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나라 투루판에서의 이틀
-제4차 실크로드 답사-
박경훈
우루무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초원을 거쳐 사막을 누벼야할 시간이건만 어제 북경 지방에 불어 닥친 폭우와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이제 사 중국 국내 공항 검열대 앞에 서게 되었다. 양말을 벗고 발바닥까지 검사한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에 뱀눈처럼 냉기 풍기는 검열관의 눈초리가 마주칠 때마다 소름이 쫙쫙 끼친다. 중국의 화약고로 일컬어지는 위구르 자치구로 들어가기 때문에 검열이 이렇게 철저하단다. 나 혼자라면 주눅이 들어 포기하고 돌아섰을 것 같은데 우리 일행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표정이 덤덤하기만 하다. 전장에 투입되는 특파원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검열대에 올라서니 오히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인다.
참 머나먼 거리를 달려왔다. 대구서 북경까지 2시간 걸렸는데, 북경을 벗어나면서 나타나는 황토 위를 보잉 737 여객기는 4시간을 날아 우루무치 공항에 날개를 접었다.
출발할 때를 생각해서 공항을 빠져나가는데 애 좀 먹겠구나 생각했더니 기우였다. 다른 도시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몽골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란 좋은 뜻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인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도시, 우루무치 해발 950m에 자리 잡은 고원 지대여서 그런지 햇살이 가을의 양광처럼 쏟아진다. 마치 고양이털처럼 부드럽게 와 닿는다.
우루무치는 현재 중국 땅의 ⅙에 해당하는 신강성의 성도인데 인구는 15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위구르족, 카자흐족. 몽골족 등 42 개 민족이 살고 있지만 한족 이주정책으로 한족이 무려 80%를 차지하고 있단다.
맑은 날이 많고 강수량은 적지만 주위에 만년설을 인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어 눈 녹은 물이 하천으로 흘러들어 물은 풍부하다고 한다.
이 지역은 원래 유목민족의 무대였지만 전한 시대 인근에 서역도호부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중국왕조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곳이다. 그 후 중국 왕조의 힘이 약해지면 유목민족이 독립 국가를 건국하는 역사가 반복되다가, 당나라 때 군사 주둔지와 연계하여 작은 도시들이 건설되면서 북 실크로드의 한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우루무치가 실제로 도시로서의 역사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명대에 이르러서 몽골족이 성을 쌓은 다음부터로 청대에 와서 본격화되었다.
청나라는 우루무치강 동쪽에 도시를 건설하고 많은 만주족 기병을 우루무치에 주둔시켜서 신장 지배의 중심지로 만들고 디후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중국말로 “계몽하고 문명화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여기서 소수민족에 대한 청 왕조의 정책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러시아 제국이 동진해 오자 대 러시아 군사지점으로 더욱 중요시 되어 크게 발전했다.
공항을 빠져 나와 다리쉼이나 좀 하고 만년설을 바라보면서 초원의 정취를 좀 느낄까 했는데 그게 아니다. 투루판으로 갈 길이 바쁘다면서 독촉이 성화같다.
천산의 눈 녹은 물이 충분히 흐른다는 우루무치강을 따라 협곡을 빠져 나간다. 억센 바위들이 무섭게 엉겨 붙은 풍경은 텔레비전에서 보던 모양보다도 더 거칠고 위험해 보인다. 중국 천지에서 바람이 가장 세고, 항상 분다는 풍력 발전소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기차까지 넘어뜨렸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지만 내려서 바람 맛을 보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투루판으로 달렸다.
투루판 (吐魯番)
밤이 늦어서야 투루판에 도착했다. 식당 직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니 그간의 피로가 확 가시는 것 같다. 식사는 완전히 위구르 식으로 거행되었다. 서글서글한 눈에 코가 오똑한 위구르 여인들이 위구르 고유복장을 하고 춤을 춘다. 비파 소리와 북 울림에 따라 하늘하늘한 옷소매가 바람에 날리듯 날렵하게 몸을 또르르 말았다 풀었다 하면서 빠르게 휘날린다. 백낙천이 보았던 호선무가 바로 이랬으리라. 절정은 위구르 복장으로 바꿔 입은 우리 일행과의 어울림이었다. 빠른 템포에 격렬한 몸놀림은 단박에 식당 안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인종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고, 사는 지역은 달라도 마음속에 흐르는 원초적인 정서는 나라와 민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거창한 위구르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으나 여흥의 여운은 사막의 밤을 호텔 안에 가둬 놓지 못했다. 짐을 풀어 놓기가 무섭게 모두 호텔을 나섰다. 백양나무 가로수가 시원한 바람을 실어다주는 비포장 길을 걸으며 하늘을 봤다. 반짝이는 별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다. 북두칠성 7개별이 우리나라에서 보던 방향에 그대로 드러난다. 모두 반가운 사람을 만나듯 환호를 하는데, 수나 님은 “우리 고향에도 별 7개 다 보인다.” 한다. 누눈가가 “아, 그 고향 어지간히 산골짝이겠네” 해서 모두 까르르 이국의 밤하늘에 웃음을 날렸다.
불을 켜놓고 심야영업을 하는 포도밭에서 당도가 세계 최고라는 하미과와 수박을 안주 삼아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머셨다. 아무리 먹어도 안주가 줄지 않아 종국에는 싸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아침이 밝아오자 모두 상기된 얼굴로 버스에 올랐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무지 한가운데에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는 산이 나타났다. 마치 묵혀둔 대추같이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화염산이다. 위구르 말로는 키질라타크(붉은 산)이라 한다는데 전체 길이가 100Km 폭 9km 높이 500m 되는 거대한 산괴이다. 지질시대에 습곡운동이 상하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좌우로 일어났기 때문에 꼭 손풍금의 주름 같은 모양을 하게 됐다고 한다. 여름날 태양이 내리쬐면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여 화염산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화염산이 바로 손오공이 활약하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화염산이다. 현장삼장과 그 일행은 훨훨 타오르는 화염산을 통과하기 위해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이 필요했고, 손오공이 파조선의 주인인 칠선공주와 싸우는 이야기가 서유기에 전개되어 있다. 생각 같아선 내려서 손오공과 재주를 한번 겨뤄보고 싶지만 여정이 허락치 않는다.
베제클리크 석굴(柏孜克里克千佛洞)
화염산을 지나 나타나는 무르특 협곡, 벼랑으로 내려가니 베제클리크 석굴이 나타난다. 모두 57 개의 석굴, 허물어지고 오랫동안 방기된 것을 중국 정부가 개방 이후 수리해서 홍보하고 있단다. 이들 석굴은 6세기의 국씨 고창국 시기에 파기 시작해서 당, 송, 원대로 이어졌다. 최고 전성기는 서위구르 제국이 투루판을 지배했던 9세기 중엽 당시 위구르 족은 불교를 믿어 이 땅은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사원이 되었다. 천불동은 이슬람교도들이 898년 이곳을 장악하면서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석굴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클레엔츠가 확인한 후 학계에 알려졌고, 독일의 그륀베델이 1902년부터 4차례에 걸쳐 조사하면서 마음대로 벽화를 뜯어갔고, 그 후의 조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까지는 그림들이 잘 보존되었었는데 독일의 그륀베델과 르 크크, 일본의 오타니, 러시아의 올렌 버그, 영국의 스타인 같은 탐험대라는 약탈꾼들이 드나들면서 불상과 벽화를 도려 가서 지금 세계 도처를 유랑하고 있다. 이곳에서 오타니가 떼어낸 벽화 네 점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는 말에는 놀라움이 앞섰다. 르 크크가 오려서 가져간 9호굴의 벽화는 베를린 박물관에 복원 전시했으나 2차 대전 때 폭격을 받아 소실되었다고 한다. 베제클리크는 위구르 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이라는데 지금은 폐허처럼 허물어진 석굴 앞에 열사에 굽혀서 얼굴이 구리 색으로 변한 위구르 노인이 옛날의 영화를 되새기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악기 연주에 열중하고 있다.
고창고성(高昌故城)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 폐허처럼 된 베제클리크 석굴을 돌아 고창고성으로 향하는 차안은 온통 탐험대라는 매력적인 이름으로 위장한 서양 약탈 귀신들의 성토장이 되었다.
화염산을 되돌아 고창고성으로 가는 차안 조선족 가이드가 국문태의 고창국의 성립과 당태종에게 망하는 과정을 얘기했다. 이어서 김재원 원장님의 고창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열강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부분이어서 대강을 간추려 본다.
중국이 분열되고 돌궐이 강성할 때 고창국은 돌궐에 속했었다. 수나라가 돌궐을 격파하자 고창국의 태자 국문태는 장안의 수양제에게 인질로 가게 되었다. 수나라가 612년 고구려를 칠 때 국문태는 수양제를 따라 요동까지 같이 가서 수나라 특공대 30만이 불귀의 객이 된 현장을 목격했었다. 고구려와 전쟁으로 수나라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국문태는 당나라가 건국되었지만, 수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하고 당태종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서돌궐에 붙었다. 이에 발끈한 당태종은 7000리를 행군해서 고창국을 압박했다. 고창성이 포위되던 640년 9월 국문태는 갑자기 혈압이 치솟아 혈관이 터져 죽고 아들이 항복했으나 당군은 고창국을 초토화 시키고 포로 7000명을 잡아 가버렸다.
고창국의 멸망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영류왕은 다음 차례가 고구려라는 것을 직감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고구려는 실크로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창국의 멸망은 신라의 선덕여왕에게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는 호재로 작용했다. 이유는 당나라와 대적해야 할 고구려가 신라를 계속 압박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창국도 무관한 나라가 아니란다. 일제 때 경주 서봉총에서 금관과 은합이 나왔는데, 은합의 뚜껑 안쪽에 연수원년(延壽元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연수는 바로 고창국의 국문태 왕이 사용한 연호라는 것이다. 연수원년은 국문태 재위 5년으로 서기로는 624년이 되고 신라로서는 진평왕 42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이런 해석이 가능해 진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부국 고창국이 새 연호를 선포한 기념으로 은합을 만들어 신라에 보낸 것으로.
강의를 듣고 보니 지금도 오기 힘든 이 사막에 1400년 전에 이미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국문태의 고창성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서 보고 싶어진다.
백양목 우거진 가로수 길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니 황량한 사막 속에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폐허가 나온다. 고창국의 왕궁이 있었던 고창고성터다.
둘레 5km에 달하는 고창고성 역시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축조할 당시는 견고하도록 마른 풀을 섞어서 쌓았으나 왕국이 멸망한 후 농민들이 풀을 거름으로 쓰기 위해 성벽을 헐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한 나라 때 둔전이 설치된 이래 원나라 때까지 1000여 년간 신장지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고창국 시대의 것들이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만 덩치의 당나귀는 성질은 급해도 힘과 끈기는 끝내준다. 쏟아지는 햇볕도 아랑곳 하지 않고 뿌연 먼지를 일으키면서 잘도 달린다. 색다른 체험에 모두 만족 해 하는 표정들이다.
대불사 원형 승방, 현장법사가 지은 『대당서역기』에 등장하는 곳이다. 현장법사가 627년 인도로 순례를 떠날 때 고창국 대불사에서 석달을 머물면서 불경을 강의했던 곳이다. 당시 고창국왕 국문태가 현장을 놓아주지 않으려 해서 ‘인도에서 돌아 올 때 3년 간 머물 것을’ 약속하고 떠났는데,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 했다. 현장이 돌아온 645년에는 이미 국문태는 죽고, 고창국은 망하고, 고창성은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인간의 바람과는 달리 인과응보에 따라 변한다는 진리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 온다.
시장가 노점에서 수박과 하미과로 배를 채우고 지하수로 칸얼징으로 향했다.
감인정 (坎儿井[칸얼징]) 카레즈
투루판이 실크로드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역사를 지니고 흐르는 칸얼징 때문이다. 이는 만리장성, 항주~북경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3대 고대 건축에 속한다고 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1600여 갈래 칸얼징 중 1000 여 갈래가 투루판에 흐르는데, 그 길이가 총 5000km에 이른다고 한다. 만리장성보다 길다.
칸얼징이란 페르시아어로 ‘파서 물이 지나가게 하는 시설’이라는 뜻으로 까레즈(kerez)라고도 한다. 산기슭의 수맥을 찾아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오면서 수직굴을 만든 다음 각각을 경사진 터널로 연결해 간다. 연결된 지하수로는 거주지와 경작지까지 이어진다.
칸얼징 낙원은 그 하나를 관광용으로 개발한 것이지만 실제로 포도밭을 경작하는데 필요한 시설이기도 하다. 멀리 떨어진 천산산맥에서 흘러온 눈 녹은 물을 이용해 포도밭을 경작하는 모습을 보면 실크로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제 교하고성, 아스타나 고분군, 소공탑을 보고나면 투루판 답사는 끝이 나고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가 북방민족의 성지인 천지 팀과 돈황 팀으로 답사단이 잠시 이별했다가 북경에서 재회하는 일정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