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것’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허송해버린 세월을 아쉬워해서인지 노래에도 “세월아, 가지를 마라”라는 가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가요뿐만 아니라 민요나 단가에서도 ‘세월을 멈추고 싶다.’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세월”이 더디 가기를, 아니,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불러낸 심경의 표출이겠지. 이런 심경은 어쩌면 삶의 질이 전보다는 더 나아져 여유로워진 삶의 즐거움을 더 누려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으로 보인다. 살기가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그 반대말인 “세월아, 어서 가라”라는 말이 흔히 들렸을 터이니 말이다.
‘세월’이라는 말은 곧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말인데, 이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것인지 아니면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이 ‘시간’은 곧 ‘인생’과 연관되어 있어서 자고로 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음이 엿보인다. 어쩌면 철학이 풀어야 할 영원한 과제일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이 지구에 처음 나타나 진화해온 세월이 700만 년이라고 한다. 그 긴긴 세월을 보내면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문화를 이루며 오늘의 인간으로 진화해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람만이 지니는 ‘생각할 수 있는 두뇌’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손’이 있기 때문이며, 이를 더욱 가속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는 불편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한 가지 불편이 해소되면 또 다른 불편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새로 나타나는 불편을 해소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도 또다시 새로운 불편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진화의 혜택으로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부와 명예와 지위를 얻어 이를 오래오래 누리고 싶어도 ‘세월’은 흘러만 간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세월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철학자들은 ‘시간이란 무엇인가?의 답을 얻으려고 고심했을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고, 생물은 점점 자라서 늙어가고…. 따라서 시간은 ‘흐르는 것’, 다시 말하면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계’가 나오면서부터는 ‘시간’은 흐르고 있음을 뚜렷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해가 움직인 거리로 시간은 증명되고, 생물이 점차 성장하여 마침내 노쇠해가는 변화 현상이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은 ‘움직이는 현상’이라고 풀이하면 될 터인데, 시간이 ‘움직이는 현상’이라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생물은 왜 ‘움직이지 않고 있을까?’
철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인정받으려면 모순되지 않는, 논리에 맞는 말을 찾는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그들의 결론은 “움직임의 지속이며 정지의 지속”을 ‘시간’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 같다. 철학자가 아닌 우리 범인(凡人)들은 논리를 정리해보려고 덩달아 고심할 것까지는 없다. 우리의 ‘시간’은 ‘시계’에 맡기기로 하자.
1980년대 초, 경주의 새마을 연수 교육에서 철학 강의를 담당했던 교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설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학문”이라고 했다. 그 교수는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가 끝나면 학기말 시험은 ‘그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하는 시험’이 아니라,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풀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디에다 어떻게 두고 어떻게 풀어가는가에 따라 그 성적은 저절로 드러난다고 했다.
‘철학’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줄여 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 쉽게 말하면 ‘삶’을 탐구하는 학문이 될 것이다.
‘삶’을 더 안정되게, 더 행복하게, 더 자유롭게, 더 풍요롭게 누리려는 인간의 꾸준한 노력으로 문명의 새로운 이기(利器)가 만들어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찬란한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자연의 힘은 인간의 ‘문명’을 때로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세상 만물은 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삶은 모든 생물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생물, 우주의 생성과 변천 같은 자연 현상에도 관련이 된다.
경기도 포천의 어느 깊디깊은 산골 시설물 입구에 서 있는 손바닥만 한 검은 돌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생은 웃으려 살다가 울고 가는 것/만나려 태어나 헤어짐으로 끝나고/혼자 울고 태어나 여럿을 울리고 떠나는/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인생’이란 인간의 뜻대로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외국어 서적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대학에서 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졸업에 즈음해서 철학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대학 시절 내내 교수님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 담으며 ‘인생’이라는 명제를 잊어본 적이 없는데, 저는 지금도 그 답을 모르겠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나도 자네와 똑같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네만, 나 또한 그 답을 모른다네. 더 심오한 답을 얻으려거든, 일찍이 자기성찰로 ‘인생’ 문제에 도가 트인, 히말라야 동굴에 칩거하는 고승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해보게.”
학생은 마침내 ‘인생이 무엇인가?’의 답을 얻게 된다는 희망을 안고 그 고승의 동굴을 수소문하고, 그 고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큰 깨달음을 얻고 삶의 희망을 찾아 돌아갔다는 수없이 많은 현자 몇몇을 만나보기도 했다. 언어습득이며 체력단련 등 오랫동안의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힘겨운 여행을 떠났다.
마침내 그 동굴에 이르렀다. 고승은 면벽(面壁)하고 앉은 채 먼 나라에서 온 그 젊은이를 뒤통수로 맞이했다. 청년은 고승의 등 뒤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젊은이는 어찌 나를 찾아왔는고?”
“네, 스님, 이제 일생의 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일생의 ‘한’이란 무엇인고?”
“스님, 저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훌륭한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만, 교수님은 제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명제인 ‘인생’ 즉,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주지 않으시고, 스님을 찾아뵈라고만 하셨습니다.”
“음! 그러게나! ‘인생’에 대한 답을 아무나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잘 새겨듣게… 그리고 명심해두게… ”
스님은 여전히 면벽을 한 채, 하던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더니 한참 후에 청년의 눈에 마치 ‘공중 부양’의 환상을 보이기라도 하듯 더욱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인생이란 … 무엇이냐? … 그것은, 바로 … ‘인생’이란… «기다리는 것»이야.”
“아, 네, 스님, 스님의 ‘깨달음’의 답을 새겨들었던 분들 몇 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서도 제가 바라는 ‘답’을 얻진 못했습니다. 스님! ‘인생’이란 «기다리는 것»이라 하셨는데,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 말에 고승은 그 고고한 자세를 잠시 흩뜨리며 돌아앉더니, 공중 부양의 환상에서 내려와, 목에 침을 넘기면서, 젊은이를 향해 꽤 오랫동안 눈망울만 굴리고 있었다.
‘인생이란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이 스님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심오한 철학의 답인 양 감복하며 하산하던 옛 제자들의 모습을 그 젊은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뭇 제자들에게 되뇌던 “기다리는 것”에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2004년 가을 “하상 신앙대학 강좌”에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삶’이 무엇인지 그 답을 찾지 못해 고민에 빠진 ‘만득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만득이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는데, 열차 안에서 홍익회 판매원이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이요. 삶은 계란!”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아! 삶이란 바로 계란이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언어유희지만 만득이가 ‘달걀의 한 살이’를 ‘인생의 한 삶’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만득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득이는 ‘삶은 달걀’을 영어로 이렇게 번역할 것 같다. ‘Life is an egg’라고.
앞에서 본 그 스님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답이 “기다림”이라면,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사뮈엘 베켓은 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에서 무엇이라 했을까? 베켓은 그 작품의 프랑스어 제목(En attendant Godot)을 영문(Waiting for Godot)으로 옮기면서 “희비극”(a tragicomedy in two acts)이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이 말은 그의 희곡이 비극과 희극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오기를 기꺼이 기다리는데, 슬프게도 영원히 오지 않는 것”, 따라서 “고도를 기다린다”라는 말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데, 그래도 기다리고 있다”로 보인다. 바로 베켓의 답은 ‘인생은 희비극’이다.
이를 좀 달리 풀이해보면, ‘무엇을 기다리는가?’에서 ‘무엇’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 즉 ‘신’을 대신하는 것, 바로 ‘시간’, 더 나아가 ‘세월’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이 세상 만물은 움직이지도, 자라지도, 늙지도, 죽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영원히 그대로 멈춰 있을 것이니…”
궁금해진다. 오늘의 하루가 옛 시대의 10년, 더 나아가 몇백~몇천 년과 맞먹을 만큼 변화무쌍한 시대에 사는 밀레니얼(M)세대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히말라야 산중의 그 고승은 어찌 되었을지?… ‘인생이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진짜로 터득해보려고 새로운 수도 도량으로 옮겨 오늘날의 중생을 위해서 그 해답을 얻으려고 지금도 면장(面墻)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 진짜로 면장(免墻)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