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차두시촉직운(次杜詩促織韻)」 두보의 「촉직(促織)」을 차운하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서 1689년부터 1694년까지 5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의 문집 『죽천집(竹泉集)』에는 중국 당나라 대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의 시(詩)를 차운(次韻)하거나, 본떠 지은(效擬) 한시가 전하고 있다. 백거이의 시를 차운한 시편은 3편이고 두보는 7편이다. 죽천(竹泉) 선생은 궁핍한 유배지 거제도에서 고독과 단절된 고통을 견디기 위해 백거이와 두보의 시를 얼마나 깊이 읽고 자신의 삶에 투영했는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그 문학적 궤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또한 거제도의 김진규는 백거이가 겪었던 소외된 좌천의 외로운 처지와 더불어, 두보가 타향살이의 고독과 슬픔을 끝없이 고뇌한 심정을 깊이 공감하였다. 그리하여 두 분의 시적 공간을 자신의 내면에다 차용하였고, 또한 자신의 유배 상황을 미화하고 감정을 고조시켜 보편적 고독과 서정에 깊게 동조하여 이번 시편들을 완성했다.
○ 참고로 여러 지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두시(杜詩)」는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시(詩)를 통칭하며 그의 율시(律詩)는 엄격한 형식미 위에 침울고분(沈鬱孤憤)의 현실주의 정신과 정교한 대구(對句)를 결합한 중국 고전 문학을 대표하는 상징적 시어(詩語)의 모음이다. 특히 두보는 5언율시와 7언율시의 격률(格律, 율격)을 완성하고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두보 시의 풍격(風格)을 가장 잘 나타내는 네 글자 ‘침울고분(沈鬱孤憤)’은 "나라와 백성의 비극적인 현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깊은 슬픔과 외로운 분노를 가슴속에 묵직하게 억누르고 인내하는 문학적 태도"를 의미한다. 두보의 시가 단순한 불평불만이나 얕은 감상에 그치지 않고, 묵직하고 비장한 정서를 자아내어 위대한 문학이 된 이유는 이 '침울고분'의 태도 덕분이다.
물론 문법 구조가 완벽하게 맞물리는 대구(對句)를 구사했고 인위적인 느낌을 주지 않고 자연의 섭리나 인간의 운명처럼 필연적인 울림을 준 면도 크다 할 것이다. 그중에 두보의 「등고(登高)」 내용에서 "끝없는 낙엽은 쓸쓸히 떨어지고, 다함 없는 긴 강은 도도히 흘러오네(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는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대구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글자 하나하나가 제자리에 박힌 듯한 압축미와 긴장감을 주며, 일상적인 어휘마저 고도의 문학적 상징으로 승화시켰다. 이에 그의 율시는 단순한 감상 서정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모순, 관료들의 부패,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록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개인의 서정시가 시대를 기록하는 대서사시의 깊이를 갖추게 되었다. 후세 평론가들이 말하길, 두보의 율시는 외형적 제약이 가장 심한 문학 형식 속에서 인간과 시대에 대한 가장 깊은 사유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시문학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칭송했다.
⇨ 이번 지면에는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의 오언율시 「차두시촉직운(次杜詩促織韻)」과 죽천 선생이 차운한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의 「촉직(促織)」 등 2편을 차례대로 소개하겠다.
1-1) 다음 ‘眞’ 운목(운통)의 오언율시 「차두시촉직운(次杜詩促織韻)」 ‘두보(杜甫)의 촉직(促織, 귀뚜라미) 시(詩)의 운을 빌려’는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이 거제도 유배 중(謫中)에 지은 작품으로, 『죽천집(竹泉集)』 권3(卷之三)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促織) 소리를 들으며, 겨울옷을 준비해야 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길쌈 노동의 고고함을 두보(杜甫)의 시풍을 빌려 읊은 작품이다.
○ 내용인즉, 이 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동명의 시 「촉직(促織)」의 운자(韻字)를 따라 지은 차운시다. 가을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겨울이 멀지 않았으니 어서 겨울옷을 지으라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3~4구]에선, 거미줄과 반딧불이를 언급하며 가을날의 소박한 자연 풍경을 길쌈(방직)과 독서(형설지공)라는 인간의 부지런한 삶의 모습과 연결 짓는다. [5~8구]에선, 시인은 귀뚜라미가 밤새도록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을 백성들이 새벽까지 베를 짜는 고단한 노동 소리로 치환한다. 귀뚜라미의 베틀 소리와 인간의 실제 베틀 소리 중 무엇이 가짜(假)이고 무엇이 진짜(眞)인가(物我一體). 결국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옷을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하며,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노동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보여준다.
**「차두시촉직운(次杜詩促織韻)」**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繰縷元由繭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은 본래 고치에서 비롯되고
杼機豈屬人 베틀과 북을 돌리는 일이 어찌 사람만의 일이겠는가.
蛛絲纖可取 거미줄은 가늘어서 취하여 쓸 만하고
螢火朗堪親 반딧불이는 밝아서 친해질 만하구나.
咿軋偏鳴夜 삐걱삐걱 베틀 같은 소리로 밤새도록 울어대며
辛勤每達晨 괴롭고 부지런히 매번 새벽까지 이어지네.
衣裘成此響 가을 겨울 옷(衣裘)이 이 울음소리에서 이루어지니
誰假更誰眞 어느 것이 가짜이고 또 어느 것이 진짜란 말인가.
1-2) 다음 ‘眞’ 운목의 오언율시 「촉직(促織)」 ‘귀뚜라미’는 중국 최고 시인 중 한 분인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가 가을날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타향살이의 고독과 슬픔을 노래한 명시다. 이 시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떠돌던 759년 가을,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 천수)에서 지은 작품이다. '촉직(促織)'은 '베 짜기를 재촉한다'는 뜻으로,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를 의미한다.
○ 내용인즉, 두보는 아주 작고 하찮은 곤충인 귀뚜라미(促織)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했다. 처음에 풀뿌리에서 울던 귀뚜라미는 밤이 깊어 추워지자 방 안의 침상 밑까지 들어온다. 시인은 이 모습을 보고 마치 귀뚜라미가 외로운 자신에게 말을 걸며 "마음이 서로 친해지려(意相親)" 다가온 것처럼 느낀다. 이어 [5연과 6연]은 시의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다. 전쟁을 피해 떠도는 신세인 '오랜 나그네(久客)' 두보는 가을벌레 소리에 고향과 가족 생각으로 눈물을 흘린다. 동시에 고향집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며 남편의 옷을 짓기 위해 베를 짜고 있을 '아내(故妻)'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그리곤 마지막 연(결구)에서 두보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뛰어난 음악(悲絲與急管)도 귀뚜라미의 천연덕스러운 울음소리가 주는 감동을 따라갈 수 없다고 극찬한다. 인위적인 예술보다, 가을의 섭리에 따라 온 마음으로 우는 미물의 '천진(天眞)함'이야말로 슬픈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위로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가을밤의 쓸쓸함 속에서 피어난 두보 특유의 사실주의적이고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촉직(促織)」** 귀뚜라미 / 두보(杜甫 712~770)
促織甚微細 귀뚜라미 몸집은 참으로 작고 가냘프건만
哀音何動人 그 애절한 울음소리는 어찌 이리도 마음을 흔드는가.
草根吟不穩 풀뿌리 밑에서 불안한 듯 초조하게 울더니
牀下意相親 어느새 침상 밑으로 와 다정하게 속삭이네.
久客得無淚 오랜 객지 생활에 지쳐 눈물 없이 못 듣겠고
故妻難及晨 홀로 남겨진 아낙도 새벽이 오기까지 밤새 괴로우리라.
悲絲與急管 애처로운 거문고와 격앙된 피리 소리라 할지라도
感激異天眞 그 어떤 곡조도 이 천진(天眞)스런 감동에 이길 수 없으리.
[주1] 판본에 따라 '故妻(늙은 아내 혹은 홀로된 아내)'는 '放妻(버림받은 아낙)'로, '意相親(의상친)'은 '夜相親(야상친)'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주2] 촉직(促織) : 귀뚜라미의 다른 이름이다. 울음소리가 베틀을 돌리는 소리와 비슷하여 '가을이 깊었으니 어서 겨울옷을 짜라'고 재촉(促)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데서 유래했다.
[주3] 불온(不穩) :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초조하거나 불안한 상태를 뜻함.
[주4] 구객(久客) :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오랫동안 유랑 생활을 하고 있는 나그네(두보 자신)를 의미한다.
[주5] 비사여급관(悲絲與急管) : '사(絲)'는 현악기, '관(管)'은 관악기를 뜻함. 즉 인간이 인위적으로 연주하는 슬프고 격렬한 음악을 통칭한다.
[주6] 천진(天眞) : 꾸밈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