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초대석(윤희경 시인)
사라진 것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 을 출간한 윤희경 시인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호주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민 후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리며 하루하루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작은 공책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하루를 적어두려던 메모 몇 줄이 어느새 시가 되어 있었고, 저는 그렇게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드니에서 한국어로 시를 씁니다. 하루 종일 영어 속에서 살다가도 마음이 가장 먼저 돌아가는 곳은 한국어였습니다. 멀리 와서야 내 안에 한국어가 이렇게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특별한 이야기를 쓰는 시인이라기보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을 한 번 더 돌아보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작은 메모 하나, 누군가의 손끝, 마당에서 오래 버틴 풀 한 포기가 자꾸 저를 붙잡습니다.
좋은 시는 좋은 손길과 닮았습니다. 아마 시는 그런 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을 소개해 주세요.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말을 남깁니다.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끝내 전하지 못한 말…….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말보다 그 말이 머물렀던 자리가 더 오래 마음에 남을 때가 있습니다.
『말이 사라진 자국』은 바로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며 엮은 시집입니다. 사라진 말과 떠난 사람, 그 뒤에 남아 있는 흔적을 따라간 기록입니다.
교정지를 넘기던 어느 날, 한 문장 앞에서 손이 멈췄습니다. 더 보태야 하나, 이대로 두어야 하나. 시를 쓰다 보면 낱말 하나보다 쉼표 하나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날도 있습니다. 결국 덜어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도 무언가는 남아 있었습니다.
가족과 부재, 기억과 시간이 이 시집의 여러 자리를 지나갑니다. 그 밑바닥에는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사라진 것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독자께서 이 책을 읽다가 자신의 삶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말이 사라진 자국』은 그때부터 독자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집을 출간하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한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고 나니 오히려 한동안 말을 줄이고 싶었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원고를 고르고 순서를 바꾸고, 끝났다고 믿었던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 수십 번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시집을 손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성취감보다 안도감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내 손을 떠났구나’ 싶었지요.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북토크에서 독자들을 만난 뒤였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여동생, 어머니를 떠올리며 쓴 시를 한 독자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처럼 읽고 있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분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시집은 더 이상 제 책만은 아니었습니다. 시는 쓰는 사람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읽는 사람의 시간이 되나 봅니다.
-시를 어렵게 느끼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시를 어렵게 느끼는 분들이 많지요. 저도 학교에서는 시를 읽으며 정답을 찾고, 시험을 위해 뜻을 외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를 만나면 처음부터 애쓰지 않습니다. 소리 내어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으면 그 앞에 잠시 머뭅니다. 좋은 시는 이해보다 먼저 발걸음을 늦추게 할 때가 있습니다.
늦은 밤 찻잔을 곁에 두고 시집을 펼칩니다. 몇 장 넘기다가 한 줄에서 손이 멈춥니다. 왜 좋은지도 잘 모른 채 밑줄 하나 긋고 책을 덮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장을 보다가, 운전을 하다가, 아무렇지 않은 하루 한복판에서 그 문장이 불쑥 돌아옵니다.
저는 그때 시가 비로소 읽히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줄이 따라온다면, 그 시는 이미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셈이니까요.
-해외에서 한국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멀리 떠나와 살다 보니 오히려 한국어가 제 안에서 더 깊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 가까워 미처 느끼지 못했던 말들이 이곳에서는 자주 그리움이 되기도 합니다.
7월 한겨울, 장작불 앞에서 책을 읽다가 오래 잊고 있던 우리말 하나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창밖에서는 쿠커바라가 떠들썩하게 울고 있는데, 책 속의 낱말 하나가 아주 먼 계절을 데려옵니다. 너무 익숙해서 스쳐 지나갔던 말인데, 뜻보다 먼저 온기가 느껴집니다. 멀리 와서야 어떤 말들은 비로소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일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 오래 알고 있던 우리말을 다시 만나는 일에 가깝습니다. 한 단어를 바라보다 그 안에 스며 있는 시간과 감정을 천천히 꺼내는 일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한 편만 고르기에는 모든 시가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어 조금 망설여집니다. 그래도 지금 한 편을 꼽으라면 「아프리카 바이올렛」입니다.
아프리카 바이올렛 화분 두 개가 부엌 창가에서 매일 저를 바라봅니다. 함께 살다 보니 제가 꽃을 키우는 것인지, 꽃이 저를 지켜보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정처 없이 멀리 다녀온 날에도 그 작은 화분들은 꼼짝없이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저도 슬며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 웃게 됩니다.
식물도 나를 지키는데,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면 되겠나.
제 속마음이 시에 닿았나 봅니다.
「아프리카 바이올렛」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도 가끔 내 먼 이름을 잃어버려
써두기도 한다.
「아프리카 바이올렛」은 제가 꽃에게 건넨 시였는데, 오래 두고 보니 꽃이 제게 돌려준 말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바이올렛
국적도 모르고 키운 애
계절이 다른 나라에서도
그것을 키운다
다섯 살쯤,
꼬물꼬물 겨우 기어 다니던 애를 데려왔다
나조차 믿지 못하던 손으로 키운 몸
이름을 붙이네
네 얼굴 앞에서 소란을 떠네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니
부르지 못한 너
어쩌다 아프리카 열기에서
오세아니아 모래바람으로 날아와
허리가 휘는 줄 모르고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도 가끔 내 먼 이름을 잃어버려
써두기도 한다
세상이 자꾸 엎어지고 뒹굴어서
이름 하나 쥐고 가는 게
쉬운 계절이 아니었나 봐
너와 나
이제야 동등해졌나
이름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앞으로의 계획이라는 말을 들으면 조금 막막해집니다. 계획표대로 글을 써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제게는 가끔 회초리를 드는 젊은 선배들이 있습니다. “좋은 시 한 편보다 좋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마 자신에게도 들려주는 말이겠지요. 듣고만 있던 제가 어느새 앵무처럼 그 말을 꺼냅니다.
좋은 시 한 편을 얻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어머니는 입맛이 없을 때 가끔 육모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몹시 쓴 것을 먹고 나면 입맛이 돌아온다고 했던가요. 요즘은 시 한 편을 쓰는 일이 그 쓴맛을 견디는 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맛을 지나고 나면 잊은 듯 또 시를 쓰고 싶어집니다.
한편으로는 산문도 써보고 싶습니다. 시가 낱말 하나에도 깐깐하게 향기를 묻는 장르라면, 산문에서는 그 향기를 조금 거두고 싶습니다. 이민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 책과 음악, 나이 들며 뒤늦게 보이는 풍경들을 천천히 풀어보고 싶습니다. 잘 다린 옷보다 오래 입어 몸에 익은 무명옷 같은 글. 그런 질감으로 독자에게 건너가고 싶습니다.
-뷰티라이프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신가요? 어느 헤어살롱의 잠깐 비어 있는 의자 곁일 수도 있고,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전철 안일 수도 있겠지요. 앞마당에는 백목련이 다 지고, 봄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바다 건너 먼 곳에 있지만, 몇 페이지의 글을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 앉았습니다.
막 세상에 나온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과 저를 『뷰티라이프』의 <저자 초대석>에 불러주셨네요. 책을 내놓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입니까?” 하고 자리를 내어주는 일, 따뜻한 환대이고 말고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드니에서 보낸 편지 한 장이 누군가에게 가만히 닿은 것 같아 저도 많이 기쁩니다. 이제 저는 이곳의 하루로, 당신은 그곳의 하루로 돌아가겠지요. 멀리서 손 한번 흔들어 봅니다. 우리, 또 어디선가 만나요.
■윤희경 시인
2015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말이 사라진 자국』. 전자시집 『빨간 일기예보』 『귀를 여는 저녁』.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제10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제9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kyun7884@gmail.com
<뷰티라이프> 202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