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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7회 2016.4.19.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6년 4월 19일(화,오후 1시 15분~ )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제7장
사념처(四念處) 수행
2.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身念處]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선 마음이 가장 두드러진 대상인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부터 시작합니다. 몸에서 알아차릴 대상은 모두 열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은 들숨과 날숨, 네 가지 자세[行住坐臥], 분명한 앎[正知],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 네 가지 요소[四大],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입니다. 하지만 이런 수행을 한꺼번에 모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적합하고, 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하면 됩니다.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은 현재 할 수 없는 수행입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여러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몸은 변하므로 무상하고 몸이 있는 한 괴로움이 있고,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이익입니다. 이런 지혜가 날 때 비로소 집착을 여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차적인 목표는 몸을 통하여 마음을 길들이는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마음이 호흡을 겨냥하지 않으면 마음은 끊임없이 과거나 미래로 가서 후회와 근심걱정과 두려움을 만듭니다. 이런 마음을 순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때는 오직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몸에서는 오직 몸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의 몸은 물질을 의미합니다. 사념처 수행에서만 몸이라고 하며 다른 경우에는 몸을 모두 물질로 봅니다. 몸을 하나의 물질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대상을 객관화해서 보는 이성적인 시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몸이라는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해 영원히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다음은 몸을 알아차릴 때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입니다.
첫째, 몸을 알아차릴 때 다른 대상과 섞이지 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오직 몸만 알아차려야지 망상을 하거나 다른 대상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몸이 아닌 것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다른 대상과 섞이지 않게 알아차려야 고요함이 생겨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몸을 알아차릴 때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많은 물질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러한 장기들을 모아서 하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수많은 장기들의 결합으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때 몸은 이러한 결합물을 부르기 위한 명칭입니다.
셋째, 몸을 알아차릴 때 단지 몸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몸을 ‘나’라고 하거나 나의 소유라고 알아서는 안 됩니다. 몸은 하나의 물질적 대상에 불과하며 마음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일 뿐입니다.
넷째, 몸을 알아차릴 때 몸에 있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무상입니다. 몸을 바르게 알아차리면 마지막에 몸이 항상 변한다는 무상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은 항상 하지 않고 무상하다고 알아차려야 하며,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하며, 자아가 아니고
무아라고 알아차려야 하며, 깨끗하지 않고 더러움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탐욕으로 보지 않고 탐욕 없이 알아차려야 하며, 일어나지 않게 하고 소멸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움켜쥐려고 하지 않고 완전하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몸에서 몸을 알아차려야 할 내용입니다.
1) 호흡의 알아차림
(1) 대념처경의 들숨과 날숨의 알아차림
몸에서 알아차릴 대상은 모두 열네 가지이지만 이 중에 몸의 호흡을 모든 수행자들이 주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립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하나이지만 위치에 따라서 다르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역대의 모든 붓다나 벽지불, 아라한 및 수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물론 호흡 하나만 알아차린 것은 아니지만 호흡을 주 대상으로 삼아서 모두 도과를 성취했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평생 호흡이 있기 때문에 호흡은 알아차리기에 가장 좋은 대상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호흡을 하다가 마지막 호흡이 끝나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호흡은 생존의 가장 기본 요소입니다. 이런 호흡은 나의 호흡이 아닙니다. 만약 나의 호흡이라면 내가 숨을 거둘 때 호흡이 멈추지 않도록 지시해서 멈추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호흡이 사라질 조건이 되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멈추고 맙니다. 이런 호흡에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은 생명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흡은 마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마음에 따라 호흡도 다양하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호흡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들숨과 날숨의 알아차림은 대념처경에 있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방법입니다. 다음 대념처경의 ‘들숨과 날숨의 알아차림’을 통하여 호흡을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숲 속이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앉아, 전면에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리고 그는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나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나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그의 제자가 물레를 길게 돌릴 때, 나는 길게 돌린다고 알아차리고, 짧게 돌릴 때, 나는 짧게 돌린다고 알아차리는 것처럼.
바로 이와 같이 비구는 숨을 길게 들이쉴 때, 나는 숨을 길게 들이 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그는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그는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이상이 들숨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경전 내용입니다. 지금부터 이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라는 호칭은 비구, 비구니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자를 부르는 명칭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다음에 “전면에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리고 그는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의 ‘전면에서’는 빨리어로 빠리무캉(parimukhaṃ)이라고 합니다. 빠리무캉은 ‘전면에서’ 또는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경전에 있는 들숨과 날숨은 코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고, 전면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전면은 몸이 아닌 앞에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려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실천하기 쉽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호흡을 몸에서도 알아차리지만 집중력이 생기면 전면에서도 알아차립니다. 이때의 전면을 마음자리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대상도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할 때 아는 마음을 전면에 두면 자연스럽게 호흡을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을 호흡에 겨냥하고 겨냥한 마음을 지속시켜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집중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오랜 기간 동안 산만한 상태로 들떠 있어서 하나의 대상에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명상 주제를 만들어 거기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수행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농부가 거친 소를 길들일 때 소에 고삐를 매어 말뚝에 묶어두면 소가 이리저리 날뛰지 않고 말뚝 가까이에 서 있거나 누워 있게 됩니다. 이것처럼 오랜 세월동안 온갖 일로 정처 없이 방황하는 마음을 호흡에 묶어두면 마음이 순한 소처럼 길들여져서 청정하게 됩니다. 마음이 호흡을 자신이 머무는 거처로 사용할 때 집중력이 생기고 알아차림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호흡보다 더 좋은 피난처는 없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어떤 번뇌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호흡을 알아차리는 여러 가지 이익 중의 하나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호흡은 코에서는 들숨과 날숨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가슴이나 배나 전면에서는 일어나고 꺼짐으로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호흡은 반드시 들숨과 날숨의 과정이 있으며, 일어남과 사라짐의 과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어남은 원인이고 사라짐은 결과입니다.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새로운 일어남과 사라짐이 거듭됩니다. 이렇게 하나의 호흡을 두 가지의 단위로 나누어서 알아차리면 호흡의 변화를 통하여 무상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매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이 같은 호흡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같은 호흡이라고 생각할 경우에 즉시 싫증이 나서 마음이 호흡에 머물지 않고 달아납니다. 그래서 이런 변화를 통하여 같은 호흡이 아니고 매번 새로운 호흡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지금 살고 있는 현재까지 무수한 호흡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흡은 모두 같은 호흡이 아닙니다. 시간도 같지 않고 호흡의 특성도 같지 않습니다. 마음의 변화만큼 호흡도 각양각색입니다. 인류의 모습이 모두 다른 것처럼 매순간의 호흡도 서로 다릅니다. 넓은 바다위에서 일렁거리는 무수한 파도의 모양이 하나도 같지 않듯이 자신의 호흡도 매순간 다릅니다. 이렇게 다르다고 알 때 무상을 알며 흥미를 느껴 수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나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나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호흡은 항상 일정하지 않습니다. 호흡을 자세하게 알아차리면 긴 호흡이 있을 때도 있고 짧은 호흡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에서 일어남이 길고 꺼짐이 짧을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일어남이 짧고 꺼짐이 길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나 호흡의 길이가 다를 때는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길게 들이 쉬는 것이나 짧게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 인위적으로 길게 하거나 짧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어떤 호흡도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만들어서 하면 안 됩니다. 만약 대상에 개입하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매순간의 호흡마다 서로 다른 특징들이 있습니다. 호흡은 일어남과 꺼짐이 있고, 길고 짧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약함이 있습니다. 코의 들숨과 날숨에서는 들어갈 때 차가운 바람이 있고 나올 때 따뜻한 바람이 있습니다. 또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밀고 당김이 있고, 부풀었다가 사라짐이 있고, 팽창과 수축이 있고, 가벼움과 무거움이 있습니다. 빠르고 느림도 있습니다. 이처럼 호흡은 여러 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이러한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호흡과 호흡 사이에는 짧은 사이 숨도 있습니다. 사실 호흡은 풍대의 요소로서 바람이 부풀었다가 꺼지는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다양한 호흡을 알아차리면 매번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이 결코 같은 호흡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싫증나지 않고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게 되면 나중에 무상을 보는 지혜가 납니다. 누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알아차리면 이러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어 흥미를 느끼면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집중이 되어 처음에 알아차리기 힘들던 호흡이 매우 크게 느껴져서 대상을 더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 온몸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 온몸이라고 하는 것의 빨리어 뜻은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차리는 것을 뜻합니다.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습니다. 호흡이 일어남은 시작이고 호흡의 중간은 일어남과 꺼짐 사이에 있는 짧은 쉼이 있는데 이것이 중간입니다. 그리고 끝은 꺼짐입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 일어나서 다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호흡의 일어남 하나에도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습니다. 호흡의 일어남 하나에도 속도와 강약과 바람의 요소가 각기 다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꺼짐 하나에도 속도와 강약과 바람의 요소가 각기 다른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집중력이 생기면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확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차릴 때 강력한 집중력이 생겨 통찰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는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하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숨을 들이쉴 것이라는 것의 빨리어 뜻은 호흡을 인위적으로 만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숨을 들이 쉴 것이라고” 했을 때는 미래의 시제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길고 짧은 호흡을 알아차리느라고 그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제 호흡을 더 정확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차릴 수 있어 더욱 밀밀하게 호흡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지면서”라는 구절은 이렇게 하도록 수련을 한다는 뜻입니다. 수련이란 단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약을 하면 호흡을 꾸밈이 없도록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라고 수련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호흡을 할 때 꾸밈이 없도록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만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에 개입하면 대상의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그리고 호흡을 만들어서 하면 나중에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피곤해서 수행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호흡을 만들어서 하면 몸의 리듬이 깨질 뿐만 아니라 나중에 극도의 피로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반드시 인위적인 호흡을 피해야 합니다. 인위적이라는 것은 호흡을 스스로 조절하려고 개입한 것임으로 욕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자연스런 호흡을 하면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연스런 호흡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말합니다. 이때 자연스럽다는 것은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호흡의 조건은 먼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몸이 없고 몸이 없으면 호흡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렇게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 이것을 일으키는 자아가 있어서 호흡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이러한 조건에 의해 호흡이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호흡도 나의 호흡이 아닙니다.
분노로 인해 거친 호흡이 일어났을 때도 개입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려야 합니다. 고요함으로 인해 미세한 호흡이 일어났을 때도 개입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려야 합니다. 모든 것들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나고 사라질 만해서 사라집니다. 수행자는 단지 이러한 현상의 성품을 보아 사물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기존의 알아차림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을 요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고요해지기 시작하여 호흡이 미세해집니다. 이때 호흡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호흡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호흡이 미세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력이 생겼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호흡이 소멸해가는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거친 호흡이 중간 호흡으로, 다시 중간 호흡이 미세한 호흡으로 바뀌는 과정은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집중력이 생기면 먼저 몸의 느낌이 사라집니다. 다음에는 몸의 호흡이 사라집니다. 이때 호흡이 정지되는 것이 아니고 미세해져서 감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몸의 느낌이 완전하게 소멸한 상태가 됩니다. 몸의 느낌이 소멸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이때 마음이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의 아는 마음을 앎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이 마음조차도 소멸하면 열반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미세한 호흡은 이러한 과정에 진입하는 하나의 관문입니다. 그래서 더 주의를 기울여서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의 목표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번뇌가 불타서 소멸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멸이 바로 수행을 하면서 몸의 느낌의 소멸과 호흡의 소멸로 나타나고 결국에는 마음의 소멸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 소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소멸했다는 것은 내가 소멸한 것입니다. 내가 소멸했으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자연스럽게 소멸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친 대상을 조건 없이 알아차려야 하고 차츰 미세한 대상이 나타나면 더욱 노력해서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집중력이 생기면 알아차릴 대상이 더욱 분명해져서 알아차리기가 편합니다. 그러나 유독 호흡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집중력이 생기면 온통 호흡밖에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가 차츰 호흡이 미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알아차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 차츰 호흡이 사라지는 단계가 옵니다. 물론 호흡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너무 미세해서 감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때 호흡이 미세한 상태 그대로 알아차려야지 미세하기 때문에 거칠게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바로 미세한 호흡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해서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면밀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약 호흡이 미세해지거나 사라졌을 때는 현재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호흡을 새로 일으키거나 사라진 호흡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불문율 중의 하나가 사라진 것은 찾지 않는 것입니다. 사라진 것을 찾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라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사라졌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해서 의식이 고양된 상태인데 다시 사라진 것을 찾으면 과거의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는 과거가 없습니다. 지나온 날이 어떠하든 그것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이며 알아차릴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사라진 것을 찾으면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는 소멸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수행의 진전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에서뿐만 아니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항입니다.
수행자가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다음 네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이 지속되는 기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미세해진 호흡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호흡이 미세해서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때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바꾸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호흡은 항상 일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 대념처경에서 밝힌 호흡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요약하면 첫째, 숨을 들이 쉴 때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내쉴 때 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숨을 길게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숨을 길게 내쉬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셋째, 숨을 짧게 들이 쉴 때는 짧게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숨을 짧게 내쉴 때는 짧게 내쉬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기본 알아차림으로 하면서 호흡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알아차리도록 노력하고 꾸밈이 없이 자연스러운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지금부터 계속되는 경전구절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뿐만 아니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다음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그는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그는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다른 대상이 아닌 오직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수행자가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그리고 몸의 밖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다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라는 말은 알아차릴 대상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대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알아차릴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념처경에서는 모든 대상을 알아차릴 때 일관되게 ‘안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고, 밖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고, 안팎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는 수행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안을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자가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음에 밖을 알아차리는 것은 감각대상에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특정한 상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의 상황에 처했을 때도 모두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상의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모든 경우를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어 바르게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대상을 볼 때는 눈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안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이는 대상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밖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을 귀에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안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음에 들리는 소리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밖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로 소리를 듣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른 감각기관과 감각대상도 이와 마찬가지로 알아차립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하여 일어나는 여섯 가지 아는 마음으로 삽니다. 이것을 일체, 전부,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인간에게 실재하는 것은 이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붓다께서 전부를 안다고 말씀하실 때의 범주가 바로 이상 세 가지의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12처입니다. 다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포함된 것이 18계입니다. 인간의 18계가 실재하는 세계이므로 수행자의 대상은 18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18계는 불교의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수행의 대상이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과정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과 대비해보면 ‘수행자가 호흡을 알아차릴 때 호흡을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리고, 혹은 감각대상인 다른 사람의 호흡을 알아차리고, 혹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호흡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는 자신의 코, 가슴, 배, 전면 이렇게 호흡이 일어나는 곳에서 자유롭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 감각대상에서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타인의 호흡을 직접 쳐다보고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호흡이 들숨과 날숨이 있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호흡도 이렇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다른 사람의 호흡을 지켜볼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대상인 밖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을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라고 하거나 ‘앎’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수행을 할 때는 호흡이 대상이지만 몸이 아닌 호흡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심념처 수행이 됩니다.
그러나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에 관해서 다른 주석서에서 앞서 밝힌 것과 다르게 설명합니다. 안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밖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의 호흡처럼 다른 사람의 호흡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의 호흡과 다른 사람의 호흡이 있다는 것을 차례로 왔다 갔다 하면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안팎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안과 밖을 차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가지를 동시에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수행자가 필요에 따라서 이런 방법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주석서에서 밝히는 내용은 수행자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므로 근기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큰 틀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바른 틀 안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밝힌 안팎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에게 가능한 방법이므로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다른 주석서에서 말하는 차례로 안팎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가 집중력이 생기면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수행의 완성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호흡을 알아차릴 때 안을 알아차리는 것은 호흡이 일어나는 몸의 안쪽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알거나, 밖을 알아차리는 것은 호흡이 일어나는 몸의 표면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알거나, 안팎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알아차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 밖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려야지 남의 호흡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남의 호흡을 알아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호흡을 안과 밖과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단지 호흡에만 국한된 것만이 아닌 다른 모든 대상을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흡 하나만 놓고 볼 때는 안과 밖과 안팎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몸과 마음에 있는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안과 밖과 안팎에 대한 알아차림은 호흡 하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은 먼저 자신의 감각기관입니다. 마음이 처음부터 감각대상에 나가면 내가 본다는 견해로 보거나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감각기관에서만 알아차리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누가 자신에게 말을 할 때는 마음이 감각대상인 상대에게 마음을 기울여서 들어야 합니다. 만약 이때 상대가 말을 해도 자신의 감각기관에서만 듣는다면 상대가 말하는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밖에 있는 상대에게로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다가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차리고자 할 때는 안팎을 알아차리는 방법으로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자가 혼자서 좌선을 하거나 경행을 하거나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때는 당연히 안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상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는 밖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더욱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안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관하여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저만 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문제 삼아 상좌불교 수행자들은 저만 안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붓다 이래로 모든 수행자들이 도과를 얻는 과정에서 실천되어온 방법입니다. 만약 이런 오해가 있다면 사념처 수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먼저 안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의 감각기관을 알아차리는 순서일 뿐이지 항상 자신만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수행자나 결코 자기만 알지는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붓다와 모든 아라한입니다. 그분들은 모두 남을 위해서 사신 분들입니다. 만약 자신만 안다면 분명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나만 있고 상대가 없다면 결코 수행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단지 알아차리는 순서를 먼저 자신으로 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먼저 알아차리지 않고서는 수행이 아무런 진전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남의 문제부터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놔두고 먼저 남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이끄는 것은 자신입니다. 이런 자신부터 정화가 되어야 다음 단계로 남에 대해서도 관용과 사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감각기관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감각대상을 알아차리고 마지막으로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수행이 완성됩니다. 단지 자신의 감각기관을 알아차려서 이해하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 되며, 또 다른 사람을 감각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상을 알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수행의 완성도가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하다고 판단되면 나의 마음처럼 상대의 마음도 이러하다고 판단하게 되어 관용이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선한 마음과 지혜에 의해서 궁극의 열반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다음 경전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라는 내용입니다.
경전의 이 구절도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에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고 모든 대상을 알아차릴 때 똑같이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내용도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몇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어나는 현상과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며 지낸다는 뜻은 호흡이 몸에서 어떤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은 세 가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호흡은 먼저 몸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콧구멍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호흡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호흡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호흡입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호흡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생긴다고 이해할 때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와 무아를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러므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몸, 콧구멍, 마음이란 세 가지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에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며 지낸다는 뜻은 일어나는 현상을 조건 짓는 것의 반대가 됩니다. 몸이 없어도 호흡이 없고, 콧구멍이 없어도 호흡이 없고, 마음이 없어도 호흡이 없습니다. 일어남은 일어남의 조건이 있습니다. 사라짐은 사라짐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콧구멍과 마음이 있는 한 호흡은 일어나서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몸과 콧구멍과 마음이 없는 한 호흡은 사라져서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태어날 조건에 의해서 태어난 것은 태어날 조건이 사라지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여기서 몸에서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조건을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거나 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가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지혜가 나서 이런 조건들을 알게 되는 때가옵니다. 그렇지 않고 호흡의 조건을 사유로 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둘째, 먼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과 다음에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과 마지막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은 단계적 과정을 통하여 몸의 특성인 무상을 알기 위한 지혜의 계발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비단 호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대상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으로 오직 대상이 가지고 있는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과정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일어남 꺼짐의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무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호흡의 전 과정을 알아차리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초보수행자는 호흡을 몇 번 알아차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대상의 일어남 하나를 알아차립니다. 아직 알아차리는 힘이 없을 때는 대상의 절반만 알아차리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초보수행자는 아직 집중력이 생기지 않아 대상을 알아차리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약간의 집중력이 생기면 다음에는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이때도 대상의 절반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힘들면 알아차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일하는 마음을 배려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정기간 사라짐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다 집중의 힘이 생기면 이제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전 과정을 밀밀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자연스럽게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무상의 지혜가 성숙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호흡 하나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인 무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이용하여 호흡을 알아차린다면 다음과 같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호흡의 ‘일어남’ 하나를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었을 때 다음 단계로 호흡의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좀 더 집중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일어남 사라짐’의 전 과정을 알아차립니다. 이처럼 단계적 과정을 통해서 알아차리는 영역을 확대해 나가면 호흡을 더욱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 ‘일어남’을 다음에 ‘사라짐’을 그리고 마지막에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세 단계로 분류한 것에서 수행자들의 근기를 배려한 붓다의 자애로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림으로써 자연스럽게 무상의 지혜가 나도록 한 것도 위대하신 스승의 큰 뜻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라는 구절입니다. 이때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라는 뜻은 호흡을 하는 몸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호흡에는 하나의 절(節, section)이 있는데 이것이 호흡의 일어남, 꺼짐입니다. 그러므로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막연하게 알아차리지 말고 일어남의 과정과 꺼짐의 두 과정으로 분명하게 나누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라는 구절은 몸에 있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오직 호흡하는 몸만 있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이것이 나의 호흡이라거나, 남자의 호흡이라거나, 여자의 호흡이라거나, 호흡을 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알면 안 됩니다. 오직 호흡이라는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만 있어야 하는 것을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라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에서 몸의 현상은 앞서 밝힌 것처럼 호흡이 일어나는 조건들을 말합니다. 호흡은 이러한 조건에 의해 일어났을 뿐이지 이것이 나의 호흡이라거나, 나의 소유라거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호흡이 아닌 것을 아는 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정한 과정을 거쳐 지혜가 성숙됩니다. 지혜는 처음에 시작 단계의 과정에서 차츰 더 높은 단계의 과정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차츰 더 높은 지혜를 단계적으로 얻게 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단지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면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니고, 나의 호흡이 아니며, 이 호흡을 내가 소유하지 못하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아는 지혜가 납니다. 여기에는 영혼도 없고 오직 조건 지어진 몸과 이것을 아는 순간적인 마음만 있다는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해서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가 성숙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호흡 하나에서 이처럼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가 성숙하는 과정에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때 완전한 지혜를 향해서 갈 수 있습니다.
다음에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호흡은 단지 물질적 정신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호흡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계속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그 과정에서 일곱 가지의 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성숙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도 더 성숙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변하는 것밖에 없으며, 집착으로 인해 만족할 수 없어 괴로우며, 이것을 소유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도 사라지고, 존재에 대한 갈애도 사라지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삿된 견해인 유신견과 상견과 단견도 함께 소멸합니다. 이 호흡도 나의 호흡이 아니고 조건 지어진 호흡이라고 알면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호흡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호흡을 일으킬 조건이 사라지면 호흡도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상견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호흡을 일으킬 조건이 계속되면 호흡이 계속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단견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사물의 바른 이치를 알 때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내게 됩니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의 세상은 세간을 말합니다. 세간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때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인 오온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다섯 가지 물질과 정신의 무더기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을 오온(五蘊)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단지 조건에 의해 모여서 각각의 역할을 할 뿐 여기에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의 지혜가 나면 몸과 마음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오온을 집착하면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되지만 오온을 집착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원인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해탈이고 윤회의 끝입니다. 오온이 오취온(五取蘊)이 되지 않는 것이 궁극의 깨달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앞서 밝힌 것처럼 몸을 알아차릴 때 몸 외에는 다른 대상을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과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몸을 알아차릴 때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몸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사념처 수행에서만 몸이라고 할 뿐 나머지 경우는 몸을 물질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알아차릴 때는 하나의 물질의 영역으로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은 정신의 영역입니다.
이상이 대념처경에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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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법문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귀한법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