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띠 해 임진(壬辰)년이 밝았습니다. ‘일필휘지 하지 않는’ 학구파 서예가 하석 박원규 선생이 독자 여러분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예스러운 용(龍) 자입니다. 선생은 청나라 말기의 학자 용경(容庚)이 편찬한 ‘금문편(金文編)’에 실려 있는 고대문자를 되살렸습니다. 3000년 전 주(周)나라의 제사용 청동 술항아리에 용모준(龍母尊)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용자의 모습이 이와 같다고 합니다. 한자가 상형문자이긴 해도 사회구성원 간의 약속인 이상 형태를 지나치게 변형하면 문자로서의 의미는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용 꼬리부분은 약간 길게 늘였는데 화선지를 구긴 다음 빠르게 붓을 그어 힘찬 기운을 표현했습니다. 작은 글씨로 쓴 설명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용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용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만물을 적셔준다고 한다. ‘설문’에 또 이르기를 용은 비늘이 있는 짐승의 우두머리다. 몸을 숨길 수도 드러낼 수도 있으며, 작아질 수도 커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몸을 숨긴다고 했다. 그런즉 용은 신기하고 영묘함을 헤아릴 수 없으며 은혜를 베풂이 무궁하다. 때는 2012년 정월 초하루. 근수실 새벽 창가, 차를 달이고 향불을 피우고서 하석이 쓰다’.
[2012년 임진년… 용을 말한다]
실제로 없는 동물 중 最强의 지위… 용안·용포 등 王 묘사하는 데 쓰여
서양선 부정적인 '惡의 화신' 인식, 더 나아지고픈 인간의 욕망 대변
2012년 임진년(壬辰年), 올해는 용(龍)의 해 그중에서도 흑룡띠의 해이다. 용은 12지(十二支) 중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이다. 인간과 가장 친숙하다 여겨지는 열두 동물 중 상상의 존재인 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용의 해를 맞아 새삼 흥미롭게 여겨진다.
인류의 '꿈과 환상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신화와 전설 속에는 무수히 많은 상상의 동물이 등장한다. 남미의 작가 보르헤스는 그러한 가공의 존재들을 한데 모아 '상상동물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피닉스, 유니콘, 그리핀, 스핑크스, 미노타우로스 등 하나같이 신묘하고 기괴한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결국 그 모두를 상상해낸 인간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 일러스트=밥장
수많은 상상의 동물 중 최고의 자리는 단연 용이 차지하고 있다. 용에 대한 비유와 상징은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 용은 옛이야기 속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며, 가장 강력한 존재로 표현되는 최고 최상의 아이콘이다.
과거 동양에서의 용의 위상은 용을 숭배한 중국의 영향력만큼이나 확고한 것이었다. 용은 신성하고 영험한 존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힘의 총체로 왕(王)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사극에서 사용되는 '용안'(龍顔 왕의 얼굴)이나 '용포'(龍袍 왕의 겉옷) 같은 단어는 현대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용은 비와 강을 다스리는 '물의 신'으로 여겨졌다. 오랜 세월 강이나 바다 속에 잠겨 있다 때가 되면 입에 여의주를 문 채 천둥번개 치는 먹구름을 뚫고 하늘로 비상한다. 그러한 용의 이미지는 동양인들이 가진 용 판타지의 정점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용에 대한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등장인물은 다름 아닌 공자(孔子)와 노자(老子). 어느 날 공자가 예(禮)에 대한 조언을 구하러 노자를 찾아갔다. 공자는 노자를 만나고 돌아온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는 날아가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육지의 짐승은 뛰어다닌다. 뛰어다니는 짐승은 덫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물로 잡을 수 있고 날아가는 새는 화살로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란 것이 있다.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감히 용을 만나고 왔다 할 수 있다."
'큰 뱀'이란 뜻의 그리스어 '드라콘(drakon)'을 어원으로 하는 서양의 용 'dragon' 역시 신비하고 강력한 존재의 대명사다. 그러나 서양의 신화와 전설 속 용의 모습은 동양의 용과는 사뭇 달라 위협적이고 부정적인 악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용에게 사로잡힌 공주를 구하러 험난한 여정에 오르는 왕자나 기사의 이야기는 영웅 모험담의 가장 전형적인 플롯이다. 모험의 마지막 관문에 이르러 맞닥뜨리게 되는 무시무시한 최강의 난적이 바로 용이다. 전설 속 주인공의 '용 죽이기'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러나 기사는 용기와 지혜를 모아 사생결단 용과 맞서 싸운다. 용을 무찔러 제거해야만 비로소 영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해 영웅이 되는 모험담을 속박된 자아를 해방시켜 진정한 성장에 이르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융(C.G Jung)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란 자신의 남성성(기사)과 여성성(공주)을 조화롭게 합일시킨 인간(영웅)이다. 내면 깊숙한 곳에 은폐된 또 다른 자아를 구출해 의식의 밝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다. 용은 난폭하게 불을 뿜어내며 그 미션을 무산시키려 한다. 용은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힘의 총체다. 그러나 저항이 거세면 거셀수록 극복의 의지와 해방의 기쁨은 배가 된다. 서양의 용은 사악한 괴물이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의 영웅적 면모를 이끌어내는 '안티히어로'의 원형(原型)이다.
승천을 꿈꾸는 동양의 신성한 용도, 맞대결을 통해 인간을 성장시키는 서양의 용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상상력이 탄생시킨 신비한 존재다. 어떤 필요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었을까.
용은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에서 비롯된 상상의 동물이다. 때문에 신화와 전설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살고 있는 듯한 21세기 현대인들에게도 용의 판타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용을 원한다.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입한다는 메타포를 원한다. 우리는 여전히 용꿈을 최고의 길몽으로 여기고,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 체념하면서도 개천에서 용이 나길 바라며,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업그레이드되어 용 됐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치고 이만큼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또 있을까. 강력한 실체를 가진 상상의 존재, 용. 용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 모두 용을 알고 있다. 용을 꿈꾸고 있다. 용은 이제 '왕'의 동의어라기보다는 '꿈'의 동의어라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2012년 임진년(壬辰年), 비상과 승천을 향한 용틀임이 시작되었다. ☞흑룡띠 해육십갑자 시간법에 따르면 해마다 특정한 기운이 있다. 올해와 같은 임진년(壬辰年)에서 지지인 진(辰)은 십이지에서 용을 일컫는다. 천간인 임(壬)은 오행사상에서 물(水)에 해당하고, 색으로는 흑색을 상징한다. 이 둘이 합쳐져 2012년은 흑룡띠해가 되는 것이다. 용이 물을 만난 형국이라 매우 길한 해로 믿어져 왔다. 60년마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