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대근 교수의 유배문학산책3
‘서포’의 국문문학론과 ‘만필’에 나타난 산문정신
진보 지식인 서포 김만중, 근대문학의 첫장을 열다
권대근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Ⅰ.
서포 김만중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작가이자 정치가로, 그는 조선의 몽테스키외라 불릴 정도로 혁명적인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사상, 문학에 대한 비평, 그의 문학관들은 그의 대표적인 수필집이자 사회평론집인 <서포만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해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무인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문인으로는 서포 김만중이 아닐까. 두 분 다 한 많은 생을 남해에서 마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순신순국공원’과 ‘남해유배문학관’은 남해의 랜드마크가 되어 남해를 역사와 문화의 고장으로 빛내주고 있다.
남해읍에는 남해유배문학관이 있다. '남해에 있는 유배문학관' 이기도 하고, '남해로 유배온 문인들의 기념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유배문학의 기념관을 남해에 세웠다는 것은 남해도에 많은 유배객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남해유배문학관’ 현판 글씨는 이 시대의 유배객 신영복 교수가 썼다. 삼십대의 가장 빛나는 황금기를 교도소에서 20년 유배생활했다는 신영복 교수가 죽기 전 마지막 쓰고 간 현판이라는 데서 ‘유배’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유배는 징역과 달리 강제노동이 없었고, 시간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지만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것이 바로 징벌이었다.
유배생활이란 지금의 독방과 같지만 위리안치 중죄인만 아니면 밀폐된 가택연금이 아니라 넓은 대자연 속의 독방이었다. 그러니 유배 중에도 현지에서 소실을 얻어 밥 짓고 빨래도 하는 일을 맡겼다가 후엔 자식까지 낳기도 했다. 결국 후대에까지 남게 된 것은 저술이었다. 남해 노도 '김만중문학관'에 가면 알 수 있듯이, 유배지에서의 글쓰기는 일기, 한시, 편지, 저술, 소설, 편집까지 다양하다. 그래도 유배가 무섭고 두려웠던 이유는 유배는 정해진 기한이 없었고, 언제 어느 날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두려움이 늘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잊혀져 유배지에서 죽는 경우도 많았다.
상주면 벽련마을에서 나룻배로 건너가면 닿을 수 있는 섬, 노도로 유배되어 온 문인 김만중은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글로, 문학으로 승화시켜온 산 증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서포만필>을 중심으로 그의 대표적인 문학론을 개성 중시와 진실한 감정으로서의 산문문학론, 우리말 중심의 국문문학론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이어 김만중의 저서 <서포만필>의 본문을 함께 살펴보고, 분석한 그의 문학관이 가지는 의의와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함께 덧붙이고자 한다.
Ⅱ.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1. 서포의 성장배경과 생애
남해는 조선시대에 대표적 유배지였다. 실록에 의하면 남해에 유배된 인물은 고려시대에 7명, 조선시대에 179명, 모두 186명에 이른다. 남해는 그만큼 문학적인 풍토가 조성된 곳이라는 뜻이다. 자암 김구는 〈화전별곡〉에서 남해를 ‘일점선도(一點仙島)’ ‘산천기수(山川奇秀)’의 땅으로 노래했다. 자암이 남해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면, 서포 김만중은 절해고도인 노도에 유폐돼 창작열을 불태웠다. 수려한 명소가 많은 남해에서 노도가 알려진 건 전적으로 김만중 덕분이다. 김만중은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3년 남짓 노도에 살다가 55세에 숨을 거뒀다. 남해군은 김만중의 유적과 이야기를 엮어 노도를 문학의 섬으로 조성했다. 김만중문학관, 서포초옥, 야외전시장, 작가창작실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 문학 여행지로 가꾸어나가고 있다.
김만중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광산, 아명은 선생, 자는 중숙, 호는 서포, 시호는 문효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자, 김집의 손자.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김만중은 1637년(인조15년) 유복자로 배 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성균관의 생원이었는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떠난 인조가 항전 끝에 항복을 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윤방의 손녀요, 이조참판을 지낸 해평 윤지의 딸이자 병자호란으로 20일 전에 남편을 잃은 윤 부인, 윤 부인이 남편을 잃은 전쟁터에서 얻은 귀한 자식이 김만중이다. 김만중의 탄생은 조선소설사를 빛낼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걸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리라. 그때 그의 부인 윤씨는 서포를 임신하고 있던 중이었다.
서포의 집안은 이름 있는 사대부 학자 집안이었는데,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이 증조할아버지이며, 충렬공 익겸이 아버지,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가 그의 형이었고, 숙종대왕의 초비인 인경왕후가 그의 조카였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 역시 이름난 사대부 집안의 사람이다. 서포는 오로지 어머니 윤씨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했는데 그의 생애와 사상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충실한 부덕의 소유자로 절행과 학식과 교육열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서포는 그의 어머니에게 남다른 효심을 다했다. 이는 그가 벼슬에 진출한 후 기사환국때 인현왕후를 옹호하는 서인의 입장에 선 것이나, 그 사건을 소설로 형상화한 그의 소설 <사씨남정기>다.
서포 김만중은 어머니의 특별한 가정교육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는 충렬공 김익겸으로 인조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고, 그 후 어머니 윤씨는 과부가 되어 형 김만기와 김만중을 정성스럽게 키웠다.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는 조선 후기 대제학이라는 관직까지 올랐으나, 당시 환국과 붕당정치라는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숙종에 의해 유배를 간 뒤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당시 주자학과 성리학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서 주자학이라는 중화주의 사상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였고,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비평하고자 하였다. 그는 문학에서 개성을 존중하여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문학을 평가한 것이 아닌 여러 관점에서 정철, 한유 등 작가들의 작품을 비평하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유교 질서와 주자학을 절대적인 규범으로 여기던 시대였는데,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주자학을 비판하고, 불교를 내세우는 등 당시로서는 비판의 대상이자 혁명적이었던 주장을 그의 저서 속에 담았다.
김만중은 1688년 11월에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자 그도 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로 다시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 기사환국이란 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으로 실세했던 남인이 1689년 원자정호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을 말한다. ‘원자정호 문제’란 이렇다. 장 씨가 왕자 균昀(후일 경종)을 낳자 숙종은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 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하였다. 집권 세력이던 서인은 인현 왕후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 책봉을 반대하였다.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숙종대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한다. 이 사건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으며, 김만중도 기사환국 당년인 1689년 윤3월에 남해로 유배 가 쉰여섯 살인 1692년 4월 30일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해가 숙종 18년이었다.
이래저래 김만중의 삶을 바꿔 놓은 희빈 장씨는 김만중이 남해로 귀양 간 1689년 5월 인현 왕후가 폐출된 자리에 올라 왕비가 된다. 그리고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죽은 지, 겨우 2년 뒤인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희빈(후궁)으로 강등되고 다시 이로부터 7년 뒤인 1701년(숙종 27), 인현 왕후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사내인 숙종으로부터 자결을 명령받아 죽음을 당한다. 김만중이 유배 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카딸 인경 왕후, 인현 왕후, 희빈 장씨와의 관계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임은 〈사씨남정기〉의 저술에서도 알 수 있다.
김만중의 재주는 비상했다. 그는 시문집인 <서포집>(1702년)과 비평문들을 모은 <서포만필>,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남겼다. 김만중의 초기 시작품은 대략 인경왕후 초기에 지어진 것이다. 궁궐 안의 비빈·궁녀들의 화려한 영총을 노래한 것이 많아 특이하다. 후기작은 거의가 애상적인 경향을 많이 띠고 있다. 그의 만년의 서새남장과 모부인 윤씨에 대한 불효의 가책 등의 쓰라린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김만중의 시에는 「직녀수독거」·「연연편」·「동작기」·「월녀행」·「왕소군」 등 미인에 대한 영탄이 많다. 소설 「구운몽」에서의 갖가지 미인상과 연관 지어 흥미를 끈다. 귀양지에서 지은 「기사구월이십오일작」·「칠월이십오일적중작」 등의 사친시에는 모부인 윤씨에 대한 애절한 효심이 잘 나타나 있다.
2. <서포집>과 <서포만필>
<서포집>에는 김만중의 사상적 편력과 박학한 지식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기사들도 엿보인다. 불가 유가 도가 산수 율려(음률과 악률이라는 뜻으로, ‘음악’ 또는 ‘가락’을 이르는 말)·천문 지리 등의 구류의 학에 대한 견해가 점철되어 있다. 이 책에는 불가에 대한 작자의 긍정적 시각이 여러 번 나타난다. 이 때문에 진작부터 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의 형태를 유지하여 전해지게 된 것 같다. <서포집>은 문학관의 측면에서 보면 한·중 문체의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조선조 시가관 그리고 국어관의 확립을 통한 소위 ‘국문문학론’ 등 김만중의 선각적 이론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서포 김만중은 우리 문학사에서 국문으로 쓴 작품의 의의를 처음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이다. 한문학만이 문학으로 인정되던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를 물리치고 한글 문학의 가치를 드높임으로써 서양에서 지방어(민족어) 문학을 주장하고 ‘신곡’을 지음으로써 근대문학의 첫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단테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만필은 논리적인 서술과 치밀한 논증을 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다양한 사항에 관한 관심을 표명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이러한 만필의 미학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김만중은 선천 유배지에서 자신의 지적 체험을 하나씩 정리해 <서포만필> 상권에 104편, 하권에 165편을 썼다. 그 문체는 매우 고백적이지만 자신의 학문하는 자세를 회의하는 것이어서 상대주의적 관점이 여기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서포집> 권10의 「선비정경부인행장」에서는 어머니의 뛰어난 현덕을 일자일획의 꾸밈없이 잘 묘사하고 있어 「구운몽」의 후서라 이를 만하다. <서포만필>을 보면 그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트인 사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서포만필>에서 소식의 <동파지림>을 인용하여 아이들이 〈삼국지연의〉를 들으면서는 울어도,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다고 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와 감동의 힘을 긍정한 것이나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소설을 직접 창작할 수 있었던 근원도 바로 이러한 폭넓은 사고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하였음을 넉넉히 어림할 수 있다.
특히 김만중의 국문, 한글에 대한 이해는 남달랐다. 그는 <서포만필>에서 한시보다 우리말로 쓰인 작품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여,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들면서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했다. 이유는 이 세 편의 가사가 우리말로 된 뛰어난 작품이어서였다. 김만중은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제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데 비록 그것이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設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라고 하였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낸다 함은 남의 글, 즉 한문을 쓰는 일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저 시절은 한문이 양반의 공용 문자요, 한글은 언문(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 하여 ‘상놈 글’이요, ‘암클’이라고까지 천시하던 때다. 이러한 시대에 암클 언문을 국문, 즉 나라글이라 명명한 것에서 그의 우리말에 대한 자각이 여하함을 알 수 있다.
<서포만필>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었던 김만중이 송강 정철의 가사 작품을 극찬한 비평문이다. 송강 가사에 대한 비평과 함께 국문 문학론의 당위성을 주장한 글로 조선조 비평 문학의 전형이 된 작품이다. 또한 이 글은 <서포만필> 중에서도 김만중의 문학관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김만중은 문학을 장단과 가락을 가진 것이라 정의하였다. 문학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말’을 거론한 것은, 문학이 철학적인 ‘뜻’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 나라의 ‘말’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밝힌 것은 선구적이다. 이는 ‘뜻’으로만 한정된 한문학의 독점적 의의를 부정하고 국어로 표현된 문학이 참 문학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장은 국어 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즉, 언어는 나름대로의 색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잘 살려 써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견해이며, 송강의 가사를 높이 평가한 것은 당연한 귀결문이다. 국문학에서 국어의 중요성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점은 문학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만하다.
<서포만필>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색하고 사회 현실의 문제를 연관시켜 논술한 글이다. 김만중은 삶과 관계된 모든 분야에 걸쳐 스스로의 맥을 짚듯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자 했기에, 그의 일생 경륜과 지적 모색이 여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서포만필>은 만필의 형식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과 개방적인 시선으로 역사 속 인물과 사건들을 바라보았다는 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상대주의적인 견해를 힘 있는 문체로 논술했다는 점 때문에 한국 지성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경학 역사 문학 유가 불가 도가 등 삼교, 천문 지리 음양 산수 율려 근대적 과학, 천주교 등에까지 폭넓게 전개되고 있어서 우리는 김만중이라는 조선시대의 걸출한 인재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특히 역주를 단 심경호 선생은 현대의 독자들을 위해 김만중이 피력한 내용을 ‘평설’로 보충하거나 재해석하면서 그 당시의 시대환경과 만필을 쓴 김만중의 독특한 시각을 유추해 김만중이 거대 담론이나 이념을 동어반복하지 않고 세세한 사실을 해부하면서 지식을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 넓은 땅과 하늘 사이에 새것이 어데 있는가. 새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괴상하고 난해한 것을 들고나와 이것이 새것이다라고 뽐낸다. 그러나 새것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만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새것이라야지, 그렇지 못하면 옛것을 취하는 것만 못하다. 옛것을 취하되 오늘에 맞게 변화시켜야 하고 법도에 맞게 해야 한다.” 이 말은 연암 박지원이 250년 전에 쓴 시론이다. 조선의 시인들은 중국 시인들의 시를 모방하는 데 급급했다. 또한 그런 시를 좋은 시라고 추켜세웠다. 현대적 관점에서 꼭 국문만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그의 주장은 용기있는 주장이며, 혁명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인도에서 대부분 사화(辭華)를 대단히 숭상하여, 인도의 부처를 찬양한 노래는 무척 아름다운데, 이제 그것을 중국 글로 역출(譯出)하게 되면 다만 그 뜻만 알게 할 뿐이지 그 사화는 알기 힘들다. 이것은 응당 그렇다. 사람의 마음이 입을 통해 나타난 것이 말이고, 말에다 운율을 가미한 것이 노래요, 시요, 문장이요, 부(賦)다. 사방의 언어가 다르기도 하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각각 고유언어를 가지고 운율을 잘 맞추기만 한다면 다 충분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에게까지고 통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중국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한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흉내 내어 썼다.
-<서포만필> 중에서
인용 예문은 서포의 문학관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부분으로, 글쓴이는 좋은 문학의 기본 요소를 사람의 입으로 표현된 ‘말’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유교적 문학관과 대조되는 국문 문학의 가치를 내세우는 근거로, 글쓴이는 이를 바탕으로 내용 전달에 치중하는 한문학으로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우리말의 가락을 표현할 수 없으므로 한글 문학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한문학만을 문학으로 인정하던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국문 문학의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자주적인 문화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김만중의 주장은 성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에 매우 파격적이었다. 서포는 송시열을 따르는 서인이었다. 송시열은 주자의 경전 해석을 조금이라도 달리 풀이하면 사문난적으로 공격했는데, 김만중은 뜻을 굽히지 않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글로 썼다. 국문학사에서 김만중을 높이 평가하는 점이다. 그 시대에 성리학과 한문학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을 향해 ‘중국의 말과 문자를 마치 앵무새처럼 흉내내는 것’이라고 독설을 날린 것이다.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해도 앵무새가 하는 사람의 말일뿐이다. 그런데 거리의 나무하는 아이들이며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 데야 하며 서로 화창(和暢) 하는 것이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 진위성을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이른바 시부를 흉내 내는 것과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이 세 별곡에는 천기(天機)가 자연적으로 발로되어 있고, 미개한 사회에 흔히 있는 낮고 속된 성질은 없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구석에 치우쳐있는 이 나라의 진정한 글이란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또 이 세 편에 관해서 말하면 후미인곡(後美人曲)이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전미인(前美人)은 중국의 어휘를 빌어서 수식했다.
- <서포만필> 중에서
그는 우리 문학은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말과 글은 사용하는 이들의 정신과 문화를 지배한다. 우리 문학을 우리글로 표현하는 일이야말로 조선의 자존심을 일깨우고 우리 문학을 드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말 사용과 대중을 가까이 하기에 가장 좋은 매개체가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그 당시 선비라면 시를 짓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소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았다. 서포 김만중의 대표적인 작품 <구운몽>은 아들의 유배 생활로 인해 가슴 졸이며 살아가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소설을 지은 것이었다. 귀양살이와 높은 벼슬아치의 생활이 반복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여느 문인과는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포만필’은 글쓴이가 송강 정철의 가사를 우리나라의 진정한 문학으로 극찬하면서, 국문 문학의 당위성을 논한 시화詩話, 한문학에서 작품에 대한 비평, 해설, 고종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시가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이 천하의 풍속을 어지럽힌다고 멸시하던 소설의 가치도 높이 평가하였다. 즉 통속소설의 예술적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진수, 233~297)의 삼국지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사람을 더 감동시킨다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처럼 그가 당시 천대 받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우리말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같은 소설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이 얼마나 진보적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한 예라 하겠다.
송강(松江) 정철은 호탕한 기질에 술을 마시면 가끔 실수를 저질렀다. 성문간(成文簡) 선생이 그 점을 힐난했으나 송강은 그것에는 전연 상대하지도 않고 다만, <고요한 산 밖에 대나무 소리 울리고 /가을벌레 소리 침상에 들려오는구나.>라는 시구를 소리 내어 읽고서는 <이것도 어디 흠잡을 데가 있소.> 문간은 웃으면서, <그 아래 구절인 흘러가는 해 어찌 붙들 수 있으랴.>고 했다. 지금이야 생각해 보니 이 말은 아주 어울리지 않는다. 문간의 평은 지극히 정확했다. 송강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전후미인가(前後美人歌)는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다. 그러나 그것을 중국 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음악가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거나 혹은 한글로 적혀서 전해질 뿐이다.
-<서포만필> 중에서
<서포만필>은 17세기 말의 시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회의의 정신과 탐구의 정신을 담았으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관용의 정신을 지녔다. 김만중은 이러한 산문정신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맥을 짚듯 사유했다. 스스로 맥을 짚어보는 태도는 권위에 눌려, 혹은 시류에 편승해서 타설을 모방하거나 타인에 뇌동하는 것과 대척점을 이룬다. 주자학설에 대한 맹신이나 불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논박은 설득력이 없다고 보고 속류 유학자의 편벽함을 비판했다. 또 그는 상대주의적 시각을 견지했다.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사상과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해 냉엄한 분석을 시도했다. 김만중은 자기를 철저히 회의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읽고 논리를 지향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서포만필』의 주된 내용은 우리나라 시에 대한 시화이며, 소설이나 산문에 관한 것도 있다. 지은이의 사상적 편력과 박학다식함이 잘 나타나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책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체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시가관, 국어관의 확립을 통한 '국문문학론' 등 선구적인 이론을 밝히고 비평의 객관성 추구를 기본과제로 삼으면서 만필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관념의 허위를 비판하고 중국문학에 매몰당한 국민문학을 적극 옹호했다.
Ⅲ.
<서포만필> 상하권에는 여러 이본들이 전하나, 내용은 거의 같다. 내용의 대부분은 우리나라 시에 관한 시화로 이루어져 있으나 소설이나 산문에 관계되는 것도 섞여 있어 수필이나 평론으로 다루어야 할 것도 있다. <서포만필>에는 작자 김만중의 사상적 편력과 박학한 지식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기사들도 엿보인다. 이 책에는 불가에 대한 작자의 긍정적 시각이 여러 번 나타난다. 이 때문에 진작부터 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의 형태를 유지하여 전해지게 된 것 같다. <서포만필>은 문학관의 측면에서 보면 한중 문체의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조선조 시가관 그리고 국어관의 확립을 통한 소위 ‘국문문학론’ 등 김만중의 선각적 이론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여항閭巷의 나무하는 아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비록 쌍스럽다고 하지만, 그 참값을 논한다면 사대부들의 시부詩賦보다 낫다고 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사대부들의 시문이 중국 한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를 앵무새의 노래와 같다하여, 조선 사람은 조선의 말로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획기적이라 하겠다.
특히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우리말을 절묘한 리듬으로 살려낸 정철의 가사 작품인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동방의 이소離騷’라 하여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며 그중에서도 ‘속미인곡’이 우리말을 잘 살렸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한자 사용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에 국어의 가치를 인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 문학을 도道를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으로 보고,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꾸밈보다 진실에 있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비평문학이라 할 수 있다. 비평문학의 흐름은 임진왜란 ·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실학사상과 더불어 변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는 표현의 사실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문학의 개성적 성격을 강조하는 방식의 문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국문 시가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특히 이러한 인식은 서포 김만중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