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1962.02.04 (일), 한국 이리교회
요걸 찾아 가지고 그다음에 참자녀를 찾아야 돼요, 이분(참부모)을 만나야만, 이분의 명령을 받고 이분의 도리의 치리함을 받아야만, 이분의 수술을 받고, 접붙임을 받고, 멕기공장을 거쳐 나와야만 도금이 되어 가지고, 대용품의 이름을 가져 가지고 참자녀의 인연을 맺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룩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판서하시며 말씀하심) 처음 온 사람들, 알겠어요? 「예」
참부모의 인연에 접붙이는 자가 돼야 할 통일교인
이런 부모가 되고 이런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는 하늘 대신이요, 어머니는 땅 대신이 되는 것이요, 이 자리에는 요것이 합함으로 말미암아 천지에 비로소 산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가정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가정을 포장하여서 우리 통일교회에서 일컫는 말이 있나니 그 말이 무슨 말? 식구라 합니다. 식구라는 건 엄청난 말이예요. 식구가 되려면 형제가 있어야 되고….(녹음이 잠시 끊김)
여러분들도, 잘라 놓은 사람도 자르고 나서는 고쳐 가야 돼요. 접붙이려니. 잘리는 것만 해도 죽겠는 데 잘리고 나서 접붙이려니 고생이예요, 이게. 그런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천리의 원칙이 그러니 그렇게 해야 됩니다. 요것 접붙이면 한 3년 간….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세계적인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접붙이는, 거 접붙이는 기사를 뭐라고 하나요? 뭐라고 할까? 「기술자입니다.」 기술자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술자를 만드는 데 원칙을 떠나서는 접속시킬 수 없습니다. 그 공의의 법도와 공의의 원칙, 때와 원칙을 어기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과 그 원칙을 세워 나가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 열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열 사람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열 사람의 훈련이 같아야 됩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 첫아기 낳는 거하고, 물론 여러 번 낳아 보면 뒤에 낳는 건 좀…. 그렇지만 첫째 아기를 낳으나 둘째 아기를 낳으나 세째 아기를 낳으나 열을 낳으나, 혹은 스무 명까지 낳는 사람은 없겠지만 스물을 낳는 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스물을 낳는다 해도 복중으로부터 나오는 그 과정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물론 어머니에 따라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접붙이는 책임을 짊어지고 그런 일을 하여야 할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고통의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이예요. 만약에 가을이나 여름, 혹은 겨울에 잘라 놓았다면 `어느 때에 봄이 오겠나?' 하여 때를 맞게 해 가지고, 환경을 맞게 해 가지고 접붙여 줘야 됩니다. 잘린 녀석들이야 주인만 잘 만나면 때를 맞을 수 있겠지만 책임자 입장에 서서 접붙이는 일을 하는 것은 고통이예요.
선생님이 여기 온 것은 모가지를 자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구요. 여기 처음 온 사람이나 지금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이해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런 놀음을 왜 하느냐 이거예요. 만약에 오해한 사람이 있거든 설명을 들으라구요. 설명해 주라구요! 응? 「예」 모가지 자르는 겁니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 나온 역사적인 배경, 모든 사정, 혈통적인 모든 것, 자기 인식까지 시시껄렁한 모든 전부를 잘라 버려야 된다는 거요. 그러지 않으면 망합니다. 다 버려요. 문제는 거기 있어요.
정의의 칼로 원수들을 잘라 버려야
오늘날 한국 백성의 실정을 바라보게 될 때, 여러분들, 정신 차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북쪽에는 괴뢰 정부가 있고, 서쪽에는 중공이 있고, 동남쪽에는 누가 있어요? 40년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그들은 말하기를 `독도는 우리 것'이라고 합니다. 공산당은 말하기를 `남한은 우리 것' 이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는 말하기를 `민주주의 세계는 우리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자르려고 합니까? 누가 자르려고 하느냐 이거예요.
두 사조가 있고 두 흐름이 있으니 어차피 하나 자르기는 잘라야 되고, 잘려야 할 사람이 한 사람 있어야 할 텐데 누가 자르고 누가 잘려야 되겠느냐? 지금 보게 될 때 이것은 반드시 해야 됩니다. 칼을 들고 잘라야 할 쪽이 이남이요,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칼에 잘려야 할 것들이 지금 대들고 있습니다. 잘라야 할 입장에 선 이들은 세상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거예요.
이러한 세계 앞에 통일교회는, 어떠한 이념을 갖고 왔느냐? 자르는 이념입니다. 잘라야 돼요. 옳지 못한 칼을 든, 접을 붙여 줘도 또 죽일 수 있는 사기꾼들, 첩자들이 있다 할진대는 내가 정의에 입각하여 `너 해봐라' 하고 그냥 안 둔다는 겁니다. 잘라 놓으면….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끝날에 정의의 심판이란 명사를 걸고 해부할 수 있는 칼을 들어야 합니다. 비록 삼천리 반도가 좁고 삼천만 민족은 불쌍하지만 우리 통일의 무리는 작은 무리가 아닙니다. 불쌍한 모양을 했지만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약한 자와 같은 모양을 했지만 약한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비수를 갖고 있나니 용납할 수 없는 불의는 잘라 버려라 이거예요. 정의에 접붙일 수 있게 잘라 버리는 것만이 아니예요. 잘라 놓고는 책임지고 접붙일 수 있는 용사가 되라고 나선 것이 통일의 신도들입니다.
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모든 원수의 무리를 쳐부숴야 됩니다. 옳지 않은 자들도 칼은 들고 있습니다. 저들도 같이 대항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갖고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있어서 우리는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여기에 비장한 내적인 실력과 훈련을 갖추어 가지고 스스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륜이 요구하고 온 하늘땅이 고대하고 있는, 그리고 정의에 입각해 가지고 잘라 가지고 종지에 접붙일 수 있는….
천지가 고대하고 있고, 선의 목적을 위하여 역사노정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과 도의 세계를 대신하여 따라나왔던 수많은 선지 성현들이 고대했던 것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의 책임을 짊어지고 나타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시대적인 존재가 아니고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진 존재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책임을 부정하는 환경이 있다 할 때는 용서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은 그렇게 단호한, 접붙이기 위한 하나의 자르는 실체가 나와야 할 때입니다.
하늘땅을 위해 살아가는 청년이 되어야
여러분은 발전하기를 바랍니까? 오늘날 세계 어느 민족한테도 뒤지지 않는 문화민족이 되기를 바랍니까? 후진국가의 국민이 돼 있고 퇴폐적인 전통과 퇴폐적인 가정 환경을 가지고 있는데서 고질적인 자아, 처량한 처지를 느끼고 있습니까? 만약에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아이고, 난 좋다' 하는 자리에 부모가 가지 말라 할지라도 박차고 가야돼요. 형제가 막고 있더라도 박차고 가야 됩니다. 이 사회가 막고 있더라도 박차고 가야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 일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살려 주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실정, 한국의 환경에 있어서는 이러한 무리의 움직임이 나와야 됩니다. 더욱이나 오늘날 혁명 정부가 나와 가지고 인간 개조를 부르짖고 있고 새로운 건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뛰쳐 나왔다가 들어가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무리가 필요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말하느냐? 환경적으로 보나 모든 사조적으로 보나 세계 정신사적으로 보게 될 때도 부정할 수 없는 이런 절박한 입장에서 뭔가를 보여 줘야 할 것이 우리의 입장이요, 3천만의 입장이요, 더더욱이나 청년 남녀들이 당연히 부딪쳐야 할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봉착해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 것은…. 내가 수십 년 전부터 기도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시여!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시여! 살아 계시거든 내가 바라는 그 한때에 있어서 젊은이들과 인연맺게 해 주십시오'라는 거였어요. 30세 전 젊은이, 허기져도 30대 청년으로서 그때를 마련하고, 그때를 맞겠다고 지금까지 바라고 준비해 나왔습니다. 환경에 몰리고 사정이 여의치 않는 곡절의 노정을 걷다 보니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 삼십, 혹은 이팔 청춘, 그런 시절을 끝없이 영위해 갈 수 있는 모토가 될 그런…. 그런 순간을 지내다 보니, 물론 곡절의 성상, 눈물과 피어린 노정을 거쳐왔으나 오늘날 이 민족 앞에 몰리며 외로운 고아의 입장에서 거쳐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고아 된 무리들을 모아 가지고 오늘날 이런 움직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앞으로 국가적으로 문제될 때가 올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문제될 때가 온다는 겁니다. 이건 틀림없습니다. 나는 이미 사십의 고개를 넘어가는 입장에 있지만 이 이념과 정신은 젊은이의 이념이요, 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념과 정신을 따라나오는 무리들은 젊은이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고이 품에 품고 젖먹이던 그 시절부터, 비록 나는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을망정 부디 뜻 있는 아기가 돼 달라고 기도한 어머니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뜻은 어떠한 뜻이겠느냐? 부모 앞에 효도하는 것도 그 뜻이겠지마는 멀리 종족을 대신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기가 되고, 더 나아가 민족을 위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기가 돼 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오는 자식들이 많을지라도 지금이라도 그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식이라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될래야 될 수 없습니다. 이 민족 앞에 배신자가 될래야 될 수 없고, 이 사회에 강한 자가 될래야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비록 비참한 생활일망정 저녁이면 고요히 심성을 찾아들어 `너는 무엇을 향하여 가느냐?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어떠한 초점상에 있어 가지고 오늘 하루동안 움직였고 책임했느냐?' 라는 천주적인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여기에 모여든 청년들은 무위도식하는 청년들이 아닙니다. 형제들을 위하여 남모르게 눈물 흘리는 청년, 처참한 환경을 위하여 눈물 흘리는 청년, `하늘이 있느냐? 땅이 살았느냐? 나와 부딪쳐서 정의의 그 무엇이 있는지 보여 달라' 라고 호소하는, 불타는 그 무엇을 지니고 애써 나오는 청년이 모였다고 믿어 주고 싶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입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기에, 또 여러분을 그렇게 보고 있기에 여러분에 대해서 말하는 데도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여러분이 참석했다 할진대는 과거를 걸어놓고 후회해야 됩니다. 내 나이 삼십, 혹은 이십이 된 과거의 생활은 무엇이었던고? 나의 생활을 들어 건데기를 건져 볼 때에 내 손에 남아질, 내 일생에 자랑할 수 있는 건데기는 무엇이 있느냐? 없다 하게 될진대는 하늘 보기 두렵고 땅 보기 두려운 겁니다. 여기에서 피땀을 흘리고 외쳐야 됩니다.
선생님은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렸고, 지금도 복통(腹痛)할…. 3천만을 전부 한꺼번에 모아다 놓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지만 입은 하나요, 몸뚱이도 하나니 천추에 한이 됩니다. 가고 싶은 곳도 많지만 갈 수 없는 하나의 몸, 제한된 몸인 것이 한스럽습니다.
`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느뇨? 내 손끝이 무엇을 잡으려 하느뇨? 내 머리는 무엇을 원하느뇨? 민족과 세계 인류를 넘어서 이 대천지는 어디로 가느뇨?' 라고 염려할 줄 아는 청년들이 돼야 됩니다.
공의의 법도대로 살아가야 할 나
만일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편에서 쓰러지기를 바라고, 고아와 같이 이 세계 앞에,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3천만 이 민족 가운데 그런 청년 남녀들의 수가 날이 가면 갈수록 불어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탄생될 수 있기를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은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민족의 절망을 해원시켜 줄 수 있는 청년 남녀들, 해원의 조건을 선포할 수 있는 용맹스런 정의의 종교는 어디 있느냐고 외치며 통곡하고 싶어해야 됩니다. 외치다 보니 힘이 부족하고….
이러한 논법에서 보게 될 때, 동방의 고아와 같이 홀로 자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벌거숭이 삼천리 반도, 너는 누구한테 뜯겼던고! 자리를 잡지못하고 왔다가 방황하는 3천만, 너는 누구한테 이렇게 당하였던고! 자기 부모가 있다면 더운 방에 눕히고 싶은 것이요, 자기 처자가 있다면 역시 그러한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수하를 막론하고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천리의 인연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 옆에 누운 부모를 굶겨야 하고, 자기 옆에 있는 자식들을 굶겨야 하고, 때로는 자기 사랑하는 아들딸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처참한 이런 인연을 누가 만들었느냐 이겁니다. 본래 우리 선조들이 잘못한 죄악의 보답으로 그런다면 할 말이 없지만,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아서 이런 보응을 받는다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 이것이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할 과제입니다.
죽어가는 민족 앞에 우리는 죽은 무리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헐벗고 있는 이 민족 앞에 헐벗은 무리가 될망정, 몰리고 있는 민족 앞에 몰리는 무리가 될망정 우리는 죽은 무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벗고 있어도 또 줄 수 있고 몰리는 자리에서도 구해줄 수 있는 이런 무리여야 됩니다. 이것이 당장 이 민족에게 필요하고 절박한 과제라는 것을 우리 청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구호가 있다면 `나는 내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명제를 내세워야 할진데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이 나라는 이 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세계는 이 세계의 것이 아닙니다. 곱게 단장시켜 나보다 더 거룩한 존재 앞으로 내가 끌고 가 보여 주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보여 주는 동시에 자랑해 드려야 할 또 하나의 주인이 있단다면 그 주인 앞에 그러한 책임분담을 해야 할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직시해야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도 여러분 앞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가야하고 여러분들도 가야합니다. 가야 할 그 길이 평탄한 길이라면 좋으려니와 평탄한 길이 못됩니다. 가시밭길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험산준령, 피 흘려야 할 이런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이 길을 단연코 가야 할 때가 왔고,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할 시대가 왔는데 이 민족은 잠자고 있고, 깊은 몽상에 잠겨 있으니 이제는 어떡해야 되겠느냐? `야, 아무개야 깨라!'라고 부르짖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집에 불이 붙어 당장 쓰러질 운명에 놓여 있다는 절박감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저들의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발길로 걷어차 가지고 유리문 밖으로 던질 수 있는 이런 절박한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사정 볼 때는 지나갔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런 때에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런 때에 있어요!
선생님은 염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혁명 정부에서도 대공문제에 대해서 염려해 왔지만 선생님은 그런 문제에 더욱더 염려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통일교회에 들어와 보니 3년 기간이라는 혈투전을 전개할 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기간은 굶으면서도 가야 되겠고, 떨면서도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서서 외치는 사람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를 가진 자요, 누구보다도 더 사랑받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얽매어 살 것이 아니라…. 그들도 민족을 위함이요, 그들도 공의의 법도를 빛내기 위한 것임을 알기에 오늘날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때
많은 기간 가운데 어찌하여 3년을 잡아 가지고 일을 하느냐?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설명하려면 역사를 풀어 헤쳐야 됩니다. 이 3년이라는 기간에 되어진 국내적인 사정과 국제적인 사정을 바라보라는 거예요. 엊그제 한국일보의 기사를 여러분도 봤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2월 3일부터 4일, 5일까지 3일 동안 벌어진 것이 무슨 일이냐? 오늘부터 내일 초하룻날 초이튿날까지 넘어가는 때입니다. 세상에서는 웃을는지 모르지만 성좌를 보고 미래의 때를 염려하는 점성술사들은 이런 기간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나는 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지상에 저끄러져 있는 일보다도 새로운 역사적인 전환점이라는 거예요. 하늘과 땅에 있어서 방향이 새롭게 달라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있다면, 악한 신과 선한 신이 있다면 악한 신과 선한 신이 회합을 하여 방향을 바꾸어 가는 때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런 때가 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시대는 밤절기였습니다. 밤절기였어요. 밤은 악을 상징하니 밤절기의 시대에는 악한 사람이 잘살던 시대예요. 이것이 교체하여 낮절기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어요. 우리 통일교인들은 이제 밤낮을 가리지 않는 기간을 세워야 할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 때가 왔어요.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이렇게 될 때는, 지금은 민주주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자기들을 주장하고 있고, 또 하늘을 배반한 무리들이 득세하여 자기들의 위심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제 밤이 지나간다는 겁니다.
이 때가 다 지나가거든 민주주의도 3분파가 되고 공산주의 3분파가 될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되어 있지만. 소련과 중공과 그다음에 불란서─이건 중립주의 공산국가입니다. 수정주의예요. 현재 그들이 나와서 서로 싸우고 있어요. 요렇게만 되라 이거예요.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자들도 교체할 때가 왔고, 민주주의도 다시 교체할 때가 왔습니다. 세계 사조가 스톱하여 다시 수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도인들도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거예요. 오늘날 철학이니 윤리도덕이니 사회 조직 전부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겁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놓고 생각해야 되느냐? 무엇을 걸어놓고 다시 생각해야 되겠느냐? 이제 시대는 개인주의 시대도 아니요, 민족주의 시대도 아니요, 어떠한 국가주의 시대도 아닙니다. 세계주의 시대도 넘고 우주시대도 넘은 입체적인 시대, 인공위성이 날고 있는 이런 시대에 들어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종교면 종교, 마음의 세계면 마음의 세계에 있어서도 입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지금까지 전통적인, 역사적인 모든 인연을 세워 놓고서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적인 기반을 그대로 세워 놓고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현재 갖고 있는 신앙 관념을 그대로 세워 놓고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주의나 체제를 그냥 그대로 세워 놓고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전부 제쳐 놓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전부 다, 무슨 종파니, 설교니 무엇이니 전부 다 평면에 세워 놓고 다시 골라야 되는 것입니다. 요건 쓸 것, 요건 못 쓸 것…. 이런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되느냐? 누가 쓸 만한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입니다. 어떤 것은 쓸만한 것이고 어떤 것은 못쓸 것이라고 판명할 수 있는 그는 누구뇨? 만일에 그런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메시아로 모실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는, 이 세계를 전부 다 벌려 놓고 그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전체적인 내용을 갖추어 가지고 정부(正否)를 판결지어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서 수습하여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생활력을 가진 이 생활환경에 있어서의 생활적인 그 가치가 전체 가치의 비준을 대신하여 자기 가치를 내세워 가지고 당당히 나서서 주장하는 그 모습은 전체의 가치 앞에 있어서 같은 비준으로 설 수 있는 가치를 가질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그런 뭐가 있다면 그것은 우주사적인 견지라든가 세계사적인 견지에 있어서의 메시아사상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도(道)를 보고, 어느 종교를 더듬어 보더라도 거기에는 끝날에 대한, 말세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거 없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건 종교가 아닙니다. 악한 세계, 선악이 투쟁하는 역사과정에 있어서 과정적인 현상에만 머물 이 시대가 아닌 만큼 목적 시대, 목적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적인 현상을 청산지어야만 됩니다. 결산을 봐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실을 헤아려 논고를 세워 보자'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보는 관도 그렇거든….
그러니 끝날에는 반드시 최후에 청산을 지어야 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의 실정을 바라보면 혁명정부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습니다. 이런 난국을 수습하여 이 수습된 것이…. 앞으로 이 우주사적인 대사조의 변혁이 벌어지는 때에 수습된 것은 그냥 그대로 가게 되는 거예요. 마이너스, 혹은 가려 가지고 내버릴 것 없이 그냥 그대로 수습되어 딱 백퍼센트의 점수로서 현재 수습된 것이 냅다 자리를 잡고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선진국가면 선진국가, 미국이면 미국 어느 국가든지 전부 한 군데에 펼쳐 놓고 수습할 수 있는 때에 그 퍼센트의 정도는 어느 국가가 많을 것이냐? 이런 문제가 나올 겁니다.
그러면, 전통이면 어떤 전통이 옳을 것이냐? 종교면 어떤 종교가 옳을 것이냐? 종교 중에도 제일 좋은 종교가….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인류는 좋은 것, 더 좋은 것이란 가치문제에 들어와 가지고는 생의 노정까지 무시하면서 허덕이며 그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별되어 있는 현세계
여러분들, 여기에 왜 왔어요?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이러한 견지에서 보게 될 때 어느 한 때에 이것을 거두어서 가려야 합니다. 안 가리면 안 되겠다 이겁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면 하늘 앞에 호소를 해서라도 가려야 됩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이렇게 해서 한번 추려 가지고 못쓸 것은 잘라 버리든가 해야 됩니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러한 책임을 짊어진 우주사적인 인격자, 인물이 와야 되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이 못 나오거든,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 자신이 해라 이거예요.
오늘날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게 될 때, 종교적인 한 면에 있어서의 서광을 남길 수 있는 것, 우리들이 고통당하고 있고 안타깝고 애절한 입장에 있는데서 하나의 이념의 길을 엿보게 해주고 있는 것이 종교에 있어서의 메시아 사상인 것입니다. 이걸 볼 때에 역사적인 종교는 필시 그렇게 되어야 되겠으니, 우리가 종교를 떠나서 논리적인 조건을 세워 가지고 비판해 보더라도 그런 때가 와야 할 것은 틀림없으니 반드시 그러한 한 때에 있어서 세계적인 모든 진영을 총수습하여, 이것을 헤아릴 수 있는 지도자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는 정치, 문화, 경제뿐만이 아니라 종교라든가…. 나중에는 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몸과 마음도 수습하고, 여러분의 심정문제까지도 수습해야 합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있는 세계에서는 의식혁명에도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강압적으로 `이놈아!' 하고 총끝을 대가리에다 대고….
그러나 춥던 겨울이 지나가고 남에서 북으로 찾아 올라오는 태양빛을 받게 될 때는 그 모든 동산에 얼었던 눈이 녹고 얼음이 녹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이 순리법도에 있어서의 우리 사람 자체도 자기의 길, 방향을 찾아 한 곳을 향해 가게 돼 있습니다.
보라구요. 태양빛이 비춰 오면 방안에 있는 화초들 순의 꼭대기가 먼저 태양 쪽으로 돌아갑니다. 꼭대기가 먼저 돌아가요. 그와 동시에 다말라 빠진 잎사귀라면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진액이 있어 가지고 몇 퍼센트의 생기라도 가진 이파리는 죽어갈망정 그 햇빛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시대가 기필코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천운이 돌아갑니다. 이 천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요, 역사를 근본적으로 파괴시키기 위한 것이 하늘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을 수습하여 그냥 그대로 연결시키는 겁니다. 가치문제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는 시간적인 가치가 제한성, 시간성을 넘어서 무한한 가치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 할진대…. 거 이해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의 얘기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다시 생각해 봐야됩니다. 이제 여기에 서 가지고 내가 `좋다 나쁘다' 하는 걸 다시 봐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사람이 손을 한번 들었다 내리는 것도 결과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치문제로 논란을 세워보면 들었다 내리는데 좋은 것을 위해서 들었던 것, 나쁜 것을 위해서 들었던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에 이의 있어요? 이의 있느냐 말이예요. 응? 「없습니다」 한번 벌어진 작용이나 현상이나 행동의 결과는 반드시 선의 결과를 가져오든가 악을 결과를 가져오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사실인 동시에 진리입니다. 이건 삼척동자도 부정 못 합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 보자구요. `좋다' 할 때, 제일 좋은 게 뭐예요? 청년들, 제일 좋은 게 뭐예요? 응? 「…….」 그것도 생각 않고 있어요? 안 되겠구만. 그렇게 말해도 할 수 없다면 말이예요. 이 마음을 가만 보면 좋은 것을 찾고 있는데 말이예요. 제일 좋은 게 뭐냐 할 때, 밤이나 낮이나 좋다 할 수 있는, 천하의 어떠한 존재물을 갖다 주더라도 내가 제일 좋다고 하는 것은 세계로. 믿는 사람들은 나쁜 것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가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왜 그러느냐 이거예요. 여러분들, 같은 동료끼리인데도 누가 가 가지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주먹으로라도 한번 때리면 가만 있겠어요? 기분 나쁘잖아요. 기분 나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겁니다. 들이 쳐갈기든가 자기 스스로 대치를 하게끔 돼 있다 이겁니다. 개인적인 위치를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 권한을 우리는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 그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그런 자유 권한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양심을 찾기 위한 것은 또 뭐냐? 내 양심이 좋고 그다음엔 내가 좋은 동시에 우리 부모도 좋고, 부모가 좋은 동시에 우리 가정이 좋고, 가정이 좋은 동시에 사회도 좋고, 사회가 좋은 동시에 세계도 좋은 그런 뭐가 있어야 될 거 아니예요? 좋기는 좋아야 되겠다 이거예요.
그러면 좋을 수 있는, 제일 좋은 것의 한정을 알겠어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좋은 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되겠어요? 이젠 거의 다 올라갔지요, 꼭대기까지? 뭐지요?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좋고, 하늘이 좋고, 땅이 좋고, 그다음엔 세계에서 높은 사람도 좋고 그다음엔 내려가서 백성도 좋고, 그다음엔 상ㆍ중ㆍ하 중에 거지, 그것도 거의 죽어 가지고 `아이고, 나 죽는다' 하고 넘어지는 그 거지도 좋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요?
그 좋은 것에다 입을 대고, 베개도 베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단다면 그 사람은 지금 죽어도 좋을 겁니다. 그런 공상을 한번도 안 해봤어요? 안 해 봤어요? 「…….」 이건 멋진 사나이들이 아니예요. 여자들도 그런 공상도 안 해 봤어요? 안 해 봤어요? […….] 그러니까 지지리 하는 게 여자들이예요.
자,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생각해 보자 말이예요. 생각을 하는 데도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있어요. 행동을 하는 데도 좋은 행동 나쁜 행동이 있고, 먹는 데도 좋은 것 나쁜 것이 있습니다. 가는 데도 좋은 곳 나쁜 곳이 있습니다. 내 오감이나 직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감각에도 좋은 것 나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내 개인이 그러니 이웃집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좋은 집 나쁜 집이 있습니다. 단체를 볼 때도 좋은 단체 나쁜 단체가 있고, 사회를 볼 때도 좋은 사회 나쁜 사회가 있습니다. 국가도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있고, 주의 사상에도 좋은 주의 나쁜 주의가 있습니다. 더 크게 보면 하나님을 중심삼고도 그렇습니다. 하늘편 사탄편.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현상으로 봐 가지고 제아무리 종교를 부정하려고 무슨 요술을 부리고 입을 벌려 가지고 큰소리 했댔자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 인간이 결과적인 가치를 표준하여 선악의 좋고 나쁜 결과의 입장에 서야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알겠나 말이예요? 「예」
모든 사람은 종교생활을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그러면 한번 쭉 생각해 보자 이겁니다. 한번 해부를 해보자 이거예요. 오늘날 세계에는 얼마나 살고 있다고? 몇 억? [30억입니다] 자, 30억이 살고 있는데 좋고 나쁜 것으로 보게 되면 좋게 생활하는 사람도 있을 게 아녜요? 그렇지요? 「예」 그러니까 절반 잘라 봅시다. 자르면 얼마예요? 「15억」 그래도 땅 위에 사랑할 곳이 있지요. 이렇게 보면 틀림없는 말이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은 그런 걸 많이…. 30억이라는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는 지상 위에 생활적인 결과를 타진하여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누어 보게 될 때, 좋은 사람이 15억쯤 된다면 그래도 가망성이 많다 이겁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꼴이니까 세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한 사람만 잡아도 가망성이 있는 거거든요. 그렇지요? 「예」 그래도 그럴 수 있는….
그렇다 해도 좀 가까운 무엇, 좋을 수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되는데, 어디 그럴 수 있는 사람 있어요? 붙들고 `아, 후련하다. 아 좋다' 할 수 있게 돼 있나 말이예요. 어느 집, 어느 위정자, 어느 종교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대답해 보라구. 찾았나, 못찾았나? 대답해 보라구요. 아직까지 답을 못 하고 있는 거 보면 아직은 만나지도 못한 거 아니예요? 「찾았습니다」 찾긴 뭘 찾아? 「선생님」 선생님, 내가 알 게 뭐요?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 말은 믿지도 말라는 거라구요. 알게 뭐요? 두고 봐야지. 그 때까지 두고 보려면…. 그때 가서는 때가 늦게 돼요. 여러분들은 모른다구요. 지금은 몰라요.
생각해 보라구요. 젊은 녀석들이 어떻게 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들여다 보면 그저 그 녀석들에게 기합을 주고 모가지에서부터 뼈다귀까지 짓이겨대고 싶단 말이예요. 이 자식들아! 천지가 어떻게 돼 있는지, 네 생명이라는 것이 어떻게 돼 있는 지, 제한된 생애 노정을 걸어가다 언제 어느 때인지는 거꾸러질지 자동차 타고 가다 부딪혀 죽게 될 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말이예요.
자기가 제일 귀하다고 미친 말들을 하는 거예요. `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개 같은 것들이예요. 가치로 보게 되면 개 중에는 팔면 몇만 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개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까짓 건 죽으면 단돈 1원을 주고도 안 사갑니다. 그걸 부모들이 알면서도 `아이고, 우리 아들 죽었네' 하고 통곡합니다. 그거 왜 그럴까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웃을 게 아니라 심각한 문제란 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 생각해 보라구요. 생각해 보게 될 때 문제는 크게 벌어진 거예요. 높고 넓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수많은 역사노정을 장식했다고 자랑하고, 수많은 문화를 창설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이 권내에 있어서 내 생명이 좋아할 수 있고 내 생애를 걸고서 생활적인 모든 것을 기쁨으로 포괄할 수 있는 지도 이념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그런 생명을 가지고서 그 환경을 벗어나지 못 하게끔 해 가지고 행복을 노래하고 최대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권내로 나를 잡아매 준 사람이 있느냐? 잡아매 줄 수 있는 기성교회 사람이 어디 있느냐? 앞으로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없다면 절망입니다. 과거에 있었다면 모르거니와, 그리고 이제라도 있을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앞으로도 없다면 절망입니다. 차라리 약을 먹고 죽는 것이 나아요.
이러한 가치문제를 가지고 허덕이면서 `나를 붙들어 다오. 나를 끌어다오. 나를 치료해 다오. 나를 살려다오'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느냐? 마음으로는 전부 그렇게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외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이것이 문제예요. 여러분, 외쳐 봤어요? `나를 살려다오. 나를 치료해 다오' 하고 외쳐 봤느냐 말이예요. 외칠래야 외칠 수 없는 사정에서 그냥 그대로 혼자 뒤넘이치다가 말 한마디도 세상에 남기지도 못하고 독약을 먹고 죽는 인간들과 같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움의 절벽이 인간에게 가로막혀 있기에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그러한 것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하고 호소하고 애원하는 겁니다. 그 소리가 종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기도라는 겁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기도하는 종교인 만나봤어요? `우리 아들딸 복주소!' 하고 기도하고 있다구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면 하나님이 밑지는 장사를 하신다는 겁니다. 밑진다는 거예요. 그런 기도를 하는 종교인을 만나 봤어요?
그저 `지금보다도 돈이나 많이 있어야 복이라고 알고 기도를 했는데 이거 유치장이 웬말이냐? 벌받았구나! 하나님 없다!' 그렇게 된 세상판국이예요. 만일에 인간을 믿을 수 없고 인간 세계에 살 수 없거든 이 인간을 창조하고 우주의 근본을 조성한 어떠한 원동력의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는…. 모든 자연이라든가 인간내에 조성되어 있는 세포적인 모든 것을 분석해 보더라도 이것이 있게 된 목적성이 형태 내에서라든가, 그 의식적인 면이라든가, 우리 양심적인 작용인 지ㆍ정ㆍ의의 활동적인 모든 현상을 사회에 반영시키고 있는 것이라든가, 혹은 이상적인 감정으로 이걸 헤아리는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될 때 그런 동기적인 내용을 갖춘 절대적인 힘의 원천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있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이 나와야 됩니다. 인연이 돼 있기 때문에 내가 그런 내용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존재는 하나님도 이것을 존재라 합니다. 그런 분 앞에 애달픈 모든 것을 맡기는 게 종교생활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인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답을 내줘요, 답을. `야, 너희들 소망을 가져라'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답을 내주시는 걸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답을 내주며 `너희들, 소망을 가져라. 끝날이 온다. 끝날에는 메시아가 온다. 메시아가 오면 곧 좋은 세상이 된다' 하시는 거예요.
이런 모든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해 보더라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왜? 어떠한 종교일지라도 그런 결과에 봉착해 가지고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종교인들은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그게 종교 생활이예요. 이 사람을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고, 나쁜 사람일지라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야 돼요.
종교를 통해 좋은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 그럼 그런 기도 해봤어요? 해봤어요? 어느 정도냐구요? 힘이 지나칠 정도로. 만일 그런 하나님이 없다면 허사지만 그런 하나님만 있단다면 이런 환경이….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나님이 있다면, 막연하지만 그런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일까요? 나쁜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좋은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이예요.
무엇에 대해서 좋은 것을 요구할 것이냐? 하나님 자기를 위해서? 절대자인 주체가 무엇 대해서 요구할 것이냐?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이냐? 개, 돼지가 아니고 온 우주일 것입니다. 우주인 동시에 우주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슬프면 슬픈 것을 알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을 알고, 기뻐하면 기뻐하는 것을 아는 심정적인 존재일 것입니다. 심정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적인 반응을 받아 가지고 거기에 화동할 수 있고 상대가 될 수 있는 이런 존재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무엇일 것이냐? 거기에 아무리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게끔 되어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안 그래요?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사람이라면 사람 가운데도 어떠한 사람일 것이냐? 어떠한 사람일까요? 만약에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면 자기 주머니에 쓸어 넣고 `너만 붙들고 있겠다, 너 하나면 되겠다'고 하시겠어요?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찾았다 할 때는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세계를 다 모아놓고서 `햐! 내가 좋은 사람을 찾았으니 이 좋은 사람을 좀 봐라' 하는 그런 마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어때요? 있겠어요, 없겠어요? 대답을 하라구.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겠습니다」 있습니다. 정말 있어요? 「예」 그러면 내가 모든 세상에…. 그런 일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겠습니다」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걸…. 그래서 비난이 많고….
아, 내가 무슨 말을 했나? 내가 무슨 말을 했나요? '있겠어' 했는 데 무슨 말을 했어요? 혼자 말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지 뭐. 들을 사람이 있어야 말하는 거 아니예요? 무슨 말을 했어요? 잊어버렸네. 무슨 말을 했지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혼자 가지겠다는 이야기 했나요? 여기 아주머니!
자, 만일에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시고 이 온 우주를 위하여 복지를 건설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이라면 복지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를 말하느냐? 같은 시대에서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복지일 거예요. 그런데 복지가 못 됐으니 하나님이 제 아무리 잘났다 해도 하나님….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가졌다면 틀림없이 우리 조상한테 보여 주든가, 내 아버지한테 보여 주든가, 동생에게 보여 주든가 보여 줘야 되는데 아직까지 보여 준 것이 없으니 그런 사람을 못 가진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나 나나 마찬가지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기쁜 일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에는 하나님이나 나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나, 마찬가지의 입장이라는 것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좀 낫단다면, 그럴 수 있는 가망성의 자리에 섰더라면 그것은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하지 말자구요. 그리고 여러분들도 낙망하지 말고 조금 기다려 봐야지요. 지금까지 이렇게 나왔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한 때 보게 되면 속임수같이 나가는 거요. 그 시대환경에 있어서 어떠한 주류가 있으면 그 주류에서 맨 위에 위대한 사람이…. 주류는 이렇게 높이 그리고 있는 데 이게 나가려면 역사적인 고충이 여기에 대번에 따르게 돼요.
그러니까 여기에 그런 운세를 잘라 가지고 주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요 말단에 양심적인 사람으로 다리를 놔 가지고서 시대적인 책임량을 점점 넓혀 여기 세계를 책임지게 하는 거예요. 최고의 지점까지, 여기 하나님까지 찾아올라간다 이겁니다. 그런 기준에 찾아할 수 있는 이런 양심적인 도를 세워 가지고 종교를 세워 나가는 겁니다.
그 종교의 내용을 분석하면 말이예요,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돼 있지 않은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래 가지고…. (칠판에 판서하시면서 설명하심) 하나님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가망성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러한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의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고 계신다는 겁니다.
거, 조그만 것들이 와 가지고 무슨 불편을 그렇게 끼치니. 응? 오줌이 마려우면 싸라구! 여기 서서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오줌 싸라구, 내 치워 줄께. 여러분들이 선생님 말씀에 취해 가지고 오줌이 출출 나오는 것도 잊어버리고 들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만큼은 돼야 뭣이라도 하나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사실입니다. 내가 미쳐 가지고 길가에 가다가 서서 오줌을 싸면서도 `세계복귀' 그럴 때는 `야, 너 됐다' 한다는 거예요. (웃음) 그만큼 됐으면 됐다는 거지. 그래도 좋아하거든. `그 면에 있어서는 내가 왕이다' 한다는 거예요. 다른 오줌싸는 건 안됐지만 말이예요. (웃음) 이렇게 다리를 놔 가지고….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은 각 시대에 따라 가지고 변천해 나오는 거예요. 변천해 나오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낫다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과 같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은 그렇게 주욱 수습해 나오는 과정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앞에 `야, 너희들 좀 기다려라' 하는 말을 해야 되겠기 때문에 어떻게 말씀을 하셨느냐? `끝날이 온다' 혹은 `말세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걸 약속하신 거예요. `말세가 온다. 끝날이 온다' 하셨어요.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조금 기다려라. 조금 기다려라'하는 것을 보니 지금까지 속임수 모양으로 종교를 걸어 놓고 거쳐왔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여기 꼭대기까지 올라갔댔지만 꼭대기는 없어지거든요. 여기를 믿던 사람들은 `아이고, 이건 천지 최후의 종교요, 우리를 살려줄 줄 알았는데….' 한다구요. 그걸 믿더라도 믿던 사람들이 이걸 옮길 때는 그걸 내 버리고 따라갈 줄을 모른다 이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수많은 종교 때문에 시대적으로 종교의 발전을 방해하는 면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요 가운데의 요것들은 이렇게 됐지만 새로운 면에 있어서의 더 큰종교, 이게 흡수해 가지고 옮겨지고, 또 흡수해 가지고 옮겨지고 해서 점점점 올라간다 이겁니다. 역사적으로 문화권사를 보게 되면 큰 문화권을 이룬 종교가 약소 문화권을 다 흡수합니다. 그러니 제일이라고 주장한 녀석들이 움직이지 못하면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고 보장해 주는 종교를 믿어야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됩니다. 나라의 혼란 시대가 오고, 어떤 종교가 부패하는 것이 전성기가 아니고 어느 한계에 도달할 때 지혜있는 사람들은 다시 볼 줄 알아라 이겁니다. 이해돼요? 거 이해돼요? 「예」 이런 논법에서 개인의 가정이 망해 들어가게 되면 다시 세워라 이겁니다. 또, 여러분이 결실할 것이 파죽지세로 이 세계를 정복할 것 같지만 가다가는 재차 정복당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예요. 아직까지 이런 종말의 예고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라! 그렇다고 망할 때만 다시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흥해 있지만 그 흥한 것이 원인적으로 하나님이 끝날이라고 선포한 그 찰나의 기준에 접촉될 수 있는 도상에 서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거든 다시 생각해라 이겁니다. 망하는 녀석도 생각하라. 흥하는 녀석들도 생각하라. 그러니까 전부가 생각해 봐라. 결론은 그렇게 됩니다. 그렇지요? 다시 생각해 봐라 이거예요.
우리가 새로운 문화세계를 꿈꾸고 있고, 새로운 역사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21세기의 비약적인 문화를 바라보는 교차 도상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 봐라' 하는 이 말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가 늘어진 사람이나 배가 들어간 사람이나,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전부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종교고 뭐고 전부 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라. 세계 저 골짝마다, 그리고 아무리 고대광실 높은 용상에 앉았더라도 다시 생각해 봐라. 왜? 인간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하나님이 좋다 하는 결론을 받지 못했으니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는….
`너희들 두고 봐라. 두고 봐라! 그냥 그대로 인계해 가지고 거기에다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는 인연을 접붙여 가지고 가라. 더 받아라' 이러면 모르거니와 행여 백 번 가운데 한 수가 있을둥말둥 해요. 하늘은 그걸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이면 기독교 각 종파는 물론 무슨 도를 물론하고라도 다 다시 생각해라 이겁니다. 이 결론을 내리면 여기에 다 들어간다 그 말이예요. 그렇지요? 「예」
좀 쉬어서 하자나, 그만 두자나? 그만 두자고? 이 결론에는 반드시 천하의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다 들어갑니다. 다 들어간다 이거요.
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근성을 분석해 보게 될 때, 전부 다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지만 좋지 못한 환경에 있다는 거예요. 좋지 못한 환경에서 좋아지기를 바라고 허덕이며 울부짖고 있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고통이요, 비애요, 곡절입니다. 이러한 판국의 세상이 되었으니 결국 하나님이 이런 판국의 세상을 책임지고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세상을 책임지고 나가야 할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 앞의 나쁜세상-좋던 녀석도 나빠지고 나쁜 녀석도 좋아져 바꾸어지는, 믿을 수 없는 세상, 이런 세상 앞에 하나님은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말세라는 한계점을 세워 놓고 `조금 참아라. 참고 나가라' 하시는 겁니다.
참고 나가는 데는 그냥 참고 나가지 말라는 거예요. 신앙이라는 믿음을 중심삼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저버리더라도 하나님만은 믿어라 이거예요. 하나님만은 믿으라는 막연한 주제를 내걸어 놨습니다. 하나님만은 믿어라. 이건 모호하기 짝이 없단 말이예요. 하나님만은 믿어라. 죽을 때도 믿고, 기쁠 때도 믿고, 쫓겨다닐 때도 믿어라. 사정이나 환경이 천태만상으로 변하고 모양은 천태만상으로 달라지더라도 하늘을 믿는 것만은 변치 말아라 이겁니다. 그러면서 어떡하라고? 정성을 들여라! 정성을 들이라 이거예요. 여기에 곡절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여, 당신은 믿으라 할이만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믿겠다고 하는 사람을 믿어 주십니까?' 하고 물어 봐야 돼요. `내가 믿는 데는 믿는 만큼 믿어 줍니까?' 하고 물어 봐야 돼요. 또, `충성을 해라!' 하면 `하겠습니다. 그런데 충성을 한만큼 충성으로 알아줍니까?' 하고 물어봐야 됩니다.
맹목적인 말이요, 모호한 내용으로 우리 앞에 권고했지만 그것으로 모가지를 자르고 끌어 내릴 것이 아니라, 믿으라면 믿는 데 대해서 답을 가져야 되겠고, 충성을 하라면 충성을 하는 데 있어서 답을 가져야 됩니다. 왜? 까딱 잘못하면 믿는 데서도 나쁜 패거리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긴 믿는 데 좋을 수 있는 것에 부딪치게 되면 괜찮겠지만서도, 저 사람이 믿는 것, 내가 잘 안 믿는 것 용서받는…. (녹음이 잠시 끊김)
꼬불랑 꼬불랑 가긴 가는데, 여기서부터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꼬불랑 꼬불랑. 그러면서 `슛! 골인' 하는 그 믿음이…. 수많은 민족도 전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러한 복잡다단한 신앙이면 신앙, 믿음이면 믿음, 복잡다단한 환경과 단체이면 그 환경과 단체에 있어서 가져야 할 신앙, 대상을 향하는 신앙 관점에 있어서 전부 자기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내용에 있어서 말세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신앙이냐? 믿는 데는 내가 천당가겠다고 믿지 말라는 거요. 천당은 저 문만 통과하면 가는 거예요. 그게 목적이 아니예요. 자기가 가진 관념이 벌써 틀리다 그 말입니다.
그저 믿고 천당 가겠다는 건 막연하다는 거예요. 믿는 데는 이 말세의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있어서 `야, 믿어라!' 했던 것이 좋다고 보장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맨끝에 가서는 이렇게 변천해 나오는 거요.
끝에 가서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경지에 선 믿음으로. 하나님적 믿음입니다. 하나님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적 믿음이예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예요, 그건. 또, 내가 충성하는 데는 이 권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충성을 해야 돼요. 거기다 맞춰야 됩니다. 거기 있다는 거예요.
교회에 그저 보따리 싸 들고 다니면서 찬송이나 하고…. (탁자를 두드리시며 찬송하는 흉내를 내심. 웃음) 이래 가지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안 돼 있다 이거요. 자기들도 그래가지고 또 찾아 해결하겠지요. 그거 틀렸다는 것이 아니요. 모르니까 내가 가르쳐 주려고 그래요. 이것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님 다음 사람 있으면 나와! 만일에 이런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나온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겠나 이거예요.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 이겁니다. 어때요, 책임을 져 줘야 되겠어요, 안 져 줘야 되겠어요? 「책임을 져 줘야 됩니다」 천당 가겠다고 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천당 보내줘야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책임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신앙을 해야 돼요.
책임을 져 주는 입장에 서게 되면 무엇이 되느냐? 어떻게 되느냐? 책임을 져 주겠다고 하면…. 말세라는 종말이라는 원리적 관점을 세워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하나님으로서는 무엇을 주기 위한 것이냐? 하나님이 아까 말한…. 하나님도 지금까지 말하기를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할 사람을 갖지 못했다 이겁니다. 그래서 끝날에 가서는 하나님이 전부 다…. 그저 복잡다단한 것을 다 거쳐 가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별의별 사정을 다 거쳐가지고 한 곳으로 넘어서야 됩니다.
종말적인 끝날에 있어서, 인간 도상에, 역사 도상에 있어서, 인류사적인, 혹은 천주적인 내용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비로소 `이야!' 하고 기뻐하며 사랑하실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하시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될 거 아녜요? 그래야 하나님도 구원하신 보람이 있지요.
하나님과 인간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은 메시아의 날
만약에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을 가졌다면, 그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제일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할진대 그 기뻐하는 것을 혼자 주머니에 넣어 버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예요. 이것을 돌려줘야 할 하나님이니 `내가 좋으니 너희들도 좋아라' 하십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가치적인 입장에서 아까 말한 신앙자들에게도 데려다가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이나 이 모든 인간이나 기쁜 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대우주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기쁜 날을 봤다면 그 기쁨은 인간 세상에도 나타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쁠 수 있는 소망의 한 날을 세운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그 날은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같은 소망의 곳이요, 같은 목적의 곳이요, 같은 목적의 날입니다. 그 날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요, 그와 동시에 비로소 인류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알겠어요? 그 때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의 날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만나 가지고, 그러한 한 존재를 세워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동시에 만 천하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모든 천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명패를 그의 즐거움과 더불어 같이 느낄 수 있는 때가 인간 역사 노정에 있어서 바라는 소망의 때요, 오늘날 이 사회주의 사상이 바라는 이상세계라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알겠어요? 「예」 그런 게 있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지 못하는데 인간이 기뻐하겠다는 것은 천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세상은 전부 허사라는 것입니다. 허사예요. 세상은 지나가 버립니다. 허무하다 이거예요. 믿지 못할 세상입니다. 믿지 못할 세상이지만 믿어야 하는 곡절의 운명은 나를 재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운명의 과정에 휩쓸려서 자기도 모르게 죽을 사지를 도피하여 가는 길이 종교의 길입니다. 이 길을 더듬어 가 가지고, 이런 막연한 목적지를 향하여 신앙길을 가 가지고 이것이 주도적인 역사적 사조를 이끌어 나오는 모양을 갖추어 왔다는 거예요.
내용은 제시되지 않았고, 방법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방향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방향에 있어서는 저 세계를 향하는 달려가는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 지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반드시 관계를 맺기 위한 최후의 기준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2천 년 전부터 계속되어져 온 그런 말씀이 있었던 거예요. 그 말씀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거예요.
오늘날 인간적인, 역사적인 사조를 헤아려 볼 때에 이 세계사적인 사상은 반드시 동양의 한 면에 있어서 수습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가 왔다 이겁니다. 아까 말하던 선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가꾸어야 할 때가 왔나니 가꾸어서 전부 선한 편으로, 좋아할 수 있는 편으로 모아 놓은 곳은 온 세계 인류가 `너도 나도 좋아!' 하고, 하나님도 `아이고 좋구나!'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런 권내로 들어가야 그 권내에 들어온 사람들이 비로소 `아, 천상천하 모든 존재 위에 서 있구나. 누구든 우리를 본받아라. 이것 봐라!' 한다는 것입니다. `오냐! 오냐! 보자. 보자' 전부가 그럴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됩니다.
돈 많이 있는 사람들 보면 옷 한 가지 가지고 자랑하지요? 그때 가서 그런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이 자리는 한 면에서는 부러운 것이요, 한 면으로는 복된 자리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에 대해서 실제적인 무엇이, 가치적인 반응의 실체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수긍하나…. 우리의 직접적인 감정으로는 느낄 수 없던 하나님이 이런 기쁨이라는 하나의 문제를 걸어 놓고, 그것이 딴 물건도 아닌 사람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동시에 온 천하 만민이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어떠한 일개 국가의 주권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천상 천하의 모든 존재, 지금까지의 기성 존재가 기쁨을 드릴 수 없었던 이런 가치의 존재로서 인간이 등장하는 그런 최고의 권위의 자리라는 것을 갖고, 그렇게 좋은 입장에 서고 비로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늘땅의 누구보다도 훨씬 높다 할 수 있는 이러한 입장에 선 사람이어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좋아하신다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안 좋아할 수 있나요?
종교는 거짓 것을 참 것으로 만드는 멕기공장
그래 여러분들, 만물의 영장이예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획기적인 것입니다. 영장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가짜란 말이예요. 이 역사노정에서 아직까지 진짜가 나오지 않았어요. 진짜 나왔어요? 좋고 나쁜건데 좋은 것이, 아직까지 진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뭐가 나오지 않았어요? 「진짜」 뭣이? 「진짜」 뭣이? 「진짜」 대답을 크게 하라구요. 뭐가 안 나왔어요? 「진짜입니다!」 아, 이젠 큰데. 뭣이? 「진짜!」 오늘 왔다가 요거 잊고 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진짜 부모 만나 봤어요? 하나님이 진짜라 할 수 있고, 온 피조만물이 진짜라 할 수 있고, 아는 사람이 진짜라 할 수 있는 부모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겁니다. 그러니 가짜의 탈을 쓰고 나오는 인간, 어이 슬프지 않겠습니까? 가짜의 명패를 달고 나오는 인생이니 진짜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공의의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어이 고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인생행로는 고해(苦海)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가짜로 취급받아야 돼요. 공의의 법을 추구하는 천도가 있다 할진대 그 법도 앞에 가짜들이니, 가짜 취급 받아야 할 인간이 되었으니 이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 보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응? 「예」 알겠어요? 「예」
가짜를 진짜로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본질이 전부 다 사탄세계의 핏줄을 받았어요. 그러니 내가 어저께도 부산에서 얘기했지만 멕기(めっき)를 올려야 돼요. 멕기가 뭔지 알아요? 도금, 물을 올린다는 거예요. 진짜 물을 올린다는 거예요. 섭섭하지요? 배꼽까지 가짜예요. 이놈은 가짜지만서도 금물 도가니에 넣어 가지고 금물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멕기한다는 거예요. 멕기해 주겠다는 겁니다, 멕기. 그냥은 안 돼요, 그냥은. 그래 멕기 공장에 들어가는 것이 낙원입니다. 아직까지 그 멕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이 지상도 그거예요. 이 도라는 것도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이름 밑에서 그런 내용의 진짜 도가니에 몰아 넣어 가지고 멕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다가 말아 가지고 합격품이 못 되었다는 거예요. 요만큼만 되도 그건 불합격품이라구요.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 복귀섭리입니다. 저 학생, 알겠어요? 복귀섭리예요.
그러니 얼마나, 얼마나 원통하고 분하겠어요? 본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순금으로 태어날 것인데 이것이 전부 놋으로 태어난 거예요. 구리로 태어났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내 본성의 본질은 그것을 한하면서 순금의 그 자리를 그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의 뜻, 본질의 고걸 반영하여 외적인 멕기를 씌워 가지고 중간 것은 인정하지 않고 요걸 딱 맞추는 거예요. 가짜지만 멕기를 들여 가지고 진짜 대신 갖다 놓자, 진짜 대용품하자 그겁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진짜 대용품이예요.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손질을 잘해도 흠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한번 골통에다 박아 써서 빼낸 흠이 있다는 거라구요. 이런 것을 다시 순금의 겉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 교회는 뭐냐? 참교회는 뭐냐? 참종교와 참교회는 뭐냐? 뭐예요? 멕기공장입니다. 감투를 씌우는 겁니다. 껍데기를 씌우는 거예요. 너는 가짜니까 들이대라 이거예요. 처음 온 사람 중에는 `야 저 사람 저 말하려고 하루 종일 저렇게 말했구나. 교묘하게 꼬여 들어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기도해 보라구요, 거짓말인가.
종교는 어떤 곳이라구요? 「멕기공장」 멕기공장인데, 무엇을 씌운다구요? 「감투입니다」 감투, 세상에서 올라가는 그런 감투가 아니예요. 무슨 감투? 나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감투입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 들어오면 칠통이 있어요. 칠통. 무슨 칠통? 악질통, 권력통. 응? 상질, 중질. 악질통. 뭐 선질이 아니예요. 선에 못 가요. 상질, 중질, 하질. 섭섭하지요? 그렇지만 할 수 없지 뭐. 어떡하겠나요? 오늘 저녁에도 밤예배를 할 수 없이 맡았다구요. 사실이 그렇다구요. 말들 참 잘 지어낸다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그럼 멕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어떤 녀석들은 말이예요, 편안히 앉아서…. 이렇게 나오면서 멕기 할 수 있어요? 잘라 버려야됩니다. 뿔이 난다구요, 뿔이 나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가만 둬 두어야 돼요? 잘라 버리든가, 망치 가지고 때려 눕히든가 해야 돼요. 그렇게 해야 될 거 아니예요? 해야 되겠나요, 안 해야 되겠나요? 해야 되겠지요? 「예」
그렇지만 그걸 자기는 못 하거든요. 자기가 할 수 있었다면 다 했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깡패 오야붕이 돼 가지고 남을 하루에 백 사람을 죽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이구, 안 그래야 할 텐데' 한다구요. 사람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 칼을 빼고 나면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거 볼 때 좋을 게 있겠느냐 말이예요. 그거 좋다는 건 사람이 아니예요.
자기는 못 하는 거예요. 어떤 스승이 있던가 어떤 의사가 있던가 해 가지고 해부를 해서 까 내든가, 도끼 자루로 들이 패서 잘라 주든가, 뽑아내든가, 들이박든가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뿔을 강제로 끊으려고 하면 근본이 깨져 나가거든요. 밑창이 상처가 난다구요. 굴려야 됩니다. 그래서 이 역사도 굴려 나온 거예요. 가려 나온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비애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통일교인이 되어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바라보기에는 통일교회는 멕기공장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구요, 아직까지 멕기공장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멕기공장을 만들어야 되겠단 말이예요. 그러려면 젊은 녀석 누구누구를 전부 잡아다가…. (녹음 불량으로 일부 수록하지 못함)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거 나쁜 마음예요, 좋은 마음이예요? 「좋은 마음입니다」 좋은 마음입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겁니다. 그저 몽땅몽땅 뽑아 가지고 한꺼번에 몽땅 붙여 놓고 싶은 것이 여기 이 사람의 바램입니다.
사람도 선을 지향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하나의 시대적인 입장에 그런 맘을 품거든, 하물며 천지를 사랑하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 할진대 창조주의 마음이 그렇지 않겠느냐.
30억이라는 인류가 살고 있습니다. 30억이라는 인류가. 30억이라는 인류가 살고 있어요. 이 30억이라는 인류 가운데서 사망률을 평균 잡자면 백 명 중에 한 사람만 죽는 다 해도 일년에 죽어 나가자빠지는 게 얼마예요? 3천만입니다. 원수의 사탄세계에서 지옥을 향하여 급행열차를 매 10초에 한 대 꼴로 달리는 거예요. 무지몽매한 하나님이라면 모르거니와 심정으로 이끌어 이것을 살려 주기 위한 책임을 짊어진 하나님으로서 그걸 바라볼 때에 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세상 부모도 자식이 하나 죽어 가게 되면 그 자식이 살인강도요, 이 나라에서의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자라도 그가 최후로 사라지는 교수대를 향하여 걸어 나가게 될 때, `하나님, 능력이 있사오면 저 아들을 살려주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 부모의 마음이거늘, 이런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의 원천되는 것이 창조주라 할진대 그 원천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이 1년에 3천만이라는 수효가 지옥을 향하여 달려 들어가는 것을 볼 때에 `어, 너 잘간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이겠느냐 이거예요. 어떻겠어요? 한갓 몇 척밖에 되지 않는 사람도 그런 욕망에 있어서 자신의 것을 좋은 것으로 인정할진대 하늘이 이런 처참한 환경을 바라보고….
우리 한국을 두고 보더라도 3천만 가운데 3십만의 사람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고 가고 있고, 또 연속적인 운행을 하고 있는 마당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얼마나…. 이런 인간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이 이런 경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날 내가 밥 먹는 이 시간에도 죽음의 고함성을 치면서 죽음의 지옥을 향해 달려드는 이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리가 많다는 거예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이 아니예요. 지식계급의 사람들, 이 나라를 지배하고 혹은 세계를 움직여 나온 자칭 똑똑한 인텔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억울하고 억울하구나!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런 걸 생각할 때 통곡할 줄 아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들이 믿고 우리들이 만나려 하는 그 아버지는 슬픔의 아버지입니다. 천상, 지상 어떠한 존재물을 대하더라도 고생을 하고 고통을 당했다는 어떠한 왕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고통이라는 명사는 인간 앞에 해당되지 않아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더라 이거예요.
고생이라면 하나님 이상 고생한 사람이 없고, 고통이라는 명사를 가질자는 하나님밖에 없고, 슬픔이라는 명사를 가질 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억울하고 분하고 세상만사 곡절의 모든 비운의 실체로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오늘 인간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억울하고 분한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분인 것을 알고 보니 매를 맞고 엎드려 엉엉 울면서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할 수 있고, 쫓김을 받아 있을 곳이 없어 바위틈에 가 가지고 찬 바람을 맞는 그 자리에 들어가서도 `나는 괜찮습니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누구냐? 그분은 누구냐? 그분은 본래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본래의 우리 아버지가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던고? 본래의 우리 아버지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던고?
여러분, 이 땅 위에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입장에 서야 하나님의 실체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는 사정을 말할 수 있고,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한 자리에 있으니 죽더라도 한이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어요.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은 매를 맞아 피를 토하는 자리에서도 그 아버지가 보고 싶었고, `내 아버지, 내가 죽습니다' 하는 죽는 자리에서도 `당신을 위하고 당신의 서러움의 핏자국을 메울 수 없는 불효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안타깝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도 이런 심정을 지녔기 때문에, 아들딸을 찾고 있는 아버지의 버릴 수 없는 소망은 자기가 죽어가더라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을 박는 무리를 보고도 `피야 떨어져라. 몸이야 찢어져라!'했다는 거예요. `슬픈 고통의 실체는 당신이였사오니 내 아무리 슬프고 내 아무리 곡절이 많다 하더라도 이것은 한계적인 고통이로되, 죽음의 고개는 몇 분 몇 초 안 되는 한계적인 고통이로되, 당신은 내가 죽어간 후에도 고통의 생활을 면치 못하는 억울한 당신인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향하여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흐르는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민족을 향하여 아직까지 피와 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직까지는 죽음의 비통한 길을 걸어야 하는 아버지인 것을 알아주는 무리가 되자는 것이 통일교회 패들입니다. 내게 재산이 없고 내게 자랑할 아무것이 없더라도 불쌍한 아버지의 효자가 되어 보겠다는 이 정성, 이것이 통일교회가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재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 수십 평생 곡절의 길을 갈 적마다 그 아버지는 살아 계시거늘 내가 고통을 받고 있는 여기에 있어서 편될 수 없는 아버지라는 걸 생각할 때에 억울하고 분통했습니다. 그런 곡절의 사정을 지금까지 말 못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고생하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고생길로 나가야
그러면 그 아버지는 어디를 더듬어 찾아가느냐? 당장에 죽을 사람의 운명의 좌석에서 눈물 흘리는 아버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살피시는 아버지, 이런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찾아가자니 나는 여러분에게 고생의 길을 가라고 하늘을 대신하여 맹세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부디 고생하는 길을 가라!
고생하는 길을 가서 뭘할 것이냐? 전도를 해서 사람 만드려는 것이 아니예요. 내 목적은 전도해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예요. 뭘할 것이냐? 그 자리에 가서 슬픈 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슬픈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슬픈 아버지의 눈물과 더불어 여러분도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가 피땀을 흘리면 여러분도 피땀을 흘릴 수 있는 동반자가 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몸은 본부에 있고 침대에 누워 있지만 마음은 괴로워요. 찬바람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이런 밤에 어린 아들딸들이 산지 사방 죽음의 첨단에서 하늘 대신하여 눈물 뿌리고 있는 데 그런 입장으로 몰아넣는 내가…. 이 스승만은 거짓된 자가 안 되기를 지금까지 기도해 왔다는 걸 여러분은 알아야 돼요.
그 목적은 어디 있느뇨? 좋은 자리에 있느뇨? 예수는 어떤 사람이냐? 천지에 지극히 슬픈 하나님의 왕자였습니다. 예수는 어떤 아들이냐? 천상천하에 없는 고통의 왕자였습니다. 그렇기에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슬프고 곡절 있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한스럽고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것이 무엇이냐? 좋을 수 있는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이 고통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면 고통 뒤에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좋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이런 고통을 책임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책임지고 이것을 위해서 싸워 승리적인 깃발을 들기 전에는 기쁨이라는 명사는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을 우리들은 몰랐거니와 역사적인 고통 전체를 짊어지고 이 세상의 해방의 한날을 가져와 `고통은 내 것, 기쁨은 너희들의 것' 이라고 약속하여 오늘날 소망의 일념을 기원한 황공한 하늘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느냐 말이예요. 아느냐 말이예요. 꿈도 못 꾸고 있어요.
이번에 전라북도에 널려 있던 여러분들, 40일간이라는 한때를 통하여 고생을 했다고 우리들은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나마 두려운 자리, 이 자리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아버지와 더불어 인연맺어 가지고 아버지가 눈물 뿌린 자국에 여러분이 눈물 뿌리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이 민족은 비록 잠이 들어 있고, 이 나라는 비록 아버지를 모르는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갈 길은 꺾이지 말아야 됩니다. 최후의 곡절의 마당에 있어서 갈 길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한 입장에 선 친구의 주인이 됐기 때문에 그 길에서 싸워도 하나님이 꺾여 나가지 않는 한 우리들은 이 시대와 더불어 종말의 한계선과 더불어 겨루어 이 고개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최후의 승리의 터전으로….
끝날에 처한 성도는 인류의 부모 되시는 참부모를 찾아야
이 나라를 개척하고, 이 나라를 책임지고, 이 세계를 개척하고, 하늘을 책임져야 할 무리들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던 이런 입장에 선 하나님이라면 그런 경각에서 고통을 느끼며 바라보는 아버지 앞에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멕기 공장에서는 이래 가지고 뭘할 것이냐? 종의 처신을 찾아서 양자의 처신을 갖추어 그다음에 아들이다 하는 이름, 혈통이 다르기 때문에 이래 가지고 아들이다 하는 이름까지 우리가 거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은 이 땅 위의 인간으로서 비로소 본연의 참부모를 갖추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타락한 후손이니 참부모를 갖지 못했다는 거예요. 앞날에 있어서 하늘이 찾고, 아까 말하였던 하나님이 제일 좋아할 수 있는 그 중심존재, 끝날에 우리 인간 앞에 비로소 보여 줄 수 있고, 너와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중심 존재는 누구냐?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본래 창조 당시에 지었던 창조이념으로서 고대하던 분이 있다면 그분이 누구냐? 이는 타락한 인류를 번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하지 않고 참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참다운 부모로서, 인류의 타락하의 인연을 벗어난 참부모인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부모로서 세워지면 뭘 할 것이뇨? 하나님이 비로소 천지만물을 다 지어 놓고 기쁘다면 최고로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의 감정을 그 부모의 감정과 접촉시켜 가지고 오늘날 이 지상 위에 그런 후손을 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것이 하늘의 창조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보여 주고 싶은 것,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던고? 그는 참부모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기쁨의 왕궁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생각해 봐요. 그래야 될 거 아니예요?
천상 천하를 대신하여 그를 가리키면서 쌍수를 들어 `너는 내 아들딸이다' 해 가지고 둘을 세워 놓고 성혼의 축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상의 마음으로 그리고 이상의 심정으로 품고 싶었던 사랑의 마음을 그냥 그대로 몽땅 위업으로서 상속해 주고 싶었던 그분이 있나니 그분이 누구냐 하면 인류의 뭐? 「참부모입니다」
그럼 인류의 참부모를 만났느냐? 여러분을 낳았던 부모들은 타락한 혈통에서 맺어진 부모입니다. 천륜을 배도하고 인륜을 어긴 우리의 선조들과 여태까지….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이 있는 지 없는 지 모르는 사람들이 돼 버렸다구요.
온 천상에 가 있는 영인들이나 지상에 있는 육체를 가진 모든 인류들이 바라는 존재는 누구냐? 끝날에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종말시대의 약속의 한 소망의 존재요, 우리들이 그리워하던 아예 없어서는 안 될 분, 천상과 지상 인간과 하나님에게 최후의 심지적인 중보가 되어야할 그런 분이 있나니…. 그를 만나게 될 때에 하늘의 기쁨이요, 그를 만나게 될 때에 인간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환희의 노래를 하늘에서부터 땅으로부터 드높이 찬양할 수 있는 중심존재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 탄식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고아예요, 고아, 고아, 고아, 고아.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회의 진리는 신랑 신부라는 이름으로서 막음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소원을 단정하고 이걸 해결지어야 할 문제는 무엇이뇨? 신랑 신부입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처음 온 사람이 있기 때문이예요. 신랑 신부라는 말이 왜 나오느냐? 이 말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마운 말입니다. 참 고맙고 감사한 말이예요. 한많은 가슴에 새로운 하나의 답을 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명사야말로 인간 세상에 있어서 복된 말씀 중에 복된 말씀이요,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종결적인 하나의 실체를 만나지 못하였기에 오늘날 뜻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나오는 기독교에 있어서 신랑 신부라는 명사는 이제 종말의 관문을 향하여 허덕이는 말세시대를 통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끝날에 처한 성도들은 누구를 찾아야 되느냐? 예배당에 가 가지고 예수를 찾아야 되겠지만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쁨의 대상으로 세워 줄 수 있는 우주의 보화, 온 천주의 기쁨의 왕자, 기쁨의 왕궁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참부모의 모습을 찾아야 됩니다. 이게 누구냐? 새로운 신랑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심판할 수 있는 신랑 신부예요. 인간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신랑 신부가 아니예요.
여기 이 아주머니가 말할 수 있는 신랑 신부가 아니예요. 이 명사는 누구의 입으로 할 말이냐? 감히 우리 타락한 인간의 입으로 할 말이 아니라구요. 하나님의 입으로 말할 말입니다. 거룩한 신랑 신부, 이 거룩한 신랑 신부는 뭐냐? 타락과 인연이 없었던 자유 천지에 있어서 하늘의 심정적인 것을 몽땅 옮겨 가지고 태어난 신랑 신부입니다. 그 신랑 신부가 누구냐? 참부모입니다. 하나님이 신랑 신부로 세워서 축복을 해 주시면 좋겠는데 천지는 다….
최고의 진리는 참부모를 중심한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게 하는 것
그래 여러분들은 고아예요, 고아. 고아예요, 고아, 고아! 한국 동란후에 고아원에 관한 기사가 나온 신문 봤지요? 애기들을 다 모아 놓고는 귀한 것은 다 빼앗아 먹고 껍데기만 먹이니 뼈만 남아 가지고 엉엉 우는 것이 신문에 나온 걸 봤지요? 그것을 볼 때 나는 `세계 인류가 이 꼴이 됐으니 고아원 원장이 누구냐?' 하는 걸 생각했어요. 가랑이를 째 놓아야 돼요. 인간을 농락하고 고아의 피를 빨아 먹고 뼈를 깍아 먹던 이 고아원 원장이 누구냐? 이것이 사탄이라는 거에요, 사탄. 이것이 천륜을 배반한 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자는 것이 통일교회 이론입니다.
이것을 익히 알리는 것이 이 시간 외치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느끼는 날에는 `용서없다 이놈! 악한 놈들아 이래서는 안 된다. 역사상 지금까지 우리 선조의 피를 빨아 먹고 최후의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이놈!'하고 복수하는 거예요. 원수들에 대해서 이런 결사대로 나선 무리들이 통일교회 신자들입니다.
`사실이야. 사실이야. 원통하고 분하구나!' 이 맘을 느끼는 사람만 만들어 놓으면 이 세계는 선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자리가 어려운 자리입니다. 진리 중에 최고의 진리가 무엇이뇨? 이것입니다. 인간 앞에 있어서 무슨 학설도 필요 없어요. 교육도 필요 없어요. `과연 이거로구나!' 하고 참부모라는 것을 백 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는 진리가 있다면 이것은 만고불변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운이 돌아가는 거예요.
참부모 앞에 있어서 참자식 될 수 있는 부자지 인연. 참부모가 있으면 그분이 나와 비로소 고아원 각지에 있던 이들을 샅샅이 찾아 `내 아들아. 내 딸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너희들이 고아가 됐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를 못 알아보는구나' 하고 낳아 준 어머니요, 낳아 준 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몰라보니 설명해야 할 서글픈 입장에 서야 할 부모가 오신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예」 고아원 부모가 온다는 거예요.
그 부모를 기독교에서는 신랑이라 했고, 딴 종교에서는 미륵불이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네 어머니이다'라고 할 수 있는 부모가 와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부모가 이렇게 설명하기 전에 이런 놀음을 증거해 주는 사람이 이걸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증거를 책임져야 할 종교가 기독교요, 딴 이방 종교들입니다.
진리의 최고가 무엇이냐? 참부모를 섬기고 참자녀와 더불어 살고, 참부모, 참자녀를 중심한 참가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참가정은 이러한 가정이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참종족, 참민족, 참국가, 참세계와 참하늘땅 이런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참이라는 인연이 비로소 생겨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한 많은 세상아 어서 가라!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도 `사십 고개야 어서가라. 꽃다운 청춘시절아 어서 가라!'라고 했습니다. 봄동산에서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청춘시절부터 눈물로써 걸어오기를 지금까지…. `어서 가라! 나는 천지의 대도를 밝힐 참부모 앞에 효성지도의 길을 개척하고, 그분 앞에 종의 일신이라도 맡을 수 있는 그날을 그리며 가겠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주의 진리의 근본이 뭐냐? 딴 거 아닙니다. 이 악한 무리들이 부모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가슴 터지는 심정이 오갈 수 있는 대성통곡을 하는 아들딸이 되는 겁니다. 부모를 배반한 자식들이니 회개하지 않을 수 있느냐? 부모를 잃어버린 인간이니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것을 알게 되면 눈물로서 기도하게 됩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죄인들을 찾아오는 아버지는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아담가정에서 쫓겨난 우리 아버지, 노아의 가정에서 쫓겨난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방당한 아버지였어요. 또, 그런 인연을 갖고 왔던 예수를 우리 손으로 잡아 죽였어요. 그리하여 부활하여다시 온다는 한의 일념을 남기고,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겨 인류의 부모의 인연을 갖추기 위해 지금까지 수천 년을 거쳐 오는 것입니다. 곡절 많은 사망의 이 세상을 허덕이던 하늘의 역사가 이렇게 비참했다는 것을 알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어요?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냐 말이예요. 효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 아버지, 그런 부모를 만나는 날에는 한번 쥐었으면 손이 끊어져도 못 놓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워해야 됩니다.
여러분, 로마의 압정시대에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가 가지고 4백 년 고역의 길을 거치는 동안 그들은 화형에 처해지고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주님이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용을 몰랐어요. `구주라고 할 수 있는 주님 오시옵소서!' 했지만 내용을 몰랐어요. 그들의 한을 풀어야 할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인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앞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이 몰렸어요. 모든 위정자들 혹은 모든 기독교 교주들한테 여기서 말하는 이단이라는 명패가 박힌 사람이 지금도 몰리고 있어요. 만일 오늘날 통일교회가 몰리지 않았더라면 공산당과 싸웠을 겁니다. 이런 얘기는 뭐 안 할 말이지만. 통일교회는 한을 품은 교회입니다. 그렇다고 민족의 한을 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을 풀겠다는 교회입니다.
그런 한을 푸실 아버지께서는 이 부락도 가야 되겠고, 저 마을도 가야되겠고, 이 면도 가야 되겠고 방방곡곡을 다 가야 된다는 거예요.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나서는 부모님의 길을 우리가 대신 책임지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진리는 무엇이냐? 부모를 알고, 나는 아들이요 당신은 부모라고 비로소 핏줄끼리 하나님이 소망하시던 그 소망의 심정에 통할 수 있는, 눈물로서 상봉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 있는 진리가 최고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예」 알겠냐 말이예요? 「예」
사탄을 처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워 나가자
통일교회에서 그 길을 못 가르쳐 주면, 선생님이 솔직히 얘기하는 거예요, 이것을 못 가르쳐 주면 보따리 싸 가지고 또 찾아가야 돼요. 만일 그것을 못 가르쳐 주면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은 사기꾼이예요. 이 민족이 추방해야 돼요. 추방만 해요? 각을 떠서 죽여야지요. 여기에서 이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생명을 각오하고 옹호해줘야 합니다. 생명을 보루삼고 깨지고 부딪치는 치열한 전투가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막아 내야 됩니다.
여기에 왔다는 것은, 통일교회를 따라온다는 것은 이 세계 앞에 있어서 아까 말한 고아원 원장 같은 이 원수 사탄을 우리 손아귀로서 처치하자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해야 돼요. 오시는 참부모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됩니다. 부모님의 원수를 누가 갚아야 돼요? 자식이 갚아야 돼요. 자식의 원수를 부모가 갚는 것은 역리예요, 역리. 자식의 원수를 부모가 갚는다면 천리에 어긋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탄이는 무엇이냐? 자식들의 원수예요. 자식들의 원수인 동시에 부모의 원수예요. 아직까지 부모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가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자식들의 원수와 같은 입장인 사탄이를 쳐 죽일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부모의 원수가 올 때는 자식들을 동원해서 친단 말이예요.
여러분은 여기서 뭘 할 것이냐? 이 억울하고 분한 곡절에 있어서 여러분이 나서 가지고 천주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원수, 피를 빨아먹던 이 원수, 이런 인연 가운데 엉클어진 부모를 뺏어 나와야 돼요. 그러니 밤잠을 잘 수 있느냐 말이예요. 이 부락에 그 원수가 있거든 샅샅이 뒤져라. 저 마을에 가서도 샅샅이 뒤져 나가라. 이 사명의 책임감을 가지고 나선 무리가 누구라구요? 「저희들입니다」 누구라구요? 「저희들입니다」 그래 그거 할래요? 할 자신 있어요? 「예」 어때요. 자신있어요? 「예」 자신있어요? 「예」
이것은 어떻게 대답해야 되느냐면 하나님의 가슴으로부터, 참부모의 가슴으로부터, 참아들딸의 가슴으로부터, 참형제의 가슴으로부터, 참가족의 가슴으로부터 참종족ㆍ참국가ㆍ참세계ㆍ참하늘땅 앞에 통할 수 있는 심정을 걸어 가지고 대답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대답한 것이 삼천만을 뚫고 나가는 그런 무엇을 느꼈어요? 세계를 위해 가지고 가정을 뚫고 나가는 그런 느낌을 느꼈어요? 하나님의 보좌 밑에서 하나님이 깜짝 놀라 `오냐, 장하다!' 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을 느끼며 대답했어요? 그렇게 대답해야 됩니다. 지금 대답은 그렇게 해야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만일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이런 일 할래요, 안 할래요? 「하겠습니다」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크게 해요.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그래 하겠다고 하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자구요. 내려요. 이것을 해주어야 우리 후손들이 평화를 노래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여러분들이 지금 하겠다고 손들은 것은 여기 있는 선생님도 확인한 사항이예요. 알겠어요? 「예」 삼천만을 뚫고, 인류를 뚫고, 하늘을 뚫고 올라가면 이런 입장에서 설명하는 그 기준을 찾아간다고 했지요? 「예」 이것은 맹세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남한 각지에 공산당들이 들어와 가지고 공작한다면 이 공작하는 공산당을 내 손으로 처치하겠다는 그 이상 더 치열해야 되겠다구요. 뭐 설명하려면 한정이 없어요. 그런 걸 여러분이 명심해서 결정했으니 이 시간 이후부터 용맹스럽게 싸워 나가야 되겠어요. 알겠어요? 「예」
기 도
아버님, 당신께서는 외치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 있으시되 6천 년 동안 한 많은 그 가슴을 눌러 오기에 얼마나 슬프셨습니까? 오늘날 끝날을 대하여 하늘이 보여 주고 싶었던 한날을 고대했던 내용이 무엇이며, 인간이 찾고 싶었던 한날을 바라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던 참부모요, 참자식이요, 참가정이요, 참종족ㆍ참민족ㆍ참세계ㆍ참천주였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날 거짓된 세상에서 토해 낸 그 자체를 이제 근본적으로 타파해야 되겠습니다.
이제 내가 처하여 살고 있던 생의 근거가 이렇게 억울하고 이렇게 분통하였다는 것을 알았사옵고, 역사적인 해원의 기점이 어디에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을진대 오늘 저희의 입장과 처지를 성별하시어서 이것을 갈라내시어서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저희들을 명령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저희들은 이 엄청난 사실을 앞에 놓고 이 민족 앞에, 혹은 세계 인류 앞에, 천주 앞에, 아버지 앞에 맹세하고 각오하였사옵니다. 과연 힘든 역사노정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날 이 시간 외로운 무리들이 사방에 흩어졌다가 수백 리 길을 걸어와야 할 입장이 억울합니다. 굶주린 자리에 세워 놓은 것이 억울합니다.
아버지,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에,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기에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심정을 안 연고요, 당신의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을 찾아 나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사정을 저희가 알므로 이런 길을 거쳐 왔사오니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그 모든 사정과 내용이 아버지와 더불어 움직이는 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삼천리 반도 동산 가운데의 제단에는 통일교회 식구들의 피와 눈물이 떨어진 인연이 연결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3천만 민중에게 통일교회 눈물의 인연이 연락되어, 삼천리 방방곡곡 집집마다, 사람 사는 가정 가정마다 이 피눈물 뿌린 것을 연결시키어 참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이 인연을 향하여 통곡할 줄 아는 무리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았사옵니다. 이리하여 새로운 복귀의 동산을 건설할 책임성이 있사오니, 부디 죽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효자 효녀의 이름을 갖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끝까지 싸워 아버지의 영광의 식구의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어느 기간 동안 그리워하다가 만나게 하신 것 고맙습니다. 아버지, 사정 사정이 달라진 것을 당신은 알았습니다. 눈물로써 인연 되어진 우리의 노정, 당신이 여기에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여기의 외로운 무리들이 흘리는 모든 눈물이 헛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참석했던 이 걸음이 헛된 결과를 거져오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처음 참석한 무리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마음에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가지고 이 민족 앞에 나는 어떤 자요, 우리의 인류를 농락하던 자가 누구였으니 그들 대해서 정히 하늘과 천주 앞에 책임을 감당하여 정의를 대신해 나가 싸울 수 있는 생명적인 기반을 이루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여 내일의 새로운 모습을 천지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인연을 갖기를 맹세하고 결의하였사오니, 그 마음 변치 말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신 걸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이 시간 이후에 되어지는 일체를 친히 당신께서 홀로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이제 내일을 기해 다시 황무지와 같은 벌판을 지나 가시밭길을 가야 할 무리들이 있사옵니다. 생각하면 분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사오나 당신의 수고의 노정을 맞기 위함이요, 사탄의 화살 앞에 있어서 하늘을 보호하기 위해 쌓여지는 도성이 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오니 강하고 담대하도록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과중에서 쓰러져 낙오자가 되는 패들이 없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러한 사정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외치는 자도 외로운 자였습니다. 그런 외로운 저를 이끌기 위해 외로울 적마다 위로하고 분부하시던 당신이 저희들을 품어 주실 것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께서 친히 같이하여 주시고 지켜 주시어서 최후의 승리의 개가를 올릴 때까지 부디부디 떨어지지 말고 아버지의 기쁨의 동산에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모든 것을 맡겼사오니 이날의 축복의 은사로써 저희들 단결시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써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