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사도행전 16장 24-40절
설교제목 : 사방이 막힐지라도
영혼의 혼탁함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재산 피해가 있었습니다. 수해를 당한 이재민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의 문명은 진보와 발전을 위한 걸음과 상생과 보존을 위한 걸음의 딜레마에 봉착해 있는 듯합니다. 태풍이 지난 후 찌는 듯한 열기가 조금은 누그러져 또다른 변화를 기대하게 합니다.
지난주 압구정에서 롤스로이스를 탄 차량이 인도로 돌진하여 한 여성을 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20대 후반으로 알려진 남성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투약 후 운전을 하다가 20대 여성을 쳤고 뇌상상태에 빠졌습니다. 마약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변호사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고 여론 때문이었는지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고 해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차를 몰며 압구정을 활보하며 온갖 욕망을 실현시키며 살고 있지만, 마약에 의지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야만 하는 서글픈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영혼의 혼탁함으로 멀미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지난주 칠곡에 있는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잠시 피정을 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수도원 옆에 거대한 피정센터를 짓고 있어서 어수선했습니다. 유럽의 채플처럼 크고 아름다운 채플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녁미사에 참여하여 오랜 시간 그레고리안 찬트를 교송하면서 몇몇 젊은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고 머리를 조아리며 합장하고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티없이 맑아 보이는 신부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수도원에서 수도를 하며 살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40년 동안 그곳에서 살고 계신 안내하시는 수사님은 영혼이 참 맑아보였습니다. 수도원 밖 세상이 갖지 못한 평화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수도자처럼 살 수는 없지만, 왜관 수도원 채플의 한 벽화의 그림의 글씨, “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처럼 내향과 외향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동지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다툰 후에 실라와 함께, 제 2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그가 이전에 선교했던 곳이 아닌 마게도냐로 선교의 방향을 선회하게 하셨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의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를 말을 듣고 그는 마게도냐로 갑니다. 마게도냐의 첫 성은 빌립보였습니다. 이 빌립보는 로마식민지의 으뜸가는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라 모든 일종의 로마의 축소판으로 법과 제도, 도시 전체가 로마식으로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일종의 황제의 도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익숙한 곳이 아니라 낯선 도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바울은 안식일에 유대인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성문 밖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았습니다. 이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수로 장사를 통하여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이었습니다. 두아디아 출신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 자신의 집에 묵어달라고 간청하여 자기 집으로 바울을 데리고 갑니다(16:12-15).
루디아라는 여성은 낯선 도시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길을 우회하게 하시고 그 길에 루디아라는 여성을 준비해놓으신 것입니다. 일상동안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한 여성, 든든한 조력자는 루디아였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의 장면을 떠올리면, 인간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루디아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빌립보에 있는 동안 잠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고마운 사람과 어찌 평생 동지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운 여름날 냉수 한 그릇을 얻어먹으면 그 사람에 대한 인연의 고리가 연결됩니다. 한국 정서로 말하면 정이 생깁니다. 자기 살기 바쁘고,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동분서주하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제공한 정을 경험한다면 한결 마음은 따뜻해지고, 관계는 돈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 수도원에 가는 일정을 3일로 잡았다가 너무 무료할 것 같아서 부산 해파랑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는 부산에서 머물렀습니다. 친구와 같이 가려 했지만 갑작스런 장례로 가지 못하고 혼자 갔습니다. 고민하다가 고속도로 마지막 휴게소에서 부산에서 계신 분석가 선생님에게 혹시나 해서 카톡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울진에서 근무하는데 집은 해운대라서 퇴근 후 분석실에서 분석하는데 저녁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런 저런 담소를 두시간 반 동안 하였습니다. 소탈한 선생님의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언제든 찾아가도 마음을 열어 환대하고 환대받을 수 있는 관계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마음이 바로 정으로 이어진 관계인 듯 합니다. 루디아가 기꺼이 진심으로 바울과 실라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듯이 소중한 이들을 환대하고 맞이하여 정으로 이어진 관계 속에서 평생 동지가 되어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
바울은 빌립보에서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점을 쳐서 돈을 벌어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인은 바울을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의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여러날 동안 이런 여인의 모습에 바울은 그 여인에게 있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주인들은 돈벌이 희망을 잃었다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광장으로 끌고가서 치안관들에게 바울과 실라가 도시를 소란케하는 자들이며, 로마시민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한다고 고소합니다.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질을 당한 뒤에서 발에 차꼬가 채워진 채,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과 방향을 선회하여 빌립보에 왔으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의 선교가 성공적으로 놀랍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치욕스럽게 옷이 찜김 당하고 심한 매질을 당하고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한 여성을 고쳐주었지만 돈벌이 수단을 잃었다고 잡혀서 모함을 받고 매질까지 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경은 누누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이 더 따를 수 있도 있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사방이 막힐지라도
바울과 실라는 이 지경이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억울해서 분노를 키울 만도 한데, 오히려 한밤중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터전이 흔들려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감과 차꼬가 풀렸습니다. 기도와 찬양은 자신을 가두는 터를 흔들어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기도자는 자신의 정신 에너지를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함으로써 엄청난 신성한 힘이 대지의 터를 흔들어 모든 갇힌 문과 족쇄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기도와 찬양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방으로 모든 것이 막혀있고, 자아를 옭아매는 사슬이 있다할지라도, 위로 열린 하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다면, 내면의 깊은 심층으로 내려가 주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내가 서 있는 감옥의 토대를 뒤흔들어 갇힌 상황으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한 듯 막혀 있을 때,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접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접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뒤흔드는 지진을 통하여 막힌 것을 열려지는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옥문이 열리고 족쇄가 풀렸지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탈출시켜달라고 기도하게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기도했더라면 옥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찬양은 고통의 하소연이나 감옥에서의 탈출이 아닌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길 기도했을 것입니다.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간수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큰 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하고 외쳤습니다. 간수는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를 바깥으로 데리고 가서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바울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주었고, 그와 온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옷이 찢기는 모욕과 심한 매질로 고통받으며 감옥에 갇혔지만, 감옥에서 하나님을 영접한 간수와 그의 집안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고통과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접속됨을 잃지 않고 도리어 생명을 전하였습니다. 화조차도 복으로 바꾸어간 사람들인 것입니다. 상황과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자신에게 불어닥친 화조차도 복으로 바꾸어간 바울과 실라처럼 진흙탕 속에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는 당당함, 사막 한가운데도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나의 됨됨이가 분명한 인생길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