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구옥순
젊어서는 큰 나무로
온 산을 파랗게 품기도 했고
늙어서는
난로에 들어가 환하게 웃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하였고
이제는 보드라운 먼지로
씨감자 상처 어루만지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
꿈꾸는 작은 씨앗 다독일 테지.
-《동시발전소》 (2023 봄호)
ㄱ
김선일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글자판
맨 앞에서
허리 굽혀 인사하는
글자 나라
문지기
-《동시 먹는 달팽이》 (2021 겨울호)
지하철
김옥애
땅 아래
어두운 길을 달리는 기차
지하철 창문에
군데군데 시가 써져 있다.
글과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이 써져 있다.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동시집 『숨어 있는 것들』 (2023 청개구리)
벚꽃 잎 수레바퀴
문삼석
벚꽃 잎은
수레가 좋은가 봐.
바람이 날개를 달아 주면
서둘러 땅으로 내려가지.
그리고
신나게 굴러가지.
새하얀
수레바퀴가 되어
똘또르! 똘또르!
-《시와 동화》 (2022 여름호)
흙꽃
설용수
이른 봄엔
흙도 꽃으로 피어난다.
농부아저씨가 논을 갈면
쟁기 끝에서
둥글둥글 피어나는
흙, 흙꽃
흙꽃에도
향기가 있다.
자연을 가득 담은
풋풋하고 싱그러운 내음
흙꽃은 그 향기로
벼를 키운다.
우리들도 키워낸다.
-동시집 『누구에게 말해요?』 (2021. 만인사)
혼자가 아니야
우승경
싹뚝,
잘려 나가
밑동만
남은 나무
버섯이
촘촘하게
옷을
입혀 주는 중이다
-《동시 먹는 달팽이》 (2023 봄호)
사람이 되고 싶다던
유하정
로봇과
뱀파이어가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
난 로봇이야
난 뱀파이어야
자신을
인정하는 것
-《동시발전소》 (2022 겨울호)
새벽달
윤희순
출근하는
아빠 어깨 위로
떠나지 못한 달이
하얗게 떠 있다
어둠을 여는 아빠
힘내!
응원하려고
밤새 아낀 달빛
아빠를 향해 비추고 있다.
-《열린아동문학》 (2023 봄호)
할미꽃
천선옥
햇살이, 바람이, 달빛이, 별이
할미하고 부르며 매일 놀러 온다
오늘은 빗방울까지
할미 등을 오른다
지나가던 개미가 한마디 했다
참, 철없는 애들 때문에 허리 아프시겠어요
괜찮아, 그 애들 덕분에 살맛 나는걸
손가락 횃불
황남선
엄지가 고개 들 때
남은 넷은 몸을 접어
최고가 되었습니다.
새끼손가락이 고개 들 때
약속이 되었습니다.
늘 숙이기만 하던 셋이
꼿꼿이 일어섰습니다.
엄지도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거머쥐자, 손은
미얀마의 봄을 부르는
횃불이 되었습니다.
-《한국아동문학》 (2021 제38호)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