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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 마5:1-12
이천년전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첫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심으로 천국을 선포하신 후에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팔복산 정상에서 팔복의 산상보훈을 선포한 것을 생각하면서 산상수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던 팔복산은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사이에 위치하며 4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팔복을 설교한 장소를 기념하여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고 오늘날의 팔복교회는 1937년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팔복산 정상에 세운 것으로, 교회 내부는 여덟가지 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여덟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복의 내용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은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급이 큼이라.’로 끝을 맺는다.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인 갈릴리에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고(마4:20).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제자 삼습니다.(2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회당을 다니면서 가르치시고 천국을 선포하시면서 온갖 종류의 질병을 고치고 마귀 들린 자, 미친 증세가 있는 자, 마비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23-25). 하늘의 이적과 표적이 왕의 권위로 땅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무리들이 에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가 모인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그 무리에게 설교를 합니다. 외적으로 본다면 이 시기는 예수님이 최고로 성공하신 시기였는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마태복음 5장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을 취하셨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피하셨다는 의미인데 왜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셨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은 진실로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만을 가르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주 산에 가셨던 산은 어느 정도 외진 산으로 시끄러운 군중을 뒤로하고 고요한 정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시는 것이며 또 산으로 가시는 것은 쉽게 열광적인 무리들과는 다르게 진지하게 예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해 산으로 가셨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산상수훈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고, 제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것이다. 특별히 마태복음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이 총 다섯 번 나옵니다.
첫째는 산상수훈(5장-7장)입니다.
둘째는 제자 파송의 교훈(10장)입니다.
셋째는 천국 비유(13장)입니다.
넷째는 용서의 교훈(18장)입니다.
다섯째는 종말론적 교훈(23장-25장)입니다.
1.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황금률
(마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를 시작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천국이 그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신약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팔복과 주기도문 등 신앙인의 삶의 표준을 제시해 주신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황금률이라고 불리우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황금률이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마7:12).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인간관계에서 이웃을 섬기며, 나그네와 이방인을 배려하고, 선행을 베푸는 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남을 대접하라는 율법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 배경과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세상 모든 종교에서도 똑같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마5:18-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성경66권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중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다 지켜 행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요 다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것은 지켜야 할 황금률이고 어느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를 지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약함으로 말씀 그대로를 다 지키지 못하기에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다 감추어진 비밀이요 진리입니다. 그 감추어진 비밀을 깨닫게 될 때 구원받는 진리가 되고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의 말씀을 다 실천하고 그 영적 진리를 다 깨달을 순 없을지라도 때가 되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의 말씀들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암송하느냐보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바로 깨닫는 믿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2. 예수님의 산상수훈 요약(마태복음 5, 6, 7장의 황금률 모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형제에게 노하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욕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하지 말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하지 말라.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리리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마태복음 5-7장은 흔히 ‘산상보훈’이라 부르는 주님의 첫 번째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는 것은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실제는 가버나움 근처의 언덕으로 예수님은 이 호수 주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무리들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일반적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후 공생애 초기에 하신 설교로 봅니다. 산상수훈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인간 윤리의 최고봉과 같은 수사를 붙이지만 실제는 천국 시민의 삶으로 기도, 구제, 물질관, 이웃사랑 실천과 같은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핵심은 결코 윤리적 내용이나 대인관계가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복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으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주제입니다.
3.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합니다
팔복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이 받는 복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면 五福 아닙니까? 壽富康寧攸好德考終命(수부강령유호덕고종명)이 아닌가? 장수하고, 부자 되고, 평안하며 건강하고, 덕이 많아 자식을 많이 낳고 명대로 살고 죽는 것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법 그럴싸하지만 오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오래 산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치매나 질병으로 오래 사는 것보다 짧게 살더라도 주안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늘 불안하면 만사가 다 귀찮지 않나요? 부자가 된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 나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 많다고 행복합니까?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잘 죽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생을 가지고 천국가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진짜 복은 죄인이 죄 용서받고 천국에서 주님과 영생하는 것이 진짜 복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복의 개념은 (시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주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 (시128:1-4) 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러 앉은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이 땅에서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 잘 믿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알고보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과 예수님께서 주신 팔복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오복은 육체 위주인데, 팔복은 영혼 위주입니다. 오복은 물질이 위주인데, 팔복은 영적 은사 위주입니다. 오복은 현세 위주인데, 팔복은 내세 위주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오복은 구원 없는 복인데, 팔복은 구원을 얻는 복입니다. 오복은 세상 사람들이 간혹 누리는 복인데,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 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복입니다. 오복 좋아하지 마시고, 팔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 하신 말씀들을 한 절씩 더듬어 살펴보겠습니다.
(마5:3)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 하시는 영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사람의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하는 외식하는 의와는 달리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드릴 것이 없는 빈곤 상태를 말합니다. 하늘의 왕국의 시민이 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읽어보겠습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판단의 공의를 베풀어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
율법을 조목조목 지켰다고 외식하는 우월감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들과 인간의 무지와 무능함을 인정하고 속 깊은데서 나오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멸시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탄식하고 핍박과 연약함에서 오는 악한 일들을 탄식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은 '영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하늘의 왕국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선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갈급해야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5:4)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애통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아니면 신체적인 약함 때문에 애통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감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고 말한 정확한 의미는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며 애통하는 자들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대면하면 우리는 자신의 처절한 무능과 절망을 경험하면서 필연적으로 애통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자기 죄를 주님앞에 자복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내 안에 숨어있는 죄에 대한 탄식을 깨닫고 하나님께 구하는 마음입니다. 죄를 시인하고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마음을 자백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5:5)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온유하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온유함”이란 말은 겸손함, 부드러움 등의 의미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온유함이란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모습이고 신앙적 차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따르므로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복종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순종의 자세가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닙니다. 성경의 온유함이란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통제되는 능력입니다.
(민12:3) 이제 그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모세는 광야 40년동안 민족들을 통솔하는 지도력은 연약함이 아니라 온유함 속에서 나오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복음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는다면 땅을 상속받을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어떻게 의로와 질 수 있는지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죄로 인해 고통받거나 부당하다고 느끼는 답답함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영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마23: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는 말씀은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도 하나님앞에서는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5:7) 긍휼을 베푸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함을 받은 것에 감격하여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속죄를 받아, 마음이 깨끗하게 된 사람은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귱휼을 베푸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18:25)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는 주께서 친히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께서 친히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는 믿어야 합니다. (갈6:7,약2:13)
(마5:8)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요.
순수하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불순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진실한 마음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의 시편에 나타난 내적 상태로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시15:2) 곧바르게 걷고 의를 행하며 마음속으로 진리를 말하는 자,
(마5:9)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이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
화평은 내적이며 좁은 의미이며 평화는 외적이고 넓은 의미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으로, 타인을 화평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민족이나 국가간에 평화는 화평이라는 내적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는 '화평의 복음을 예비한 것으로 너희 발에 신고'(엡6:15) 라고 내적으로 심겨진 복음을 언급합니다.
(마5:10)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
11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란 예수님을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다면 12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대언자들도 다 이렇게 핍박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주를 믿다가 받는 고난이 축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이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주를 위해 죄와 싸우는 사람입니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과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만 비교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잠깐의 복과 영원한 복, 사라질 복과 지속되는 복, 육체적 감각적인 복과 영혼 내면의 복, 마약과 같은 마취성의 복과 끝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복, 이렇게 보면 팔복은 인간적인 윤리로 얻는 복이 아니라 복음에 기초한 구원 받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복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 받은 사람의 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천국 시민이 되기 위하여 '의를 선택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핍박과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거룩함으로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핍박받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이 참된 복음을 제시하게 되면 종종 조롱거리로 몰립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딤후3:12) 그러한 자들에게 하늘의 왕국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내적 성품을 말씀하는 이유는 하늘의 왕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1) 팔복에 대한 해석
팔복은 산상수훈의 핵심인데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해석하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도리인데 산상수훈은 결코 대인관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신앙이 근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의 핵심은 구원의 복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팔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 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이 팔복안에 모든 복들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복의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의 주신 복을 받습니다. 윤리의 실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다고 복이 되겠습니까?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저주를 받는 채로 잠시 이 세상에서 내가 잘 되겠다고 발버둥친다면 과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팔복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인간이 복을 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해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서 죄용서 받고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의로움을 얻으려고 애통하려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만이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심령이 가난한 자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심령이 가난한자가 받는 복입니다. 첫 번째로 강조할 것은 심령(pneuvmati)은 다른말로 마음, 또는 영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영혼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다 받을수 있지만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면 어떤 복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복을 누리는 주체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현대인들은 심령은 약하고 육체는 강합니다. 요즘 살인, 강도, 강간같은 강력 범죄가 빈번합니다. 이런 범죄자들은 심령이 약한 사람들에게서 발생합니다. 심령이 약한 자들은 겉보기에는 강한 것 같지만, 유혹에 약하고, 의지가 약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개 두 마리를 길렀는데 한 마리는 진돗개이고, 한 마리는 똥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똥개는 사람들이 집에 들어갈 때부터 숨이 넘어갈 듯이 짖어대는데 진돗개는 힐끗 쳐다보고 잠잠하다고 합니다. 겁이 많은 개일수록 짖어 대는데 강한 놈은 짖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람도 그렇습니다. 영혼이 강한 사람은 겉으로 요란을 떨지 않고 가진 것 자랑하지 않고, 힘 자랑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심령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정말 복된 삶을 원하신다면 외적인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고, 우선 내적인 심령부터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영혼은 건강하십니까? 만약 내 영혼이 건강치 못한다면, 어떤 것을 갖춘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어떤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신이 드릴 것이 없는 정말 빈깡통같은 신세임을 통렬히 깨닫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복받은 사람은 구원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은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요?
(Ⅰ) 죄를 회개하고 죄 용서받은 사람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한 자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빈곤은 경건과 구원의 보증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마음의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여야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의 필요성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죄가 무엇일까요?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ἁμαρτία)인데 표적을 맞추지 못한 채 과녁을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이 목적을 빗나가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 죄에서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살며 그 마음속에 이 세상의 지식이나 명예나 인기나 재물이나 권세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을 살기 위하여 빗나간 인생의 목표를 바꾸고 자기를 부인하고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왕으로 모시고 살기 위하여 무엇을 비우고 버려야 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세속적 가치를 내려놓거나 아니면 예수님 다음의 순위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내 마음속에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을 다 버리는 믿음의 결단을 하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예수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3) 날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바로 천국의 실존을 믿고 그 천국을 날마다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함을 알지 못하며 다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부귀영화와 쾌락과 안일함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날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이 천국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천국은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천국의 가치가 최고의 가치며 천국을 소유하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의 자리에 미치지 못하는 함량미달의 죄인들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지나간 날들의 삶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의 목표와 표준에서 벗어난 삶을 회개하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22:12)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에 이르러 완성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여러분!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로움이 없는 의의 빈곤자 입니다. 선행과 의로움보다 죄와 불의와 악행이 더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사랑의 극빈자이며 지혜의 빈곤자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능력의 빈곤자이므로 마귀유혹에 약하고, 죄에 약합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함을 통렬하게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신앙에 대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의의 갈망, 사랑의 갈망, 생명의 갈망, 믿음의 갈망을 할수록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됩니다. 마침내 속죄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 자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심령 가난 자체가 천국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심령이 가난함으로 인해 구원을 갈망하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에 결국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4)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산상수훈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시작하였듯이 여덟 번째도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을 받아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면서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복도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받는 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좀 깊이 생각해보면 그 천국의 내용은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천국이란 미래적 천국과 현세적 천국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래적 천국이란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국을 말합니다. 그곳에서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고 기쁨과 생명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이러한 미래형 천국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줍니다. 현재 형편이 어려워도 견디면서 죄와 싸우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현재를 강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현세에서는 박해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을 현세적 축복은 어떤 종류의 풍성함과 풍족함입니다. 구체적으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혼 속에 사랑의 빈곤, 기쁨의 빈곤, 소망의 빈곤, 의로움의 빈곤, 선함의 빈곤, 평안의 빈곤이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되면 상황은 전혀 바뀐 것은 없으나 심령은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전에 없던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생명력이 있고 삶의 의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서 내 영혼에 천국의 선물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심령이 가난함에서 얻었던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0). 한 마디로 “뭔가 보배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절대로 포위당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 사람, 절대로 넘어지거나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 절대로 망하지 않는 사람, 생명이 넘치는 사람!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에 정말 이 땅에서도 심령에 천국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충만”입니다. 사랑이 충만합니다. 지혜가 충만합니다. 능력이 충만합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위로가 충만합니다. 평강이 충만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이 땅에서 현세적 축복인 줄 믿습니다.
(5)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예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아 가셨을 때 만난 한 여인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 (눅7:38). 이 여인은 자기가 지은 죄를 인하여 무척 괴로워하다가 주님을 만난 후 통회하고 상한 심정을 주님 앞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심령이 부한 자>였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를 속으로 비판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수 없음을 알고 둘 다 탕감하여 주였다. 시몬아 네 생각에는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바리새인 시몬은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하니 주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내게 감람유를 붓지 아니했으나 저는 내게 향유를 부었느니라. 내가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눅7:35-50)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인자가 올 때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시면서, 자기를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에게 경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드셨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랑스럽게 뽐내면서 크게 남이 들으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 같이 보입니까? 모든 계명을 지키고, 금식 생활을 정기적으로 하며 십일조를 빠뜨리지 아니하며 바치고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아니하였답니다.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넘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훌륭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문제는 자신은 의롭고 세리나 죄인들을 멸시하는 태도는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부요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입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뿐 아니라 몇 배나 더 받아내어 치부하던 자들입니다. 민중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자들이 세리입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서 바리새인에 비하면 너무도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판단하시기에는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의롭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차이가 납니까? 세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내가 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무에게 관심을 받지 않으며, 인기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둘째 아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남의 돼지 움막에서 살며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고향생각을 하며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며 하늘을 쳐다보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의지할 곳은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에 적신으로 태어났고 돌아갈 때도 적신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잠시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이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정리를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마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죄 많은 인생인 줄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악하고 추한 죄인을 조건 없이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신 은혜에 너무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들도 역시 전적인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하고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시42편에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하는 사슴처럼 하나님께 대해 너무나도 목이 말라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만족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 심령이 가난해지면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심령이 가난해지면 이제 작은 것에도 감사가 주어지므로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사후세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심령이 가난한 하나님 백성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산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만 천국의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경험하며 산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은혜의 왕국의 축복에 대한 시편 기자들의 고백을 보자. 심령이 가난한 자를 우리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주를 찾을 때, 주님이 그를 생각하시고 도우시고 환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의 임재가 함께 하기에 그 심령에 특별한 천국을 맛보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끝으로 천국에 대해 몇 마디 더 언급하겠습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의 왕이신 주님의 다스림입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 주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 주님이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면 교회가 천국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 실패의 곳이라도 천국이 됩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천국이 됩니다.
- 고통과 시련의 장소가 천국이 됩니다.
- 가난과 초막에 살아도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산상설교 안에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과 교훈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산상설교를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사상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예수님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를 깊이 바라보면 볼수록 예수님의 얼굴이 더 분명하게 보입니다.
산상설교는 기독교인의 자화상입니다.
산상설교 안에는 기독교인이 누구인가?
기독교인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며,
기독교인의 세상 속에서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뚜렷하게 스케치되어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면,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내 모습의 원형이 무엇이며,
지금 일그러져 있는 내 추악한 모습은 어떠한지를 알게 됩니다.
산상설교에 비추어 내 모습을 점차 성형해 가노라면 언젠가는 내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게 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윤리의 샘입니다.
묵상의 두레박으로 퍼내면 퍼낼수록 생수와 같은 윤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이 처음 산상설교를 말씀하신 이후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는 이 진리의 광산에서 수많은 보석들을 캐내었고,
이 윤리의 샘에서 수많은 생수를 길어 마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도덕적, 정신적 경지중에 최고로 높은 경지이어서 비폭력 무저항의 시위로 유명했던 간디조차도 크리스쳔은 싫어하지만 예수님과 그 산상수훈의 윤리만은 존중한다고 하였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윤리, 오른뺨을 맞으면 왼뼘도 내어 주는 윤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이런 윤리를 가지고 살면 과연 우리는 생존할 수나 있을 것인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산상윤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자신의 본성을 부인하면서 자기를 죽일 수 없다.
우리 크리스쳔에게 이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공정하신 그분을 믿는 그 믿음이다. 사랑할 수 없는데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용서할 수 없을 때도 용서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나의 상황을 반전시키신다는 것이 땅에서나 아니면 천국에서라도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라는 점, 그리고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원수를 대신 갚아주실 것이라는 점 등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산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들 심령이 가난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면서 주님 앞에 “주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기도하며 날마다 주님 앞에 회개하여 청결한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천국을 소유하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서 날마다 우리 심령에 천국의 기쁨, 감사, 영광, 위로, 헌신,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