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별러 드디어 보았다. 코로나-여파의 자율 입장이라 안내원도 없는 상영관에 들어서니 관객이라곤 커플 한 쌍, 친구 한 팀에 나까지 총 5인. 세 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이 부담이었지만 오붓이 즐길 수 있는 관람이었다.
영화 《패왕별희》 (Farewell My Concubine, 覇王別姬)
첸카이거 연출. 1993년 12월 개봉. 원작은 이벽화의 동명소설. 제4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2020년 5월 재개봉.
주요 인물
청데이程蝶衣 : 장국영
단샬루段小楼 : 장풍의
주샨(菊仙) : 공리
간략 줄거리
1925년 베이징의 경극학교. 과묵하고 내성적인 미소년 도즈(데이)와 그런 두지를 듬직이 지켜주는 시투(샬루). 엄격한 사부 밑에서 그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극을 배운다.
1937년 중일전쟁. 데이와 샬루, 당대의 경극 배우로 등극. 샬루는 무도한 일본군 장교를 폭행한 죄로 갇혔다가 데이와 원대인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한편 샬루가 홍등가의 유명한 창녀 주샨과 약혼을 하게 되자, 현실에서도 샬루만 의지했던 데이는 배신감에 무너져간다.
1945년 일본 패망. 국권은 회복되었으나 폐허 위의 경극은 그저 광대놀음에 불과했다. “일본놈들도 너희 같진 않았다.” 경극을 우습게 보는 국민당원들에 일갈하는 샬루. 공연은 난장판이 되고 와중에 쥬샨이 유산을 한다. 데이는 일본군 위문공연의 죄목으로 기소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다행이 형이 확정될 찰나 경극을 보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고위 당원 덕에 풀려난다.
1949년 국공내전. 공산당이 득세하며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다. 데이를 마음에 품고 도움을 주었던 원대인이 처형되고, 데이는 무대의상을 태우며 배우 생활을 청산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 반동의 낙인이 찍힌 경극 배우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발과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샬루가 데이의 동성애를 폭로하고, 무릎 꿇은 패왕에 분노하며 데이는 주샨이 매춘부였음을 밝힌다. 다시 샬루는 주샨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고, 절망한 쥬산은 목을 맨다.
1976년 문화대혁명 끝자락. 20여 년만의 공연을 위해 관객 없이 무대에 오른 데이와 샬루. 데이는 패왕의 검으로 목숨을 끊으며 극과 현실을 동시에 완결한다.
어둡고 적막한 무대로 향하는 두 사람.
당당함을 잃어버린 어정쩡한 걸음의 초패왕, 그의 팔뚝을 잡고 입장하는 우미인의 다른 손엔 검이 쥐어져있다. 잠시 합이 맞았던 걸음은 곧 엇박자로 어긋나고, 날카롭게 울려오는 영화의 첫 대사.
干什么呢(깐서머너)?
뭐냐? 뭐하는 연놈이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왔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관에도 불구, 필요 없는 질문이 떨어진다.
우린 옛-경극-배우다!
필요 없는 대답에 경극 배우가 처한 현실이 암시되며, 격랑의 중국 근대사가 두 배우의 험난한 삶을 통해 순차적으로 펼쳐진다.
도입부는 어린 시절 이야기다.
전화(戰禍)의 여차저차한 사정에 떠밀려 경극단에 입문한 아이들. 매춘부 엄마의 손에 끌려온 도즈는 다지증의 육-손이라 입문이 거절되지만, 돌볼 형편이 못 되는 엄마는 작두로 아들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잘라낸다. 1995년 4월 개봉한 《파리넬리》의 거세 장면이 스치는 것은 혼자만의 느낌일까. (롱테이크의 거세 장면은 거부할 수 없는 카스트라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원-숏 처리의 단지(斷指) 장면은 거부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정도가 차이점?)
“꽃다운 시절 사부에게 머리를 깎여/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계집이 아닌데...”
시투의 도움에도 불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번민이 계속 도즈를 괴롭힌다. 극단에서 도망치던 중에 마주친 패왕별희의 길거리 공연.
“어쩜 저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맞았기에...”
함께 도망친 친구 라이즈는 자조와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도즈 역시 패왕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 흘린다. 이 순간 도즈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발길을 되돌린다. 이후 첸-감독은 더 이상 도즈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담지 않는다. 도즈로서는 이 도망이 굴레를 거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세월이 지나 당대의 경극 연기자로 유명세를 타게 된 데이(도즈)와 샬루(시투).
“죽을 때까지 함께 하면 안 될까?”
“이미 반평생을 함께 했잖아”
“안 돼, 한평생이어야 해. 일 분 일 초가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야.”
무대와 현실을 동일시하는 데이에게 샬루는 명확히 금을 긋는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갈등은 당연한 귀결이고, 샬루와 쥬산의 결혼으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원대인으로부터 데이에게 건네진 검이 샬루에게 던져진 순간, 외부의 격랑이 아니더라도 이들에게 행복한 결말은 허락되지 않는다.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騶不逝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지만, 때를 얻지 못하니 오추마도 멈추었네.
騶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추가 움직이질 않으니 어이할 거나. 우희, 우희야! 너는 또 어이할 거나.
역사 속의 패왕은 유방과 한신에게 쫓겨 해하(垓下)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 번 웃으면 온 세상이 봄이요, 한 번 찡그리면 만고의 수심이 가득하니...”
애첩 우희 역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둘은 한평생을 함께 한 것이다. 그러나 경극은 경극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데이 한 사람을 제외하곤.
마지막 장면. 처음의 적막한 공연장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어둡고 관객은 없지만 패왕과 우희만의 공연이 시작된다.
“대왕마마, 어서 첩에게 검을 주옵소서.”
“안되오. 그럴 순 없소.”
잠시 우희의 표정이 미묘해지지만 극은 계속되고 패왕의 검이 뽑혀진다. 이어지는 패왕의 비명성은 ‘우부인~’이 아니었다.
“데이~~~”
관람 전 주워들은 풍문으로는 퀴어(queer) 계열이라 했다.
끈적끈적했던 《쌍화점》과 유쾌했던 《아가씨》. 뒤이어 《번지점프를 하다》 《왕의 남자》, 외화로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크라잉 게임》 《가장 따듯한 색, 블루》 《필라델피아》 등이 떠올랐다. 살짝 담갔든 푹 담갔든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담은 영화들이다.
미소년 도즈가 겁탈 당하는 장면과 데이-원대인 간 미묘한 장면을 간략히 처리한 것으로 보아... 첸-감독은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딱히 의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신경을 썼다면 초반부 도즈의 단지 장면부터 보다 비중 있게 처리했을 것이니까.
이런 첸-감독의 무신경 덕분에 관객들은 머리가 아프다. 샬루를 향한 데이의 감정선, 그 정체에 대해 해석의 여지가 넓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