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문화를 찾아서(3)추사 고택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숭고한 문화와 예술이 숨 쉬는 고택
글. 사진│김명숙 미술사가
역사의 향기를 담은 추사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조선조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이 있다. 이곳은 주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아 조용한 곳을 찾아 산책하며 역사의 향기를 탐해보려는 미술사 학도들과 가족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이다. 차가운 바람과 짙은 안개 속 고택으로 가는 길은 넓은 예산벌을 가로 지른다.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풍요로운 예산 벌판의 정경을 연상하면 즐거움이 절로 나겠지만 차가운 겨울비와 바람만이 예산 벌을 휘몰아 치고 있어 을씬년 스럽기만 하다. 봄과 가을 여행시즌과 주말 관람객들을 위한 주차장은 넓게 잘 다듬어져 있다. 2월 14일 비가오고 바람이 부는 날씨, 필자가 이곳을 찾을 때는 차가운 비바람과 안개만이 있을 뿐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구절비룡(九節飛龍)으로 불리는 팔봉산의 한 줄기에 형성된 용산자락에 자리한 고택은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의 생가로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건립하였으나 잦은 병화로 지금은 34칸만이 남아 조선시대 가택(家宅)의 형태를 읽을 수 있다.
추사고택건물구성과 형태
추사고택은 선생이 나서 성장한 곳으로 80,5평의 암담한 팔봉산의 한 줄기에 형성된 용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택은 솟을 대문의 문간채를 시작으로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을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향하였고, 사랑채는 남향하고 있다. ㄱ 자형의 사랑채, ㅁ 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각방의 각 방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남쪽엔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 잡은 ㄱ자형 집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家宅) 기준이었다. 추사고택은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추사고택의 사랑채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했던 것이며 요긴하게 쓰였던 것 같다. 이는 사랑채 기둥마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담긴 “또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니, 즐겁게 매화와 같이 한산에 머무는구나(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요, 세상에 두 가지 큰 일이 있다면 밭 갈고 독서하는 일이다.(天下一等人忠孝世間兩件事耕讀” “그림 그리는 법은 긴 강이 만리에 뻗친 듯하고, 글씨 쓰는 기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畵法有長江万里 書勢如孤松一枝)” 주직(柱職)들에서 엿 볼 수 있다. 또한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刻字)된 석주(石柱)가 있는데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선생이 집적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한다.
안채에는 여섯 칸 대청과 두 칸의 안방, 두 칸의 건넌방이 있다. 안방부엌,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 집으로,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여섯 칸으로 그리 흔치 않은 큰 마루 규모이다. 대청 대를 보와 기둥들에는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 들어가야 하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의 모임이라.(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다섯 이랑은 대나무 심고, 다섯 이랑은 채소 갈고, 한나절은 정좌하고, 한나절은 책 읽는 즐거움이라.(五苗種竹五苗藝蔬 半日靜坐半日讀書)” “ 푸른 옥쟁반 안에 수정이 희롱하고, 황금 반합 속에 홍설을 담아 놓은 듯하다. (碧玉盤中弄水晶 黃金合裏盛紅雪)”추사선생의 필적들이 붙어 있다. 이러한 ㅁ 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 형이다.
지붕은 긴 홀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는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하여 처리되었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을 이어 붙인 지붕이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백송나무와 고택 주변
고택을 나와 잠시 발길을 돌리면 멀지않은 거리에 추사 선생의 묘소와 증조부이신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 그리고 화순옹주 정려문(旌閭門) 즉, 홍문이 있다. 정려문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命旌)한 열녀문이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또한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600미터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는데, 백송은 중국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이 백송은 추사선생이 25세 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 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00살이며 나무의 키는 약 10m 정도이다. 백송의 밑 둥과 줄기의 피해 부분을 석회로 수술하여 백송의 아름다움이 적어 안타깝다.
고조부 김흥경의 묘 주변 풍경과 거리감을 덜하도록 연출되어 있는 조경들과 백송, 인도, 벤치는 필자의의 발길을 잡는다. 앉아서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추사고택에서 남쪽, 추사묘 뒤쪽으로 올라가면 화암사(華巖寺)를 만날 수 있다. 이 사찰은 삼국시대의 고찰로 추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별사전으로 분급된 일대의 전토에 포함되어 그 일문(一門)에 세습되었다. 지금은 요사체(療舍體)만 남아 있는데, 추사 선생은 이곳에서 불교에 정심(精深)하였다 한다. 이곳에 추사 선생의 친필인 한 없는 수명이란 뜻<무량수각>,<시경루> 등 현판이 있고, 뒤편 오석산 병풍암벽에 각자한<시경>,<소봉래>,<천축고선생댁> 등 추사 선생의 유적이 남아있다.
추사 고택 가는 길은 서울과 경인 지역에서라면 두 길이 있다. 일단 예산까지 가야하는데,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천안-온양-예산 잇는 길이 있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당진 IC와 해미 IC에서 예산방향으로 접근한다. 경부고속도로 천안 IC에서 예산까지는 온양을 거쳐 신례원에 이르게 된다. 이 곳 신례원사거리를 놓침면 않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1,5km를 가면 계촌리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4,1km쯤 들어가면 추사고택이다. 돌아오는 길은 길을 바꾸어 멀지 않은 수덕사와 덕산온천, 윤봉길 의사 기념관 등을 들러 보고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면 답사는 더욱 멋있게 장식된다.
추사 김정희
추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기예하여 일찍이 북학파의 일인자인 박제가의 눈에 띄어 추사의<입춘첩(立春帖)>을 보고 학예로 대성할 것을 예언, 수제자가 되었다.
1809년 24세에 생원시에 합격 ,그해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서 수행,181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 예조참의(禮曺參議),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1840년 55세에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에 생부 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철종7년)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체계를 탈피하여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 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先覺者)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 청조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문자학(文字學),사학(史學),지리학(地理學),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여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황의 순수비(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綠),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완당척독(阮堂尺牘),담연재시고(覃?齋詩藁)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 서, 화, 전각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書道)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묵죽도>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등이 있다.
올해는 추사 탄생 220주년 서거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 전당 등에서 다양한 전시를 준비하고 잇고, 경기도 과천시도 올 11월에 추사를 돌아보는 국제학술대회에서 인본인 후지즈카 지카시 씨가 기증한 작품에 대한 연구결과를 일부 발표할 예정이다. 그리고 예산군에서는 매년 10월10일 추사고택 주변에서 추사문화제를 개최하여 추사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숭고한 문화, 예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시기를 맞춰서 답사를 하면 추사 선생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충분히 접할 수 있다.
“추위로 인한 고통이 북청에 있을 때보다 더합니다. 밤이면 한호충이 밤새 울어대다가 아침이 돼서야 날아갑니다.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온통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