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포켓몬 고
공교롭게도 올 여름 한국영화계를 들썩이게 하는 두 편의 영화-『곡성』, 『부산행』-가 좀비영화다. 동양적 전통의 맥락을 지닌 『여고괴담』 시리즈 같은 귀신물도 아닌 서양적 좀비의 등장이 내게는 단절의 충격과 현대사회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럴 즈음 전 세계에 광풍을 몰고 온 ‘포켓몬 고’라는 게임을 하기 위해 속초에서는 웅성웅성 뛰어다니고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이들이 현실에 나타난 좀비로 보였다. 그렇다. 좀비가 우리 사회 나아가 현대 사회 주체 상실의 실존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는 반영물로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는 벌써부터 자본의 좀비, 소비의 좀비였던 것이다. 이 글은 주체를 상실한 좀비적 존재가 되어버린 현대인과 체제에 대한 짧은 성찰을 담고 있다.
좀비의 성격을 보자. 좀비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주체가 없이 조정 받는 살아 있으되 죽은 시체다. 좀비가 우리를 당혹케 하는 점은 이렇게 이해를 차단하는 철저한 모순성에 있다. 즉 살아 움직이지만 죽은, 아니 죽었으되 죽지 못하는 존재다. 주체가 없으므로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절대적 폭력이며, 정신이 완전히 부재한 피와 고름 따위로 범벅이 된 과잉 물질적 존재다. 좀비는 이렇게 모순과 불가능의 현현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좀비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일상과 정상을 마비시킨다. 몰개성의 주체 없음과 과잉 행동의 맹목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정상사회를 덮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보이지 않는 조정자야말로 좀비가 지닌 불가항력적 폭력성의 열쇠를 쥐고 있다.
좀비와 귀신의 차이는 명확하다. 귀신은 주체가 있다. 맥락과 동기가 선명하다. 한이 맺혔으므로 복수를 해서 한을 풀려는 이성과 욕망을 지닌 주체가 곧 귀신이다. 즉 귀신은 전통과 근대의 자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좀비는 자아가 없다. 주체와 맥락이 생략됨으로써 이성적 납득과 설명도 불가능하다. 소통불능 이해불능의 공포가 우리를 압도하는 것이다. 좀비와 귀신은 그렇게 이질적이다. 귀신이 전제적 개인의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희생된) 개인이라면, 좀비는 절대적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작동하는) 군중이다. 좀비는 시스템 바이러스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고 소멸한다. 그것의 목적은 개인의 주체와 삶을 빼앗은 폭력성일 뿐이다. 그것의 공포는 이런 감염성에 있다. 시스템 안에서 좀비는 이유 불문하고 저와 같은 좀비를 만들 뿐이다. 우리는 귀신에게 묻는 왜를 좀비에게 묻지 못한다. 질문이 불가능하므로 정답도 없다. 이것은 좀비의 언어 곧 침묵과 괴성으로 나타난다. 오직 걸신의 식욕과 공격본능만이 작동한다. 하지만 좀비의 행동은 역시 조정되는 저돌적 수동성일 뿐이다.
앞에서 나는 귀신과 좀비가 근대사회와 현대사회의 단절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근대가 가부장제 권력의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피라미드 사회였다면, 현대사회는 권력의 기관들이 절대적 매트릭스로 진화한 시스템사회다. 근대는 주체적 개인이 존재하므로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현대는 주체가 사라진 시스템사회이므로 책임을 묻기 어렵다. 우리 시대의 불안과 공포는 이런 무책임성에서 피어난다. 근대사회에는 주체와 타자의 대립이 명확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주체가 사라지고 권력이 작동하는 시스템만 남았다. 주체가 없으므로 현대에는 근대와 달리 귀신 대신 좀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해가 차단된 좀비의 세상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좀비가 출현한 세상은 이미 페스트가 창궐한 고립도시처럼 극단의 절망과 공포의 게임공간으로 변해 있다. 우리는 결단의 상황에 처해 있다. 주체를 보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좀비의 무리가 될 것인가? 주체는 좀비의 먹이(희생)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한다. 바이러스처럼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좀비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없다. 닫혀 있는 절대시스템의 공포가 좀비 공포로 상기된다. 닫혀 있는 절대시스템 이것이 현대사회가 아닌가? 흡혈 거인족의 발생으로 인한 인류가 절멸의 위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도 현대사회에 내재한 공포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 세계자본주의사회의 전모를 파악하고 그것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단을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한 세대가 지나며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를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절대시스템으로 재편하였다. 이곳에서 주체적인 존재는 없다. 혁명의 담론도 실종됐다. 생산을 위해서든 소비를 위해서는 시스템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길이 되어버렸다.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로 재편된 세계시스템이 곧 좀비사회인 것이다. 가장 막강한 권력은 금융자본이나 다국적기업들이겠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신용게임을 하며 가상적으로 존재하며 전 세계의 돈을 흡혈하듯 빨아들일 뿐이다. 전제적 개인 대신 시스템과 법인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의 조종에 의해 전 세계 인민이 순식간에 좀비가 된 것이다. 하지만 팍스아메리카나의 세계질서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여기저기 출몰하는 좀비와 좀비의 희생자들도 막을 길이 없다.
‘포켓몬 고’는 대단히 폭력적인 게임이다. 가상의 전자정보가 현실의 구체적인 맥락을 순식간에 학살-삭제,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지살해에 의한 실존학살이다. 포켓몬 캐릭터들은 대단히 유치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지만 그것을 잡는 명령에 복종한 좀비가 된 참가자들은 부지런히 구글지도가 전송하는 지도 위를 달린다. 구글지도에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없다. 할머니도 강아지도 장애인도 자전거도 자동차도 거리의 장사치도 날아가는 새도 없다. 하지만 없는 게 아니다. 게임공간에서 삭제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만약 ‘포켓몬 고’를 하는 사람의 앞에 서 있다면 그 사람에 의해 우리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적 존재로 돌변한다. 공공공간과 실존들이 게임권력에 의해 완전히 전유되고 점령된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세계를 게임의 이름으로 천박하게 학살하는 일이다. 이토록 경박하고 조잡한 게임을 돈이 된다고 재미있다고 열광할 수 있을까? 사드를 배치하는 것 따위, 위안부 문제, 실업자 문제, 역사 문제 따위 온갖 넘치는 문제들은 돈과 재미 앞에 무의미해진다. 보드리야르가 예견했듯 가상이 현실을 압도했다.
그 전에 우리는 이미 좀비였다. 순도 100%의 순좀비가 아니더라도 시스템에 어찌할 수 없이 복종하는 한 90%의 불순좀비다. 좀비는 열심히 뛰지만 자신이 좀비인 걸 모른다. 생각해보라. 좀비가 뛰다가 갑자기 ‘우리가 왜 뛰고 있지?’ 반문하며 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좀비인가? 최소한의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좀비세계의 비극성은 좀비세계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악몽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꿈처럼. 단지 게임일 뿐이라고? 아니다. 감성의 학살이다. 공공의 학살이다. 이성의 마비이다. 원래 학살엔 소리가 없다. 좀비는 뛴다. 오직 돈으로 환산 가능한 열량(에너지)을 사용한다. 하지만 뛰지 마라. 포켓몬이라는 도깨비에 홀리지 마라. 대신 누가 왜 이 게임을 현실에 던졌는지 되물어 봐라. 돈의 지배가 보인다. 전자정보와 인터넷망은 철저히 숫자로 변해 돈으로 계산된다. 세계자본시스템의 게임프로그램 안에서 좀비는 꿈에서 깨어나기 어렵다. 악몽도 꿈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첫댓글 예..!!! 좀비가 되지않기위해서~ 인간으로 태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왜 뛰고 있지?’ 반문하며 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