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머리말
오랫동안 한.일 관계사 특히 기원 무렵부터 가야(伽耶)지역과 구주(九州)에 위치한 아마대국이라는 불리는 女王國 왜(倭) 그리고 백제(百濟)가 5세기초 삼국간의 전란을 피해 대화지역에 대대적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생긴 대화왜(大化倭)가 성장하여 7세기경 국호를 일본(日本) 바꾸는 일련의 과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삼국유사에 기이(紀異) 第2 가락국가(駕洛國記)에 나오는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기록과 탑상(塔像) 第4 금관성(金官城) 파사석탑(婆娑石塔) 등에서 몇가지 의문이 항상 나의 생각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고, 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락국기에 보면 허황옥이가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했는데, 어떻게 인도에서 어떤 경로로 왔을까?
둘째, 그 당시 장보고의 신라방처럼 양자강 하류에 외국인 집단구역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에서 온것인 아닐까?
세째, 가락국기에 보면 신하들이 배필을 구하려고 하자,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도 하늘의 뜻이며,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염려말라고 하고는 유천간(留天干)에게 망산도(望山島)에서 기다리게 하자 왕후를 실은 배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사실은 미리 배필이 정해져서, 왕후가 언제 오리라는 것을 김수로왕은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넷째, 가락국기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과 알에 나왔는 김수로왕은 어디서 왔을까? 혹시 왕후와 같은 지역출신이 아닐까? 아니면 북방 기마민족 출신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가야사(伽耶史)에 관련된 기사나 책이 발간되면 관심있게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 동안 새로 출판된 몇가지 책에서 위에 언급된 의문들이 정리될 수 있었으며, 또 지금까지 김해가야, 김해에 대한 지리적인 조건과 배경에 관한 자료를 읽어서도 느끼지 못한 김해(金海)라는 지역이 보통의 지역이 아니라 당시에 매우 중요한 철이 생산되고, 한.중.일을 잇는 국제항구의 중심에 위치했구나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런 공부의 결과로 그럼 당연히 그때 가야(伽耶)에 차(茶)가 전래될 수 밖에 없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나. 駕洛國記와 金官城 婆娑石塔
우선 의문의 발단을 제공한 僧 일연(一然)이 지은 三國遺事 中 기이(紀異) 第2 가락국가 (駕洛國記)와 탑상(塔像) 第4 금관성(金官城) 파사석탑 (婆娑石塔)에 나타난 허황후(許皇后)에 대하여 살펴보자.
기이(紀異) 第2 가락국가 (駕洛國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서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는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 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토록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사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도록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애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서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기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시는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에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漢나라에서 가지고 온 여러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쳐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 중략 -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 으로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로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또는 文武王 661-681)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 661)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庶云잡干)의 딸 문명황후 (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내는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 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영(供營)의 자(資)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 차, 과실 등 여러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가 행해지게 되었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 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빠뜨리기도 했다.』
- 중략 -
탑상(塔像) 第4 금관성(金官城) 파사석탑 (婆娑石塔)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 (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金官國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타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旗)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 (旗出邊)이라 한다.』 - 중략 -
다. 문헌에 나타난 茶 史料
前 장에서는 三國遺事에 나타나는 許皇后 黃玉에 대한 흔적을 살펴보았다. 本 장에서 그외 伽耶 建國 前後 韓.中 文獻에 나타난 茶관련 史料를 살펴봄으로써 茶 전래시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三國遺事 紀異 第2 景德王(742-765).忠談師.表訓大德 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24년(765)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있는 僧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는냐." 이때 마침 威儀있고 깨끗한 大德한 僧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僧을 왕에게로 데리고 오니, 왕이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僧이 아니다."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僧 한 사람이 있는데 납의(納衣)를 입고 앵통(櫻筒 ; 혹은 삼태기)을 지고 남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小僧)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 스님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 흥덕왕(興德王 826-835) 3년 朝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2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어 조공(朝貢)하니 당나라의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사신을 불러보고 사연(賜宴), 사물(賜物)에 차가 있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茶)의 종자(種子)를 가지고 오매, 왕이 그것을 지리산(地理山 : 지금의 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茶)는 선덕왕(634-647)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盛)하였다.』
중국의 기록 문헌 중에 보면 서한(西漢 B.C. 206 - A.D. 8) 신작2년 (神爵 B.C. 59) 촉(蜀)나라 선비 왕포(王褒)가 성도(成都)에 과거를 보러가는 도중에 작성한 노비매매 문서인 동약(동約)에는 노비 편료(便了)가 해야할 일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 차(茶)에 관한 대목에 『武陽買茶 烹茶盡具』라는 적혀 있는데 "노비 편료는 무양(武陽)에 가서 차를 사와야 하고, 차를 달이고 다구를 깨끗히 해야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촉나라(사천) 일대에는 차(茶)가 이미 사대부들의 생활 필수품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唐 618 - 907)때 봉연(封演)의 封氏聞見記의 風俗史에서는 "남녘지방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시나 북녘지방의 사람들은 처음에 차를 많이 접하고 마시기 않았다."라고 기술하였다.
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 733년에 경능군(竟陵郡) 현재 호북성(湖北省) 천문현(天門縣)에 태어난 육우(陸羽 733-804)는 고아 출신으로 사찰에서 자라면서 절에서 불경 공부외에 주지스님의 차 끊이는 일도 맡아 했다.
755년 안록산(安록山)의 난을 피해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에 정착한후, 교연(皎然)의 적극적인 권유에 따라 육우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차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28세 때 다경(茶經)의 초고(草稿)를 완성한다. 그 후 10여년 세월에 걸쳐 정립한 다경(茶經)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로서 뿐 만아니라 후세 차에 관한 모든 학문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가 만든 다경(茶經) 칠지사(七之事)편에는 차 마시는 기원 및 역사를 설명하면서 삼황(三黃) 때에 염제(炎帝)인 신농씨(神農氏)로 부터 차를 마셨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노(魯)나라의 주공(周公), 제(齊)나라의 재상인 안영(晏영), 한(漢)나라 때에는 선인(仙人)인 단구자(丹丘子), 황산군(黃山君), 사마상여(司馬相如), 양웅(楊雄) 등 선인(仙人)들이 차(茶)를 마셨던 일화를 이야기를 곁들어 기술하고 있다.
송나라(宋 960 - 1367)때 구양수(毆陽修)는 집고록(集古錄)에서 "차는 위나라(魏 220 - 263)와 진나라(晉 265 - 419) 때부터 있었다." 라고 하였고, 배문(裵汶)은 다술(茶述)에서 "차는 동진(東晉 318 - 384)에서 비롯하여 본조(宋)에 이르러 성했다." 라고 했다.
청나라(청 )때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진(秦)나라가 촉(蜀)나라를 정복한 뒤부터 차(茶)를 마시게 되었다." 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볼때 기원전 부터 양자강 유역과 이남에서는 차(茶)를 즐겨 먹거나 음용하였는데 비하여 차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황하 유역과 이북에서는 남북조(南北朝) 末이나 수나라(隨) 무렵부터 점차 차(茶)가 알려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육우의 다경(茶經)에 언급된 삼황(三黃) 때에 남방의 神으로 추앙하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 B.C. 2700년경)로 부터 차(茶)를 마셨다는 설은 다소 과장된 듯하고, 차의 역사가 오래됨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고 볼 수 있는데, 홍수를 다스린 공(功)으로 우(禹)가 시조(禹에 관한 전설을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전국시대, 楚나라에 널리 펴져 있던 전설을 문답형식으로 풀이한 『초사(楚辭)』의 천문(天門)편인데 우왕이 실존한 역사적인 인물이라기 보다 고대 어떤 부족의 땅의 신, 또는 사신(社神)의 의미임)가 되어 세운 하(夏)왕조 (B.C. 22c - 16c) 최후의 폭군인 걸(桀)왕을 멸한 탕(湯)왕이 세운 은(殷)王朝代 (B.C. 16c - 11c)의 강역(彊域)이 황하 중, 하류지역인 화북지방 대평원 유역이기 때문이다.
즉,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은 분명 신농씨 이전에도 차나무가 자생지(自生地) 하고 있었지만 음용하는 차로서의 의미보다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채소, 나뭇잎, 과일 등 식용의 범주에 지나지 않았고, 유적 발굴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後代)에 세워진 은(殷)왕조의 강역이 황하 중, 하류 지역이라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볼 때도 그 지역에서는 차나무가 자생할 수 없는 자연환경이다.
이런 문헌들의 사료(史料)를 공부하면서 문득 1994년도에 읽은 김병모교수가 쓴 "김수로왕비 허황옥"에 대한 글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그렇다면 우리의 차의 기원을 普州太后 許皇玉 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라. 普州太后 許黃玉의 出自
우선 가락국기에 언급된 아유타국(아요디아)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하여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1세기 전후의 인도역사를 살펴보자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B.C. 563년) 시대에는 16개의 마하자나빠다라고 불리는 국가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빈디야 산맥 이북의 서북변경에서 부터 비하르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 중에서 마가다, 꼬살라(아요디아), 바뜨사, 아반띠의 4국이 가장 강하였다.
이들의 패권을 위한 투쟁으로 점차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고, 마가다왕국의 빔비사라 왕은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꼬살라, 바이샬리, 마드라 왕국과의 결혼정책으로 막강한 외교적 귄위와 더불어 마가다의 서진과 북진정책의 길을 트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아들 아자따샤뜨루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결혼정책으로 유지해온 인접국과의 평화관계를 무력으로 패퇴시켰다. 또 한편 그 무렵 강력한 경쟁국 아반띠는 바뜨사를 물리치고 마가다와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약 100년간의 오랜 전쟁끝에 마가다는 아반띠 세력을 제압하고 쉬슈나가 왕조를 탄생시켰다.
쉬슈나가 왕조는 다시 난다 왕조로 계승되었다. 난다왕조는 지금까지 어느 왕조보다 훨씬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여 알렉산더 군대가 빤잡에서 더 이상 동쪽으로 침입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가 인도에 머무른 19개월 동안(B.C. 326 - 325)은 전쟁의 연속이였다.
난다왕조 말기에 이르자 왕들은 세력이 점차 약화된 데다가 백성들의 지지마저 잃게 되어 끝내 마가다에서 시작된 그들의 통치는 마가다에서 새로 등장한 마우리야 왕조로 교체되었다.
마우리야 왕조는 짠드라굽따 마우리야라는 한 평범한 가문의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 짠드라굽타는 당시 서북 인더스강 서부 지역의 패자 셀레우쿠스와의 승리로 동부 아프카니스탄과 발루치스탄 그리고 인더스 강 서부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서부 인도와 서북부 인도, 데칸을 포함하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다.
마우리야 왕조는 초대 짠드라굽따로부터 그의 아들 빈두사라에게 계승되었다. 빈두사라는 그리스 군주와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은 마우리야 역대 왕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아쇼카(B.C. 273-232)이다.
불교 옹호자인 아쇼카는 고대의 교통의 요지에 금석문을 남겼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직접 군주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깔링가 전쟁이라는 단 한 차례의 중요한 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에서 10만명이 죽고, 15만명에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브라만 사제들과 불교 승려들에게 많은 참담함을 주었고, 아쇼카에게도 많은 가책심을 주는 계기가 되어 그는 물리적 점령 정책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문화적 정복 및 복속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아쇼까는 깔링가 전쟁을 계기로 불교로 개종하였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그는 승려가 되었고, 불교도들에게 막대한 하사를 했으며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다고 한다. 이런 불교성지들을 방문한 사실은 그의 금석문에도 적혀있다.
그러나 아쇼카의 정책이 그의 통치가 끝난 B.C. 232년 이후에 각 지역에서 독립을 선언한 여러 제후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지 못했으며, 인접국들은 아쇼까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25년 만에 서북 변경을 습격해오기 시작하였다.
아쇼까는 국내외의 포교활동에 전념한 결과 B.C. 3세기 중앙 아시아의 각 부족의 움직임을 경계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진시황제(B.C. 247-210)는 흉노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하여 B.C 220년에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다.
흉노족이 지속적으로 인도를 압박을 가했으며, 그리스 인들이 북부 아프카니스탄에 세운 박트리아왕국이 처음으로 B.C. 206년에 인도에 침입하기 시작하여 서력 기원이 시작될 무렵까지 일련의 이민족이 침입이 계속되었다.
이들 침입의 가장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박트리아와 파르티아를 통치했던 셀레우쿠스 제국의 쇠약과 그 무렵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축조와 더불어 한무제(B.C. 140년)가 흉노 토벌정책을 펴기 시작하자 흉노족들은 더 이상 중국으로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비하여 당시의 인도에서는 아쇼까 왕의 계승 세력들이 너무 미약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마우리야 제국은 B.C. 185년 뿌시야미뜨라 슝가에 의해 무너졌다. 그는 브라만이었으며 마우리야 왕조 최후의 왕 브리하드리타 조정의 장군이었다. 슝가왕조는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 빠딸리뿌뜨라와 중부 인도를 통치했고, 브라만적 생황 방식의 부흥을 위해서 베다방식의 제사의례를 시행하였다. 슝가왕조는 같은 브라만 출신의 깐바왕조로 계승되었다.
아프카니스탄 및 카자크스탄 지방을 통치한 박트리아를 이어 들어선 쿠샨(인도-그리스인)은 B.C. 2세기 초에서 B.C. 1세기에 걸쳐 서북 인도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그 크기가 알렉산더의 의해 점령된 지역보다 훨씬 넓었으며, 멀리 아요디야와 빠딸리뿌뜨라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이 지방을 지배하던 아요디아 사제계급과 왕족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되었다.
이제까지 간략하게 인도고대사를 알아보았다. 여기서부터 김병모교수가 지은 "수로왕비 허황옥"이란 책으로 돌아가 보자.
『아요디아(정복할 수 없는 땅)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도 쿠샨의 침략을 피해 어디론가 옮겨 갔을 것이다. 쿠샨이 서쪽과 북쪽에서 침입했으니 아요디아인의 피난방향은 동쪽과 남쪽이었을 것이다.
그 지역 중에 하나가 중국 서남쪽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중국 운남지방 대리국(大理國)에 서기전 3세기때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까 대왕(阿育王)이 자기의 아들을 대리국 왕으로 임명하였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아쇼까 왕은 열렬한 불교도로서 불교를 세계 각지로 퍼뜨린 장본인이다. 그의 아들이 대리국까지 왔다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내용은 중국에 불교가 도입된 증거인 서기 70년 때 불승(佛僧)이 존재했다는 기록보다 몇 세기 앞선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중국에서 불교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리겠다.
그러나 고대에 일어난 사건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파묻혀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운남(雲南), 귀주(貴州), 사천(四川), 이 세 지방은 사실 황하 중심의 중국사 시각으로 보면 변방이고, 중국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니 대리국의 왕이 아쇼까의 아들이었든지 또는 인도 출신의 어느 불교 신도였는지 이 내용이 중국측 정사(正史)에 기록될 이유조차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면 후대에 아요디아 지식인들, 특히 신앙지도자들이 쿠샨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대리(大理)를 중심으로 한 중국 서남 지방으로 옮겨 갔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이 책의 157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나는 "중국 고지명 대사전"을 집어들고 보(普)자를 찾아서 페이지를 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나느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거기에 보주가 있었던 것이다.
보주(普州) - 사천성(사천성) 안악현(안악현)의 옛이름. 주(주)나라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의 명칭.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땅이었다. 주나라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의 보주 땅이 지금 사천성에 있는 안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후한 때도 안악지방은 보주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 이 책의 159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혼자 중얼거리며 서재로 가서 책상 위에 펼쳐진 "후한서"를 들여다 보았다.
광무 23년(서기 47년) 촉(蜀) 땅에서 토착민(南蠻)의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토착민들이 봉기하여 한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반란군의 세력이 강하여 정부는 진압군을 파견해 힘겹게 진압하였다. 반란의 주동자와 인구 7천명을 강하계(江夏界)로 이주시켰다.
촉 땅에서 토착민이 반란을 일으킨 해가 광무(光武) 23년이면 서기 47년이고, 이때는 허황옥 여인이 가락국에 도착하기 1년 전이다. 또 반란 세력이 강제로 내쫓겨 새로 정착한 강하 지방은 오늘날의 무창(武昌) 지방이다.
무창 지방은 양자강의 중류에 있다. 그렇다면 촉 땅의 보주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이 봉기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봉기가 실패하자 무창 지방으로 옮겨 간 사람들 중에 한 젊은 처녀가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가락국에 가서 수로왕에게 바쳐졌다면 그게 바로 허황옥의 혼인 여행이 아니겠는가.
중략... 몇 장 더 넘기고 나니까 한층 더 재미있는 내용이 나타났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13년 (서기 101년), 촉 땅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다. 허성(許聖)의 무리가 세금의 차별이 있는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 여름, 정부는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형주(荊州)의 여러 군(郡)의 1만여 병을 독려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허성 일당을 크게 격파하였더니 허성이 항복하였다. 이들을 또다시 강하로 이주시켰다.
이 기사는 기가 막히게 반가운 내용이었다. 두 번째 반란이 있었는데, 그 반란의 주동자가 바로 허성(許聖)이었다. 그것은 허씨 성(姓)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또 이 책의 169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만에서 나온 "변강 민족사(邊疆民族史)"라는 책을 보니까 후한때 허성 집단의 반란 사건이 인용되고 있었다. 조금 더 읽어보니 허성이란 인물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허성(許聖)의 '허'는 성(姓)이 아니라 세습되는 직업 무사(巫師)를 부르는 명칭라고 하였다. 이 책은 중국인(漢人)의 시각에서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무사'라는 표현은 한인의 유교적 입장에서 본 이교도(異敎徒)의 신앙 지도자를 일컫는 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즉, 신앙 지도자로서 신분이 세습되는 사람을 '허'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허'라는 말은 사람 이름 앞에 붙는 칭호로서 신부, 목사, 승과 같은 종교적 칭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허'는 혹시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와 관련이 있는 칭호가 아닐까? 더군다나 그 책 뒷부분에 직업 무사인 '허'는 그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보주 땅의 허성은 인도의 브라만 출신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는 인도를 떠나 보주 땅으로 이주해 온 후 태어난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였다. 그래서 보주에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인도식으로 신앙 생활을 계속하면서 쌍어문을 그린 사원을 짓고, 쌍어문이 그려진 그릇으로 의식을 행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이 책의 298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허황옥은 서기 32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서기전 165년 쯤 허황옥 여인의 6대 또는 7대 선조들이 고향인 아요디아, 즉 아유타국을 떠났을 것이다. 이들이 사라유 강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면 갠지스 강 본류를 만났을 것이다.. 갠지스 강은 동류하여 벵골 만으로 들어가는데, 오늘날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동 벵골에 이르면 아삼 지방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온 자무나(Jamuna)강과 만난다.
이 강의 상류는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그러니까 아요디아 출신의 허황옥의 조상들이 강줄기를 타고 중국 쪽으로 이동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운(水運)에 능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쉬운 이동 경로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 인도를 떠나 보주(普州) 땅으로 이주해 온 후, 정착한 '허'라는 세습 무사(巫師)집단은 그 사회에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고, 차의 자생지(自生地)인 사천지방에서 서한(西漢 B.C. 206 - A.D. 8) 신작2년 (神爵 B.C. 59) 촉(蜀)나라 선비 왕포(王褒)의 기록 처럼 차(茶)가 이미 사대부들의 생활 필수품이라면 반드시 세습 무사(巫師) 집단에서도 다반사로 애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보듯 허황옥이 가야(伽耶) 땅으로 김수로왕과 혼인을 위하여 올 때 漢나라에서 가지고 온 여러가지 물건에도 차(茶)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 제30대 법민왕(文武王 661-681)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 661)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리고 종묘(宗廟)에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면서 해마다 명절이면 그동안 지내온 관습대로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 차, 과실 등 여러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마. 결론
한 인류학자의 30년에 걸친 쌍어문과 허황옥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찾아 나선 결과 우리에게 많은 사실을 전해 주었다. 특히 史書에 나타난 기록 못지 않게 직접 답사하고, 그 주변국의 관계를 파악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뿐만아니라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당시로 볼 때 너무 중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거나 특이하고 신비한 일들로 인해 백성들의 입으로 회자되어 오는 것을 後代에 기록된 것임을 다시 확신해 주었다.
특히 가야(伽耶)의 김수로왕이 멀리 인도 아유타에서 보주(普州)로 이주해와 살던 귀족집단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당시로 보면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가야지역 주민들은 이런 사실을 구전(口傳)으로 남겨 역사의 한자락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茶)의 원산지 사천(四川)에서 대대로 살던 사회에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을 세습 무사(巫師), 즉 바라문의 집단의 한 여인이 혼례예물로 가져왔을 그 많은 금은보화와 물건 중에는 반드시 차종(茶種)과 차(茶)가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다. 그것은 바로 차(茶)를 마시는 것은 당시 사천지역의 사대부나 귀족들의 생활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확신있게 말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김수로왕의 내력이다. 가락과 가야라는 즉, 물고기라는 뜻의 드라비다 계통의 말을 국가의 명칭으로 쓰고, 쌍어문의 흔적을 남긴 김수로왕은 어디 출신일까?
당시 가야의 고위관리들이 좋은 배필을 구해주려고 해도 짝을 짓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한사코 거절하다가 지정된 날짜에 유천간과 신귀간에게 명하여 배필을 맞으라는 것은 이미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자연히 허황옥과 같은 보주출신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김교수의 책 '김수로왕비 허황옥'에서 촉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광무(光武) 23년 즉 서기 47년에 강하로 이주한 허황옥 일가(一家)가 바로 다음 해에 가락국에 도착하여 김수로왕과 결혼을 내용은 다소 무리가 있는 듯 하다.
본인의 생각은 허황옥이 보주에서 출생한 후, 광무년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강하(武昌)로 내려와 세력을 떨치던 중에 자연히 한.중.일의 국제도시인 김해지역 우두머리 김수로왕과 정략적인 혼인이었을 것이 더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또하나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일제시대 일본이 식민지를 타당화하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파헤쳐 정확한 고분의 출토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중 일부 출토된 유물중에 기마민족의 흔적이라 볼 수 있는 금동관, 각배, 오리모양의 토기, 동탁이 발굴되는 것과 김수로왕과의 관계 설정에 혼란스러운 점이다.
오랫동안 이런 혼란속에서 헤매던 끝에 정리되는 몇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신라 내물왕(奈勿王)대의 4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금관(金冠) 사용이 유행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가야에서 출토되는 유물도 이런 기준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난 진한(辰韓)인의 형성과정을 가야(伽耶)인의 형성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구분하여 보면 가야지역의 출토품으로 인하여 막연히 김수로왕이 기마민족 출신일거라는 편협한 생각에 대한 상당한 여유와 어느지역 출신이건 간에 한.중.일의 해상세력과 밀접한 연관과 막대한 영향을 지니고 있었을 거라는 그나마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