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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묵상글 들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거짓이 없는 사람은?. 등 )
*** 오늘 새볔미사 참례하셨더라도 맨 아래에 추가된 가톨릭평화방송의
황인수 이냐시오 신부님의 강론 -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나는 누구인가? 를 묵상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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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거짓이 없는 사람은?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거짓이 없는 사람이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요한복음에서는 나타나엘이라고
불리고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데
이것은 정말 대단한 칭찬입니다.
이런 칭찬을 받는 제자라면 제자들 중에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진정 거짓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혹 있다면 거짓이 없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겠지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이란 죄라고 할 수 없는 선의의 거짓말은 아니고,
나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남에게 피해를 주는 적극적인 거짓말을 뜻하지요.
다음으로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입니다.
사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저와 같이 글을 쓰고 강의를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은 번드르하게 하여
다른 사람이 자기를 말과 같은 사람으로 믿게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지요.
다음은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 곧 위선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이기 위해 기도하고 단식하며 선행을 하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을 많이 혼내셨는데 그런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기도와 단식과 선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이 믿는 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살아있을 때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생애 말년 어느 사순 시기에 너무도 쇠약해져 의사의 처방대로
닭고기 국물을 어쩔 수 없이 먹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고기를 먹지
않았을 거라고 믿을 것이기에 그는 형제를 시켜 자기가 고기를 먹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라고 곧 광장에 나가 외치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거짓이 없는 사람은 존재의 안과 밖이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운' 존재입니다.
수도자라면 수도자다운 사람인 것이고,
교육자라면 교육자다운 존재인 겁니다.
이렇게 '다운' 존재를 묵상하다보니 자연스레 사제 서품 때
주교님으로부터 듣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복음서를 수여하며 주교님은 대략 이렇게 훈시하시지요.
"그대는 이제 복음 선포자가 되었으니
들은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시오."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럴 수 없어도 그러려고 노력을 하다보면
그리고 나이를 먹어 인정 욕구가 사라지면 점차 안과 밖이 같아지고,
말과 실천이 같아진 존재가 되지 않을까 희망해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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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새벽을 열며.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빠다킹신부님.
초등학교 때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선생님께 심한 체벌을 당한 기억입니다. 당시에는 체벌이 워낙 보편적이어서 특별한 기억이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의 체벌이 너무나도 억울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앞에 나오게 했고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떠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든 것은 분명히 제 옆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떠들었다고 때리고, 억울하다고 항의한 것을 핑계 댄다고 또 때렸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억울함이 지금까지도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 형상소송 체계의 대원칙으로 “100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의 누명을 쓰게 하는 것이 가장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도 죄가 무거운지 가벼운지 정확하게 모르면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주라고 했습니다. 죄를 봐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키우거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큰 죄인으로 만드는데 너무 익숙한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판이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큰 죄인으로 단정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권리는 사랑할 권리만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향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하면서 필립보가 말하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음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말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대화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자신의 판단을 굽힌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나자렛 출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단정을 짓고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필립보와 함께 와서 주님을 볼 수 있었고, 열려 있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도 나타나엘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판단이 전부인 것처럼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일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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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소한 것들 속에 있다. 잃게 되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소소하고 평범한 것들이다(론 마라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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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모범.
미국 매사추세츠 윌리엄스 칼리지의 수전 엥겔은 유치원 아이들을 관찰한 실험을 발표했습니다. 실험에서 아이들은 방에 혼자 앉아 한쪽에서만 볼 수 있는 유리를 통해 엄마, 아빠의 모습을 봅니다. 아이의 엄마, 아빠는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가지고 놀거나, 그냥 쳐다보기만 하거나, 아예 무시한 채 다른 어른과 잡담을 나눕니다. 그 뒤 아이들에게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을 주었습니다. 결과는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사소한 행동이 아이에게 전염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의성이 높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호기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책 많이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아이를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만 이런 현상을 보일까요? 아닙니다. 좋은 모범에 대해서는 모두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을 사는 우리의 좋은 모범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더욱더 밝고 희망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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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는 필립보의 소개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는 평을 들었던 나타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교하였다고 전해지며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복음: 요한 1,45-51: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출신”이라고 소개한다(45절).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회의를 갖는다. 즉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 라고 하였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권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처음에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바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게 된다(47-49절).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절). 즉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된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에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원을 드린다면,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으로부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하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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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 명단에는 있지만(마태 10,3 참조) 이후 복음서에서 별다른 언급이 없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바르톨로메오 축일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르톨로메오는 ‘톨마이’ 또는 ‘탈마이’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순교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황금 전설』을 보면 예수님의 첫 기적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바로 바르톨로메오이고, 인도나 아르메니아에 선교하러 갔다가 체포되어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형벌로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이 일어난 장소인 카나와 관련하여,
카나 사람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이가 필립보이고, 복음서의 열두 사도 명단에 늘 필립보 다음에 바르톨로메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타나엘은 율법서와 예언서를 열심히 공부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정 관념 때문에 필립보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자렛이 언급되지 않았고,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따라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의 이런 태도를 오히려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물을 주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의 가죽을 벗겨 진리를 보았기에,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드러낼 수 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를 다시 바쳐 봅니다.
“주님, 복된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오롯한 믿음으로 성자를 따르게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굳센 믿음을 주소서.”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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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희망과 삶 - 관상과 순수 -
요즘 나이 70이 넘어서야 10대때 부른 동요의 진가를 깨달으니 참 신기합니다.
어제는 산책시간 아무도 듣지 않을 때 ‘새나라의 어린이’를 마음껏 불렀습니다.
해방이후 수십년을 불러온 노래인데 아마 중년이든 노년이든 이 노래 모르는 사람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가사도 좋고 곡도 흥겨워 5절까지 모두 인용합니다. 한 번 조용한 시간에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장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거짓말을 않습니다. 서로 믿고 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쌈을 하지 않습니다. 정다웁게 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몸이 튼튼합니다. 무럭무럭 크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참 좋은 가사입니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하늘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하늘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이 동요만 아니라 더불어 불러 본 ‘졸업식 노래’도 ‘기찻길옆 오막살이’ 동요도 이토록 좋음을 이제서야 알았으니 너무 역설적입니다. 기회되면 이 두 노래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새벽 언뜻 스치듯 마음에 와 닿은 인터넷 뉴스 제목에 감격했습니다.
‘쿠바 의사들의 강인함의 뿌리는 '희생 정신' 아니라 '동료 시민 의식’, 이런 동료 시민 의식의 형제애를 지닌
이들이 진정 하늘 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하루 확진 400명 육박에 정은경 "더 증가할 것...3단계 격상 매일 고민-집에 머물고 마스크를 항상 제대로
써달라’, 참으로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하늘 나라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프로는 아름답습니다. 두 경우 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프로들입니다.
참으로 삶의 아마추어가 아닌 삶의 프로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죽어 가는 언젠가 그날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늘 나라의 생생한 희망을, 꿈을, 비전을 지녀야 합니다. 희망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아무리 다 지녔어도 이런 궁극의 희망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다 지녔어도 기쁨이, 평화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참 기쁨, 평화도 하늘 나라의 참 희망에서 꽃처럼 피어납니다.
제1독서 요한 사도가 성령의 은총으로 관상한 새 예루살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 하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런 영원한 희망인 새 예루살렘의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관상시간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희망이자 꿈인 하늘 나라입니다. 이미 이런 희망을 지니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새 예루살렘의 삶을 살았던 열두 사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진정한 이탈과 초연의 자유로운 삶도 이런 하늘 나라의 희망을 지니고 살 때 가능합니다.
‘그 도성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새 예루살렘의 거룩한 도성의 기초를 이루른 열두 사도입니다.
바로 열두 사도의 기초위에 세워진 새 예루살렘의 실현인 우리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필립보의 안내로 이뤄진 나타나엘과 주님과의 만남이 감동적입니다. 그대로 대화 과정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서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와서 보시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 일명 발토로메오를 설득하는 필립보의 우정이 참 순수합니다.
아, 순수한 이들이 주님을 만나 관상의 기쁨을 누립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이 참 극적입니다.
나타나엘의 평생 영적 삶의 원천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을 주님과 첫만남의 추억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도대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찬사는 없습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바 이런 거짓이 없는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순수와 순수의, 참 사람과 참 사람의 만남이자 구원 사건입니다.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예수님의 혜안慧眼이 부럽고 놀랍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결코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평소 끊임없는 말씀 묵상과 기도로 메시아를 대망했던 나타나엘을 이미 주목한
예수님이요, 때가 되어 서로 만나니 그대로 하느님 섭리의 은총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 믿음을 고백하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이 시작됨을 봅니다.
참나의 실현에, 하늘 나라 꿈의 실현에 결정적인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진정 영적 성장도 주님과 우정의 성장이요 성숙임을 깨닫습니다.
나타나엘은 주님을 찾는 구도자의 롤모델입니다. 말씀 묵상중 나타나엘이 되어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의 깊이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엘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나는 하늘 나라 구원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주님이 하느님과 살아있는 만남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하늘길’이요
‘하늘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늘의 하느님 아버지와 활짝 열린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되는 참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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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신문이 1년에 3번 휴간을 합니다. 설날, 추석, 8월 휴가 때입니다. 지난 8월 초 휴간 때입니다. 코네티컷에 있는 한인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도 몇 번 뉴욕엘 왔었고, 저도 시간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뉴욕이 현대적이고, 도시적이라면 코네티컷의 한인 공동체가 있는 곳은 시간과 공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건물은 20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사적지로 지정되어서 건물의 외관을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고즈넉한 마을의 찻집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습니다. 오래된 건물 사이로 우뚝 솟은 교회가 있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1776년에 있었던 집이 아직도 있습니다. 종탑의 종은 은은한 소리를 내며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를 2000년 전의 시간과 공간으로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나자렛, 타볼산, 아인카렘, 예루살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 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놀라던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보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이 담긴 추억 속으로 여행을 가보면 어떨까요?
신부님께서도 텃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무 막대로 지지대를 만들었는데 신부님은 줄로 지지대를 만들었습니다. 2층에서 내려온 지지대를 타고 오이가 줄기를 감고 있었습니다. 지지대의 높이만큼 오이가 자라는 걸 보았습니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센티미터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센티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와 뮈토스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제 주변에는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맞이하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한분은 4년 선배이시고, 다른 한 분은 4년 후배이십니다. 선배 신부님은 여러 면에 조예가 깊으신 분입니다. 효소를 직접 만들기도 하셨고,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 자격이 있으셔서, 사람들에게 커피에 대한 강의를 하십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집중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이제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후배 신부님은 직관의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신부님과 함께 일을 할 때 보람이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등대지기가 어두운 밤바다를 비추듯이,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집중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전체를 잘 보지 못하는 제게는 배워야할 것들이 많은 분들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길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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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봄"의 신비로 초대합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예수님께서 필립보의 말을 듣고 당신을 만나러 온 나타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러" 오기 전에 이미 그를 "보신" 것입니다.
보는 것은 시각을 통해 감지하는 행위지요. 그저 스치듯 힐끗 보고 이내 잊어버려 의미로 연결되지 못하는 "봄"에서부터, 봄이 앎으로, 사랑으로 이어져 서로에게 영향이 되는 "봄"까지 매우 다양한 층위가 존재합니다. 짧은 순간이었겠지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타나엘을 바라보신 예수님의 "봄"이 바로 후자의 "봄"이었지요. 그가 오기도 전에 예수님은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와서 보시오."라는 필립보의 초대에 예수님을 보러 온 나타나엘이 이미 자신을 봐서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두 존재 사이의 봄이 신비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그분이 나를 보고 아시고, 내가 그런 분을 보고 깨달아 나도 모르게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네가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봄"이, 본 주체와 대상, 서로에게 의미가 된 이는 시각적 "봄"을 뛰어 넘어 보게 됩니다. 그것이 곧 관상입니다. 관상의 "봄" 안에는 앎과 사랑이 구분 없이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깊어갈수록 기도 안에서 "봄"과 앎과 사랑의 구분이 사라지지요.
앞으로 보게 될 일은, 스승께서 보여 주실 표징과 자신들이 수행하게 될 주님의 일, 그리고 스승의 수난과 죽음, 종래에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까지, 여태 보고 안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신비일 것입니다.
나타나엘의 고백은 비록 말 마디가 전하는 바는 손색이 없으나, 그 말 마디를 채우는 그의 깨달음은 아직 설익은 단계입니다. "더 큰 일"을 보고 알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고백한 말의 내용이 스스로의 내면에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봄"은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을 마주뵈옵는 지복직관의 행복에 다다르기 전까지 끝없이 완성되어 가는 여정 중에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한층 더 나아간 "봄"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묵시 21,9)
천사가 묵시록 저자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에서 묵시록 저자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묵시 21,10)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던 도성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자랑이었지만 유다의 멸망과 함께 이민족들에게 유린당해 폐허가 되었지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잊혀진 도성 예루살렘을 다시 정결하고 거룩한 신부로 단장시켜 당신 앞에 세우십니다.
묵시록 저자는 아름다운 신부에게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적힌 열두 성문과,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는 성벽의 열두 초석을 봅니다. 예루살렘은 구약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뿌리가 되는 열두 지파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주춧돌인 열두 사도의 이름 모두를 품에 아우른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임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신부인 도성에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자체로 도성은 이미 순결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찬란합니다. 그 도성을 바라보는 묵시록 저자와 함께, 이를 바라보도록 초대받은 우리 역시 차츰 그 도성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를 "봄"으로써 감동하고 뜨거워져 닮아가고 같아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봅니다. 보면서 알고 사랑하고 영향을 받지요. 관상기도는 그래서 우리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 모상을 끊임없이 캐내고 발굴하는 과정입니다. "봄"이 "일치"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며, 사도들이 그러했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보고 알고 사랑하고 분께 더욱 깊이 머물러 그분을 닮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봄"의 기도로 초대받은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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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거짓이 없는 사람!'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도인 바르톨로메오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나타나엘을 두고 하신 요한복음 1장 47절의 말씀을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해 볼 수 있겠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 저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
'거짓이 없다.' 라는 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
곧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거짓이 없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행위는 내 마음의 창고에 '성령담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신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긴 사람들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의 모습과 또 다시 코로나 등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혼란 속에 빠져있는 우리나라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나타나엘, 곧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사람들, 그런 그리스도인들, 그런 행복한 사람들이 세상과 우리나라 안에 적다는 표지가 아닌가?
하느님의 선물인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면, 그래서 내 마음이 거짓이 없는 깨끗한 마음이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내 뜻 안에 갇혀 있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고, 공동선과 공동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래서 좀 힘들더라도 모두의 이익을 위해 참는 사람이 됩니다.
모두 함께 참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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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이영근 신부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듣고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라고 하며, 필립보의 증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와서 보시오.”(요한 1,46) 라고 확신에 찬 초대를 합니다.
나타나엘은 마지못해 의혹과 편견을 지닌 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두렵고 떨리는 ‘만남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나타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그의 됨됨이와 그가 품고 있는 생각과 소원을 낱낱이 아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 하고 당혹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믿음과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필립보가 부르기도 전에 나를 보고 ‘알았다’는 예지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곧 ‘주시하여 바라보고 계셨다’는 ‘사랑’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곧 주시하여 사랑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시는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마침내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만남의 신비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말합니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합물질의 만남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만남의 신비입니다. 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곧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을 통하여, 하늘과 땅을 이어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여, 우리를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주님,
제 마음에 울려오는 하늘의 이야기를 듣게 하소서.
이미 펼쳐져 있는 당신의 하늘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만남에서 하늘이 열리게 하소서.
우리 안에 펼쳐놓은 당신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이 땅에서 당신이 계신 하늘을 보게 하소서.
이 땅이 당신이 여시는 하늘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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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묵시록 21,9ㄴ-14
요한 1,45-51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답니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겠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면서도 흥미로운 책인 동시에, 성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거나 해석하거나 묵상할 때 꼭 유념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안에는 유다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정통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권위있는 가르침 안에서
읽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어마무시한 메시지를 접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당신 백성을 향해 그분께서 건네시는 희망과 격려 차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이비 목자들과 이단자들이 요한 묵시록을 악용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성경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글자 그대로 종말이 곧 올것이라는 가르쳤습니다.
아직도 종말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치 어린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잘했을 때 칭찬도 하지만, 그릇된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갈때는 강한 질타와 경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두려운 표현들은 그런 사랑의 틀 안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실제로 이 세상 종말과 심판에 관한 장면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세상의 갖은 시련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굳건히 살아가도록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절대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저주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요한 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마지막 날에 반드시 필멸할 것이라는 것, 최종적인 승리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재창조 하실텐데, 새로운 창조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그로부터 샘솟는 위로와 희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2022년 2월 22일 오후 2시 종말이 온다는 식으로 날짜를 특정해서 가르친다면, 그는 백퍼센트 사이비가 틀림없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다시 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광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요한 묵시록 21장 11절)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꼐서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옛 예루살렘 시대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관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새 하늘 새 땅,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감격에 젖어 내려다보는 중에 천상 어좌에서 들려오는 큰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쳐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이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절)
보십시오! 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답니다.
그분께서 몸소 우리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겠답니다.
하루하루 힘겹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또 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또 다시 일어서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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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요한 묵시록 21,9ㄴ-14
요한 1,45-51
착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솔직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없어야만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더욱더 거짓말이 활개를 칩니다.
정부에선 ‘가짜뉴스’를 퍼뜨리면 처벌까지 하겠다고 나옵니다.
잘못된 정보로 정부에서 자신들을 표적으로 삼고, 음성인데도 양성이라고 판정을 내린다고 믿는
사랑의 제일교회 신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불안한 마음에 치료를 받다가 탈출까지 시도해 방역 당국의 애를 먹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전광훈 목사는 정부에서 자신들을 테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교회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오는 날엔 코로나가 절대 번지지 않는데 왜 코로나와 광화문 집회를 연결하느냐고
병실에서 유튜브로 따집니다.
지금 정권에서 이것으로 독재를 유지하려고 우려먹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신이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수준까지 올라온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하는 거짓말을 본인들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죄가 없어질까요?
그들 때문에 온 나라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거짓말에 대한 의식을 새로 해야 합니다.
는 나라가 거짓말 천국이 되어가는 이유는 ‘착한 거짓말’을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자녀들도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선의의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거짓말일까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입니다.
바늘도둑도 도둑인 것처럼, 작은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안 좋은 것이라면 뿌리부터 잘라야 합니다.
제가 음식 대접을 받고 맛이 없을 땐 그저 “먹을 만하네요!”라고 말해줍니다.
먹을 만하니까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맛이 없는데 굳이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상대를 기쁘게 해 주는 말이기는 하나, 그러면서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나를 믿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합을 펼칠 때,
대부분 갤럽조사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압승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빅데이터 통계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트럼프와 힐러리를 검색한 숫자를 세어보니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힐러리를 응원하면서 속으로는 트럼프를 뽑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트럼프를 뽑았다고 하면 정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갤럽 조사에서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을 마친 사람들이 감옥에 갔을 때 “누가 저 사람 뽑았어?”라고 물어보면 뽑아준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선이 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합니다.
거짓말은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말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나무입니다.
거짓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왜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고 했을까요?
자신들이 죄를 지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십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을 심판하고 또 자신들의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고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죄인으로 심판하는 분도, 나를 선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하느님 대신 나 자신이 심판자이고 구원자가 되려고 하느님처럼 높아지려는 방법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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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억 신부님 – 보완 (10:50)
200824.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신앙인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 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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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 – 10:55 보완
20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와서 보시오. ♣
우리 교회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고,
평소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요한 1,48).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셨습니다(요한 1,47).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필립보가 메시아 강생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한 일은,
동방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일과 같고, 또 필립보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일은, 그 별이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한 일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별처럼 빛난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과 같은 일을(선교활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별처럼 빛나는 일은 ‘온 삶’이 신앙의 빛으로 가득 차서 빛나는 것입니다.
말만 잘해서는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삶 전체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빛이 나야 합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5-46).”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은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필립보의 말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입니다(요한 1,41).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는 말은,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요셉의 아들인 예수로만 알고 있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이신 분이오.” 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성경에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은 없소.”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으로 알려졌다면,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있기 때문입니다(미카 5,1).>
“와서 보시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라는 권고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다음에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쌓아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만나서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만남’은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기도와 묵상은 예수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마태오복음 8장에 나오는 ‘백인대장’과
마르코복음 10장에 나오는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소문만 듣고서 믿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7,27-28).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믿음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인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완전하게 아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고 ‘진실한 사람’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이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필립보가 너에게 증언하기 전에”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 공부를 하던 관습에서
온 표현인데, 여기서는 “나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너의 심정을 전부터 알고 있었고,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너의 심정과 생활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라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알고 계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신앙인인지, 그리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고, 그를 제자로 삼으시려고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필립보가 그를 예수님께 인도한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곧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는
“내가 너의 심정과 생활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서”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51절의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리는 일”입니다.
여기서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뜻이고,
이 말은, 당신의 신성(神性)을 암시하신 말씀,
즉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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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신부님 - 보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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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 출신. 제자 필리포가 예수님께 인도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나타나엘'로 불림. 예수님께서 그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요한 1,47). 교회 전승은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주님 승천 후 인도아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성전의 성벽의 초석에 어린 양의 열 두 사도 이름 기록됨과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은 이스라엘의 거짓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천사가 요한에게. "이리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 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묵시 21,9-14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학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
나타나엘이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야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 45-51
실천하기
제자들은 메시아를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희망하여 사람들을 인도하고 연결하였으며, 예수님 먼저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는 '관심과 만남'의 공동체'입니다.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관계와 관심을 통해서, 곧 관계의 다리(bridge)로서 만났습니다.
다리 놓음. 그 관계와 만남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짓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필립보와 동행한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 관계의 다리를 놓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관심과 앎으로 복음의 일꾼으로 삼았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희망하며 연결하고 동행하며, 관심과 관계를 통하여 주님의 일꾼으로 인도합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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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가톨릭평화방송 영상
'2020년 8월 24일 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매일미사
_황인수 이냐시오 신부 집전'
황인수 이냐시오 신부( 성 바오로수도회 준관구장 )
# 신부님 강론은 10:44 부터 19:52까지 입니다.
* 가톨릭교우회 밴드 (카타리나. 2020년 8월 24일 오전 7:38) 에서 영상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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