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내 굴동굴현황
거운리
■ 용마굴, 용담
거운리에 사는 정씨(丁氏)네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3일 만에 시렁 위에 올라가서 병정놀이를 하는 등 보통아이와는 달랐다. 집안에서는 역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작두로 목을 잘라도, 큰 연자방아로 눌러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기장수에게 독한 술을 3일 동안 먹이고 잠이 든 후에 겨드랑이 밑에 있는 참새 날개만한 쭉지를 인두로 태워서 죽였다. 그 후 거운 다리 밑의 용마굴에서는 흰 백마가 나와서 만지 쪽으로 뻗은 백말등(산능성이)을 치달리며 3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은 강 건너 섭사에 있었는데, 1936년, 1972년, 1990년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아기장수의 무덤은 성황당 터 건너편에 있는데, 지금도 장수묘라고 부르고 있다.
■ 조청동굴
거운리 동남쪽인 섭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굴이다. 길이는 50m 정도, 입구는 30°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내부로 들어가면 3개의 굴로 나누어진다. 동굴 중간에는 물과 종유석이 있으며, 예전에 난리가 나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박쥐와 같은 새들이 많았으므로 '조청동굴'이라 한다.
덕포리
■ 용마굴(龍馬窟)
상리(上里)앞의 삼옥교 밑에 있다. 석항천이 용마암의 기암괴석을 관통하여, 그 사이로 맑고 푸른 물이 흐르므로 여름한철 어린이들의 물놀이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하송리 엄씨 문중에서 아기 장사가 태어나 며칠 만에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시렁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자는 등 집안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엄씨 집안에서 장사가 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나라에서는 이 아기장사가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 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이에 포졸들이 와서 칼로 찌르고 커다란 연자방아를 올려놓아도 결국은 죽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장사는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님 제가 때를 잘못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쌀 서말로 술을 만들어 그것을 저에게 목이면 깊은 잠에 빠질 것입니다. 그때 겨드랑이 밑에 있는 날개를 없애 버리면 저는 힘을 못쓰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날밤, 부모는 눈물을 흘리면서 인두로 날개를 태워버리자 이 아기 장사는 죽었으며 지금도 그 무덤이 하송 1리 노인정(은행나무 서쪽) 뒤에 있다. 이 아기 장사가 죽자 덕포리 용마굴에서는 바위를 뚫고 나온 용마가 주인을 찾으며 사흘동안 밤낮을 울었으며, 합수거리에서도 장사의 칼이 윙윙거리며 울어대는 소리가 영월 전역에 퍼졌다고 한다. 이때 주인을 찾지 못하고 죽은 용마의 무덤은 지금도 덕포 상리에 있으며, 칼은 합수거리의 깊은 소에 빠졌다.
그때부터 이곳을 '검봉연(劍鳳淵)'이라 했는데 시인 묵객들에 의해서 '금봉연(金鳳淵)'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문산리
■ 용머리굴(龍頭屈)
무내리의 북쪽에 있다. 굴 앞에 있는 큰 바위가 용머리처럼 생겼으므로 용두암(龍頭岩)이라고 하며, 그 밑에 굴이 있으므로 '용머리굴'이라고 한다.
연하리
■ 연하굴
기념물 31호로 동강의 하상에서 15m에 위치한 굴이다. 좁은 입구에 길이는 200m 정도이며 2개의 넓은 광장으로 형성되었으며 수많은 석순과 종류석으로 이루어졌다.
대야리(大野里)
■ 대야굴
대야리 덕내 북쪽의 수리봉 병창 밑에 있는 길이 400m의 석회 동굴로 강원도 기념물 32호로 지정되었다. 폭 5m, 높이가 10m인 이 굴은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있으며 27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나 관리부족으로 많은 종유석들이 훼손되었다.
진별리(津別里)
■ 용담굴(龍潭窟)
진별리 베리골 왼쪽의 8부능선에 있으며, 강원도 기념물 23호로 지정되었다. 이 동굴은 고생대(古生代)의 석회암층으로 길이는 350m에 이르는 수직굴로 내부의 온도는 계절에 관계없이 15∼18℃가 된다. 4개의 큰 광장만 수십만년 전에 생성된 석순과 종유석들이 있고 30여 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며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학술조사가 있었다.
■ 고씨굴(高氏窟)
나루두둑(진별리)의 강 건너에 있는 굴이다. 원래는 '노리곡석굴(魯里谷石窟)'이라 했으나 의병장 고종원(高宗遠) 일가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했으므로 '고씨동굴'이라 하였다.
4억년의 신비를 자랑하는 이 굴은 호수, 폭포수, 광장 등과 24여종의 미생물이 서식하며 1985년부터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고씨굴에는 횡성 고씨(고종원 일가)들이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어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연덕리(延德里)
■ 꽃병굴
성황동 남쪽 산등성이에 있는 굴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좁고 그 내부는 교실 크기 정도의 넓은 굴이므로 '꽃병굴'이라 한다. 6.25사변 때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난을 했으므로 일명 '피난굴'이라고도 하는데 종유석과 석순이 많다.
쌍용리(雙龍里)
■ 쌍룡굴(쌍시굿)
고촌(庫村) 뒤쪽인 쌍룡양회 채석장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두 개의 '쌍시굿, 쌍룡굴'이 있었다. 시굿은 돌리네 현상에 의해서 땅밑으로 움푹 파인 굴인데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굴이 수직으로 뚫려 있었다. 옛날 용상리에 부잣집이 있었는데 이 부자는 마음씨 착하고 예쁜 딸을 키우면서 장차 훌륭한 사위를 맞아 가문이 더욱 번성하기를 기원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초파일 이 처녀는 탑골에 있는 절에서 탑돌이를 하던중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훤출하게 생긴 총각을 만나서 사귀게 되었는데 두사람은 부모님의 눈을 피해 은밀히 만나면서 총각의 신분이 상민인 것을 알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졌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처녀의 집에서는 가문의 망신이라며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했지만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녀의 집에서는 딸과 그 머슴 총각을 뒷산에 있는 굴에 가두어 두고 정을 끊으면 풀어주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져 살기보다는 차라리 내세(來世)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같은 시각에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 후 이들은 두 마리의 용으로 변하여 한 개의 여의주를 다정하게 물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이곳 쌍룡리에 전해오고 있다. 쌍룡양회에서는 쌍룡굴이 있던 곳에다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 옹정리(甕亭里)
■ 굇동굴(槐洞窟)
괴골 동쪽에 있는 커다란 굴이다. 사정리(射亭里)에 있는 자문굴에서 검은 고양이를 들여보냈는데, 3년이 지난 후 흰색 고양이가 되어 이곳으로 나왔다고 한다. '고양이'는 '괴'라고도 하는데 고양이가 나온 굴이므로 '굇동굴' 또는 '괴골'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 무릉리(武陵里)
■ 명마굴(鳴馬屈)
명마동 사슴목장 밑으로 도로 우측 냇가에 있다. 동굴 입구가 좁아서 약 10m정도는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안쪽에는 약 150평 정도의 넓은 광장이 있다. 굴은 크게 네 갈래로 갈라지는데 지금도 여러 종류의 진귀한 종유석들이 많다. T.V의 『주부탐사』프로에 소개된 후부터는 많은 살마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굴속에는 용마가 장수를 기다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임진왜란때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혈을 박은 후 부터는 말 우는 소리가 그쳤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 자료출처:「영월 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저자 엄흥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