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칼럼의 요지를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것이 信(신)! 解(해)! 行(행)! 證(증)!입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체득하는 것입니다.
저를 돌아보는 마음이 크기에 안읽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 글은 모두 공부가 아닌 그저 공부심을 돕고자 쓰는 읽을 꺼리입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시는데 분위기 조성으로 쓰는 것이니, 늘 그렇게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信(신)!
믿기에 배우는 것이고,
배움은 듣는 것이라,
믿음과 배움과 들음은 같은 의미의 다른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것은 신해행증의 신(믿음)이고 문사수의 문(들음)이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배우지 않고, 배울 마음이 없으면 듣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배우고, 배울 마음이 있어야 듣습니다.
그리고 배움의 핵심은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르기에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면서 묻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배우러 오시나요?
그럼 자꾸 묻게 될 것입니다.
물론 밖으로 물을 수도 있지만, 먼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왜 이렇지? 이건가? 무슨 뜻이지? 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꾸 묻게 된다면, 믿음이 섰다 할 것입니다.
신해행증의 신이고, 문사수의 문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모르는데도 묻지 않는다면, 아직 들음도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신심)은 공부심(학심)입니다.
그리고 발심입니다.
발심이 작은 일이나 능히 큰 일을 냅니다.
공부심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공부심이 퇴전하지만 않으면, 전환을 이루어 반드시 더 큰 발심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사도에서 중사도로,
중사도에서 상사도로 말입니다.
解(해)!
이제 믿음이 선 사람은 묻지 않을 수 없고,
묻기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이해와 앎은 같은 의미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은 신해행증의 해이고, 문사수의 사라 할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해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해야 알게 됩니다.
앎의 핵심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기에 이해하는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알기 위해 오시나요?
그럼 자꾸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력이 늘어납니다.
물론 밖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먼저 스스로 이해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이런 것이로구나! 이것이구나!
그럼 자각이 되신 것입니다.
알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면 앎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는 자각입니다.
그리고 지혜입니다.
하나 하나의 지혜는 작으나 쌓이면 큰 지혜를 이룹니다.
자각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자각이 퇴전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더 큰 자각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사도에서 중사도로
중사도에서 상사도로 말입니다.
行(행)! 證(증)!
자각이 비록 중요하나 행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행하지 않는 병이 셋이나 됩니다.
안다는 아만심이 생기고,
망상이 늘어나고,
알기만 하려하고 행하려고 하지 않는 병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이런 병을 벗어나는 길은 알면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병을 벗어남과 동시에 두가지 좋은 것이 생깁니다.
정진력이 생기고, 행하려는 사람은 행함을 전제로 알려하기에 생각이 실다워지고, 그 핵심을 자각합니다.
행한 것은 체득하게 되어 모조리 자기 것이 되지만,
행하지 않으면 남의 말이나 전하는 말재주꾼에 아만심만 높아집니다.
그것의 핵심을 알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만큼 아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더 뭘 말하겠습니까?
한마디로 알았으면 일상에서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체득이 됩니다.
이것이 행입니다.
한번 안되면 두 번, 두 번 안되면 세 번... 거듭거듭 하다보면 점점 체득이 됩니다.
물러서지만 않으면 점점 쉬워집니다.
나중에는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자동으로 됩니다.
힘이 덜어지고, 끝내 아무 할 것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증입니다.
행하고 행하다 보면 행할 것이 없어지니, 행이 곧 증입니다.
그러므로 행하는 것은 신해행증의 행증이고, 문사수의 수라 할 것입니다.
행하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행함이 퇴전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더 큰 체득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사도에서 중사도로
중사도에서 상사도로 말입니다.
이 모두는 나에게 달린 것입니다.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신해행증을 찾아보니, 야보(冶父道川 1127~1180) 스님의 게송이 있더군요,
어렵고 어렵고 어려움이여! 마치 평지에서 푸른 하늘에 오름과 같도다.
쉽고 쉽고 쉬움이여! 옷 입은 채 한숨 자고 깨어남과 같도다.
배가 가는 것은 삿대 잡은 이에 있으니
누가 파도가 땅에서 일어난다 말하리오.
難難難如平地上靑天 易易易似和衣一覺睡 行船盡在把梢人 誰道波濤從地起
다시금 교수님의 칼럼을 보다보니, 너무 중요한 말씀이라서, 저를 돌아볼 겸 사족을 붙여 보았습니다._((()))_
첫댓글 최근에 넷도량에서 교수님께서 코로나 시국에 비대면으로 하신 12연기 강의를 들었습니다.
보석 같은 강의였습니다.
펼치면 3세양중인과(분위연기), 쌓으면 찰나연기, 멀리 이어지는 원속연기
연속적 속박으로서의 연박연기....
네가지 연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 12연기의 4가지 측면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전생의)식과 (현생 수정란)명색은 양방향 인과로서 쌍조건이다.
12연기의 각 지분은 증상연 관계이다......
생각나는 것 몇 구절입니다.
한말씀 한말씀 인문학적 치열한 공부의 결과이면서도
신행의 지침으로서의 일이관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니 참으로 숙연해지고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탄허스님께서 “종지가 없는 학문은 죽은 불교학이다.”라고 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청정님께서 신해행증을 풀어주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해가 되어야 신심도 생기고, 실천하여 증득한다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
향상일로의 길입니다.
_((()))_
그렇습니다.
종지가 없는 학문은 죽은 학문입니다.
종지란 무엇일까요?
바로 일대사인연인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학문은 죽은 학문입니다.
불법은 깨달음의 종교이므로 종지가 있는 학문인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이 넘보지 못하는 높은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종지가 있는 학문을 하고 있기에 살아있는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 아니 어떤 수행자이든, 신해행증을 통해서 종지(=깨달음)를 증득합니다.
그러므로 도반님 말씀대로 종지와 같이, 신해행증은 내가 바르게 공부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지침이 됩니다.
도반님,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이해가 되는 것은 생각의 결과이며
신심이 생김은 앎이 분명해짐이고,
실천하여 증득함은 분명한 앎을 실천하여 몸소 체득함을 일컬음이니, 매우 좋습니다.
받아들여 이해하심이 이렇게 명쾌하시니, 저보다 나으십니다.
저도 십이연기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해야 해득이 됩니다.
저는 이것말고 다른 비결을 찾지 못했습니다.
자꾸 반복해 듣다보면 점점 잘 이해되고, 잘못 알던 것이 눈에 보이고, 모르던 것이 알아집니다.
12연기는 참으로 깊은 진리라서 알기 어렵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듯이
삼세로 나누어서 보든
한꺼번에 일어나는것으로 보든
멀리까지 미치는 것으로 보든
연달아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든, 모두 12연기입니다.
이와같은 12연기를 부처님과 아라한이 아니면 어떻게 사실그대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연각 즉 벽지불이 12연기를 보아서 벽지불이 된다고 하는데,
치우친 벽지이지만, 부처불자가 붙는 것은 부처님과 아라한들이나 보는 연기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12연기를 알아도 참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를 알면 길을 잘 알아서 끝가지 갈 수 있듯이,
지도를 알면 정견을 갖춘 것과 같아서, 모든 사견을 깨뜨리고, 방향을 잡아 끝가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도의 힘입니다.
높게 말하면 종지가 있는 지 없는 지 지도로 알 수 있고,
낮게 말하면 삿된 종교인지 아닌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으며,
공부중에도 내가 길을 잘 가는지 못 가는지
내가 잘못 아는지 잘 아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도의 중요함이고,
지도야말로 목적지인 종지를 포함하여, 가는 방법인 신해행증과 모든 수행,
못가게 하는 모든 번뇌와 못가서 괴로운 삼계 윤회를 다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졸견으로도 교수님의 체계불학이 중요한 것은 이와같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제대로된 지도만 있으면 잘 갈 수 있듯이,
체계불학을 알면 잘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반님만 만나면 제가 말이 길어지는 군요.
그것은 아마도 도반님을 믿고,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입니다.
마도로스 도반님, 늘 행복하시고 공부에 진취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_((()))_
이곳에 오시는 분들 가운데 몇 분들은
제가 이곳에서 교수님의 체계불학을 과장되게 말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리라 생각합나다.
제가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이곳의 한 글귀라도 모두 교수님의 피와 땀이 담긴 그런 귀한 말씀인 줄 알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얘기들이 아닙니다.
마도로스남이 숙연함을 느끼셨다는 것에 저는 백퍼공감합니다.
너무 감사하지요,
정말 어렵게 얻으신 것을 이곳에 무상으로 법보시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귀한 말씀인 줄 아시는 분들은 복이 있으시고 안목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저의 체계불학에 대한 찬탄의 말들은 오히려 너무 부족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요
그래서 제가 깜짝깜짝 놀리고 찬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적어 보았습니다.
오시는 모든 분들, 더위 조심하시고, 공부에 진취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_((()))_
청정님 글을 읽으면 본인의 다짐을 말씀하시면서도 타인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기를 바라는 이타심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교수님의 체계불학에 대한 믿음이 크셔서 이 넷도량의 수문장을 자처하셨지요.
저도 그런 점에서 청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생각이나 표현이 조금씩 다른 분들도 계실 것이고,
회원게시판에는 오지 않으시지만교수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인연 따라가듯이 현실은 초기불교 대승불교 티벳불교의 우월을 다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체계불학이 보리도차제를 전범으로 하였지만, 티벳불교의 우월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불교의 역사는 누적적 역사이니 서로 다툴 것이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만 바로세우면 된다”는 교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인도의 베다사상이 주관성의 끝까지 간 위대한 외도이고, 한 걸음 더 들어가 찰나 생멸하는 주관성 불교탄생의 바탕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놀라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지식이 일천하여 그런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도 너무나 납득이 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역사를 보는 연기적 역사해석이면서도 외도도 감싸는 긍정적 말씀입니다.
교수님 강의는 늘 저에게 이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좋은 강의는 많겠지만, 제 경우에 교수님 강의처럼 합리적이고 인문학적이면서도 체계적이고
수미일관한 강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청중을 배려하셔서 풀어서 쉽게 설명하시니 초보라도 저절로 집중하여 듣게 됩니다.
그래도 나중에 다시 돌이켜 보면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전문적인 내용이 많고 일체 허튼소리가 없고 농축된 강의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자애롭고 진실하시고 겸손하시면서도 당당하신 강의...
그래서 틈나는 대로 듣고 또 듣고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터넷 세상이라 참 감사합니다.
이 회원게시판에 언제까지 불이 켜질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잦아들겠지요.
그러나 교수님의 학문과 연구업적은 늘 여기 넷도량에 있으니 언제나 공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언젠가 교수님의 체계불학은 체계불학이랄 것도 없이 사람들 마음 마음에 스며 있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청정님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_((()))_
당연합니다.
저도 당연히 저보다 비할 바 없이 잘 아시고, 더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갖고계신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이 많음을 믿기에, 체계불학의 등불이 이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저야 그런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대변하는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도반님, 회원게시판의 불은 이 홈이 있는 한 안꺼질 것입니다.
나가라고 하시기 전에는 제가 홀로 남아서라도 불을 밝힐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마시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체계불학을 열심히 공부하셔서 내 발등의 불을 끄시고,
그래서 체계불학을 널리 알리시고, 선양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타고난 근기가 저보다 나으시니, 해내실 것입니다._((()))_
청정님 감사합니다.
공사다망하실텐데 게시판을 꿋꿋하게 지켜주시니 힘이납니다.^^
🙏🙏🙏
도반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도리어 제가 감사하지요,
글을 쓰는 것도 하나의 공부이니,
저를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누군가의 공부심을 돕는 일이 된다면,
더 말할 것이 없지요^^
보실 분은 보실 것이고,
안보실 분은 안보실 것이니, 제가 걱정할 일도 아니고요,
그래서 좋습니다.
도반님, 오늘도 좋은 하루입니다.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