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4 : 8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
본 절은 고린도 교인들의 오만불손한 행동들에 대한 야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실제적인 그들의 삶을 묘사한 내용일 수도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과 풍족함, 또 성도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서로 분쟁하고 파당을 만든다면 그들의 그 부요와 풍족, 그 자유와 특권은 복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사람을 겸손케 하는 가난과 속박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1]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7절에서의 질문들은 '너희가 정말 그러하냐?'는 반어적인 표현임이 틀림없으나 본 절을 역설적인 표현으로 취급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그들 삶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5).
그런데도 그들의 풍요는 감사와 찬양으로 돌려지지 아니하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특별히 주목해야 될 것은 '배부르며'(*, 케코레스메노이)의 완료분사와 '풍성하며'(*, 에플루테사테)와 '왕 노릇하였다'(*, 에바실류사테) 등의 부정 과거 동사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Barrett).
이러한 특징은 '이미' 성취되었음을 시사하는 헬라어 본문의 부사 '에데'(*)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Lightfoot).
그들은 완성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면서 긴장을 가지고 죄악의 요소들과 싸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풍요(豊饒)와 배부름 속에서 즉 영적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졌고 현재도 계속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 공동번역 ).
2]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본 구절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이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이 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Harris).
교만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영적 교만이다.
모든 죄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영적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덕을 더 내세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교만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한다. 스스로 자만이 가득했다. 이것이 신앙적인 교만이다.
둘째, 지성적인 교만이다.
* 고전 8: 1-2 –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배움이 많으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쉽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을 얻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물질적인 교만이다.
* 신 8: 18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재물을 받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 스스로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 대상 29: 12 -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넷째, 지위에 대한 교만이다.
바사 나라의 재상이었던 하만은 유대 사람 모르드개와 그의 가족, 온 유대인을 학살하려던 음모를 세웠지만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 하였던 기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도 교만해져서 궁전 꼭대기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성을 건설했다고 장담했다(다니엘 4장 느브갓네살 왕의 두 번째 꿈).
교만하던 헤롯이 충에 먹혀 죽은 것을 기억하라.
* 행 12: 23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 벧전 5: 5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약 4: 10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잠 16: 19 -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 미 6: 8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주님도 겸손을 가르치셨다.
* 마 11: 28-29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눅 14: 11 -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울 사도도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 롬 12: 3 -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엡 4: 2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골 3: 12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먼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친다. 겸손을 친히 보여준 구절이 있다.
* 빌 2: 5-8 –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사 57: 15 -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래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런 말을 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다. 성 어거스틴도 이렇게 말했다. 신앙생활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겸손한 사람은 자랑하지 아니한다. 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불평불만이나 원망이 없다. 그리고 순복을 잘하거나 어디서든 봉사하려 하고 범사에 감사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늘 평안하다.
3]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을 제외하고 허황한 종말론적 사고 속에서 왕 노릇 하려 할 것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시각 속에서 함께 왕 노릇 하기를 간구한다.
혹자는 하반절에 쓰인 '왕 노릇 하기'를 전반절의 부정 과거 동사 '에바실류사테'와 서로 구분하여 해석한다.
전반절의 왕 노릇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으로, 하반절은 장차 올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하지만 구태여 구별 지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Lenski).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종말론적 시각을 수정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만들어 놓은 자신의 왕 노릇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종말은 아직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은 자신의 곤고와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교만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 왕 노릇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계 3: 17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