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전사(靈田寺)와 눈없는 여래좌상
2025. 12. 7.
영전사 사적
영전사는 지금부터 1300여년전 신라 문무왕 9년에 의상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원래는 경북 영풍군 풍기읍 욱굼동 영전마을에 위치한 소백산 줄기의 수려한 대가람이 었으나 이조 중엽 이후 조정의 배불 정책으로 300여년이나 폐사되어 오다가 그후 영전사는 1923년 11월 28이 사지에서 약사여래석불이 출토됨을 계기로 해운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그러나 6.25동란 때 소백산 전투사령부의 소개령에 의하여 1949년 9월 15일 지금의 자리에 가람은 이전되었고 그 동안 목조건물 25평을 관음전으로 사용하여 오다가 전 주지 대원스님의 도제인 현재의 주지 성용스님이 은사의 뜻을 받들어 뜻있는 신도들과 원을 함께 하여 1981년 10월 2일에 착공 1982년4월 12일 준공과 함께 관음불상을 봉안하였다. 무상과 더불어 역사를 같이 한 이곳 영전사 여기에 또 다시 부처님의 은혜가 충만하니 성대한 진리의 복전으로 세상의 빛되어 영원하길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영주 영전사 석조여래입상(榮州 靈田寺 石造如來立像)
이것은 1924년 산 신도가 현몽(現夢)을 꾸고 영전사지(靈田寺址: 풍기읍 욱금동 영전마을)에서 발견한 불상으로 영전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원래는 광배(光背: 불상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머리나 등 뒤에 표현한 장식)와 불상 받침을 모두 갖추었던 것이나 한국전쟁 직후 현재의 위치로 옮기는 과정에서 광배 천체와 불상 받침 후반부를 쪼아 내었으며, 코와 손가락, 발등 등도 일부 훼손되었다. 그러나 부처의 형상이 원만하고 어깨가 딱 부러지고 옷 무늬가 유려한 점과 ㅂㄹ상 받침에 새겨진 연꽃의 모습 등 각부의 영식과 조성 수법은 매우 우수한 편에 속한다. 제작시기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인 8세기로 추정된다. 영전사는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삼천 명을 거느리고 90일동안 화엄대전을 강의했다는 소백산 추동(錐洞: 송곳골)으로 추정되고 있어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영주 가흥리 암각화(榮州 可興里 岩刻畫)
암각화는 선사 시대 사람이 바위나 절벽, 동굴 벽면 등에 기호, 물건, 동물 등을 새긴 그림을 말한다. 가흥리 암각화는 보물인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이 있는 바위에서 아래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암각화를 새긴 바위는 표면이 거친 화강암이며 그림을 그린 벽은 수직에 가깝다. 암각화는 선 쪼기 기법으로 그린 칼자루 모양인 검파형(儉破形 ) 무늬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검파형 무늬는 6개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열을 이루고 상하에 3개의무늬를 배치한 모습이다. 안쪽으로 오목하에 들어가는 외곽선 안에 가로 선을 1~3개 그었는데, 그 중한 무늬에는 세로 선도 1개 그어져 있다. 가흥리 암각화를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검파형 무늬가 10여개 이상 있다고 알려졌다. 이후 바위 표현의 이물질을 완전히 제거한 현재에는 9개의 무늬만이 선명하게 확인되었다. 가흥리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당시의 예술과 신앙, 문화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榮州 可興洞 磨崖如來三尊像 및 如來坐像)
마애여래삼존상은 커다란 자연 화강암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위 벽에 새긴 불상이다. 가운데 넓은 면에는 연꽃무늬의 대좌에 앉은 본존불이 있고 양옆에는 두 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은 체구가 상당히 큼직하다. 특히 다문 입, 큰 코, 사각형에 가까운 큰 얼굴, 연꽃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긴 광배가 장중한 느낌을 준다. 눈은 후대에 훼손되어 깊게 파여 있다. 오른쪽 보살은 두 손을 사슴 앞으로 모았으며, 머리에는 관을 쓰고 손에는 물병을 들고 있다. 마애여래삼존상 옆에는 여래좌상은 집중호우로 암반이 무너지면서 새로 발견한 불상이다. 마애여래삼존상과 같은 양식인 얕은 돋을 새김 기법으로 조각하였다. 턱 선이 둥근 얼굴은 통통한 느낌을 주며, 이목구비는 심하게 훼손되었다.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은 통일신라의 사실적인 불상으로 삼국 시대에서 남북국 시대로 전환되면서 변화하는 마애불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