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춘천의 강원대학에선 몽골학회(학회장 周采赫<주채혁> 강원대 교수)가 주최한 학술 발표회가 열렸다. 주제는 '중국의 東北(동북)공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발표문을 미리 받아 읽어보니 강원대 尹銀淑(윤은숙) 교수가 발표한 논문이 재미 있었다. 尹 교수는 2006년에 화제가 되었던 자신의 박사논문 ‘蒙元(몽원) 제국기 옷치킨家의 동북만주 지배’를 손질하여 조선의 開國(개국)과 李成桂(이성계) 및 몽골군의 관련성을 연구한 글을 내어놓았다.
李成桂의 고조부 李安社(이안사)는 전주에서 살다가 170호를 이끌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 옷치킨家가 지배하던 지금의 延吉(연길) 부근에 정착했다. 옷치킨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이었다. 칭기즈칸은 동생에게 만주 일대의 관할권을 맡겼다. 이안사는 여기서 千戶(천호)의 수장 겸 다루가치로 임명되었고 후손들도 ‘옷치킨家 高麗系(고려계) 몽골군벌 가문’으로 성장해갔다.
李安社-李行里(이행리)-李椿(이춘)-李子春(이자춘)-李成桂로 이어지는 이 家門(가문)은 다루가치의 지위를 승계하면서 함주, 등주, 화주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가 私兵(사병)으로 데리고 있던 家別抄軍(가별초군)은 여진족을 다수로 하는 流移民(유이민) 집단이었다. 이들은 몽골기마전법으로 단련되었을 뿐 아니라 여진족이 특기로 하는 산악전 기술도 익혔다. 이 군사력이 이성계가 조선을 開國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尹 교수는 지적했다.
<옷치킨家 高麗系 몽골군벌 家門 출신인 李成桂의 조선왕조 창업은 동북만주를 지역적 기반으로 蒙元제국 최고의 독립적 세력을 형성한 옷치킨家의 역사를 태반으로 삼고 고려를 그 무대로 이룩되었음이 분명하다. 李成桂 家門은 그동안 개발되어온 세계적 수준의 역사적 세례를 직접 받아오면서 크게 증강된 군사력으로 元末(원말), 明初(명초)의 격동하는 한반도 판세를 주도하면서 조선조를 창업해내게 됐다. 그러니까 옷치킨 울루스 160년사의 한 결실로 고려의 역사배경을 무대로 삼아 이룩된 新왕조라는 성격도 갖는 조선왕조라고 할 수 있겠다.>
백제, 고구려, 신라는 그 지배층이 모두 몽골-흉노계통이었다. 이들을 통합한 통일신라도 지도층이 “우리는 북방계통이다”는 의식을 가졌다. 고려 지도부는 대체로 신라계통이 많은데 그들도 그런 자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조야말로 그런 민족적 자의식을 잃어버리고 中華(중화)사상인 주자학에 함몰되었다고 생각해왔는데 尹銀淑 교수는 여기에 도전하는 논문을 쓴 것이다. 즉 조선을 개국한 태조 李成桂 가문이 몽골계 군벌이었고 그런 경험에서 만들어낸 군사력이 開國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북방유목문화를 태반으로 하여 건국된 것이 조선이란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태반에서 건국되었는가? 조선인 친미파 李承晩(이승만)이 주도한 건국이었다. 그를 매개로 하여 몽골태반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접목된 것이다. 이는 善循環的(선순환적) 접목이었다. 북방유목문화의 특징은 개방과 자유와 자존, 그리고 기동성이다. 이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인들은 조선조 500년간 북방적인 기동성과 야성을 잊고 살았다. 그런 북방적 기질은 주자학적 속박에 눌려 무의식으로 잠재화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 주자학적 질곡을 끊고 눌려 있던 북방적 야성이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도록 만들었다. 자유민주주의가 韓民族(한민족)의 뇌관을 터트린 것이다. 그런 충격을 받지 못한 북한은 아직도 조선조적인 질곡 속에 묶여 있다. 북방적 야성을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북방을 태반으로 한 흉노기마왕국 新羅(신라)의 再現(재현)일지 모른다.
이런 민족적 자의식이 편협한 인종주의나 국수주의로 악용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도 있다. 진정한 자의식과 자존심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만큼 상대도 존중한다. 이른바 열린 자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