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송은 내 친구
이 진 숙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다. 전날 밤 얼핏 보고 지나친 문자를 다시 확인한다. 오늘 전국 시 낭송 대회 본선 날이니 시간 안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예선 합격 문자를 받은 기억이 없어 생각지도 못한 곳이다. 워낙 대회에 많이 나가다 보니, 깜빡하고 있었나보다 하며 출근한 남편한테 급히 전화했다. 시간을 내기 어렵다며 혼자라도 다녀오라 한다.
하도 먼 길이라 엄두가 나지 않아 잠시 고민하다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에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한 시간쯤 더 갔을까,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하다. 차를 돌려서 돌아오는 게 좋겠어.” 한다. 주최 측에 전화해 물었더니 이름이 다르더란다. 이름 가운데 글자가 별표로 표기되어 있어 확인차 전화를 한 모양이다. 낭송할 시 제목을 물었더니 우연인지 몰라도 내가 낭송할 시 제목과 똑같았다. 그 시는 아직 대회에서 아무도 낭송하는 걸 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남편은 전화를 받는 사람의 대답도 횡설수설하여 믿음이 안 간다며 돌아오라 한다.
고속도로라 차를 돌릴 수가 없다. 한참을 더 가니 휴게소가 보인다. 휴게소에 들어가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이 대회에 신청한 기억이 없다. 예선에 합격했다면 합격 문자를 받았을 텐데, 찾아보아도 그런 내용을 받은 것이 없다. 뭐가 잘 못 된 건 아닐까?
갑자기 대회에 참석하라는 문자에 오늘 모든 일정을 취소해야만 했다. 이른 아침부터 먼 곳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중간에 되돌아가야 하는 이 허탈함과 황당함. 무엇에 홀린 듯 후다닥 나섰던 길에 주최 측의 일머리를 탓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그나마 목적지까지 가기 전에 남편이 전화로 알려주어서 다행이다.
만약 그대로 대회장까지 갔더라면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을지,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나의 불찰도 크다. 남편이 전화했을 때, 나한테 보낸 문자는 일괄적으로 보낸 것이라 하더란다. 그렇다면 전년도 신청자의 신상 정보를 마음대로 쓰고 있다는 것인데, 그 건 폐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11회차나 되는 대회에서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는 것에 더 화가 나기도 한다.
방향을 틀어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차창을 뚫고 들어온다. 부글부글 끓는 내 마음에 더위까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다. 아! 이 흥분된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힐까? 한참 고민 끝에 그래, 이럴 땐 시만 한 것이 없지. 그때 나태주 시인의 「선물」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고속도로를 달려나가며 흥얼거린다. 시로 당한 황당한 일을 시로 다스려 본다.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선물인 것을. 그까짓 먼 길 허탕 좀 친들 뭐 그리 대수겠는가. 덕분에 아침부터 멋진 길 드라이브하였으니 그 또한 선물인 것을. 오늘처럼 화가 나거나 기분이 울적할 때, 일이 잘 안 풀려 힘들 때, 기분이 좋을 때도 종종 읊조리곤 하는 시다. 좀 전까지 억울하게 느껴지던 마음이 이 시 한 구절만으로 봄날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린다.
나에겐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은 바로 시 낭송이다. 모난 가슴을 둥글게 다듬고, 차갑고 메마른 가슴도 따뜻하게 데워 어루만져 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친구가 되어주곤 한다. 오늘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내 부족한 내면을 들여다보며 나를 채찍질해 준다. 그런 그와 함께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려면 시간을 맞추어 일부러 만나야 얼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낭송이란 친구는 눈으로, 마음으로, 머리로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차 안에서도, 집에서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또 길을 갈 때도, 산을 오를 때도, 늘 내가 부르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고 다가와 준다. 그런 친구가 내 몸속에 함께 사는 것 같다.
시 낭송을 몰랐다면 지금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시 낭송을 알면서부터 내면의 삶이 날이 갈수록 더 풍성해진다. 부자가 아니어도 부자가 된 것 같고, 쌀독에 쌀이 가득 찬 것처럼 든든하다.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갈 수 있는 마음 부자라고나 할까. 세상을 바라보는 눈 또한 더욱 환해진다.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 싹트고 소소한 일에도 감동이 물결친다.
시는 이렇듯 아무런 말 없이 다가와 슬며시 감동과 기쁨, 그리움과 추억, 오만가지 선물을 툭 던져주곤 말없이 돌아선다. 그런 그가 매력적이다. 그 매력에 푹 빠져 산다. 누구든 편애하는 마음도 없다.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다. 그 보석의 깊이를 더욱더 깊게 알아가며 더 좋은 인생 친구가 되고 싶다.
황당하고 분주한 아침을 우왕좌왕 맞이하였지만, 좋은 친구가 늘 곁에 있어 오늘도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벗어나 넓고 환한 길을 찾아 달려간다. 오늘도 선물 같은 하루가 되자고 마음 자루를 일으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