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회현지하도상가, 빈티지로 가득한 지하 세상
LP 매니아들과 우표 수집가들이 즐겨 찾는 회현지하도상가
필름 카메라 가게, 앤티크샵 등 빈티지한 점포도 많은 곳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겨울다운 추위가 이어지는 나날들이다.
길을 걷다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 되면 가까운 카페나, 적당한 카페가 보이지 않으면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언 몸을 녹이게 만든다. 만약 서울 광화문 근처나 강남대로를 걷는다면 대형서점이 따뜻한 피난처가 된다.
혹시 문 닫은 점포들 때문에 더욱 춥게 느껴지는 명동 거리를 걷고 있다면 신세계백화점과 중앙우체국 사이에
자리한 지하도로 내려가 추위를 피해 보면 어떨까. 그곳은 빈티지로 가득한 지하 세상인 ‘회현지하도상가’이다.
(2022. 01. 12) 회현지하도상가.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지하도와 지하도 상가
지하도는 차량 왕래가 잦은 곳에 보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방공호 역할도 한다.
지하철 이용객을 위한 지하도도 마찬가지다. 보행자의 이동은 물론 유사시에는 방공호 기능을 한다.
평상시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지하도에 상가를 유치한 곳도 있다.
지하도에 설치한 상가는 두 종류가 있다.
방공호와 보행로를 위해 만든 지하도에 설치한 ‘지하도 상가’와 지하철역에 설치한 ‘지하철 상가’. 서울의 경우 지하철 상가는 서울교통공사에서 관리하고, 지하도 상가는 서울시설공단에서 관리한다. 회현지하도상가도 서울시설공단에서 관리한다.
회현지하도상가는 1978년에 준공됐다. 민자사업으로 진행된 이 공사는 삼환기업이 맡았고 20년 동안 상가 운영권도 가졌다. 삼환기업 측 회현상사(주)가 관리를 맡아 1978년부터 1998년까지 운영하다가 1999년부터는 서울시가 운영권을 넘겨받아
산하기관인 서울시설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약 9000㎡로 2천7백평이 약간 넘고, 현재 225개의 점포가 있다.
(2022. 01. 12) 명동 신세계백화점 건너편의 회현지하도상가 입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중앙우체국 앞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꽤 깊게 내려간다.
원래 회현지하도상가가 방공호 용도로 건설된 것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다. 상가는 네 개의 기다란 통로 양편에 점포들이
늘어선 배치로 되어 있다. 가운데 통로는 폭이 넓어서 유사시 많은 인원을 대피시킬 수 있는 용도로 설계된 듯했다.
회현지하도상가를 잠깐이라도 둘러보면 이곳이 개성 짙은 상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점포들 곳곳에서 차분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여느 상점가처럼 템포 빠른 음악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 음악이다. LP 음반을 판매하는 곳이 많아서
그렇다. 그리고 곳곳에 우표와 화폐를 취급하는 점포들도 있다.
입주한 가게들 면면에서 보듯 회현지하도상가는 빈티지한 취미를 가진 이들에게는 이미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2022년 1월 현재 LP 음반을 취급하는 점포는 9곳이고 우표와 화폐를 취급하는 점포는 20곳이다.
LP 음악 매니아들의 성지
“저희 가게는 외할아버지께서 시작하셨어요. 제가 듣기로는 1960년대부터 음반 장사를 하셨는데
회현지하도상가에는 개장 초기부터 들어오셨대요. 저희 아버지가 이어받으셨고 저도 돕고 있지요.”
LP 등 음반을 판매하는 ‘리빙사’ 이주연씨의 말이다. 매장을 둘러보니 클래식 음반이 작곡가와 장르 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재즈 음반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요나 팝 음반을 찾는 손님들도 많다고 한다.
“김광석, 유재하, 이문세의 LP는 찾는 사람이 많아요. 가격도 좀 높고요. 그리고 LP 바를 운영하는 사장님들도 자주 찾지요.”
(2022. 01. 12) 회현지하도상가의 LP 가게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1. 12) 회현지하도상가의 한 LP 가게.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런데 회현지하도상가로 음반 가게들이 몰리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음반 가게 대표들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 명동 인근에는 오디오 가게들이 많았고,
그곳에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팝 음반이나 해외에서 직접 가져온 클래식 음반을 취급했다고 한다.
그러다 전문 음반상이 생겼고 그들 중 일부가 회현지하도상가로 들어온 게 그 시초였다고 전한다.
현재 회현지하도상가에서 LP를 취급하는 점포는 9곳이지만 한때는 10여 곳 넘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세대 음반상 중 관둔 이들도 있고, 자녀 등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준 이들도 있다고.
(2022. 01. 12) 회현지하도상가에서 LP를 고르는 사람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곳에서 구하는 음반들은 중고지만 상태가 좋은 것 같아요. 음반 표면을 세척한 데다 자켓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이 많네요.”
한 가게 앞에서 LP를 고르던 이의 말이다. 음반 가게들이 늘어선 지하상가 통로에는 진열된 LP를 살펴보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들 모두가 음반을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LP에 향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우표와 화폐 수집가들은 꼭 찾는 곳
“상가 바로 위에 중앙우체국이 있고 길 건너에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 있잖아요.
그래서 오래전 중앙우체국 근처에는 우표와 화폐를 거래하는 가게들이 많았어요. 저도 거기서 시작했고요.
그러다 한두 점포가 회현지하도상가로 들어오다 보니 지금처럼 수십 곳이 몰려있게 되었습니다.”
우표와 화폐를 취급하는 ‘광우사’ 김병원 대표의 말이다.
그는 1981년부터 중앙우체국 앞 점포에서 이 일을 시작했고 회현지하도상가에 들어온 지는 20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예전에는 학교에 동아리까지 있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이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고.
주로 인터넷 카페 등 동호회나 매니아 위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전했다.
(2022. 01. 12) 회현지하도상가에는 우표와 화폐를 취급하는 가게가 20 군데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곳 상가에 우표나 화폐를 취급하는 곳이 20곳 정도가 있지만 사장님들 대부분과 친해요.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협력 관계죠. 여기에 없으면 저기에 있을 때도 있고. 그러면 교환하기도 하죠.
때로는 평생 취미로 해오신 분이 은퇴 후 가게를 열기도 하세요.”
김대표는 아끼는 우표 컬렉션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부터 여러 의미 깊은 기념 우표들까지.
우표 수집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이 역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를 많이 찾는데 형성된 가격은 대통령의 인기나 업적이
아니라 발매량과 관련있다고 한다.
(2022. 01. 12) 광우사 김병원 대표.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2. 01. 12) 광우사 김병원 대표의 우표 컬렉션.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혹시 용돈이 될까 하고 오래전에 수집한 우표들을 갖고 나왔어요.
아끼는 우표는 팔지 않을 거지만 현재 가치가 어떤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우표 수집책을 들고 있던 어느 노인의 말이다.
우표 판매점 대표들은 집에 모셔둔 예전 우표나 화폐가 있으면 문의하라고 조언했다.
혹시 생각지도 못한 보석일지도 모른다면서.
빈티지한 지하 세상
회현지하도상가에 LP 가게나 우표 가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눈에 제일 많이 띄는 점포는 아마도 ‘환전상’일 것이다.
예전에 남대문시장이나 중앙우체국 근처에는 비공식적으로 외화를 사고 팔던 여인들, 속칭 ‘달러 아줌마’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전통을 지금의 환전상들이 이어받은 것으로 보였다.
(2022. 01. 13) 회현지하도상가의 한 카메라 가게. 필름 카메라를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환전상이 많아도 회현지하도상가에 가면 빈티지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필름 카메라를 취급하는 곳,
고급 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곳, 엔티크한 소품을 전시한 곳 등 빈티지한 취향이 가득 담긴 지하 세상이다.
강남역이나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를 지날 때 걸음이 절로 빨라진 경험이 있다면 회현지하도상가를 걸을 때는
저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질지도 모른다. 회현지하도상가는 그런 곳이다.
지하도라기보다는 지하 세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빈티지로 가득한 지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