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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72) 여호람(1), 여호사밧의 아들? 아합의 사위! 역대하21:1-10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왕이었으나 북이스라엘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현실적 유익을 구하기 위해 악한 왕 아합과 동행하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산당을 없애지 못했고, 또다시 그의 아들 아하시아와의 연합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한 악한 영향들이 고스란히 그의 아들 여호람 때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과 아합가문의 연합 때문에 유다에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면서, 더욱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악인의 자리에 앉으면 안되는 지, 그 이유들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하21:1)
25년 유다를 통치한, 오점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았고 말씀 앞에 멈출 줄 알았던 여호사밧이 죽고, 여호람이 왕이 됩니다. 그때, 여호사밧은 장자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없도록 다른 아들들에게도 재산을 넉넉히 물려주어 각 성읍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2-3절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들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들이라 그의 아버지가 그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유다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었고 여호람은 장자이므로 왕위를 주었더니”(대하21:2-3)
어떤가요? 이 여호사밧의 선택,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유산들을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여호사밧의 장남 여호람은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았고, 그의 아우들, 아사랴, 여히엘, 스가랴, 또 다른 아사랴, 미가엘, 스바댜는 은금과 보물, 견고한 성읍들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렇듯 자신이 죽은 후에 아들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동생들이 견고한 성읍을 지켜줄 때, 더욱 장남인 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여호사밧은 여호람의 왕권을 견고히 하고 나라를 안정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전략적 요충지를 방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의 이런 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람에게 왕권이 주어지자, 모든 아우와 신하들을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4절 보겠습니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대하21:4)
왜요? 여호람의 눈에, 동생들이 견고한 성읍을 물려받은 것은 잠재적인 위협이었기 때문이지요? 언제든지 힘을 키워 자신에게 반역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호람이 유다의 순수혈통이 아닌, 두로와 북이스라엘의 혈통이었던 아달랴를 아내 왕비로 맞은 것, 외교적으로는 유리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왕으로 통치하는데는 치명적인 약점이었기 때문이지요?
자기와 다르게 유다의 본 나라 백성들, 방백들의 딸과 결혼하여 지지를 입고 세력을 형성한 동생들의 든든한 입지는, 그쵸? 견고한 성읍들, 군대를 갖춘 여호람의 적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가 동생들과 아울러 죽인 ‘이스라엘 방백’들은, 여호와의 선한 지식을 가르쳤던 ‘유다의 방백들’(17:7), ‘이스라엘의 족장들’(19:8)로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그리고 여호사밧을 잘 섬겼던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람은 그들의 입에서 들리는 말들이 듣기 싫었던 것이이지요? 그들의 말을 멈추려면 자신을 바꾸든지, 저들을 죽이든지의 방법이 있었는데, 결국 저들을 없애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래요. 악인은 의인의 존재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고, 세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 성도들도 이러한 미움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고 지켜주실 것이지만, 필요하시면 우리의 피도 죽음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설령 우리의 자리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죽음에 내어 던져지게 될지라도, 우리가 쓰러진 자리, 한 영혼, 한 사람을 세우실 것임을 믿으시는, 그렇게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요.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그냥 알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들들, 작은 아들은 재산을 달라하여 아버지를 떠나고, 큰 아들은 함께 살았어도 당최(처음부터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이요, 딸입니까?
보십시오. 오늘 여호람은 동생들에게 재산과 성읍의 통치권을 나눠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왕위도 재산도 성읍도 모두 내 것이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동생들과 방백들을 죽이면서까지 세워 다스리려던 나라는 겨우 8년짜리 나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만의 왕국이었던 것이지요?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니라”(대하21:5)
오늘 우리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까? 어떤 왕국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오늘도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누군가를 악하게 말하고 죽이면서까지 세우고 싶은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오히려 나를 지켜줄 사람들이요, 내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요, 나를 지지할 사람들을 내 손으로 다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나를 지켜줄 사람들을 죽이고 났더니,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죽고, 이제는 영원히 내 것일 줄 재산들을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16-17절이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확인해볼까요?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올라와서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물론 8-10절에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길 때, 우리 손에 두셨던 이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우리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오늘 에돔이, 립나가 벗어났노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지요? 10절만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여 여호람의 지배 하에서 벗어났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대하21:10)
여호람은 동생들과 신하들을 죽임으로써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여지들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4절). 그 결과 에돔과의 전쟁에서 포위되고 간신히 살아돌아올 뿐입니다. 그리고 이후 립나가 독립해도 손을 쓸 수가 없었고,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는 모든 것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남유다가 맺은, 여호사밧이 맺은 저 아합과 그 아들 아하시야의 연합, 악한 이와의 교제로 인해 유다에 스며 들어온 죄된 영향력이 어느 새 유다를 전부 망가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안배를 두었던 것이, 이토록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통과 타격을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새벽에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내 배의 키를 주님이 잡고 계실 때, 내 비행기의 조종관을 주님이 잡고 계실 때, 그분께 맡겨드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내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만드는 이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듣고 서서 깨닫고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 주님입니다. 이 땅을 만들고 지금까지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움직이신 주님입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늘 서운하게 섭섭하게 아니 가슴이 찢어지게 무너지게 들 그릇행하며 대적하며 덤벼가며 떠나가며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만만하게 여기며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더한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네 판단과 헤아림을 앞세워 우리와 주변을 망가뜨려가며 말입니다.
그래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지 못하고 통제해 낼 수 없는 경우가 정말로 많습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삼은 일은 참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 속에 살아갑니다. 늘 먼저 하나님께 여쭙고, 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어지는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5-6절입니다.
“여호람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
열왕기는 북이스라엘 왕들이 범한 죄를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의 죄’로,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명목상으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죄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죄가 ‘아합의 죄’인데,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한 죄입니다. 그런데 이 ‘아합의 죄’가 남유다에서 나타났습니다. 백성의 것을 죽이고 빼앗는 정도가 아니었지요? 이제는 형제를 죽이고 형제의 것을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알고보니 이유가 뭐라고요? 오늘 저 여호람의 아내가 바로 아합의 딸 ‘아달랴’였다 라는 것입니다(6절). 그래요. 여기서 오늘 설교제목을 정했습니다. 오늘 저 여호람은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기보다 ‘아합의 사위’였던 것이지요. 아니 여호사밧의 아들의 길을 버리고, 아합의 사위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이름들이 붙여집니다. 모든 이름들을 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갈 수있다면 좋겠고,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름들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 어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야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고, 그 순간, 우리 인생의 가치관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여호람은 바른 주인을 섬기지 못했고, 그가 중히 여기고 사랑한 것이 결국 그와 그의 주변을 망하게 하였노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이름에 더 힘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름은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름입니까? 아니면 나만, 혹은 세상과 사람들만 좋아하고 기뻐하는 이름입니까?
그 이름, 그 타이틀을 위하여 내내 해온 일들은 무엇입니까? 오히려 중요하고 사랑해야 할 것들을 망가뜨리고 죽여가며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렇게 소중히 여긴 이름이, 결국 나를 죽게 하고 내 주변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자, 그럼에도 여전히 은혜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본문의 증언이지요? 이러한 여호람의 행위와 삶만 본다면 사람에게도 버림받을만한 모습이요, 하나님께서 그 큰 심판을 행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에 ‘등불’을 주겠노라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7절). 그래서 다윗 왕조는 ‘겨우’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여호사밧 당시에는 동맹이 지혜로와 보였겠지만, 지난 수요일에도 말씀드린대로, 악인과 함께 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겨우 세상적인 가치들뿐, 다 썩어질 것들 뿐입니다. 오히려 손해와 타격이 큰 것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끊으시지 않으셨지만, 여호람의 왕권을 약화시키셨습니다. 먼저 저 에돔이 유다의 상태를 알아챕니다. 에돔이 유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선포합니다(8절). 여호람이 에돔을 제압하기 위해 출정했지만, 오히려 에돔군대에 포위되고 말지요. 여호람은 가까스로 에돔의 포위망을 뚫어내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여호람의 군대는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왕하8:21).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왕하8:20-21)
“군인들은 모두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다.”(8:21하반절 새번역)
“But his infantry deserted(버렸다) him.”(8.21b, MSG)
아무도 왕을 지켜 돌아오지 않고, 다들 뿔뿔이 자기 살기에 바빴던 것을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것이 유다가 힘을 잃었다는 증거가 되고, 주변국들에게 기폭제가 됩니다. 이를 지켜본 립나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호람이 지배하던 나라들이 하나같이 더 이상 남유다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호람은 힘을 잃고 왕권이 실추되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으니 저 대적들이 유다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아합가문과 맺은 동맹은 이제 유다의 왕들과 유다의 백성들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아합의 자손’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바알의 백성’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악인들과 같은 멍에를 메고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세상의 자녀로 살게 되기가 쉽다는 것을 이토록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순간에도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임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가르침대로 인도하심대로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더욱 기억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삼가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 안타까운 점이 이것이지요? 좋은 믿음이 잘 이어지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아들이 반드시 아버지와 같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발하며 세상으로 튀어 나가는 경우가 또 많은 것이지요.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신앙을 잘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남과 북을 통틀어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역시 좋은 신앙인이 되지 못했던 것이 오늘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지요.
여호람은 아버지 여호사밧의 좋지 않은 점만을 빼닮습니다. 여호람도 아합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 결과 여호람에게는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했다’(6절)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따라붙게 되었습니다. 겉모양은 선민의 모습이지만, 행실과 믿음이 악인의 모양을 닮고 따른, 안타까운 사람이 바로 여호람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못한다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믿음을 잘 상속하는 복된 주의 종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보존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여호람이 신실해서 다윗 왕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해주셨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때문입니다(7절). 그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마침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여호람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기억하셔서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주 떠나고, 그분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베푸시는 사랑과 놀라운 은혜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 사랑,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더 닮고 배우고 나누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니 나도 조금은 악해도 봐주시겠지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신실한 언약 앞에서 더욱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믿음의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실 사무엘과 여호사밧도, 저 솔로몬도 실패한 일입니다. 그러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자녀들에게 믿음을 잘 물려줄 수 있도록 말씀으로 더욱 잘 양육하고, 자녀들을 위해 더 많은 기도를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길이 악인과의 동행이 아닌지 잘 살피고, 자녀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삶의 길에 서서, 말과 행동이 같은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는 힘을 잃고 창자가 빠져나와 죽는 이들이 아닌,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고 번성하며 범사에 잘되는 복된 자녀들이 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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