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산동네 마을 삼거리에서 걸어 사오십분, 언덕받이에 칠십대 중반 부부가 사는 축담 디딤돌 높은 집이 있다.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곱게 피는 어쩌면 내가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거쳐갔을 것 같기도 하고, 산악동아리 회원들과 꽃축제를 즐겼음직한 화사하게 꽃피는 산촌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산촌동네 초등학교 동창이란다. 어려서부터 서로를 잘알고, 좋아해서 그렇게 결혼해서 살아온 천생연분이다.
며느리였던 시절 할머니는 치매걸린 시어머니 23년간 병수발하며, 매를 맞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글쓰기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그걸 가슴아픈 표현으로 일기 쓰듯 간직해 두었다.
산마을 비탈진 밭때기에 콩, 옥수수, 감자 심고, 봄이면 쑥이며 냉이 캐어 무치고, 국끓여 정답게 밥상 마주하던 꽃같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50초반 할아버지가 갑자기 파킨슨병에 걸렸다. 농사일과 생계를 할머니가 떠맡아야 했고, 그 병이란게 컨디션에 따라 변하는 터에 할아버지 화장실 갈때도 양어깨를 부축해야 했다.
그러한 중압감에 할머닌들 성할리 있을라고?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아프고 한쪽 다리가 아파왔다.
그러한 몸으로 아침마다 생계유지를 위해 정부에서 마련해준 공공근로 일터인 마을회관 청소를 위해 복대를 차고, 언덕길을 절룩거리며 40여분을 걸어내려왔다 다시 올라간다.
그렇게 해서 집으로 들어서면 아침밥을 함께 먹기 위해 헐아버지가 기다린다. 할머니는 아이 대하듯 할아버지의 밥숫갈 위에 뼈를 바른 고기를 올려 놓았다.
50년 함께 고달프게 살아온 세월, 한번도 다투지 않고 부부의 정을 이어 왔단다. 그런데 얄굿은 병마가 그들을 시샘하는 것 같다.
나이 들면 안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만 특별히 왜 그럴까 생각되면 서러운 것이다.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아파도 감내해야 된다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우리는 그걸 전생이니 원죄탓으로 돌렸다. 신을 감히 탓하지 못하니, 잘못된건 조상탓으로 돌렸으나 어느 조상이 후손 못되길 바라겠는가?
그렇게 산촌의 시간은 흘러간다. 이쯤해선 그럼 자식들은 도대체 뭐하느냐고들 말한다. 예단(豫斷)하건대, 우리들처럼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라 출세 못한 자식들인들 별수 있을라고?하며 편들고 말아야겠다.
이런 경우 병약하여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배우자도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게 우리네 정이었다.
팽개치고 나만 잘살자 떠나는 100세 인생이라면, 장삿꾼들 호객행위에 놀아나는 여생처럼 느껴진다.
우리들이 떠나온 고향엔 도시 문화에 들떠 휴양차(?) 사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대부분 아직도 많은 노년들이 그 땅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더 나은 내일이 다가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