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및 참고 문헌」
- 승리의 경전 ‘호렌초’
- 신 인간혁명 제 28권 제 2장 ‘대도‘
- 어서와 그 마음 ’신(信)‘
『이번에 법화경에 신심을 가질 것이뇨.
신이 없이 이 경을 행하는 것은, 손 없이 보산(寶山)에 들어가고 발 없이 천리 길을 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다만 가까운 현증을 인용해서 먼 신(信)을 취할지어다.』
금일의 어문에 있어 우선 어의구전 서품 제1 여시아문지사에서,
『여시(如是)란 신순(信順)의 말이다.
신(信)은 즉 소문(所聞)의 이(理)를 터득하고 순(順)은 즉 사자(師資)의 도(道)를 성취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신(不信)의 사람은 여시아문의 문(聞)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시의 체(體)를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화경의 행자만이 여시의 체를 듣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의구전 말씀처럼 여시란 신순의 말입니다.
믿음으로서 소문의 이 즉 일념삼천의 법리를 이해할 수가 있으며 순하면 사제의 도를 이루고 스스로도 불계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니치렌 대성인 및 그 문하만이 신을 통하여 여시아문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법화경 전체가 나 한 사람의 일기문서임을 감안할 때 신순을 통해 여시아문으로 되지 않게 되면 진실한 법화경 행자는 아닌 것입니다.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서 수지 즉 관심의 법리에 의하여 묘법을 신수(수지)하는 것이 성불의 본인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수지는 신구의의 삼업에 걸쳐서 법을 믿고 영법구주해 나가는 것이며 관심은 나의 기심을 관하여 십법계를 봄을 관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념삼천의 법리를 본존으로서 현현하고 본존을 수지하는 것이 즉 관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석존의 인행과덕의 이법은 묘호렌게쿄의 오자에 구족되어, 우리들이 이 오자를 수지하면 자연히 그의 인과의 공덕을 물려 주시느니라』라는 관심의 본존초의 일절 그대로 본존님을 수지하고 귀명함으로써 곧바로 자신의 생명에 있는 십법계, 그중에서도 불계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시아문의 문(聞)이란 ‘단순히 듣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신심(信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본존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여시아문의 사람이 될 수 없게 됩니다.
더욱 엄격하게 말한다면 어본존을 수지한 사람이라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신심수행이 없는 자는 여시아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관념적으로 불법을 이해하려고 해도 불법의 진수가 결코 쉽게 회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목을 부르고 역경을 타개하여 힘찬 인생을 걸어나갈때 생활, 생명 상에 엄연히 공덕이 솟아나고 증득(證得)할 수가 있게 됩니다.
거기에 어본존의 위력, 대성인 불법의 위대함을 절실히 자각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멀리 석존시대에 지혜제일이라고 불리던 사리불조차 이신득입이라고 하여 신으로써 성불하였습니다.
결코 신심, 실천이 없는 자가 불법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결코 관념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 대 인간이라는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즉 법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에게 귀착되는 것입니다.
구도심에 불타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여시아문의 사람이며 순하여 스승의 말을 일직선으로 실천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스승이신 대성인과 경지명합하고 사제불이의 원리에 입각해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을 감득할 수 있게 됩니다.
어의구전 보현품 6개의 대사 중에서, 제6 차인불구당예도량지사에
『당기원영 당여경불 8자를 가지고 법화일부의 요로(要路)로』하였습니다.
법화경은 말법 본인묘의 교주 출현의 예언서가 분명하며 어디까지나 그 정의(正意)는 멸후 말법에 있습니다.
종국에 법화경의 설법은 법화경을 믿는 사람의 공덕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법의 본인묘의 교주이신 니치렌 대성인을 믿는 것이 결국 법화경 28품 전체의 결론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금일의 어성훈에서 신(信)이 없이 이 경을 행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손 없이 보물이 있는 산에 들어가 보아도 무엇 하나 가질 수 없으며, 발 없이 먼 길을 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다만 가까운 현증을 인용하여 멀리 있는 신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종교에 있어서, 정사, 우열, 엄격한 비판, 선택의 기준이 없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종교비판의 원리의 하나에 삼증(三證)이 있습니다.
삼증이란 문증(文證), 이(理)증, 현(現)증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증은 증거, 증명, 판정 기준이란 뜻입니다.
먼저 문증이란 문서, 기록 등 문헌상의 증거로서 불법의 경우는 하나의 교의나 주장이 어떠한 불전, 경문에 의하고 있는가를 검토하여 판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성우문답초 어서 484에서,
『경문에 명백한 것을 쓰되 문증이 없는 것은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경문에 의하지 않는 아견(我見)은 불법을 어지럽히는 원인이 됩니다.
다음에 이증이란 한 종교의 문증, 교의가 도리에 맞고 사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납득이 가는가 어떤가 하는 판정의 기준입니다.
아무리 문증이 있다고 해도 이치상으로 모순이 있고 보편타당성이 없다면 배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어디까지나 도리를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불법에 있어서도 이전경(법화경 이전의 경문들)에서는 이승(성문과 연각)이나 악인, 여인은 성불하지 않는다고 설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성불시키려는 부처의 가르침의 참뜻에서 말하면 개성불도(모두 불도를 이루다)를 설하는 법화경은 이증 상으로 뛰어나며 이전경은 열등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종교를 비판할 때에 문증, 이증은 중요한 기준과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종교의 정사, 우열을 판정하는 판가름은 현증입니다.
삼삼장기우사 어서 1468에는,
『니치렌이 불법을 시험하건대 도리와 증문보다 더함은 없도다.
또 도리 증문 보다도 현증이 제일이니라.』 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현증이란 현실의 증거입니다.
속담에도 논(論)보다 증거라고 있지만, 아무리 훌륭한 법리나 이론이라 해도 그 이론이 현실생활상에 증명되지 않는다면 하등의 의미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교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여 현실의 생활이나 사회상에 실증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종교의 정사, 우열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입니다.
교행증어서 어서 1279에,
『일체는 현증을 따를 것이 없도다.』라고 하는 금언 그대로인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 중에서 이러한 삼증의 엄밀한 비판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유일최고의 종교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 뿐이라고 바로 결론 지을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들은 문증, 이증, 현증의 세 가지를 완벽하게 구비한 대성인의 삼대비법을 믿고 실천하여 일생성불을 성취해서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쌓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본존님을 신수하여 실제로 훌륭한 행복의 실증을 나타낸 수많은 동지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소중한자료로공부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