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로만 듣던 책. 쉬이 손에 잡히지 않은 책. 읽고는 싶었던 책. 후배부부가 우리 부부를 초대해서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래서 반갑게 받아 온 책이다.
이어령선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번뜩이는 감각,냉철한 비판력'으로 한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신 분이다. 그의 이력을 모르는 분을 위해-진짜 모르는 분이 있기나 하는지~- 옮겨 본다.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문학박사,문학평론가,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원원장을 역임했다. 1970년 문학사상 주간을 지내고,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과 식전 문화행사, 대전엑스포의 문화행사 리사이클판을 주도하였으며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다. 2010년 <디지로그 사물놀이>를 기획,공연하였고 현재 중앙일보 상임고문,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마디로 지성계의 만능엔터테인먼트다. 그러던 그가 2007년 07월 24일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이 책은 세례를 받았던 전후의 시기에 쓰여진 글들을 모은 것이다. 구성은 일본 교토에서의 일년 연구생활시기,딸의 시력장애 소식을 듣고 달려간 하와이에서의 기록, 그리고 세례를 받고 난 후의 활동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내용은-저자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나는 나의 믿음을 '교토'에서 찾고 '히와이'에서 만나 '한국'에서 행하는 과정으로 작은 쉼표를 찍었던 셈이지요"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기독교 복음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이 책을 거부할 생각을 하지 마시라. 이어령선생이 누군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아우르는 통섭력과 인본적인 감성을 지닌 분 아니던가. 유물론자이든 타종교인이든 나름 그의 글에서 감동과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성과 영성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도 된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책을 건네준 후배의 깊은 의도가 느껴진다. 아마 전도의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싶다. 그렇다면 소기의 성과는 있는 것 같다. 지성이 뒷받침되는 영성의 아름다움을 저자의 글에서 보았으니 말이다. 교토의 쓸슬한 밤하늘과 적막한 외국인교수 사택으로 쌀봉지를 지고 걸어가는 저자의 심정-존재적 외로움의 구현-이 충분히 이해된다. 그 깊고 넓은 맛이야 내 품이 따라갈 수는 없지만 말이다. 딸의 불행과 손자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접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이해된다. 베드로가 아닌 사도 바울이 될 수 밖에 없는 저자의 처지도 이해가 된다. 우리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과제가 있고 그에게서 품어 나오는 상징이 있다.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에서 혼돈과 회의, 영광과 기쁨을 가로지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함석헌선생님이 그랬다. 인간은 육과 혼을 가지고 지정의활동을 하는 존재라고.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결국 감성과 지성, 영성의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 사이를 변주하는 나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유물론자이든 유심론자이든 현실 종교를 갖든 안 갖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면에서 후배에게는 성에 안 차는 바가 되겠지만 영성적 삶을 긍정한다는 면에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 아니겠나 싶다.
사실,난 이어령키드다. 중고등학교시절 그의 에세이등을 읽고 성장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느낌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그 책냄새,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나갔던 그 일상의 사실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는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읽다가 읽다가 너무 지식과 정보가 아까워 어떡하면 내 머릿속에 다 넣을 수 있을까하며 괴로워했던 바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언어와 낱말에 대한 분석과 비교는 참 재미있었다. 역시 이 책에도 그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죽는다,죽이다(67쪽),먹어치우다(75쪽),버리라(178쪽),서랍,승강기(228쪽),父(251쪽),먹는다는 것(279쪽)에 대한 해석이 그렇다. 사실 우리가 쓰는 언어에 대한 분석으로 세상을 이해-존재와 인식의 이해-하는 여러 학자의 태도에 이어령의 영향이 컸을거라 생각한다.
이어령선생은 논리의 골격이 튼실하다. 대학자들은 으례 그러할 것이다. 그의 빛나는 면은 설명이다. 그 많은 정보와 사실이 어디에서 왔는지.. 음악이면 음악,철학이면 철학 수 많은 동서고금의 이론과 학자들이 인용된다. 60년 글쓰기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 만물 지식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글이 쉽다. 옆에 손자를 데려다 놓고 조곤조곤 자상하게 이해되도록 설명한다고나 할까? 또한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 딸의 불행이 종교에 귀의하는 직접적 원인임을 부정하지 않으며, 글쓰기의 원력이 존재적 불안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여 글쓰기로 해결하지 못 하는-아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존재적 불안을 넘어서기 위해 영성을 택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영성을 이야기하더라도 지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애정-인본적 태도-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그에게 권위보다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모르겠다.프로필 사진을 보면 고뇌와 권위,독선이 조금 느껴지는 인상이긴 한데 역시 이 것은 연출일 가능성이 클거다. 그래도 그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 실제 인성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글을 통해 느낄 뿐이다.
책을 읽으며 몇 문장에서는 내 철학적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 있었다.
먼저, 123쪽. 예술과 종교의 상상과 창조성을 비교하면서 예술의 한계를 논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 한계를 종교-영성-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인용해본다.
" 그런데 예술가들은 대체로 그 문턱에서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지고 맙니다. 유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가 그러했고,탐미주의자 보들레르가 그러했고,한국의 이상이 그러했습니다. 저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키르케고르의 '미적단계-윤리적 단계-종교적 단계'의 길로 향한 것이 아니라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손가락을 따라서 '낙타-사자-유아'의 그 3단계 길로 간 것이지요"(123쪽)
니체에 일정부분 공명을 하는 나에게는 신선한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지금까지의 삶은 낙타였다. 이제는 사자가 되려 하나 곧바로 월반하여 유아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물론 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앙상한 골격만이 내 맘의 풍경에 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보다 30년을 더 산 분이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결국 니체의 지향하는 끝은 '낙타는...왕양한 자유가 있는 초인의 벌판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지요.물론 그러한 초인은 어디에도 없고 그 사통팔달로 뚫린 초원의 바람은 광기의 바람이었지요."라는 거다. 유아의 삶이 결국 광기가 도는 바람으로 꽉 찬 초원이었다니. 창문을 통해 바라본 그립다 마지 못해 염원한 그 초원의 풍경이 사실 광폭한 바람으로 정신없는 곳이었다니. 저자는 니체는 결국 미쳤지 않았냐고 반문한다.(그 니체의 미침은 끝내 변하지 않는 세상의 광기에 좌절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런 세상을 구원하지 않은 신에 대한 분노로 그러한 것은 아닌지. 저자는 세상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지 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 니체를 섬기려던 히틀러는 세기의 독재자가 되었다 한다.(히틀러는 야인으로 광야에 있을 때 갖었던 니체의 긍정성을 버리고 스스로 초인이라 생각하고 권력을 행사하려 한 것은 아닐까? 이 부분이 니체의 부정성이 아닐가 싶다.) 베토벤은 정작 사람 하나 거느리지 못 하는 사람이었다 한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에게 감동을 주지만 어둠의 심연속으로 끌어 들이는 바 구제의 높은 곳을 향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도저히 풀수 없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본다. 수학에서 5차방정식처럼 말이다. 존재적 외로움이 자신의 글쓰기로 해결이 안 되 것처럼 인간은 영성의 단계,종교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초원이 아니라는 거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80대 노학자의 인생여정을 생각해 보았다. 그의 인본적 태도,크리스천에게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존중과 사랑'을 이야기 하고 그 지도자-목사님이겠지-들에게 갖지 말고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안다. 그는 인본주의자다.(무슨무슨 주의자 주의자하는 환원론을 반대하지만) 젊은 시절 분명 니체를 지향했던 것은 제국주의와 전쟁을 겪은 세대의 공통점이다. 전쟁이 보여준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절규했단다."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이걸 보고 계십니까,정말 계시다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인간이란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도 구제도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에 무신론자.실존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라'한다.(262쪽) 그러나 그의 화려한 삶이 니체와 같은 야인의 삶으로 끝까지 밀어 부치지는 못하게 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삶은 주류와 제도권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일거다. 늙으막에 닥친 가족의 시련은-누구나가 당하는,당할 수 밖에 없는 것-그에게 더욱 존재적 허무감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그는 니체가 살았던,젊은 시절 자신이 지향했던 초원,광야로 걸어가지 않았다. 제도권이 살아 숨쉬는 종교의 제단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오해는 마시라. 비판이 아니다. 그럴 것이라는 거다. 나라도 광기어린 초원에 다가설 용기가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 이런거다. 우리가 단계를 밟고 앞으로 전진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거. 저자도 스스로 밝혔듯이. 감성과 지성,영성을 오고가는 존재, 미적,윤리적,종교적인 것은 사실 단계가 아니라 구성이라는 것. 우리 몸안에 낙타와 사자,그리고 어린아이가 휘젖고 놀고 있다는 것이 더 맞을 거다. 단계는 사실 가치론적 의미가 끼여든 것이다. 계몽적인 것도 있다. 단계는 나아가는 것이고 개선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니까. 나는 그렇다. 일상의 사회경제적 활동은 낙타일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이 옳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정체성과 자존감과 관련된 것이니까. 물론 오로지 자신이 감당하고 책임질 영역이다. 그리고 어린아이! 니체는 초인이 사는 초원의 존재를 이렇게 표현했을가? 저자는 이 초원에 광기만이 존재하며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고 절망했지만. 글쎄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훈육의 대상인 어린아이를 우리 삶의 마지막 단계로 상정하다니. 그러나 한 조각의 생각은 든다. 절대 가치를 부정하고 사이와 변주에서 놀기. 나를 따르라라는 사람을 의심하고 그거 맞어? 하고 대놓고 질문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에 활기 발랄한 즐거움을 갖고 있는 거. 이게 아닐까 싶다. 어떻든 이 문장에서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서로 상반된 3단계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이어령선생은 예수를 인격적인 주님으로 받아 들였다. 교회를 다니고 찬송을 하고 간증을 하고 교회 강의를 한다. 사람들이 비판하며 궁금해 하며 보통 신자들이 비신자들에게 듣는 질문을 받을 거다. 그런 그의 답변은 쎄다. 그럴 듯 하다. 만약 당신이 "당신 위선자 아니냐.당신 같은 사람은 그저 성서 보고 신학책 읽고 기도드리면 됐지 왜 교회 나가서 나 예수 믿는다고 떠드느냐 차라리 무교회주의자가 되지"라는 질문을 받으면 280쪽을 봐라. "노아의 방주에 모든 생물들이 쌍으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다 들어가냐? 그리고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사는 생명인데, 하늘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멸한다 했는데 물고기는 생명아니냐? 하느님이 안 만들었는냐?"는 질문은 278쪽,"왜 교회에 가는가?"라는 질문은 238쪽, "하느님이 만든 이 지랄같은(이건 내가 표현한거다) 세상은 왜 만들고 구원하지 않는거냐?"는 질문은 283쪽,"그 나이에 뭐가 답답해서 세례받는 거냐?"는 질문은 285쪽에 있다. 답이.
우리가 지식과 사실에서 왜곡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 이는 보편적 지식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지역과 문화,시간과 매체를 통해 굴절되기 때문이다. 저자도 성경의 무오류설에 대해 회의를 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인간끼리의 말이 그러한데 하물며 하늘의 말이 땅으로 옮겨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로 변화하고 인간의 문화를 통과하여 인간의 마음으로 굴절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새삼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빛을 7가지 무지개로 분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뉴턴이 프리즘을 통해 나온 빛을 보고 조수에게 "나는 일곱 색으로 보이는데 너는 어떻게 보이는가"물었다한다. 그가 왜 그랬을까? 그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7일만에 창조했다지 않나. 한국사람들은 초록은 동색으로 보았다. 서양사람들은 파란색과 남색을 구분하지 않는다.한국사람은 신호등 초록불을 보고 파란등이라 한다. 한국사람은 청출어람이라 하지만 서양인은 남색을 마땅히 지칭할 용어가 없어서 인디고블루(indigo blue)라 한다.그러고 보니 위내기경할 때 병변을 잘 보이기 위해 뿌리는 것이 인디고 블루액이다. 근데 고유명사가 아니라 색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라니. 우리는 그냥 남색용액이라 하면 안 되나. 지식지존에 다시 한번 경의와 예의를 표한다. 즉, 과학도 주관성과 문화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지상의 일상적 문화의 색에서 벗어나 절대의 빛을 찾아가려면 주관성과 감각에 의존하는 문화의 필터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물론 이것이 어렵지만 지적 탐험을 멈추지 않는 자라면 반드시 갖추어야할 덕목일 것이다.
기도 끝에 하는 아멘. 그 의미가 109쪽에 있다. 다만 기도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 그대로라는 것을 다짐하고 확신하는 말로 후에 신도들이 그렇게 붙인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기도문 끝에는 아멘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아멘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 문장이었다.
지도자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지도자들은 섬기는 것도 모르게 섬기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고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양 떼를 이끌고 모세처럼 사막을 건너 가나안의 땅에 이르는 지도자의 힘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32쪽)
창조적 지성과 분석적 지성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구운몽과 파우스트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결국 현세의 모든 삶은 부질없는 것이며 영원한 행복은 애초에 그렇게 부정했던 영적인 가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서양 문화에서도 책을 불사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단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는 차원이 다르지만)'지의 공허와 무상성'을 '사방이 막혀있는 상자의 이미지로서'책과 지성에 대하여 반발한다는 거죠. 포스트모던이 바로 근현대의 분석적 지성에 대한 반발이 아니겠는가 한다. 본인의 늦깍이 세례는 아마 '책에 의존해온 저의 지식에 대한 파우스트적 회의'의 의미라고 이야기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보통 하는 공부나 학문은 분석적 지성일거다. 그것이 일상의 삶과 연결 되면서 성찰과 분투의 수단이 될 때 창조적 지성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가 사용하는 창조의 의미는 다분히 종교적인 느낌이다. 그렇다면 매칭이 안된다. 그 지성은 영적인 지성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지성의 벌판에 서로 상호작용하는 개념으로 보고 싶다. 구운몽,파우스트의 인용도 자신의 심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의미있지 창조와 분석의 지성의 관계와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좌우지간 이거든 저거든지간에 또 하나의 문제는 '아는 것과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은 전혀 또다른 문제라는 것. 분석을 통해 뭔가를 알았다고 끝인가? 일상의 삶과 실천이 결부될 때 창조적이 되는 것이다. 창조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아는 것은 인식론의 영역이다. 몸으로 느끼는 것은 존재론이며 실천론이다. 실천은 몸에 부담을 준다. 불편해지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 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창조적 지성이다. 이를 알면서 맨날 독후감만 써 대는 나는? 위선자다. 그럼에도 글을 쓴다. 위악스럽다. 위선에 위악까지,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다.
가족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저자가 처음에 기독교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있다 한다. 자신의 어머니를 여인이라 칭하고, 아브라함에게 너의 아들을 번제로 받치라고 했다는 대목이 걸렸다 한다. '몇 천년 가족주의의 온정과 효를 지선의 가치로 삼고 살아온 한국인'이며 어머니를 신앙으로 생각하는 저자에게 가치가 충돌하는 대목일 것이다. 저자는 십자가에 매달리러 가는 길에 만나 어머니에게 예수가 한 말. Woman,behold thy son.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제자를 보며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나를 잃고 수 많은 아들을 얻었다는 의미일거다. 물론 제자들에게도 말한다. Behold thy mother. 가족의 연을 끊어야 영원한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동양의 예로 중국의 고전 <태평광기>의 두자춘이야기를 예로 든다. 그만큼 가족주의는 뿌리가 깊은 것이다. 유교는 바로 여기에 천착한 이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니 않던가. '혈육의 낡은 가정관을 사랑가 믿음,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확장하고 승화한 것이 예수님의 가정관'이라 한다. 아무리 가족애가 끈끈해도 새월이 흐르면 퇴색되고 결국 이 땅 위에서 사라진다는 것. 하여 영원한 생명의 삶을 보장하는 예수님 하나님의 품안에 가족의 사랑을 안긴다는 것이 그 믿음의 실체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애를 초월한다는 것 그게 쉽지 않다.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사실 믿음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나약한 존재로서 인간이 홀로 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겠는가? 전망도 없고 확신도 없이 말이다. 그때 누가 등불이 들고 다가 온다. 믿고 싶다. 믿어야 한다. 믿을 수 밖에 없다. 왜? 내가 불안하닌까,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그래서 믿음은 독재를 낳는다. 독재는 강요를 낳고 의식화가 이루어지고 가치의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지성은 의문을 낳는다. 의문이 지성을 낳는 것이 아니다. 의문은 고민과 갈등을 낳고 실천을 낳는다. 실천은 변화와 개혁을 낳는다. 변화와 개혁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고 또 다른 등불을 찾는다. 하여 저자가 이야기하는 믿음은 종교적 용어다.
|
첫댓글 좋은 책을 원장님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네요. 감사지요. 나도 읽어봐야겠네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읽고 영성에 대하여 고민한번 해 봐야 겠습니다.
요즘 전 기분전환 삼아 예술가의 지도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니체가 예술가에 미친 영향에 푹 빠져 있었지요 이사도라 던컨, 루 살로메 ... 조르디상드까지 .. 거미줄처럼 얽어져 있는 그들의 관계속에서 니체의 정신은 숨쉬고 있더군요 이어령교수님의 말씀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제가 니체와 이어령교수님을 모르니 왤까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중 상처투성이 니체의 내면을 껴안을 수 있는 건 완전함을 인정하지 않은 예술가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순넘은 학자가 한 철학자의 헛점을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한 동안 빠져있던 사람만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하기도 하면서요
아뭏든 그 무엇이든 한껏 주물르다 옛다하고 내놓을 수 있는 그 경지가 존경스럽기도 하구요 하지만 전 과정 중에 있으니 그 경지가 부럽진 않습니다만 언젠가는 제 생각을 이런데요 하고 반론을 제기 할 정도의 능력은 지니고 싶다는 생각을 원장님의 독후감에서 가지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