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눅1:39-45) 성령의 큰 역사를 실현하고 있는가?
누가복음 강해 (7)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39-45)
찬양하는 태중의 아이
약혼 중의 처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남편 요셉과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여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 부끄럽기도 하지만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천사는 세상을 구원하는 영원한 왕이 되실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은혜를 입었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천사는 또 처녀 임신을 못 미더워하는 마리아에게 친족 엘리사벳의 오랫동안 막혔던 태도 하나님이 열어주어서 임신 육 개월 차가 되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나사렛 시골의 보잘것없는 아녀자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의심을 걷어버리고 그 고지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천사가 떠나자,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려고 재빨리 찾아갔습니다. 과연 그녀가 어떤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도 너무 궁금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겪은 것 같은 초자연적 일이 일어났다면, 자신도 안심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온전하게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은 인간으로선 아예 상상도 못할 경이로운 차원이라서 엘리사벳을 만나러 오는 내내 두렵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살고 있는 산골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성읍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높은 산 위에 위치하므로 산골이란 표현은 그런 고원을 뜻할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나 접근성이 좋지 않은 산골까지 처녀가 혼자서 여행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고 이런저런 위험도 도사려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로선 지금 그런 것들을 염려할 겨를이 없이 최대한 빨리 찾아갔을 것입니다.
임신하기엔 나이가 많았던 엘리사벳의 불룩해진 배를 보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자신이 걱정하는 문제를 이미 다 알고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주 은혜로운 말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여인인 엘리사벳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오자 자신의 복중에 있는 임신 육개월 차의 태아가 크게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거기다 친척 언니인 그녀가 동생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칭했습니다.
세상 영웅들의 전기를 보면, 한국의 단군 신화처럼 그 출생부터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역사가 있었다는 식으로 과대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건넨 위로도 언뜻 그런 맥락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당장 엘리사벳이 마리아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었는지부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출생 기사에 의도적으로 초자연적인 신비감을 덧칠한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가 잉태된 것은 물론 에서와 야곱이 태 중에서 싸우는 것까지 감지했습니다.(창25:22) 최근에는 엄마의 생각이 태아에게 전해지고 그 반대로 태아의 감정도 엄마가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고대에도 엄마가 아주 힘들어 하거나 크게 기뻐할 때에 태아가 더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서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사가랴는 성소에 임재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전해 받은 아들의 수태 고지와 그 아들이 맡을 하나님의 일에 대해 아내에게 글로 써서라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임신한 사실을 확인하자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태교에 만전을 기했을 것입니다. 또 임신 6개월이나 되었으므로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41절) 정도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문안 인사를 듣는 순간 엘리사벳은 태중의 요한이 평소와 다르게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녀는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44절) 한번 더 강조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영적 존재입니다. 엄마 뱃 속의 태아도 6개월이 지나 스스로 움직일 정도면 지정의를 지닌 온전한 영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태아 요한과 엄마 엘리사벳 사이에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영적 교감이 이뤄진 것입니다. 물론 태아 요한이 자신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알 리는 없지만, 요한이 기뻐서 뛰놀았다는 것은 성령이 태중에서도 초자연적으로 역사해서 그로 하여금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역사상 최초의 선포를 하게 한 셈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역사
기독교 교리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때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마리아가 그녀와 대면하는 순간, 아니 가브리엘 천사가 성소에서 사가랴와 대면할 때부터 지금까지, 나아가 앞으로 요한이 건강하게 출생하여 자기 소명을 완수할 때까지, 이 가정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성령의 은혜와 권능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을 자세히 살피면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마리아가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꺼내기도 전에 엘리사벳은 “네 태중의 아이”라고 표현했습니다.(42절) 엘리사벳으로선 마리아의 배가 자신처럼 부르지 않았기에 임신은 짐작조차 못합니다. 마리아조차 천사를 만난 후 곧바로 찾아 왔으므로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설령 가브리엘 천사가 동정녀 탄생을 고지할 때에 자신의 자궁에서 어떤 움직임을 감지했다고 쳐도 잉태되었다고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했는데(28절), “받은’이라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완료 수동태입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 안에 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천사가 “은혜를 입었느니라”라고 덧붙인 말은(30절), 과거형으로 단회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천사와 대면하는 동안이나 그 직후에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어쨌든 지금 생리적으로는 모두 마리의 임신을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엘리사벳이 그런 말을 큰 목소리로 단호하게 외칠 수 없습니다.(42절)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고 성령이 말해 주시는 내적인 음성을 분명하게 들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선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선언이 자기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고, 또 그런 말을 하는 중에 마음 속에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으로선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허물 없는 친척 사이라도 혼전 순결을 일 년 동안 유지해야 하는 처녀에게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은 일상적인 상태에선 임신 여부부터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42절) 축복해주었습니다. “여자 중에”라고 했으니까 최상급의 의미인데, 혼전 임신한 처녀에게 네가 세상에서 최고로 복 받은 여자라고 말해준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신령한 점쟁이가 아니며 아론 지파의 경건한 요조 숙녀였습니다.(5절) 다시 강조하지만 그녀는 성령이 시키는 말을 그대로 대언한 것입니다.
내 주의 어머니
그러나 마리아가 최고로 복을 받았기에 아기 예수도 같은 복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최고의 복을 받았기에 엄마인 마리아도 자동으로 그런 복을 함께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이어서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어찌 된 일인가”(43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세히 따져보면 태아 요한이 기뻐했다는 것보다 더 엄청난 의미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이미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 아니라, 그 태아를 ‘내 주’라고 칭했습니다. 당시에는 ‘내 주’(My Lord)라는 호칭을 하나님 외에도 왕 같은 고귀한 신분에게 또는 종이 주인에게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낳을 요한이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는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예언을 받았기에, 모든 정성을 다해서 태교를 하는 중입니다. 원문에는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는 44절의 맨 앞에 이유를 나타내는 ‘가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자신이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칭송하며 축복하는 근거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이미 임신했다는 사실을 자기 복중의 요한이 먼저 알고서 기뻐했는데 그 감정을 엄마도 감지했다는 뜻입니다.
장차 메시아의 오심을 외쳐야 하는 요한이 마리아가 오자 태중에서부터 기뻐하며 크게 뛰어 놀았으므로, 마리아의 태 중에 있는 아이는 당연히 그 메시아인 셈입니다. 태아 요한이 크게 기뻐하므로 엄마 엘리사벳도 크게 기뻐하며 친척 동생인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로 모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가 하나님께 최고로 큰 복을 받은 아이이므로, 그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도 모든 여자 중에 최고의 복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평범한 산골 여인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뻐하며 자기 입술로 증거하며 찬양한 역사상 최초의 인간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묘한 방식으로, 즉 태중의 아이 요한에게서부터 충만하게 임재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차근차근 완벽하게 이뤄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 기록은 없지만 마리아가 문안 인사할 때(40절),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히 말해 주었기에 엘리사벳이 위로해 주려 했다고 추측해선 안 됩니다. 엘리사벳이 말한 내용부터 엄청나서 단순한 인간적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문안이라는 단어 ‘에스파사토’도 원래 ‘껴안다’는 뜻으로 오랜만에 만난 사람끼리 포옹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여자는 당시의 관습대로 포옹하며 간단한 안부 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마리아로선 천사가 전해준 말이 가뜩이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라, 쉽사리 털어 놓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만 확인하려 했는데 당장 눈으로 보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동정녀 탄생의 고지도 진리라고 확신하고서 더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이 맡을 소명에 순종해야겠다고 속으로만 다짐했을 것입니다.
지금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엘리사벳이 마치 천사처럼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전히 벙어리 상태로 있는 사가랴 제사장을 대신해서 그 아내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고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뤄나갈 인간 주역들을, 그것도 아주 평범한 아녀자들로 동원해 너무나도 신령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해 내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마리아의 태중에서부터 당신이 앞으로 베풀 구원에는 남녀노소, 인종, 신분, 계급, 재력, 지성 등 세상에서 통용되는 어떤 기준도 절대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진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누가
이 복음서를 저작한 누가는 당시로선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의사였습니다. 틀림없이 초자연적인 이적에 관해 잘 믿지 못하고 의심부터 하는 습성이 몸에 베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성령의 행전이라고 불리는 사도행전을 기록했고, 강해를 시작할 때 설명한 대로 이 복음서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부터 성령의 신령한 은혜와 권능을 실제로 체험해보지 않고는 절대 그렇게 저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가가 회심한 경위나 그 후의 믿음에 관해 자기가 저작한 책에서 간증한 적이 없고, 또 다른 성경들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선교 여행에 동참했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도 끝까지 뒷바라지 한 사실을 보면 바울의 전도를 받아서 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세상 이치와 지혜를 추구했던 헬라인들은 십자가 복음을 접하면 바울이 설명한 대로 아주 어리석다고 여겼습니다.(고전1:22,23) 누가도 처음에는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 당했다는 사실부터 말이 안 되고, 그 시신을 제자가 훔쳐서 숨기고는 부활했다는 거짓된 사설(邪說)을 퍼트리는 이단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선행이라곤 해보지 않은 극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라는 한 인물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길 외에는 모두가 지옥 심판을 받는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말도 안 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온갖 멸시 조롱 핍박도 견디며 죽음까지 불사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든 바울의 설교를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바울이 이전에 자기보다 더 심하게 예수님을 미워했고 그 신자들을 말살하려 했던 핍박자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교를 훼방하는 이단으로 몰아서 기독교 최초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주도했다는 고백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신앙관, 구원관,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이 이전과 정반대로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간증도 들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로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는 대속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구원 진리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며 어쩌면 눈물도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평소에 아주 이성적이었기에 그런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죄로 썩어져 가던 자기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충만해진 새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라고 바울이 확인해 주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데에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누가도 성령이 자신의 심령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방향과 모습으로 바꿔 주는 역사를 실제로 체험한 것입니다. 과학적인 사고를 지닌 그로선 그 후로도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혹시라도 악한 영의 작동이거나 사도들의 속임수가 아닌지 예의 주시하면서 분석해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관찰해봐도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바울의 사역을 곁에서 지켜볼수록 정말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부터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서 온갖 조롱 멸시 핍박이 따르는데도 항상 기쁜 마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시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는 사십 명의 유대인 결사대가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하도록, 신기하게도 죄수가 된 그를 로마의 군병이 경호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바울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어도 의사인 자기를 통해서 속히 회복시키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현장에 없어도 그가 사용한 수건이나 앞치마를 아픈 사람이나 악귀가 들린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행19:11-12) 누가는 바울의 사역에 줄곧 동참하면서 예수 십자가 복음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는 것이 바울 자신의 우월한 도덕성 종교성 영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온전히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사 누가는, 바울이 예수의 극렬한 핍박자에서 열렬한 옹호자로 바뀌었듯이, 성령을 최고로 의심하던 자에서 최고로 잘 아는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을 성령의 역사라고 강조했던, 아니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한 다윗
누가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스토리도 너무 궁금해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직접 만나서 그 경위를 자세히 따지며 물었을 것입니다. 자기처럼 이방인이자 지식인인 데오빌로 각하도 복음의 출발부터 온전히 믿도록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에게서 들은 내용은 바울 같은 사도가 행한 치유나 이적이나 복음 전파 사역과는 달리 제 삼자가 검증할 수 있는 외적 증거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태아 요한이 태중의 주 예수를 만나 기쁘게 찬양 했다는 것은, 두 여자가 서로 모의해서 입을 맞췄다고 비난해도 반박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방인 고넬료와 유대인으로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성령을 통해 동시에 계시받았던 사건을(행10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확실한 외적인 증거가 없이 두 사람 사이에만 성령이 역사했었던 일입니다. 누가는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칭송한 말도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히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더 나아가 다윗이 엘리사벳과 동일한 차원의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했으므로 내 주와 여호와는 별개 인물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라서 이스라엘에 자기보다 더 높은 신분의 사람이 없는데도 ‘내 주’라고 불렀습니다. 또 그 주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으므로 하나님과 동격인 존재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의 원수들을 무찌른다면 내 주는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이 구절을 들어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믿었는데, 육신적으로는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러나 천 년 전의 사람인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 칭하였으니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유대인들을 다그쳤습니다. 너희가 가장 존경하고 또 너희처럼 유일신 여호와만 믿었던 다윗이 메시아인 당신을 내 주라고, 즉 하나님이라고 이미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눅20:41-44) 다윗이 예수님과 십자가 구원 진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아니 상상도 못했던 천년 전에 예수님을 자기 주라고 고백한 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를 아예 몰랐던 다윗이 그랬다면, 지금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중에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대면하고 있는 상태에서 엘리사벳은 더 쉽게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더 나아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는 축복의 말까지 했습니다. 인간에게 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직무입니다. 인간이 남을 축복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소원한다는 기도문의 양식이어야 하는데,지금 엘리사벳은 “복이 있도다”라는 서술형으로 확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녀의 입을 통해서 대언된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마리아가 믿었다고 했으므로, 엘리사벳이 자기 아들 요한이 맡을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고지 받은 아기 예수에게 관련 된 일입니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점일획도 차질 없이 완벽하게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물론이고 그 아기가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 인류를 거룩하게 다스리는 영원한 왕이 된다는 사실을 마리아가 온전히 믿은 것입니다.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령은 지금 마리아에게도 충만히 임해서 구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그 전에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서 수태 고지를 받을 때 순종하겠다고 고백한 것이 그녀의 순수한 진심이었고 또 그 고백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다는 사실을, 엘리사벳을 통해서 마리아더러 알게 해준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는가?
본문의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공연하는 성극처럼 접해선 안 됩니다. 엘리사벳은 물론이고 다윗과 바울과 누가도 그 성정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으며, 성령이 태아 요한에게까지 충만히 임했다면, 우리라고 그러지 못한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의해 불려 나와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졌기에, 성령의 신묘한 역사가 우리의 현실 삶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토록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고 계십니다. 특별히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일을 하면서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아주 기뻐하시고 소원하십니다. 그 중에 성령 하나님은 신자에게 내주해서 그렇게 되는 모습과 방향으로 신자의 일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복음 전파의 사명에 헌신하는 신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땅끝까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함께 해주신다는 약속이 바로 성령이 내주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주님의 그 명령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신자를 보호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데, 하나님이라는 실체적 존재가 신자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로 함께 하시며,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방언 기도를 하게 하거나, 장래 일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거나, 신자의 수호신 역할만 한다는 정도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모든 신자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지막으로 선언했듯이 그 말씀을 믿는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여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은 이뤄집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성령이 실제로 한 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심을 온전히 믿어야, 아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성령이 태아 요한의 감정과 생각까지 엄마 엘리사벳에게 알게 해주었습니다. 바꿔 말해서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력하고도 기묘한 기운이나 힘이 아니라,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신자의 지정의라는 경로를 사용해서 당신의 뜻을 엘리사벳처럼 알게 해주십니다.
성령에 관한 이런 진리를 아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되고 성령님과 함께 각자가 맡은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심령을 움직이고, 또 우리 주변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당신의 권능으로 주관하셔서, 우리더러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도록 하는 구체적인 과정과 방식은 알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라 절대로 강제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분에게 마음을 열고서 모든 것을 내어드릴 때만 역사하십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하나님 그분은 언제나 인간을 인간답게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십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온전히 믿고서 기꺼이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큰 일이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당장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지 못해도 됩니다. 어떤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도 성령님과의 교통은 일어납니다. 당장 기도하는 제목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성령이 신자에게 내면의 미세한 음성으로 깨우쳐 주십니다. 또 모든 어려움에서 구함을 받고 나면, 아니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이 아니고는 실현할 수 없는 신묘한 은혜가 고난 중에도 있었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믿지도 못했고, 다윗처럼 내 주라고 시인 고백도 못했습니다. 감히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본문의 경우처럼 사전에 서로 사정을 이야기 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기도로 혹은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의 동일한 계시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간증할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심으로써, 성령 하나님만 이땅에 남아계신 것은 오직 한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한 죄인을 예수님을 ‘내 주’라고 고백하게 만들고, 또 그렇게 고백한 자도 기꺼이 다른 이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서, 동일한 고백을 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모인 교회에 덕을 세우라고 성령은 신자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사를 나눠 주시고, 또 그 은사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뤄 나가십니다. 바꿔 말해 자기가 받은 은사를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사용하는 신자에게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혹시 자기 의지로 믿음을 성숙시키고 자기 담력과 용기로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믿음 생활의 차원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우리 안에 실재하고 있는 성령님에게 자기 마음을 활짝 열고서 내어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완악한 생각과 고집으로 성령의 거룩한 역사를 막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처럼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성령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접근 분별하셔야 합니다. 바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인도에 자기 전부를 바쳐야 합니다. 성령 역사를 막지 않는 것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성령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신자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믿음입니다.
(10/19/2025) 박진호 목사
=====================================================
얘수코리아 카페에서 알려드리는 글입니다
도움을 주셔야만 문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지기는 아주 어렵게
지냅니다 투병중에 생활고로 어렵습니다
도와주신 분들께 박경옥 전도사가 하루 두번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다
먹을것도 없습니다 한 분이라도 도와주셔서...
용기릏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이 없다 보니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못삽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카페후원계좌-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