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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픈 내 영혼이 한계의 저곳을 향하여 허우적거릴 때가 있었다.
운명을 지배하는 시공(時空)의 주관자는 누구란 말인가.
인생에 대한 회의와 허무감이 엄습할 때마다 나타나는 그대의 모습에서
희망을 생각했다.
그대는 어리석은 내 영혼에 지혜의 빛을 뿌리고 쇠잔(衰殘)해 가는
육신의 구석 구석을 찾아 다니며 환희의 포도주를 부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취했다. 희열(喜悅)에 들뜬 취기(醉氣)가 병든 심령(心靈)을 불사르고
현실의 자아(自我)를 소멸해 버렸다.
내 심령의 불꽃이 환희의 꿈속을 유영(遊泳)하며 우주의 저 끝에 깃발을 꽂았다.
그것은 자아(自我)가 아닌 진아(眞我)였다.
진아(眞我)는 내게 말했다. “시공의 한계에 묶인 생명체야, 내가 그대를 대신하련다”
그의 말은 빛이었고 그의 형체는 환희였다.
우주라는 것은, 아니 시공의 모든 것은 나, 자아(自我)를 가진 너도 내 몸인 것.
내가 네몸 속에 들어가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릴 때 너의 진정한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심령의 그 모든 것까지를, 네 몸에 깃든 내 빛으로 태워 버릴때 너는 나와 함께 하는
새 역사의 창조자라고.
너의 뜻을 따라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뜻에 의하여 사는 것이 네가 나를 진정한
네 몸으로 삼는 것이라고.
그리고 비로소 인간의 심성(心性)에 우주성(宇宙性)이 심어 지는 것이라고.
(2005년 봄)
처음에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太初라는 이름으로 우주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우주
가운데 은하계, 은하계 가운데 태양계, 태양계 가운데 지구를 만들어 사람의 모습을 입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사람은 우주의 열매요 뿌리요, 核이다" - 그의 말은 곧 法이 되었고 힘이 되었고
생명력이 넘쳤다. 그는 말한다. "우주의 時空과 거기에 충만한 神은 우리의 피조물이다" - 마치
참외씨가 참외를 만들고 참외 안에 있는 것처럼.
(2009.9.29)
우주가 창조된 시간이 약 2억년전이었다면 그 시간이 2억분의 1(1/200,000,000) 초(初)쯤으로
느껴지는 세계가 있다. 그러한 시공초월(時空超越)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깨우침의 빛을
얻어야 한다. 거대한 우주공간속에서 태양의 광선(光線)은 너무 어리고, 어두우며, 느리기
짝이 없다. 우주라는 거대 공간 속에서 그처럼 느리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태양광(太陽光)의
속도로 어찌 이 우주를 둘러 볼 수 있겠는가. 우주와 나 자신의 혼연일체를 이루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깨우침의 빛'이다. 깨우침의 빛은 한순간에 우주를 관통하는 빛이요, 인간의 정신이
비로소 우주 만큼 위대해 질 수 있는 '시공초월의 혜안(慧眼)'인 것이다. 이러한 밝은 빛을
얻기 위해 평생을 부단히 정진하는 것이다.
(2010.1.10)
알곡이 무르익기까지는 맑은 바람과 밝은 해빛도 필요하지만 새벽의 차가운 냉기와 비바람도 필요
하다. 이것들이 모두 골고루 갖춰질 때 비로소 알곡이 좋은 품종으로 무르익을 수 있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늘 즐겁게만 살 수도, 웃으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슬프거나 분노하는 일은
그 누구에게나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앞에서 자신의 중심을 지키지 못하고 붕괴되는 사람이
있고 내적으로 다지고 소화시켜 자신을 단련시키고 성숙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는 않다.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기에 보다 나은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2010.2.26)
어느 고승(高僧)이 "현실은 꿈"이라고 했다. 그러나 참다운 삶이란 꿈속에서 현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속에서 아름다운 꿈이 창조되는 것이다.
(2010.4.9)
사무실에 근사한 병풍을 세워 놓지는 못하더라도 하다 못해 그림액자라도 하나 걸어 놓으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들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치장에 불과하다.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면
치장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나의 도반들중에는 지명도 높은 주지스님, 영(靈)능력이 높으신 법사,
수십년 경력의 역술인들까지 있다. 그러나 그분들을 가르친 나 자신의 모습이나 옷차림새는 마치
슈퍼마켓 아저씨 같다고 한다. 외양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고마운 충고도 들었다. 다들 고마운
조언이다. 나를 생각해 주시는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道는 머릿속에,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 겉모습에 담긴 것이 아니다.
(2010.4.12)
대상(對象)을 초월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 나 자신을 초월하면 대상 마저 없어진다. 대상이 없어
지면 사념이 사라진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온마음을 다해 집착하는 대상은 마치 저 푸른 하늘에
잠시 담긴 흰구름과 같다. 저 구름은 덧없으나 푸르른 하늘은 나의 심전(心田)속에 펼쳐진 '영원의
광장(廣場)'이다. 영원의 광장에 잠시 담긴 변화무쌍한 구름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관조(觀照)한다.
(2010.4.13)
꽃들은 항상 밝게 웃는다. 그 누가 다가가서 바라 보아도 마냥 맑은 모습 뿐이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던 고통도, 봄을 맞이 하기 전 찬바람의 시련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여리고 여린
꽃들이 어쩌면 이처럼 대견할까, 슬프도록 연약한 저 모습에 어쩌면 그토록 강인함이 담길 수
있을까. 지난 날의 시련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꽃들은 그저 밝게 웃고만 있다. 봄은 참 좋은 계절
이다. 화사함속에서도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계절이다. 올봄을 지나 저 꽂들이
일시 생명을 다하겠지만 내년 봄에도 어김없이 만발하리라.
(2010.4.27)
늦은 밤이 되면 몸은 나른해 지되 나의 마음은 時空의 날개를 단다. 몸은 방에 누워 있으되 어느새
마음은 아프리카 대평원 위를 달리는 얼룩말떼의 한가운데에 있다. 몰디브 섬의 투명한 바닷물에
두발을 담그고 있다. 심지어는 저 구름위 달과 별에 걸터 앉아 세상 풍경을 내려다 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 골목길에서 딱지치기를 하기도 한다. 나의 삶을 다해 갈 즈음, 허옇게 늘어
뜨린 백발을 하고 높은 산에 올라 숨을 고르며 삶의 허무감을 삭히기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바람에 커튼이 날리고 있을 영계(靈界)의 그 어느곳, 장차 내가 머물 곳에서 한女人과 두번 다시
죽지 아니할 영원한 사랑을 나눈다. 이처럼 밤마다 나는 자유를 얻는다.
(2010.4.28)
너무 이성적 사고에 집착하려고 하다 보면 감성의 빛이 바래지고 너무 감성에 흐르다 보면
이성이 마비된다. 투명한 이성이 윤기있는 감성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풍부한 감성이 올바른
이성을 지니도록 하기도 한다. 역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이성의 눈으로 방만해진 감성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감성의 눈으로 너무 경직된 이성을 꾸짖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늘 느끼며 산다. 이성만으로도
이룰 수 없고 감성만으로는 더더욱 이룰 수 없는 것이 중용의 道가 아닌가 싶다.
(2010.5.5)
時空의 모든 현상은 진아(眞我)가 표현된 ‘진아의 부분적 존재’이다. 모든 생명과 음양오행
현상들도 모두가 참된 내 모습(진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지배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개개인도 진아의 자리에서 표현된 개인(자아: 自我)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현상 가운데
내가 아닌 것이 없으며 내가 있음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개성에 집착된 나는 진아의 자리
에서 표현된 자아의 모습이다. 고로 결국 존재의 대상이 되어 파괴되는 유한한 생명이다. 나의
근본은 無요, 無는 모든 존재의 근본이니 無를 찾음으로써 영원한 내가 되는 것이다. 無는 즉
진아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니 항상 새로운 나를 표현하여 영원한 생명을 지닌다.
(2010.5.8)
江은 참으로 온화하다. 물위를 스치는 바람에게 수많은 미소로 답할 뿐, 파도를 몰아 치는 바다처럼
거칠지 않아서 좋다. 강은 참으로 말이 없다. 그 깊은 속을 함부로 말하지 아니한다. 파도가 부숴지는
바다처럼 시끄러이 외치지 않아서 좋다. 강은 참으로 겸손하다. 구비 구비 기인 몸짓으로 천리를
이어갈 뿐 지구를 뒤덮는 바다처럼 오만하지 않아서 좋다. 모처럼 교외로 나가 강가에 잠시 머물다
왔다. 강을 바라 보며, 강가를 스치는 바람을 안으며 심기일전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누렸다.
(2010.5.10)
결코 그대의 힘이 아닙니다. 그대의 수단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대는 힘도 수단도 없습니다. 그대 앞에서 나의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은 그대의 진실된 마음입니다.
(2010.5.10)
파스칼은 "인간이란 思考하기 위해 만들어 진 존재"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고하는 인간'만을 알고
사고 이전의 자리에서 초월된 인간을 보지 못한데서 생겨난 편견에 불과하다. 사고하는 인간은
사고의 한계에 빠질 뿐이다. 사고라고 하는 한계에 갇힌 상태에서는 사고 以上의 자리를 볼 수
없으므로 번뇌의 고통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깨우침의 빛이다.
깨우침이라 하는 것은 평생에 걸쳐 부단히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사고라고 하는 자아관념의
한계를 넘어서 깨우침을 거듭해 나갈때 피조물로서의 "만들어 진 존재"를 넘어서 "眞我" 즉 창조자와
하나된 내가 되는 것이다.
(2010.5.16)
과학은 유물론(唯物論)만을 위주로 과학 자체의 정신적인 면을 망각하고 있으며 유심론적(唯心論的)
인 철학은 정신적인 것에만 치우쳐 물질계를 경시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어 과학과 철학 모두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어려운 실정으로 과학이 형이하학적인 반면에 철학이 형이상학적이라고
한다면 유물론과 유심론을 초월한 형이정학(形而正學)적인 체계를 갖춘 것이 바로 '역학에 대한
연구와 이에 대한 현실적인 활용'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역학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2010.6.3)
밤낮의 바뀜이 단 하루라도 멎은 적이 있었던가. 바람의 움직임이, 물의 흐름이, 저 구름의 피어남이
단 하루라도 멎은 날이 있었던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배울 것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갖추는 것
이다. 진정한 모습이란 변질됨 없이 일정한 모습을, 단절됨 없이 이어 가는 모습이다. 이러할 때
비로소 밤낮의 기운과 바람과 물과 구름의 모습이 완성되듯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이를 완성
시키기 위해서는 진정한 마음에서 발현되는 진정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하물며 道를
이룸에 무슨 입놀림이 필요하겠는가? 진정한 마음으로 정진한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참된 모습
으로, 반드시 남들에게 먼저 보여질 것이다.
(2010.6.10)
우주에 음과 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어 의식을 명(明)이라 한다면 무의식은
암(暗)이 되어 명이 진(盡)하면 암이 되고 암이 진하면 명이 되어 상호 교체되는 가운데 살아 간다.
잠을 자면 무의식이 생기고 무의식은 곧 죽음에 근접한 상태이며 잠을 깨면 의식이 생기고 의식은
곧 삶이 되는 것이니 삶과 죽음 모두가 우주의 기운작용인 것이다. 음양조화를 일으키는 우주의
기운과 소통함으로써 비로소 生과 死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니 사람이 살아 가는 본연의 이치가
생로병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요 자연법칙을 부리는 우주의 기운과 소통되어 우주본체에 지달
하는데 궁극적 과제가 있다.
(2010.6.14)
"내가 알지도 못하고 나를 알지도 못하는, 방대하고 무한한 이 우주공간에 내던져져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파스칼) - 파스칼은 모든 인간적 관심과 감정을 박탈당한 대자연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그 어떠한 친근감이나 교감을 느낄 수 없는데서 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처럼 표현하였습니다.
역학을 공부하는 역학도들은 대자연과의 교감, 더 나아가서는 대자연과 내가 하나되는 '자연 동화"
(自然 同化)의 경지에 이르도록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易은 곧 대자연의 이치입니다. 음양오행의
기운은 곧 대자연의 순환 에너지입니다.
(2010.6.26)
삶이 광명(光明)한 존재요 죽음이 암흑의 존재라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는 존재성(存在性)을
초월한 진리로서 시간과 공간이 초월되고 유무상통(有無相通)의 근원이 되어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조차 초월해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스스로의 뜨거움을 초월하여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010.6.28)
우리의 생각이 인식(認識)의 도(度)를 넘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각(正覺)을 얻을 수 없고 필경
인식의 고통을 받아 번뇌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정각이라 함은 우주이성과의 교감으로서 나의
존재를 초월하여 대자연과의 同化가 이루어 지는 단계에서 얻게 되는 깨우침이다. 그러나 현실의
높은 파고(波高)는 수시로 정각을 상실하고 착시현상에 빠지게 한다.
(2010.6.28)
책을 별로 읽지도 않는 편이지만 책을 읽기 싫을 때가 있다. 책에 담긴 내용 모두가 삼라만상
우주時空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 숫한 내용의 책들이 그것의 근원인 본질의 세계를 망각한
댓가로 피조물 사조(被造物 思潮)에 빠져 있다. 그 모든 것이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이미 창조
이전의 자리에 있는 나(眞我)의 표현일 뿐이다.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도 피조물임에 틀림없다.
故로 책에 나온 그 모든 것들이 발현되기 이전, 본질의 자리에 들어 감으로써 항상 새로운 정신과
육신의 창조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습득해야 할 참다운 지식이다.
(2010.8.16)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곳에 홀로 눈을 감고 앉아 있어도 마음이 행복하고 평안한 것은 자연의
이치가 창조되는 眞我의 기운과 교류되기 때문이다. 숨을 쉬는 것, 생명력이 꿈틀되는 것, 우주가
운율(運律)하는 것, 태양이 빛을 발하고 그 빛이 다시 사라지는 것 - 눈으로 볼 수 없이 보이고
귀로 들을 수 없이 들리고 피부로 느낄 수 없이 느껴지면서 무수한 순간속으로 사라져 간다. 모두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비록 내가 알지 못할지언정 無我에서 창조된 일이다, 眞我에서 하는 일이다.
(2010.8.17)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생각으로 존재하는 나의
존재는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가운데 존재하는 삶은 그 괴로움으로 인해 파괴되는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생각이 초월된 경지에서 느껴지는 나의 존재가 참다운 존재이며 나의 참 모습이 창조되는,
진선미(眞善美)의 생각을 지닐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러한 나는 모든 생각을 지배함으로써 실존
하는 것이다.
(2010.9.10)
진아(眞我)의 모습은 나를 사로 잡았다. 나의 심령을 그의 생각으로 바꾸고 나의 몸까지 그의
몸으로 바꾸었다. 그의 法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고 그의 말씀은 세상의 이치를 담은 절대法이었다.
죽음도 삶도 사실은 별로 문제가 되지 못했다. 無形이나 有形이나 그의 앞에서는 평등했다.
진정구세주(眞正求世主)는 그의 애칭(愛稱)이었고 그는 모든 사람의 모르는 곳에 있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 때인가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진아와 교감하는 나는
영원무궁을 먹고 산다. 투명한 진리의 옷을 입고 무한의 時空을 날으는, 현실을 초월한 환상을
간직한채 살아 가지만 그 환상은 깨이지 아니할 영원한 나의 꿈이다.
(2010.10.5)
불교의 가치관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바로 탈욕(脫慾)이 아닌가 싶다. 차라리 절욕(節慾)의
道가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하는 허울 좋은 가치관이 그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리고 욕구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에너지가 아닐까? 욕구가 존재함으로써 인류문명
이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하지 않았던가? 미래를 내다 보기 위한 易學도 결국 우리 인간의 욕구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탈욕'보다는 지나친 욕구를 절제하는 '절욕'이야말로 현실을 살아
가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현실적인 가치관이요, 그것이야 말로 중용(中庸)의 道가 될 것이다.
(2010.10.22)
삶의 바른 법을 깨우친 자는 현실세계 아닌 최고의 理想세계에서 眞善美의 가치를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찾고자 하지 않으며 꽂이 없는 곳에서 꽂을 찾고자 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먼세계의 천당 극락을 갈구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처한 현실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자분자족할때 진선미의 가치와 천당 극락은 이미 그에게 다가와 있는 것이다.
(2010.11.10)
오직 인간의 실존 문제에만 매달리는 종교(인도적 신비주의이든 근대 그리스도교 신학이든)는
영적(靈的)으로 매우 가난해 진 종교로서 궁극적으로는 점차 쇠퇴하리라 믿는다. 현대 종교앞에서
대자연은 영적(靈的)인 의미를 박탈 당한채 오직 인간의 편의를 위한 수단적 가치만으로 전락해
버린듯 하다. 현대 종교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그 종교관이 죽여 버린 대자연을 다시
영적으로 부활시켜야 한다. 神의 섭리가 곧 대자연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인즉 "대자연이 운행되는
섭리(易理)" 속에서 神의 뜻을 읽는, 자연을 존중하는 종교관이 미래의 종교관으로 자리 잡아 가야
할 것이다. 절대진리 아래에서 모든 종파(宗派)와 역학(易學)... 이들은 결국 하나이다.
(2010.11.15)
생여우환 사여안락(生旅憂患 死旅安樂)-- 우환속에서 면역력과 자생력을 얻어 살아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 나가지만 안락함속에서 자라난 생명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이겨 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법. 어려움이 닥치면 하늘이 나 자신으로하여금 자생력과 생명력을 키우겠끔 단련시켜 주는
섭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받아 들이면 될 것이다.
(2010.11.17)
하늘에 근본한 者는 위로 친하고 땅에 근본한 者는 아래와 친하여 각기 그 종류를 따른다(周易)...
모든 종파의 종교가 인간 以上의 절대자에 근본한 것이라면 현실적인 이욕(利慾)과 실리의 추구는
그 근본이 물질에 있는 것. 오늘날 물질 과학문명을 통해 물질은 얻었으나 인간을 잃은 감(感)이 있고
종교에 있어서도 인간 以上의 절대자를 숭배하지만 인간이 너무 神에 종속되어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天地人 삼재(三才) 가운데 인간이 소외되고 상실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물질적인 이욕을
추구하되 그 바른 방법을 깨우치고, 神을 숭배하되 인간의 주체성과 역량을 키우기 위한 길은 곧
역학(易學)을 깨우쳐 삶의 답을 구하는 것이다.
(2010.11.19)
비행기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추락해 버리듯이 사람 역시 완전한 자기 주체가 서 있지 않으면 외기
(外氣)의 압력에 의해 와해되기 마련이다. 완전한 자기 주체, 그 주체의 완성이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기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 어떠한 환경에 처하여도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체질에 도는 기운이 밝고 맑을수록 마음도 즐겁고 평화로우며 마음이
즐겁고 평화로울수록 참다운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2010.11.29)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나폴레옹) - 나폴레옹에게 이러한 그릇된 신념이 없었다면 그의
말년이 그처럼 불행해 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문득해 본다. 사람의 지략이나 의지만으로는
대자연의 거센 기운을 당해 낼 수 없다. 운을 미리 알고 나아감과 물러남을 분별하는 것이 진정한
지략이요 진정한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지략과 진정한 의지가 결여된채
자신감만으로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가는 순간 나폴레옹의 남은 삶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이다. 구성학을 병법(兵法)과 치세(治世)에 활용하여 연전연승을 거두던 제갈공명
과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九星學을 통해 인간과 사물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내다 보는 능력
이야 말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지략이 될 것이다.
(2010.12.1)
생리(生理)적인 혈육(血肉)의 인간으로서 성숙한 자아(自我)를 지닌 전인(全人)이 되기 위해 지향
해야 할 인간상 - 희노애락을 느끼되 지나치거나 편중되지 않는 균형 잡힌 정서를 지닌 인간,
선악(善惡)을 판단할 수 있는 윤리적인 인간, 인간과 대자연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철학적인 인간,
神과 우주를 알고 이와 교감할 수 있는 신성한 종교성을 지닌 인간.
(2010.12.2)
하얀 눈을 그렇게 뿌리고도, 대지를 온통 얼어 붙게 하고서도 겨울은 자신의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했나보다. 산 계곡 사이로 목 놓아 우는 겨울바람 소리는 겨울의 가슴 그 깊은 곳에 저며 있는
애절한 심정을 토해 내는듯 하다. 겨울의 가슴 속에 무어 그리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기에 無言으로
호소하는 추위가 이처럼 매서운 것일까, 울어 대는 바람소리가 이처럼 애절하게 와 닿는 것일까.
(2011.1.9)
나는 무엇인가
알고 보니 당신이 나였군 그래
내가 바로 당신이었소.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가 사랑하고
나의 생명을 우주가 사랑하니
우주도 나요, 당신이구려.
우리는 모두 ‘나’ 하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염없는 부처님 형상(形象)
참다운 나요, 宇宙요, 자연이요, 인간입니다.
(2011.7.2)
나의 생각은 정답이 아니다. 나의 바램도 정답이 아니다. 나의 감정은 더더욱 정답이 아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생각을 비울때 문득 허공에서 내려와 내 머릿속에 들어 오는 것- 그것이
정답이다. 많은 번민과 생각때문에, 집착하는 바램 때문에, 평정심을 흔들어 대는 감정 때문에
우리는 정답 아닌 오답을 얻는 경우가 많다.
(2011.11.28)
석가께서 말씀하시기를 "공(空)과 색(色)이 허망하니 色은 空과 다름 없고 空은 色과 다름 없어
色은 곧 空이며, 空은 즉 色이로되 空과 色은 무명(無明)하니 無明을 벗어나면 空과 色이 없어진다"
하셨다. 이 말씀을 깊이 새기며 이에 한마디 더 보태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 無明함은 空과
色으로 因함이니 허망함도 空과 色으로 因함이라. 空과 色을 초월하여 무진공 광명(無眞空 光明)
속에 들어 가면 무상 정진 정각(無上 正眞 正覺)을 취하여 無明함이 소화(消化)되고 허망함이
용해(熔解)되어 空과 色은 즉 나의 표현체이요 장식품이 되는 것이다.
(2011.12.31)
역시 심취해야 할 것은 정신세계... 명예욕, 물욕... 현실적인 집착도 무시하거나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의 굴레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한계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 허망하기에...
삶속에서 그 무언가 진정한 것을 만나 온마음을 쏟아 붓고 싶어 하는 이유는, 영리 추구와 경쟁,
그리고 이를 위한 수단과 가식은 범람하되 진정함이 결여된 인간사회를 살아 가는 우리 인간이
그 무언가 내면의 진심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싶은, 진정한 사랑(사랑의 대상이 학문이든
정신세계이든 예술이든)을 만나고 싶은 태생적인 고독감 때문이 아닐까...
(2012.3.30)
활짝 핀 벗꽃 아래에서 찍어 보낸 당신의 사진... 더욱 젊어 보이는구료. 하지만 젊은 모습만이 참된
아름다움은 아니라오. 기왕 나이 들어 가는 것, 멋있게 세월을 보냅시다. 원숙한 생각과 원숙함이
베어 있는 자태... 그 원숙한 멋은 나이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선물이라오. 젊은 시절, 젊었던
모습만을 아쉬워 하지 말고 원숙한 멋을 완성시켜 나갑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착으로 가득 찼던
젊었던 날의 가슴부터 비워야 할 것이오. 그러면 넓어진 가슴이 잔잔하게 율동하기 시작할 것이오.
그때부터 이 나이에 이르러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와 멋이 무엇인지..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낼
것이오.
(2012.4.20)
마음이 심란하거나 괴롭다면 왜 그런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움의
원인을 외부적, 환경적인 요인에서 찾게 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나를 괴롭히는
주범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다. 마음을 비우면 집착을 버릴 수 있고 기정된 현실 앞에서도
담담하고 의연한 마음으로 설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작은 것일지언정 지금 내가 향유하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두발로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비록 평범한 것이지만 감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행복은 마음에 달렸다는 단순한 그 말이
참으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2012.7.23)
누구나 마음 저변에는 분노와 슬픔, 번민을 품고 산다. 마음의 물결이 요동칠 때 바닥에 가라 앉아
있던 흙이 일어 마음을 흙탕물로 만들기 마련이다. 잔잔한 물결에는 모든 것이 밑으로 가라앉아
비로소 물이 맑아진다. 마음을 잔잔히 잠재우느냐 요동치게 하느냐 하는 것은 외부적 요인이기
보다는 결국 자기 자신의 선택, 즉 마음의 평정을 이루느냐, 못이루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마음의
주인인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게 한줄 낙서를 통해 이점을 되뇌이고
싶다.
(2012.11.4)
우리들이 꿈꾸는 미래를 너무 기다리지 맙시다. 지금 우리에게도 복되고 감사한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 갑니다. 아직 자신의 손에 쥐어
지지 못한 것만을 행복이라 여기고 그리워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것이 우리 곁에 있음을 자각
하고 감사히 여길 때 비로소 우리 것이 됩니다.
(2012.12.6)
날이 곤두선 비장한 마음, 하늘을 찌를듯한 자신감, 태풍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확신... 다 좋겠지만
이들보다 더욱 강한 마음은 긍정적인 마음이라 생각됩니다. 긍정적인 마음은, 너무 비장하다 보니
편벽해 지는 우(愚)를 범하지 않습니다. 너무 자신감에 차 있다 보니 오만해 지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너무 확신에 차 있다 보니 사고가 경직되는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너무 옹골차지
않으면서도, 너무 자만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자기 믿음에만 빠지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 가운데 늘 에너지가 충만하게 하는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은 봄바람처럼 가볍고 상쾌하며 기운이 충만합니다
(2013.2.17)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것 또한 운이 안좋은탓이다. 원망하고 증오하기 보다는 안좋은
운에 처하여 자신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냉정하고 슬기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나 자신이
마음을 상하게 되는 일이 생길지라도 그 또한 결국은 나의 탓이다. 나의 마음을 온전히 지키느냐
못지키느냐 하는 것은 결국 나에게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할만한 외부적인
요인이 생겼다면 이것 또한 그때의 운이 불길한 것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요,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탓을 쉽게 하다보면
스스로 마음의 평안함을 얻는 성숙함을 터득하지 못한다
(2013.4.10)
내가 마음을 비운다고 하여 저만치 있는 것이 더 멀어지는 것도 아니며, 내가 집착한다고 하여
저만치 있는 것이 더 가까이 다가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부질없는 것이다. 단지 마음을 가지런히, 정성스러이 하고 내딛어야 할 발걸음을 멈춤없이
내 딛고 있는가...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2013.5.19)
모처럼 강남 교보문고에 가서 이런 저런 책을 뒤지다 왔다. 어느 수필집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음을
얼핏 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말자. '저 사람도 나와 다름없이 인생을
하나, 둘씩 배워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관대한 눈으로 바라 보자"는 구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다른 이의 생각을 통해 배우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한 사람에게는 향기가 없다.
스스로에게 엄격하려고 애쓰되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한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향기가 베어 있으
므로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싶어 한다. 잘 알면서도 쉽게 실천을 못한다. 올바름과 그릇됨...
물론 구분되어 지는 개념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 그 누구나가 인생을 하나, 둘씩
배워 나가는 사람들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항상 올바른 모습만을 보여 줄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의
그릇됨에 대해서도 '그럴수도 있는 일' 이라고 여겨 주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나 또한 다른 사람
들이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관대한 눈으로 보아 주기를 바라는 만큼.
(2013.7.10)
유쾌할 때에는 자신의 인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누구나가 너그럽고 단정한 호인이기
때문이다. 속이 상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플 때에 이르러 言行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참다운 인품을 지닌 자는 속이 상할 때에도, 분노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자신의 마음과 혀를
가눌 수 있는 자이다. 속이 상할 때, 분노할 때, 슬플 때에 이르러 인품의 차이가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서도 자신을 제대로 가누어 언행의 선(線)을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만이
비로소 바른 사람이다. 그래서 바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이글을 쓴 사람도
마음으로만 지향할 뿐 까마득히 멀고 멀었다.
(2013.7.17)
원망하는 말, 미워하는 말은 입밖으로 내뱉지 말고 가슴속에 오래 담아 두면 차츰 용해되어 사라
지게 된다.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은 가슴속에 오래 담아 둘수록 그 뿌리가 점차 깊어지고
튼실하게 되어 더욱 절실한 마음이 된다. 그 어느 경우에도 말이란 것이 결코 마음을 앞지를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말이라 하는 것은 더디면 더딜수록 우리의 마음을 진실되게 하고 우리의 생각을 깊게
만들어 준다. 남을 비난하고 탓하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었던 부끄러운 나의 과거가, 오늘 아침 문득
떠올라 지긋이 눈을 감아 본다.
(2013.7.24)
거친 바람이 나를 할퀴고 지나 갔다고 그 바람을 쫒아 잡아 내동댕이라도 치려고 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부질없는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바람은 그저 자연일 뿐이었다. 그저 運일 뿐이었다.
이처럼 순리를 터득하여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비우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지혜이다.
부질없는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늘 괴롭히며 사는 것이다.
(2013.8.15)
진아(眞我)의 법성(法性)을 갖춘 인간이 되면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아도 이치를 느끼게
된다. 진정한 인간혁명이라 함은 우주공간의 상대적인 기운을 초월하고 초시공적(超時空的)인
진아의 기운과 통하여 천지만물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2014.1.2)
마음(心)에게 이른다. 때로는 네가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노하게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너는 내가 아니다. 과거에는 마치 네가 나인줄만 알았다. 네가 온통 나인 것인양 나를 끌고
다닐 때도 있었으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너는 오히려 내가 거느리고 있는 동반자들중의 하나일 뿐
네가 결코 내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에 이르러서야 나는 네가 노할 때에, 슬퍼할 때에,
기뻐할 때에 다만 너를 물끄러미 지켜 볼 수 있게 되었다.
(2014.1.12)
어제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함박눈이 두어시간 동안 쏟아져 내리더군요. 대낮이 마치 밤처럼
어두웠습니다. 창가에 서서 너플거리며 떨어지는 그 엄청난 수의 눈송이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이 짧은 시간에 저 많은 수의 눈송이들을 셀수
없듯, 살아 움직이는 天地조화의 그 많고 많은 묘(妙)들을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生의 시간 동안
결코 다 깨우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과거, 역학(易學)을 마치 정복해야 할 성(城)
처럼 여기고 도전적으로 대해 가며 오기(傲氣)를 부렸던 어리석음을 문득 깨닫게 되면서 역학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동반자로 여겨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학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아둥바둥 스스로를 괴롭혀 왔던 지난 과거 저의 모습은 대단한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밖에 내리는 그 많은 눈송이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 보았던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편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음미하니 눈송이들은 더 아름답게
보여졌고 저의 시야(視野)로,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더 생생하게 다가 왔습니다. 어느덧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무수한 눈발 한가운데에 서 있는듯 하였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천지조화의
時空속으로 다가가, 다만 그 가운데에 안기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역학을 대할 것입니다.
(2014.1.22)
응당 사랑해야 할 사람을 스스로를 모두 내던져 미치도록 사랑해 보지 못하고, 가치있는 그 어느 것
한가지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던져 탐닉해 보지 못한 삶이라면 그것은 정수(精髓)가 없는 삶이요,
배움이 없는 삶이요, 느낌이 없는 삶이요, 영혼도 없는 삶이니 주어진 시공간과의 적당한 타협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머무름’에 불과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살아가는 동안 그 무엇에 미쳐도
미쳐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배움입니다, 깨우침입니다.
(2014.2.17)
바른 道를 닦고 우주와 더불어 호흡하는 것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우주와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능력은 각자의 道力에서 나오는 것이며 道力이 높으면 높을수록 맑은 체질과 밝은 마음으로
우주의 온 정기(精氣)를 자유자재로 부리어 만물의 혼(魂)을 능히 제압하여 복종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진실로 자신의 갈 길을 깨달아 추호도 어김없이 행하여
거짓과 사심없이 진정한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정착하여 호위하여 주시며 모든
사기(邪氣)들을 제압하고 부리는 권능이 부여되는 것이다.
(2014.2.19)
잎사귀 위에 맺힌 이슬이 햇빛을 모두 받아 단 한점의 그늘 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완벽한 순수함과
투명함을 지닌다면 그 이슬은 결코 정오의 햇볕을 넘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맑고 깨끗한 이슬
일지라도 자신을 잎사귀 아래의 그늘속에 가리우지 않는다면 결코 그 맑은 모습을 지켜 갈 수 없을
것이다. 대자연은 음과 양이 상호 교감, 교차되며 존립하므로 인간의 처신 또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명백하고 투명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가리워져야 할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 이치를 모르고
서는 善을 지켜 나갈 수도, 善을 실현할 수도 없다.
(2014. 2. 20)
참으로 道가 높은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인 것을 초월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를 초월한 자리에서
나오는 참다운 기운을 지닌 者의 행동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어제를 내일이라 말할 수 있고 이곳을
저곳이라 말할 수 있는데 있어서 어떠한 마음의 거리낌이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모든 것을 느끼고 지각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2014.3.20)
첫댓글 감사합니다.
도력과 신의를 겸비하신, 믿을만한 도반이 제 옆에 계시니 저도 항상 감사합니다.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선생님께서 뿌려준 씨앗으로 싹을 티우고 가능하다면 열매까지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기치료 능력, 기감능력, 기의 세기 등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드린 말씀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기를.
선생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저에 미숙함이 있지만, 선생님 글들을 보고 있자면 느끼고 배워지는 것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이것은 단언컨데... 아~부가 아닙니다. 느끼는 그대로 표현해 봅니다.
^..^
잘 압니다. 풍각님께서 저에게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아부하셔야 할 일이 더더욱 무엇이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엊그제 처음으로 차량 에어콘을 틀었습니다.
대구는 기온이 더 높으리라 생각됩니다.
역시 겨울 보다는 봄, 여름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봄을 맞아 하루 하루 건강하고 즐거운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