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연보
인묵 김형식
ㅡ.1844년: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0월 15일에 태어남, 작센 지방 뢰켄의
목사였던 카를 루트비히 니체와 프란치스카 욀러 사이에서 첫째 아이로 출생.
ㅡ.1846년:여동생 엘리자베스 니체 7월 10일에 태어남.
ㅡ.1848년:남동생 루트비히 요제프 니체 2월 27일에 태어남.
ㅡ.1849년: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 7월 30일에 '뇌연화증'으로 사망.
ㅡ.1850년:남동생 루트비히 요제프 1월 4일에 사망.
나움부르크로 가족이 이사한 뒤 공립초등학교에 입학.
ㅡ.1851년:베버 교수가 운영한 개인 기관에서 학습.
ㅡ.1854년:나움부르크 기독교 학교 입학.
ㅡ.1858년:어머니 프란치스카가 니체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나움부르크
의 바인가르텐 18번지로 이사. 니체는 슐포르타에서 가을부터 학업 시작.
ㅡ.1860년:친구들인 구스타프 크루그, 빌헬름 핀더와 게르마니아라는 문화 모임 창단, 에르빈 로데와 평생의 우정을 다짐.
ㅡ.1864년:9월에 술포르타를 졸업한 뒤 10월에 본대학교 입학하여 신학과 고전문헌학 전공, 프랑코니아라는 청년 단체에 가입.
ㅡ.1865년:본대학교를 떠나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 신학 공부를 관두고 프리드리히 리를 교수 밑에서 고전문헌학을 공부하고 쇼펜하우
어를 알게 됨. 쾰른의 사창가에 가게 됨.
ㅡ.1867년:군 복무. 제4 야전군 소속, 제2 기병대 훈련 시작.
ㅡ.1868년:말 사고를 당함,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이
스터징거」를 듣고 매료됨. 문헌학에는 점점 반감이 쌓임. 11월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남 (24세)
ㅡ.1869년: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객원 교수로 임명됨. 프로이센 시민권 포기, 루체른의 트리브쉐 저택에 방문하여 바그너와 그의
정부였던 코지마 폰 뷜로를 만남, 필라투스산에 오름. 《음악 정신에서 나온 비극의 탄생》에 관한 노트 작성. 니체가 트리브쉔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코지마가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를 출산함, 그해 크리스마스 트리브에서 보냄.
ㅡ.1870년:정교수로 임명됨, '고대 악극', '소크라테스와 비극', '오이디푸스왕'에 관한 공개 강연을 선보임, 7월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여 위생병으로 지원함, 부상병들을 간호하는 과정에서 디프테리아와 이질에 걸려 입원했다가 바젤로 돌아옴. 신학 교수였던 프란츠 오버베크와 친해짐. 바그너가 코지마와 결혼함.
ㅡ.1871년:바젤대학교 철학과 학과장 자리에 지원하나 거절됨. <음악 정신에서 나온 비극의 탄생> 집필, 프랑스-프로이센 종전 제2제국
선포되고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함.
ㅡ.1872년:바그너와 마차를 타고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초석을 놓는 행사에 참석함. <비극의 탄생>이 출판되나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
뵐렌도르프의 혹평을 받음. 에르빈 로데가 니체의 변호에 나섬. 겨울 학기 그리스와 라틴어 수사학 강의에 고전학 학생이 아무도 등록하지 않음, 바그너와 코지마는 트리브쉔을 떠나 바이로
이트로 이사함,
ㅡ.1873년:'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을 쓰기 시작하나 끝내지 못함. 파울레와 만남. <반시대적 고찰>의 1부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이자 저술가>가 8월에 출간됨. 바이로이트의 기금 모음을 위한 위협적인 어조의 '독일인에 대한 호소문'을 작성하나 거부당함,
ㅡ.1874년:《반시대적 고찰>의 2, 3부인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출간,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 전편을 완
성하고 니체에게 바이로이트에서 여름을 함께 보내자고 초대함, 니체는 검은 숲에서 요양함.
ㅡ.1875년:<반시대적 고찰>의 4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를 쓰기 시작함. 좋지 않은 건강에도 계속 강단에 섬. 엘리자베스가
바젤로 와서 집안일을 도와주며 니체를 돌봐줌. 평생의 조력자인 하인리히 쾨젤리츠(이후 페터 가스트로 개명)를 만남, 겨울 동안 건강이 극히 악화됨.
ㅡ.1876년:바이로이트 축제 개막식에 맞춰서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
그녀> 출판, 루이제 오트와 연애 감정을 느낌. 바이로이트를 갑자기 떠나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쓰기 시작함. 마틸
데 트람페다하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함. 10월에 바젤대학교에서 병가를 받고 제노바로 가 처음 바다를 봄,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 파울 레와 함께 소렌토로 감. 볼테르, 몽테뉴의 책을 읽음.
바그너와 마지막으로 만남.
ㅡ.1877년:소렌토에서 5월 초까지 지내고 카프리,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방문, 오토 아이저 박사에게 건강 검진을 받고 눈 상태가 매우나쁘다는 진단을 받음, 엘리자베스에게는 집안일을, 페터 가스
트에게는 대필 도움을 받아가며 가을부터 강의를 다시 시작함.
ㅡ.1878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해 바그너에게 보냄. 바그너는 파르지팔」 대본을 완성해 니체에게 보냄. 하지만 두 사람 다 서로의 작품을 좋지 않게 여김. 특히 바그너는 <바이로이트특보>에서 니체를 비난함. 엘리자베스는 나움부르크로 돌아가고, 니체는 오버베크 부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함.
ㅡ.1879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2부로 '여러 가지 생각과 잠언'을 출판, 건강 문제를 이유로 5월에 바젤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연금으로 6년간 3천 스위스프랑을 받음 (나중에 더 연장됨).'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집필 시작. 그해는 118일간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고 기록되어 있음. 나움부르크로 돌아가 정원사가 되기로 계획함.
ㅡ.1880년:티롤 남부를 여행하고 가르다호가 있는 리바에서 페터 가스트를 만남. 두 사람이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함. 이곳저곳 여행하며 한 해를 보낸 뒤 제노바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함. 《여명》집필.
ㅡ.1881년:레코아로, 코모호, 생모리츠 일대를 계속 여행함. 스피노자를 알게 됨. 처음으로 실스마리아를 방문하고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림, 차라투스트라를 언급하기 시작함. <여명> 출판, 제노바에 갔을 때는 콜럼버스에게 동질감을 느낌,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처음으로 봄.
ㅡ.1882년:타자기를 접함. <즐거운 학문》 출판, 메시나를 여행하며 <메시나의 전원시>라는 시를 씀. 4월, 로마에서 루 살로메, 파울레와
만남, 루는 니체, 레에게 세 사람이 동거하는 '성스럽지 못한 삼위일체' 계획을 제안함. 니체는 오르타 언덕에서 루에게 청혼하지만 거절당함, 니체, 루, 레는 바젤에 가서 그 유명한 사진을 찍음, 니체는 트레브센으로 루를 데려감. 바이로이트로는 엘리자베스 루와 동행하지 않고, 타우덴부르크에서 그들을 다시 만남, 루에게 영원 희귀 사상을 말해줌. 어머니, 여동생과 의절함. 세 사람이 파리에서 공부하며 한집에서 살기로 했던 '성스럽지못한 삼위일체' 계획은 루와 레가 니체를 따돌리고 달아나며 무
산됨, 니체는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복용하고 편지에서는 자살을 언급함.
ㅡ.1883년:1월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완성함, 바그너가 2월에 베네치아에서 사망함.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2부와 3부를 실스마리아와 니스에서 각각 완성함, 엘리자베스는 반유대주의 선동가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약혼 계획을알림,
ㅡ.1884년:《차라투스트라》의 3부 출판, 책들이 팔리지 않아 출판업자와 갈등을 겪음, 메타 폰 잘리스, 레사 폰 시른호퍼와 만남, 자신을 폴란드 혈통이라고 믿음. 엘리자베스와는 화해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4부를 쓰기 시작함.
ㅡ.1885년:자비로 《차라투스트라》 4부를 소규모로 출판함, 엘리자베스는 푀르스터와 결혼, 니체는 아버지의 묘비를 새로 장만함, 《선악의 저편: 미래 철학의 서곡> 집필,
ㅡ.1886년:<차라투스트라》 4부 이후에 나온 모든 책처럼 《선악의 저편> 개인적으로 출판합, 출판업자 에른스트 빌헬름 프리취는 니체 초기작들의 판권을 사서 <비극의 탄생>, <여명)을 재발행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2부 '여러 가지 생각과 잠언'에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를 포함하여 신판을 발행. 프란츠 리스트가 바이로이트에서 사망함. 엘리자베스와 베른하르트 푀르스터
는 파라과이로 가서 '순수한 아리아인 혈통'의 식민지, 누에바 게르마니아를 건설함.
ㅡ.1887년:니스에서 지진을 경험함. 프랑스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음. 루 살로메는 프리드리히 카를 안드레아스와 약혼.
니체는 루가 써준 시 <삶에 대한 찬가>에 곡을 붙이고 악보집을 펴냄. 공연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함. 「파르지팔의 곡
을 듣고 매료됨. <도덕의 계보: 하나의 논박서》를 출판하고, 《여명》, 《즐거운 학문》의 증보판을 다시 출판함.
ㅡ.1888년:게오르그 브라네스가 코펜하겐에서 그의 저서를 주제로 강연한 이후, 니체는 마침내 대중의 찬사를 받음. 스웨덴 극작가인 아
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서신 교환, 그는 나중에 니체 철학에 영향을 받은 극을 씀. 니체는 토리노로 가게 되고 거기서 《바그너의 경우: 음악가의 문제》를 집필함. 《힘에의 의지》를 쓰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이후로 <우상의 황혼: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법》, 《그리스도: 기독교에 대한 저주>, 그리고 마지막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
니체 대 바그너: 한 심리학자의 파일로부터>를 잇달아 써냄. 1880년 대에 썼던 시들을 모아서 (디오니소스 찬가>라는 제목으로 묶음, 기괴한 내용의 편지를 쓰면서 점점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함.
ㅡ.1889년:1월 3일 토리노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짐, 오버베크가 스위스로 데려옴. 매독균에 의한 진행성 마비로 진단받음. 예나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짐. 《우상의 황혼>이 1월 24일에 출판되어 나옴. 파라과이에서는 베른하르트 푀르스터가 자살함, 엘리자베스는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분투함.
ㅡ.1890년:병원에서 나와 나움부르크의 어린 시절 집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음. 정신병 중세와 진행성 마비가 더 심해짐. 판단력과 언어 능력을 모두 잃음.
ㅡ.1896년:유럽을 휩쓴 아방가르드의 열기로 그의 책들이 큰 주목을 받게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교향시로 만들어 초연함,
ㅡ.1897년:4월 20일 프란치스카의 사망 후 엘리자베스는 니체와 그의 글들을 바이마르로 옮기고 문서 보관소를 세움.
ㅡ.1900년:8월 25일 니체 사망. 그의 시신은 고향 뢰켄의 가족묘에 안장됨.
ㅡ.1901년: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유고를 임의로 편집하여 《힘에의 의지>초판을 냄.
ㅡ.1904년:엘리자베스가 《힘에의 의지> 내용을 크게 늘려서 '결정판'을 출판함.
ㅡ.1908년:니체의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가 마침내 출판됨. 엘리자베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언급은 삭제되어 있음.
ㅡ.1919년:열정적 나치 당원인 엘리자베스의 사촌 막스 윌러가 니체 문서보관서의 책임자로 임명됨.
ㅡ.1932년:무솔리니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엘리자베스는 무솔리니가 공동 집필한 5월의 광장을 바이마르 국립극장에서 상영하도록 추진함. 이 공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엘리자베스의 좌석을 찾아가 그녀를 만남.
ㅡ.1933년:히틀러가 니체 문서 보관소를 방문함.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지팡이를 그에게 선물함.
ㅡ.1934년:히틀러가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문서 보관소에 방문함. 니체흉상을 바라보는 사진을 찍음.
ㅡ.1935년:엘리자베스 사망, 히틀러가 장례식에 참석하여 화환을 내려놓
음. 엘리자베스는 원래 니체를 안치했던 가족 묘의 가운데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안치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