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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
본명 : 김해경(金海卿)
출생 : 1910년 9월 23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사망 : 1937년 4월 17일 (향년 27세)
도쿄부 도쿄시 혼고구 도쿄제국대학 부속 병원
(現 도쿄도 분쿄구 도쿄대학 부속 병원)
직업 : 시인,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 화가
필명 :
이상 (李箱) -가장 많이 사용한 필명. 한자로는 '李箱'이라 표기. 동료 소설가이자 친구였던 박태원의 결혼식에서는 예외적으로 '以上’이라고 표기했다.
비구(比久) - 단편 소설 '지도의 암실'을 발표할 때 사용한 필명
보산(甫山) - 단편 소설 '휴업과 사정'을 발표할 때 사용한 필명.
하융(河戎) - 하융(河戎)은 뜻[강의 오랑캐]을 보면 그의 본명인 김해경의 뜻[海卿-바다의 백작] 비틀어 버림
본관 : 강릉 김씨
가족 : 아버지 김연창 어머니 박세창
남동생 김운경, 여동생 김옥희
배우자 : 변동림 (1936년 결혼) - 변동림은 이상과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였으므로 족보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김향안과 변동림은 이명동인이다. 김향안(1916~2004)의 원래 이름은 변동림이다.
그녀는 시인 이상(李箱·1910~1937)과 함께 살았다. 화가 김환기(金煥基·1913~1974)와 인연을 맺자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김동림이란 이름도 존재한다.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그녀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18194
친인척 : 처조카 구본웅 -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과 결혼하여 족보상으로는 이상이 구본웅의 이모부이다.
물론 이상과 구본웅은 또래이며 친구였다. 단지 변동림이 구본웅보다 10살 어린 이모여서 그런 것이다.
학력 : 신명학교 (졸업)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 졸업)
장지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 산69 미아리공동묘지 →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 미상[未祥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다는 소리 ]
신체 : 168cm, 51kg (1926년 17세 기준)
등단 : 『12월 12일』 (十二月 十二日, 1930,《조선》)
대표작 : 『오감도』 (烏瞰圖, 1934,《조선중앙일보》) 『날개』 (1936,《조광》)
인생 자체가 드라마 같으며 소설 그 이상이신 이상 김해경선생 생애를 대강이나마 살펴 봅니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생애(生涯)
1910년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3년 후인 1913년 몰락한 양반인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입양되었다.
김연필은 어린 이상의 천재성이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 여겨 유교와 한문을 교육시키며 그를 지원해 주었으나, 애정은 주지 않은 채 엄하게만 대했다고 한다.
일례로, 이상이 새어머니에게 차별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백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의 여동생인 김옥희는 이상 특유의 염세적인 성격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렸을 때부터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자 없이도 반듯한 직선을 긋는 등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며, 본인 또한 화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가난한 화가보다 배곯을 일 없는 기술자가 되라는 김연필의 반대로, 이상은 보성고등학교를 졸업 후 1927년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해 1929년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건축 기사로 복무하였다.
필명(筆名)의 유래
그의 필명인 이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다.
유력한 설은 친구 구본웅이 선물한 미술 도구 상자에서 따왔다는 설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선물받은 오얏나무(李)로 만들어진 상자(箱)를 받고 이에 감동해 필명을 이상(李箱)으로 지었다는 설이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앨범에 동기들의 친필과 함께 기재한 짧은 글에도 본인을 이상이라고 칭했다.
그 외 친구 김기림 등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총독부에서 건축 기사로 일했을 당시 인부가 그의 성을 김씨가 아닌 이씨로 착각해 그를 이상이라고 부른 것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무식한 왜눔덜이 '긴상' 이라고 불러야 되는데 '리상'이라고 불러서....)
이외 다른 필명인 비구(比久), 보산(甫山), 하융(河戎)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중 하융(河戎)은 뜻]을 보면 그의 본명인 김해경의 뜻을 비튼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의 백작(海卿)은 뭔놈의 바다의 백작이야 강의 오랑캐지(河戎) 하는 식으로~~~
데뷔 이후
건축 기사가 된 지 1년이 지난 1930년, 그는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하던 잡지 '조선'에서 장편 소설 《12월 12일》을 9회 동안 연재한 것을 시작으로 문학계에 데뷔했다.
퇴사 전까지 그는 이상(李箱)을 포함해 비구(比久), 보산(甫山) 등의 필명으로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작품들을 투고했다.
그러던 1931년, 그는 갑작스럽게 폐결핵을 진단받았다.
이상은 하루에 담배를 50개피 이상 피는 것을 자신의 일과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엄청난 골초였는데, 그 때문인지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담당의가 그의 폐를 확인하고는 형체도 안 보인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결국 1933년부터는 각혈까지 시작되었고, 건축기사 일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상은 조선 총독부에서 퇴사하고 황해도에 있는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요양 후 서울로 돌아온 이상은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온천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다방의 마담 자리에 앉혀 동거하기 시작했다.
이상은 이때부터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문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가톨릭청년에서 시 꽃나무와 이런시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순수 문학 단체 구인회에 가입했다.
또한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조선중앙일보에서 오감도를 연재했지만, 독자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15회 만에 연재를 중지하였다.
1935년 경영난에 시달린 끝에 다방 제비를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하게 된다.
다방을 운영할 당시 손님에게 주문과는 다른 음료를 내주는 등의 기행을 저지른 적이 많았는데 이랬으니 장사가 잘될 리 없다.
이상은 틈틈이 창작 활동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인사동에 쓰루(鶴), 종로1가에 69와 같은 다방을 차례로 운영했지만 모두 제비와 같은 이유로 남에게 양도했고, 그러고도 다시 명동에 무기(むぎ)라는 다방을 열었으나 이것 또한 망하고 만다.
1936년에는 친구 구본웅의 아버지 구자혁이 운영하던 출판사인 창문사에 잠시 취직하여 출판물의 편집과 교정을 도맡다가 퇴사했다.
동년 6월에는 수필가 변동림과 결혼하여 경성 황금정에서 신혼 생활을 하는데, 이때 소설 지주회시와 날개를 발표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에서의 사망
점차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이상은 지인들에게 인사를 남긴 후, 1936년 9월 평소 동경했던 일본의 도쿄로 떠난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도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저러나 동경 오기는 왔는데 나는 지금 누워 있소그려. 매일 오후면 똑 기동 못 할 정도로 열이 나서 성가셔서 죽겠소그려.
동경이란 참 치사스러운 도십디다.
예다 대면 경성이란 얼마나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한적한 농촌'인지 모르겠습디다.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꼴사납게도 표피적인 서구적 악습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오.
한화휴제[閑話休題]―나도 보아서 내달 중에 서울로 도로 갈까 하오.
여기 있댔자 몸이나 자꾸 축이 가고 겸하여 머리가 혼란하여 불시에 발광할 것 같소.
이 가솔린 냄새 넘쳐흐르는 것 같은 거리가 참 싫소.###
— 이상, 김기림에게 쓴 편지 중 일부, 1936년 11월 29일자
도쿄에 대한 환멸과 주변인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병의 악화로 이상의 심신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이상은 4월 중에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1937년 2월 공원을 배회하던 중, 불령선인으로 체포되면서 도쿄 니시칸다(西神田) 경시청 경찰서에 투옥되고 말았다.
사실 별다른 혐의가 있던 것은 아니고,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도 산발로 하고 다니는 꾀죄죄한 모습이 수상쩍어서 체포된 거라 투옥된 지 34일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결국 폐결핵으로 인해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4월 17일 새벽 4시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망 전 급히 도쿄로 온 아내 변동림에게 그는 "센비키야의 메론이 먹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센비키야(千疋屋), 한자 독음으로 천필옥은 고급 과일과 과일 디저트를 판매하는 명품 상점이다. 1834년 도쿄 긴자에 오픈해서 현재까지도 영업 중이다.)
아내 변동림의 회고
나는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동대 병원 입원실로 직행하다.
이상의 입원실, 다다미가 깔린 방들, 그중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상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다. 반가운 표정이 움직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옆에 앉아 손을 잡다. 안심하는 듯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긴장해서 슬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나, 죽어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상은 눈을 떠보다 다시 감는다. 떴다 감았다.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의 메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메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7쪽 중
사후 이상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18일 전에 폐결핵으로 숨진 절친 김유정과 합동 영결식으로 화장되었다.
평가
친구인 문학 평론가 김기림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 조선 문학, 더 나아가 한국 문학의 모더니즘과 전위성을 개척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더 나아가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천재 작가라고 평가받는다.
흔히 이상이라고 한다면 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그의 시는 꽤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오감도 등의 난해 시들이 그러한데, 이런 시들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쉬운 서정시도 아닌 데다 이상 특유의 난해한 서술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 수필 등의 산문에서는 이상의 문학적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주로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과 불안, 그리고 사람 간의 관계에서 오는 불행을 초현실주의적으로 묘사해 현실을 탐구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 세계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상은 이러한 현실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자기 자신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쓰인 작품들은 다소 퇴폐적이고 비뚤어졌다는 감상을 주어 독자들에게 외면받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은 꿋꿋이 창작을 이어나갔으며, 사망 후 그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해석으로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연인 관계
알려진 이상의 첫 번째 연인은 그가 운영했던 다방 제비의 마담인 금홍이었다.
금홍은 이상이 요양을 위해 갔던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기생으로, 이상은 그녀를 사랑해서 다방 제비를 차려 그녀를 데려와 함께 운영했다.
그러나 다방은 인기가 없어 항상 경영난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이상과 금홍은 자주 다퉜다.
결국 1935년에 둘은 결별하고 다방 제비 또한 폐업하게 된다.
이후 이상은 부모의 집을 담보삼아 인사동에 위치한 카페 쓰루를 인수하여 운영했는데, 이때 카페 엔젤에서 근무하던 권순옥을 여급으로 데려온다.
권순옥은 이상이 4년 전에 만났던 여성으로, 이상에게 'D. H. 로렌스의 모조품'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상은 권순옥을 사랑했으나, 똑같이 권순옥을 사랑했던 친구인 소설가 정인택이 권순옥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며 자살 기도를 하였고, 이를 본 이상은 결국 권순옥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이후 정인택과 권순옥은 결혼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의 결혼식 사회를 이상이 봐주었다.
권순옥은 한국 전쟁 때 정인택과 함께 월북했으나 정인택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이상의 또 다른 친구인 박태원과 결혼하고 이름을 권영희로 개명한다.
박태원이 <갑오농민전쟁>을 쓰던 도중 건강이 악화되자, 권영희는 그를 도와 <갑오농민전쟁> 2부, 3부를 같이 썼다.
문제는 박태원이 남한에 처자식[참고로 이 전처의 딸의 아들, 즉 외손자가 바로 영화감독 봉준호다]을 두고 월북하는 바람에 이 소설의 저작권까지 꼬여서 재출판이 어렵다고 한다.
카페 쓰루의 폐업 이후, 카페 무기를 차린 이상은 이번엔 카페의 손님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모인 수필가 변동림에게 빠지게 되었고, 어느 날 고백한 것을 계기로 1936년 6월에 결혼한다.
그러나 이상은 결혼 4개월 만에 새출발을 하겠다며 도쿄로 떠났고, 변동림과는 죽기 전에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이후 변동림은 이상과 사별한 지 7년 후인 1944년에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고 남편 김환기의 이전 호를 따서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어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와 에콜 드 루브르 등에서 미술을 공부해 미술 평론을 썼다.
그녀는 수필을 쓰며 이상의 자취를 정리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2004년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담
구인회의 일원으로 소설가 박태원, 김유정 등과 절친했다.
이 중 김유정과는 형제처럼 친밀했으며, 이상은 도쿄로 떠나기 전 같은 폐결핵 환자였던 그에게 동반 자살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김유정은 이를 거부했다.
사후 이상과 김유정은 합동 영결식으로 화장되었다.
상당히 괴짜스러운 인물이었으나 주변인들을 챙기는 따뜻한 마음씨 또한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는데, 이것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여동생 김옥희에게 보낸 편지인 동생 옥희 보아라로, 자신에게 제대로 된 말도 없이 연인과 함께 이국으로 떠난 여동생의 선택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편지 마지막 즈음의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라는 구절은 이상이 생전 여동생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부모의 반대가 심하니 연인과 북만주로 도망가는 여동생을 지지하는 이상은 로맨티시트였다
김옥희 또한 이상에 대해 많이 사랑했으며, 소실된 이상의 묘를 찾지 못 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거나, 노년기에 치매에 걸렸을 때는 자신의 차남을 이상으로 착각해 "오빠, 오빠"라고 말을 거는 등 큰오빠 이상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반면 남동생 김운경과는 약간의 불화 또한 있었던 모양이다.
만주로 떠난 김옥희에게 근황을 전할 때 "네 작은오빠는 또 어딜 나갔는지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편지에 적은 것과, 김운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울화가 치밀 때는 너에게 불쾌한 내용의 편지도 썼다"라며 사과한 것 등을 보면
당시 방황하는 남동생과는 어느 정도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김운경이 통신사 기자로 취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편지를 보내 축하하고 기뻐했으며 하고 싶은 말 역시 많았는지 "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2~3일 이내로 다시 쓰겠다." 라고 말하거나,
자신이 도쿄에 있는 동안 아들 된 도리를 못 지키는 자신을 대신해 부모님을 모셔달라 부탁하는 등 김운경에 대해서도 비록 화를 낼지언정 많이 아끼고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7년에 이상의 업적을 기리고자 문학상 이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이상문학상은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 2020년에 대두된 저작권 논란으로 인해 현재는 그 위상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5절 속 한 구절인 날자꾸나 이상으로 언급된다.
이상의 소설 "날개"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은 시가 아닌 소설이지만 시보다 더 많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된다.
도입부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종결부 -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려워졌다. 아하 ! ! !

첫댓글 이상시인을 소상하게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쾌한 마무리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