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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18)
- 율법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천국의 의(2) :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들어 그리스도의 의를 설명함 -
마태복음 5장 27-32절 /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본문의 내용을 대하기까지 우리는 앞서 산상설교를 시작하시는 것으로 ‘팔복’에서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복이 선언된 것을, 그리고 소금과 빛을 들어서 그 천국의 의 안에 있는 제자들의 정체성을 알게 해주시는 가르침을 주셨었습니다.
그런 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함께 하고 있는 천국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져온 의보다 ‘더 나은’ 의임을 말씀하시고, 왜 그런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으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말씀해 오셨던 하나님의 본의(本意)가 무엇이며,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으로 율법이 지닌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재해석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본문은 앞서에서 십계명에서 제6계명인 “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문장 형식에 이어 동일한 문장 형식을 사용하시는 것을 통해서 두 번째의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 모세의 율법 - 바, ‘간음하지 말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금지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는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라는 생각을 갖고 그렇게 말하는지요.
그러나 말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간음하지 않는 자들과 우리가 어떻게 똑같으냐? 우리는 결코 그들과 똑같지 않다.” 라고 생각하며 말하는 자들에 대해, “ ‘우리는 간음하지 않는 자들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느냐? 그러한 너는 간음을 행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람이라는 것에서는 그들과 똑같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인지요. 그러한 죄를 짓는 악한 행위에 있지 않고 바르게 잘 살아오고 있는데요.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본문에서는 ‘여자’에 한정해서 이 단어가 쓰였기 때문에, 즉 여자에 대하여 품는 탐욕의 마음에서 쓰였기 때문에 ‘음욕’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음욕’이란 말을 ‘간음’과 관련한 음탕한 욕망으로만 한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의 본 뜻은 ‘마음을 두다’, ‘갈망하다’, ‘가까이 하다’는 것으로, 이것이 한 여인에 대한 부정한 행위로 가지면 ‘음욕’이지만, 돈이나 기타의 사물에 대한 부당한 행위로 가지면 탐하는 마음, 그러니까 ‘탐욕’ 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탐욕을 말이죠. 땅에 것들에서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것에서도 가집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도 탐하는 욕망에서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켜 행한 것에서, 그렇게 자기들의 손으로 해냈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그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에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는 한 부자청년의 질문과 나눈 예수님의 대답과 그에 따른 부자 청년의 처신에서도 확인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다시 묻는 그에게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이 말씀한 율법을 어렸을 때부터 지켜 왔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에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한 것에서 보게 되는 결코 재물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으며, 또한 그는 그것으로 인해서 그에게 영생이 되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에서 말씀되고 있는 “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족하지 못한, 즉 부족하였고, 또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도 따르지 못하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름에도 부족하였습니다. 여기의 한 부자 청년에게서 보는 것은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지켜 온 그가 재물에서는 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으며, 그는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다가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결국은 좇지 못함으로써 모든 계명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육체의 정욕에서 일어나는 탐욕을 좇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탐하지 말라“에서 말씀해주시고 있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에서 있게 되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살아갈 마음을 갖지 않고, 스스로 가난에 자신을 두고서 욕심을 갖지를 않고 살아가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탐하지 않으면 탐하는 마음이 없는 것일까요? “청빈하게 살아야지!” 하는 그 마음을 품음에 있는 것 또한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즉 ‘청빈’을 탐하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지요! 그렇듯이, 땅엣 것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의 것에서도 탐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도, 영생도 탐하는 욕망에서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않는 한에는, 그에게는 결코 탐하는 마음의 포기, 그 내버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포기란 단칼에 무짜르듯이 단번에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셔서 그의 탐하는 마음을 날마다 베어 잘라주시는 의로운 칼이 되지 않는 한에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날마다, 수시로, 이때 저때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탐하는 마음을 그때그때마다 그 일어남이 있는 즉시 베어 잘라주시는 의로운 칼의 휘두름이 없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그 주님의 따름에 있지 않는 한에는, 그는 결코 율법의 온전한 성취에 있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율법의 모든 계명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부족에 있으니,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한 부자 청년을 보며, 예수님의 제자는 “그러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영생의 기대에 있던 자신만만한 마음의 포기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의 자포자기의 마음에 아예 대못을 박아 버립니다. “그렇다! 사람의 힘으로서 천국에 들어가며 그 나라에서 영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사람인데, 십계명 준수에서만 자신의 행위를 보니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라고 하신 후,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말씀하셔서 한 부자 청년에게서 보게 되는, 어렸을 때부터 해온 율법 준수에 의하여 영생을 얻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 “천국 불가!”를 명확히 하셨습니다. 율법 준수는 인간의 행함인데, 이것에 만족하게 살아온 의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온전함이 되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너희는 그 모두의 행함에서 만족하게 살아왔을지라도, 이미 죄를 지었다”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이런 저런 것에 마음을 둔 자는 이미 죄를 짓는 악에 있었고, 또한 이 죄를 짓는 악은 계속 진행형에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따라서 ‘천국불가’는 계속해서 선언되고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요. 어떤 일에 대한 악을 행하는 것에서 비로소 나타나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일에 대한 선을 행하는 것에서 악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라고 하는 것은 행동화되어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죄가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율법 준수에서 결코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율법 준수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의롭다고 여김은, 그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만들어낸 깨끗이요 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로서는 마음에서 나오는 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 몸의 어느 것인가 죄를 지으면 그 때마다 하나씩 끊어 내버리면, 그래서 오른 눈이 범죄하면 그 눈을 빼버리고, 오른손이 범죄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고, 해서 온 몸이 여기 저기 잘라져 나가 버리면, 더 이상 그 몸으로 율법 준수에 있을 수 있겠는지요. 율법을 지켜 행할 몸에 있지를 못하니 율법 준수는 꿈에도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는, 마음에서 일어난 ‘갈망’, 그것에 사람에 대해서가 아닌, 재물이나 기타의 세상의 것에 대한 소유에 그 마음을 두고 또한 마음을 가까이 한 그 모두에서 “이미 범죄하였다!“는 것인데, 그 범죄를 일으킨 마음은 무엇으로 어떻게 잘라내어 지옥을 면할 것인지요. 백체 중 하나가 범하면 차라리 그것을 잘라냄으로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나을텐데, 마음은요? 도대체 범죄한 마음 구석만 찾아내서 무나 두부 자르듯이 그 부분만 잘라낼 수 있는 것인지요. 못하며, 안되잖습니까? 그러니 범죄한 몸 백체 중 하나를 잘라냄으로 나머지 몸은 지옥에 던지우지 않듯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설사 말이죠. 범죄한 몸 하나 하나를 잘라내 버려 몸 나머지를 지켜가다가 결국은 백체 전체를, 곧 몸 전체를 다 잘라냈을지라도, 그래서 범죄한 몸이 행한 행위를 정죄하니 심판에 이르게 할 것이니 하며 이러니 저러니 시비를 갖게 하지 못할지라도, 그 잘라내지 못한, 결코 그럴 수 없는 범죄한 마음은 그를 물귀신 작전을 쓰듯이 그를 사로잡고 지옥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니 진정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요. 여기에 예수께서 이 문제를 끄집어 내며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하겠느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사람에게서 찾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권한은 그 나라의 주인인 나에게 있다! 너희가 그 사실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한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어떤 가능도 없으니 어떤 가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를 끝맺는 결론에 이르러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모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따름에 있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며 그 집은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결코 무너짐이 없을 것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마 7:24-2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한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쥐고 계신 권한의 행사에 의해서 그 권한이 미치는 자에게서 그 나라는 무너짐이 없는 참으로 견고한 성으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복을 누림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