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외 4편
하록
오늘 보았던 눈 속의 연인은
갈라진 겨울로 떨어져
서로를 잊었다
침묵을 쥐고 떠오른
나는 다정함의 다른 이름
밖에 나선 뒤에야 맨발임을 알았고
덜컥 맞은 뒤에야 맨손임을 알았지
나를 찾는 없는 소리
부름을 따라 갈 곳이 없어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쩌렁쩌렁 삭아가는
태연한 피로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초대
하록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
땅이 나를 부른다 어지러울 정도로
어서 와 어서 와
열렬한 손짓
먼데서 내려다보다 감동하고 말아
그래 지금 갈게
지금 그리 갈게
새하얀 너를 만날 땐
나는 무엇보다 커다랄 거야
빛도 나만큼 화려하지 못할 거야
겨울처럼 강한 내가 달려들 거야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기다리니까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주행부적합개체군
하록
달보다 태양에게 말을 망설이는 것은
이어질 새벽보다 이어질 낮에 뜬눈들이 많기 때문일까
저물어가는 것은 아침의 꽁무니를 좇아오는데
많은 귀들이 쳐다보면 너는 숨고 싶니 뽐내고 싶니
나는 말소되고 싶어
번쩍
하고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실업자
하록
눈치를 보고
말을 고르고
앓다가 덮고
숨죽여 울고
남는 것은 자질구레한 일상의 찌꺼기와 명랑의 껍데기
풀린 채 묶인 의자
그보다 신중했던 구두들
그마저도 아쉬운
갇힌 땅의 낙엽들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에서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
하록
인적이 드문 풀밭에 앉아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을 보며
총총 수놓듯 네가 절망을 말했을 때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하고
움켜쥐었던 것은 숨
한줌 숨
침묵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고
포옹도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아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왔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일 때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
우리 떨어지면 어딘가 닿기나 할지
나 절벽의 속살이 궁금해
우리 부딪히면 어딘가 금이나 갈지
떠도는 별을 잡아 수호성을 삼고
우리를 지키는 신이한 존재라도 빌어
그래도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하록: 대전출생, 홍익대 미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2024년 {애지}로 등단.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