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9월13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수원] 빵과 포도주는 십자가 희생의 상징 -
수원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민수 21, 4ㄴ - 9
† 복음 : 요한 3, 13 - 17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 이스라엘 백성은 고달픈 광야 생활에 지친 나머지 이집트의
종살이를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불평한다. 주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시자 백성은 살려 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한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자 뱀에 물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살아난다(제1독서).
★ 성경에서 뱀은 죄와 죽음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보고 다시 살아났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너무 힘들어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시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 기도드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고 뱀에 물린 자는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이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당신은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을 상기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입니다.
‘들어 올린다’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도 있지만
‘부활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은총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의 끝인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께 부활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패배는 곧 하느님의 승리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은 궁극적으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잃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빵과 포도주는 십자가 희생의 상징
2012년 나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복음 : 요한 3,13-17
< 빵과 포도주는 십자가 희생의 상징 >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몰라서 복을 걷어찬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영국의 메리 여왕은 가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허름한
옷을 입고서 혼자 거리를 다니곤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정시찰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메리 여왕은 한 가게에 뛰어 들어가 우산을 좀 빌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다 찢어져 거의 못쓰게 된 우산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왕실의 마차가 그 가게 앞에 서더니 멋진 예복차림의
신하가 내려와 찢어진 우산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여왕 폐하께서 어제 우산을 잘 써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 찢어진 우산을 돌려줄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에 대해
사례를 하고픈 마음도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단지
찢어진 우산만 돌려받을 때 가게 주인은 ‘왜 좋은 우산을
주지 못했을까’하며 후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필라델피아에 있는 작은 한 호텔에 ‘도시 행사로
호텔마다 만원이라 묵을 곳이 없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노부부가 들어섰습니다. 이 호텔의 야간종업원은 ‘여기에도
객실이 없지만 제 방이라도 괜찮다면,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쓰십시오.’라고 친절히 자신의 방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종업원의 친절을 눈여겨본 노부부는 다음날 아침 자신을
소개했는데 그가 바로 1976년에 1천 9백개의 객실을 갖춘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경영인, 존 제이콥
아스터였습니다. 그는 작은 친절을 베푼 이 야간종업원을
아스토리아 호텔의 총지배인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의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에게 그 빵과 포도주가 필요해서일까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풀고 싶으시지만 그 은혜를 ‘정의롭고 합당하게’ 베풀고
싶어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바치는 정성이 빵과 포도주로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빵과 포도주는 오늘의 축일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자기봉헌을 의미하고, 신자들의 정성은 십일조와 봉헌으로
하느님께 평가됩니다.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바친 것처럼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빵과 포도주를 바치셨습니다. 이 빵과 포도주는
우리가 바치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곡식과
포도를 있는 그대로 바치지 않고 빵과 포도주를 만들어
바칩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땅에서 자란 곡식을 먼저 수확해야합니다.
땅은 자신 안에 뿌려진 씨앗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과 빛으로
곡식을 키워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씨를
성령으로 키워내어 그리스도란 열매를 맺어 세상에 내어주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성모님께서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바치신 것으로
상징됩니다. 그 분은 영혼은 인류구원을 위한 당신의 가장 귀한
아들의 봉헌으로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프셔야 했습니다.
수확했으면 빻아야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고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도록
당신 자아를 부수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없애고
빵의 형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순교복자회에서는 면형무아
(麵形無我)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밀가루로 빵을 만들 때 누룩과 같은 다른 불순물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는 죄를 상징하고 빵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밀떡에 누룩이나 다른 불순물을 넣지 않는 이유는
하느님께 바쳐지는 깨끗한 제물이신 당신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깨끗한 제물을 성령의 불로 달구어 당신은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에게는 생명을 주는 빵이 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63장에서는 멀리서 오신 메시아가 백성의 죄를 대신해
당신 자신을 포도로 비유하며 밟아서 온 포도즙이 자신에게
튀어 온 몸이 피로 물든 것처럼 되었다는 예언이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당신 자신 안에 인간의 모든 죄를 넣어서
죽임으로써 당신은 피를 흘리시지만 세상의 모든 죄를 함께
사라지게 만든 것의 상징이 포도주인 것입니다. 포도주는
또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혼인잔치를 성사시켜주는
성령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원한 혼인의 계약을 맺고 한 몸이 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우리에게서
나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인간의
축복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사건이 매일 미사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바쳐지며
하느님은 그 보답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과,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계약의 피를 우리에게 선물로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신비 안에서 우리는 위의 예화에서 우산을
빌려준 사람에 속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방을 내어준 사람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과연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있을 때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는지
성찰해봅시다. 성체를 영한다고 다 같은 은혜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카인과 아벨의 경우처럼 우리가 봉헌하는
정도에 따라 합당하게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합당하게 받으려면, 그 합당한 봉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은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온전한 자기봉헌에 비해 우리는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해 줍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사랑의 십자가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 3,13-17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6,14)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하지 못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
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
(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십자가!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신부 -
◈ [수도회] 십자가의 인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요한 3장 13-17절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십자가의 인간>
저희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에 대해 연구하면서 깜짝
놀란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으로 저희 후배들에게 보여준 표정은
언제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청소년들과 같이
뛰어노는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얼굴 이면에 엄청난 고통과 십자가, 순교자적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정말이지 큰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돈보스코 전기를 다 읽고 난 후 저는 돈보스코 성인에 대해서
확신 갖고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백색 순교자
돈보스코’, ‘십자가의 인간 돈보스코’
돈보스코가 한 평생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다양했고,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십자가는
집요하게도 돈보스코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두 살 때부터
아버지를 여의는 큰 십자가를 짊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뒤
계속된 극도의 가난, 그로 인한 성소 여정의 난관들...
뿐만 아닙니다. 사제가 되고 난 후 그가 의욕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은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시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교육부 장관, 심지어 소속
교구 주교님과 동료 사제들조차 돈보스코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수백 명의 가난한 청소년들이 기숙했던 오라토리오의
운영을 위해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내일 아이들의
아침꺼리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모든 사도직을 완수한
돈보스코, 사도 바오로 처럼 달릴 곳을 다 달린 돈보스코는
만년에 이르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가 지고 갔던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이런 고백이 나왔을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과업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가요?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가요?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면
솔직히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언제나 아이들과 뛰어놀고 아이들 사이에 굳건히
서계셨던 돈보스코였기에 그의 건강 상태는 늘 양호했고,
그의 체력은 강철체력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돈보스코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젊은 사제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각혈했습니다.
폐가 안좋았나 봅니다. 서품 2년차부터 눈병을 앓기 시작해서
결국 나중에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서품 5년차부터
심한 다리 부종으로 인해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심한 두통과 치통에 시달렸고,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불면증, 만성 소화불량, 가슴통증을 앓았습니다.
종창과 포진으로 고생했으며, 생애 마지막 15년간 주기적인
발열로 힘겨워했습니다. 한 프랑스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돈보스코의 몸은 ‘수선 불가능한 코트’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보스코는 불평 한 마디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처럼 열심히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씩 빠짐없이 고백성사를 집전했으며, 수시로
장거리 사목방문을 다녔습니다. 매일 밤늦도록 교회와 수도회를
위한 집필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병세에 대해 의사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영성생활의 진위여부는 이것입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인생의 힘든 경험,
즉 삶의 십자가 앞에 어떻게 처신하는가?’
돈보스코는 자신에게 다가온 숱한 십자가, 끔찍할정도로
무거운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졌습니다. 단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의연하고 당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의 인간 돈보스코의 인생을
한번 묵상해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마다 스스로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에게
외친 돈보스코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좋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십니다."
“큰 십자가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다 잘 풀릴 것입니다."
어부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인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지만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대구] 십자가, 오직 십자가만이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씀이신 분이 인간의 판결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산으로 죽음의 행렬을 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인간이 되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이를 당신한테로 초대하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당신한테 치유받고 가르침 받았던 사람들이
당신을 찌르고 모독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분이 이제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마지막 남은 피와 물마저 쏟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철저히 일치하신 분이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셨습니다. 당신을 찬양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는 당신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영광과 칭송을 찾아볼
수 없고, 온갖 고통과 수난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세상의 모든 불의를
겪으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고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당신이
그 값을 치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값을
치렀기에 인간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 구원에 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분과 일치할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그분의 영광에, 그분의 행복에 들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어리석음이나 수치로 여기지 않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 김명현 신부(대구가톨릭신학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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