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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23일 주일
[(녹) 연중 제7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7주일입니다.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을 통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밝혀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도 축복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다윗은 사울에게, 주님께서 사울을 자기 손에 넘겨 주셨지만,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흙으로 된 첫 인간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 주셨지만, 저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6,2.7-9.12-13.22-23
그 무렵 2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지프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다.
7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꽂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8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12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13 다윗은 맞은쪽으로 건너가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22 응답하였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23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45-49
형제 여러분, 45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기름부음받은이”(1사무 26,9)는 축성된 이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왕, 사제, 예언자가 물질적인 기름부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 성별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충정은 영웅적입니다. 이는 사울을 존경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임금으로 축성하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충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면 단연 탁월하게 축성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리적인 기름이 아니라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고 축성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구약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예표되던 것들은 이제 신약에서 영적인 것으로 실현되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고’(그리스 말로 ‘크리스토스’는 ‘기름발린 이’라는 뜻) 우주의 임금이 되십니다. 다윗이 물질적인 기름으로 축성된 사울 임금에게 보인 존경이 그러하다면 성부에게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어 축성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 방식은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루카 6,35)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던 사울을 살려 줌으로써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원수 사랑의 탁월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다윗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용서와 자비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6,36) 자비로울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와 자비는 더 높은 수준으로 돌려받을 것입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7-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향해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저주하였는지 모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또 다른 순교라고 할수 있는 원수 사랑은 그냥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원수 사랑이라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십자가와 묵주를 쥐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 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와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위대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휘광이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실은 영예로운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일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도 하느님의 자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미움은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형제가 형제의 생명을 죽이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자녀라고 계속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핵심은 무엇일까요? 헌법에 따르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측이 주장하는 바대로라면 이 계엄은 ‘계몽’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몽을 위해 형제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에 대해 국민들이 ‘아, 이것은 형제의 잘못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해야 당연할까요? 그것을 당하는 측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는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인간 존엄을 무시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주신 이에게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는 아버지에게 합당한 자녀로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카인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하느님은 형제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자녀를 계속 자녀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핵소 고지(Hacksaw Ridg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75명을 구한 실제 인물인 데스몬드 도스(Desmond Doss)의 삶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데스몬드 도스는 종교적·도덕적 신념 때문에 총을 들지 않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우의 생명을 구해냈습니다.
데스몬드와 어떻게 생명에 대해 소중함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는 형제에게 치명상을 입힐 뻔했던 사건과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댄 일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옳고 그름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을 합리화 할 수는 없습니다.
데스몬드 도스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전쟁 후유증과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변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가족에게 거친 언행을 일삼았고, 때때로 총기를 꺼내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심하게 술에 취해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려 들자, 이를 본 도스가 아버지의 총을 빼앗아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순간 도스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사실에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어린 시절 형에게 가한 폭력의 기억까지 겹치면서, “가족 간에조차, 아니 누구에게라도 총을 겨누는 순간 인간의 자격을 잃게 된다.”라는 걸 절감하게 됩니다.
용서는 결국 용서받는 대상은 물론이요 더 많은 이의 생명을 구하는 길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자라면서 당신을 학대하는 어른들에게 지쳐 그들도 죽이고 당신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촌으로 들어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는 당신 생각을 접습니다.
만약 그 생각을 접지 않았다면 저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많은 이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느님께 가셨을 때는 하느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지옥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았으니 가능합니다. 만약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마다 못했다고 때린다고 하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는 자기 부모에게 사랑받았으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의 자녀라고 할 자격도 없습니다.
용서해도 그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장 발장과 자비르 경감의 예처럼 장 발장은 용서받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자비르 경감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계속 용서하지 않는 자로 남아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합니다. 심판은 주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자녀의 모습만 보이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핑 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자에 소비자가 원하는 재료를 선택해서 올려놓는데 그렇게 올려놓는 재료를 ‘토핑’이라고 합니다. 상품에는 ‘포디즘(Fordism)’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포드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조립형 라인으로 생산했습니다. 조립형 라인으로 자동차의 생산이 증가했고, 소비자는 더 싼 값에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산 방식은 전 산업에 확대되었습니다. 소비자는 맞춤형보다는 기성품에 만족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비자는 선택한 제품에 자기만의 ‘토핑’을 더하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아이스크림을 찾아내고, 옷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옷을 입으려 합니다. 이는 신발, 스마트 폰, 가방, 가구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AI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이 바르는 파운데이션에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부 색조와 어울리는 파운데이션을 AI가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전에는 색조가 3개였는데, 파운데이션의 색조가 30,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있는 물건의 기능도 잘 모르는 저와 같은 세대는 ‘토핑’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저도 토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5년입니다. 저는 당시 토론토에서 지냈습니다. 거리의 핫도그 가게에서 핫도그를 먹으면서 다양한 토핑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토핑을 골라서 핫도그에 넣어 먹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토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샤부샤부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5가지 정도의 국물이 있어서 입 맛에 맞는 국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찍어 먹을 양념장도 여러 가지 양념을 배합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묵, 조개, 계, 라면, 떡, 채소를 골고루 선택해서 국물에 넣어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기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취향에 따라서 고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토핑은 획일적인 삶에 다양성을 제공하며 활력을 줍니다. 토핑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토핑이 케이크의 크림처럼 돋보이려면 기본적으로 케이크의 빵이 맛있어야 합니다. 빵이 맛이 없다면, 기본이 충실하지 않다면 토핑이 많아도 소비자는 외면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토핑’이 있습니다. 여러 신심 단체가 있습니다. 레지오, 성가대, 헌화회, 제대회, 독서단, 해설단, 반주단, 복사단이 있습니다. 구역 모임이 있습니다. 한국학교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미사 후에 친교가 있습니다. 사목회를 중심으로 여러 행사가 있습니다. 사순 피정, 부활절, 세례식, 견진성사, 성모의 밤, 청소년 음악회, 유소년그룹 피정, 본당의 날, 성령 찬양의 밤, 걷기 대회, 자선 음악회, 대림 피정, 성탄절, 송년 미사가 있습니다. 재정이 허락하면 더 많은 토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시니어 아카데미도 만들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미 교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토핑이 있지만 신앙생활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은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집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체를 온전히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몸을 ‘감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백성사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은 ‘토핑’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것들을 추구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 학력, 건강, 직장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토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밤을 새우고, 노력합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끌어 내리려 하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하늘의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둘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의 것이 나의 삶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토핑으로 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의 성인
성 폴리카르포(Polycarp)
신분 : 요한의 제자,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스미르나(Smyrna)
활동연도 : +155/156년
같은이름 : 뽈리까르뽀, 뽈리까르뿌스, 폴리까르뽀, 폴리까르뿌스, 폴리카르푸스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또는 폴리카르포)는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의 주교가 되었다. 성 폴리카르푸스는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였고 특히 이단인 발렌티누스주의(Valentinianism)와 마르키온주의(Marcionism)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한 1서 4장 3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사탄의 맏이'라고 부른 마르키온의 거짓 가르침을 반대하도록 역설하였다.
그는 로마(Roma)로 가서 교황 성 아니케투스(Anicetus, 4월 17일)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짓지 못하였다.
이에 그대로 스미르나로 돌아온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하여 체포되었으며, 이교도의 신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부함으로써 화형 언도를 받았다.
그는 사도 교부의 한 사람으로서 2세기 그리스도교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사도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저술가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스미르나 교회 이름으로 기록된 "폴리카르푸스 순교록"(Martyrium Ploycarpi)는 목격증인의 글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성 라자로 (Lazarus)
활동년도 : +867년
신분 : 수도승,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나자로, 나자루스, 라자루스
성 라자루스(또는 라자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수도자이자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성상파괴주의자 황제인 테오필리우스의 재위 중에 이교도에 의해 손상된 성화들을 복구하며 바삐 지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황제로부터 잔인한 고문과 박해를 당했다. 후에 그는 영예롭게 복귀하였고 특사로서 로마(Roma)로 갔다. 교회미술에서 성 라자루스는 두 손이 불타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교회나 손상된 성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복녀 라파엘라 이바라 (Raphaela Ybarra)
활동년도 : 1843-1900년
신분 : 과부,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에스파냐 바스크(Basque) 지방의 빌바오(Bilbao)에서 태어난 라파엘라 이바라는 과부가 된 후 수호천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1984년 9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