가 더 놀랐다. 밭에서 이것저것 돌보고 있는데 여태껏 잘 있다 뒤늦게서야 자다 깼는가 파드득 도망간다. 간담이 무너져 식겁하고 기겁할 일이다. 이것들이 사람을 이리 놀라게 하는가.
한번은 밭일하고 운동기구에 놀다가 설설 내려가는데 옆에서 무엇이 입을 넙죽넙죽하기에 보니 강아진가 했는데 난데없는 고라니 새끼다. 사람 많이 다니는 길가에서 그런다. “넌 왜 밭의 고추 순을 다 잘라먹나.” 비실비실 걸으며 삐죽삐죽 입을 오물오물 댄다. “여긴 우리 땅인데요. 뭐” 사람들이 다니는 틈으로 나가 산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어려서 영도 철도 없는가 막무가내다. 여름 방학이 끝나 장승포에 있는 학교 교무실에 들어가는데 수녀들이 고라니와 같이 다닌다. 꼬리를 흔들며 살랑살랑 또박또박 걸어가는 게 멋스럽다. 밭작물을 자꾸 지분거려서 구덩이를 파 나뭇가지를 덮어두었는데 덫에 빠져 걸려들었다. 죽은 어미 가슴에서 젖이 줄줄 흘렀다.
다음날 밭 가장자리에 긴 다리를 쭉 뻗고 쓰러져 있는 새끼를 거둬 안고 왔다. 우유를 퍼먹이니 좌우로 흘리고 눈만 껌벅인다. 미음을 만들어 먹여도 받아먹지 않고 질질 걷어낸다. 엄마 젖을 달라는데 그럴 수 있나 점점 까라져 가는 고라니 새끼다. 어쩌면 좋을까 엔젤 젖병을 급히 구해 물리니 쫄쫄 조금씩 빨아먹는다. 눈을 뜨고 정신 차려선 버둥버둥 일어서려 애썼다.
생기가 돌아오면서 한 달 넘게 애써 키웠다며 이야기하는 수녀 곁에 졸랑졸랑 길쭉한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보기만 해도 귀엽다. 보듬고 키웠더니 엄마인 줄 알고 가는 곳마다 졸졸 따랐다. 앙증맞아 온통 선생과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어린 고라니를 키워 집안과 마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는데 마냥 그럴 수 없어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숲속에 풀어주니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쪼르르 달아나 버린다. 무심도 해라 저를 보살펴준 사람은 안중에 없다.
일본 어느 절엔 사슴이 마당에 막 다닌다. 사람들 틈에 같이 노닌다. 귀여워 먹을 걸 주면 널름널름 받아먹고 쓰다듬으면 가만 있다. 냄새가 풀풀 나는데도 익숙히 다닌다. 사슴과 노루, 고라니가 비슷하다. 크기와 먹는 거며 엄니가 나는 것이 그렇다.
어릴 때 구수골 폭포에 자주 떨어진 사슴, 노루도 고라니가 아닐까. 이곳 승학산에 고라니 천지다. 가는 곳마다 꿈틀댄다. 어느 집 뒤 안에 떨어졌단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잡으려는 사냥꾼이 없고 올가미나 구덩이 덫도 없다. 저들 세상이다. 치빼고 내달으며 제멋대로 지낸다. 그러니 새끼가 어슬렁어슬렁 아파트 입구에서 서성이는 게 아닌가.
다시 명지 바닷가로 옮겼다. 손이 근질근질 텃밭이 그리워 바닷가에 갈대, 억새, 쑥대머리와 돌을 주워내고 텃밭을 만들었다. 가을 잘 익은 무와 배추를 짓씹어놨다. 뭐가 이랬나. 뉴트리아가 샛강으로 올라와 채소밭을 뭉갰다. 쥐처럼 생긴 것이 앞니가 길쭉한 게 토끼만 하다. 낙동강 물 흐르는 곳을 따라다녀 언제 올라오는지 알 수 없고 눈치가 빨라 잡기도 어렵다. 별난 것이 다 속을 썩인다.
자정 무렵 신년맞이 예배를 드리러 갔다. 을숙도대교 톨게이트 길바닥에 달리는 차 경적과 불빛에 놀라 어린 고라니가 갈팡질팡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헤맨다. 받치면 어쩌나 하며 지났다. 여긴 서리가 안 내리는가. 채소가 파랗다. 뜯으러 가니 몽땅몽땅 베먹었다. 폭폭 파인 발자국이 고라닌지 멧돼지인지 알 수 없다. 며칠 전 동쪽 밭머리를 가는데 잽싸게 넝쿨 풀을 헤치고 달음질한다. 그러잖아도 상추를 뜯어 먹어 뭐가 이랬나 했는데 고얀 놈 고라니 짓이다. 따라가 혼쭐을 내려다가 구차해서 내버려 뒀다.
산에 풀이 적으니 들판으로 왔다. 여긴 서낙동강을 건너야 한다. 두 개 다리가 있는데 그리로 건너서 온 것 같다. 꽤 먼 이곳까지 찾아왔다. 겨울이어서 며칠에 한 번씩 가 배추와 무, 대파를 뽑아온다. 갈 때마다 놀라 도망가는데 같은 자리에 머물던 그 숲이다. 웅크리고 잤는가. 누웠던 자리가 보인다. 뭘 먹어선가 줄행랑을 놓을 때 뒷모습이 토실토실하다. 윤기도 좌르르 흐른다.
바닥이 엉성하고 추워 보여 가마때기나 마타리 포대를 깔아주려고 맘먹었다. 며칠 뒤에 가보니 가고 없다. 휑하니 찬 바람만 분다. ‘좀 더 있잖고 산으로 잘 갔을까.’ 미안한가 그 뒤론 채소를 먹지 않았다. 뱀이 있어서 늘 몽둥이와 낫을 들고 다닌다. 그게 있어 밭을 지키는가 했는데 잠시뿐이었다.
첫댓글
고라니 노는 모습이 보일 듯 합니다.
제 이웃 사람이 사냥터 (임야)를 가지고 있는데, 인근 농장에 산짐승들의 피해를 보상해 줘야 한데요.
그래서 숲이 끝나는 (산 밑) 곳에 돼지감자와 옥수수를 심는다네요.
천적이 없는 짐승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10월부터 3월까지 사냥을 해요.
덕분에 멧돼지와 사슴요리는 자신이 생겼답니다. ㅎ
멧돼지는 옥수수와 고구마를 그리 좋아합니다.
그물을 쳐도 떠들고 들어옵니다.
옥수수는 눕혀 알맹이를 골라 먹습니다.
밤도 까 먹으며 봄에 콩을 심어두면 고랑을 뒤져 꺼내 먹습니다..
자주 오세요 보고 싶어요.
재밋는 글 수고하셨어요
멧돼지와 고라니 개체 수가 늘어 납니다
울타리를 처야 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시에서 야생 조수 피해 방지 울타리 설치
보조금도 준답니다
박회장님 카페를 이리 잘 건사해서 오래오래 갑니다.
이곳에 들어오면 편합니다.
홍시가 무르익고 대추도 많습니다.
겨울이 푸근합니다.
농작물도 쟤네들때문에 난리지만, 몇해전 선산에 갔는데, 산소를 온통 파헤쳐놔서 무서웠었습니다. 그냥 윗부분만 파헤친게 아니라, 굴을 파듯이 뚫어놔서 뭐가 나오는게 아닌가...ㅠ 산아래 꽃집에 들르면 으례히 술이나 음식을 버리지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렇지않아도 적적하고 으슥한 시골산에 쟤들에게마져 공포를 느껴야 되다니...그래도 떨어져 죽은 짐승들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성도님 반가워요.
텃밭에 뉴트리아와 고라니가 찾아오고, 뱀이 있어요.
큰 쥐도 눈이 부리부리해서 다닙니다.
아내가 놀랄까 앞장서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