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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신간이라 해도 외국 출판시장이나 평단(評壇)의 검증을 거친 작품들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는 원서를 읽은 외국 독자들의 반응을 지켜볼 새도 없이 순전히 우리 기준으로 작품의 질을 평가해야 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외국에서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교정쇄를 PDF 파일로 받아서 읽는 일도 흔하다. 필자와 각별한 친분을 쌓은 프랑스 작가 중에는 탈고를 하자마자 e-메일로 원고를 보낸 이도 있다. 이제 원서와 번역서의 동시 출간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바야흐로 문학 출판도 글로벌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문학에서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일이 점점 의미를 잃게 된다. 몇몇 외국 작가는 국내의 어느 작가보다 우리 독자들에게 친숙하다. 어느 외국 소설을 100만 명 넘는 우리 독자가 읽었다면 그건 분명 우리 문학의 소중한 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것을 개탄하는 이가 적지 않다. 30%에 달하는 그 비율은 체코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현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자조적으로 받아들일 일도 아니다.
번역을 통해 우리 독자들의 정신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외국의 선진적인 지식을 손쉽게 우리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번역서 비중이 높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학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문학은 나와 남의 경계를 두지 않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한다. 외국 문학이 많이 번역되는 것을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제대로 된 번역 문학은 우리 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 독자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뿐 결코 우리 것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
정작 우려스러운 것은 번역을 얕잡아보는 태도다. 번역 출판의 문화적 의의를 외면한 채 잇속만을 따지는 저열한 행태가 출판계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도저히 문학이라 불릴 수 없는 무지하고 무감각하고 무성의한 번역이 양산된다. 이런 번역은 외국의 창조적인 정신이 빚어낸 보배로운 우주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문학에서 멀어지게 한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일에 임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진다. 경험이 쌓이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간에 감춰진 것, 텍스트 속에 숨겨진 텍스트, 텍스트 너머에 있는 문화적 맥락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 기행과 탐사와 연구가 더 철저해지고 원작자들과의 교류도 더욱 빈번해진다. 번역 일의 진정한 기쁨과 보람은 작가의 분신이 되어 작품의 가치를 온전히 재현하려고 애쓰는 이 과정 자체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화와 백과사전을 다른 문화와 백과사전에 융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학 작품의 번역에서는 특히 문화적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다. 한 문화에서는 삼척동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다른 문화로 옮겨가는 순간 소수의 전문가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혹은 원문에 대한 충실성이냐 번역문의 가독성이냐 하는 논란은 주로 이 문화적 장벽을 둘러싸고 제기된다. 글로벌 시대는 그런 전통적인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언제든지 번역자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고, 번역자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작가와 소통할 수 있다. 이제 번역은 번역자만의 일이 아니다. 작가와 동행함으로써 문화적 장벽을 최소화하는 제3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세욱은 프랑스·이탈리아 문학 번역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크리스토프 그랑제, 미셸 투르니에, 움베르토 에코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