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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제주4・3사건
필자는 1967년 3월에 초등학교 입학하여 1979년 2월에 고교를 졸업한 이른 바 '박정희 시대'로 살았다.
그래서 때문일까? 편중된 역사를 배웠고 월북한 독립운동가 김원봉이나 제주4.3사건은 배운 적도 없고 질문을 해도
'빨갱이'를 알아서 무엇하냐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면서 새마을운동에 줄기차게 참여하는 것이 애국이며, 너희들 또래의 이승복을 본받아
'반공만이 국시' 이여야 한다는 파시즘교육에 집중하며 젊은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순을 넘어서야 3개월에 걸쳐 4.3사건을 훑어보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솔직히 말하면 몰랐던 역사를 외면한 것
같아 부끄러웠으며 다시한번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워하는 것이 필자의 유일한 권리인 것을 깨달았다?
7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사견을 곁들여 정리하니 삼촌 (삼례 촌놈들 이하' 삼촌)도 제발 읽어 보라고
2019년4월3일 새벽에 이 글을 올린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7개월간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관군 등 3만 여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에 큰 고통을 남긴 상처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가슴 속 깊은 응어리와 한으로 남아 있다.
필자가 본 '제주 4.3'은 놀랍게도 '1980년 광주 5.18'과 매우 흡사하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슴으로 이해되었고
사진자료가 별로 없는데도 파노라마처럼 머리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어느 노모>
■ 제주 4・3사건의 과정 주요 일지
년도 | 월일 | 요일 | 전 개 과 정 | 피해상황 | 9연대장 | 비고 |
1945 | 8/15 | 수 | 해방 이전 일본군 6만명 주둔하고 있다가 전군 철수 해방 이후 제주도민 6만명 귀환하여 총 28만명 거주(추정치) | |||
1947 | 3/1 | 토 | 28주년 3.1절 기념식 때 기마경관 임영관경위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 발생함.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경찰발포로 사상자 첫 발생 | 6명 사망 8명 중경상 | 3.1 사건 | |
3/10 | 월 |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 실시 제주도 전체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에서 41,211명 파업참여 | 장창국 소령 | |||
3/15 | 토 | 응원경찰 222명(전남122명,전북100명) 파견 | ||||
3/17 | 월 | 중문지서에서 수감자 석방하라는 민중에 응원경찰대가 발포 | 8명 부상 | |||
3/20 | 목 | 조병옥 경무부장 "3.1사건 발포행위는 정당방위"라고 발표 | ||||
3/22 | 토 | 남로당 전국적으로 24시간 파업인 "3.22 총파업" 전개 파업선동자 전국에서 2,176명 검거,제주는 230명이라고 경무부 발표 | ||||
5/23 | 금 | 재판에 회부된 328명에 대한 공판 완결 체형52명,집유52명, 벌금형56명,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및 불기소 처분 | 이치업 소령 | |||
6/1 | 일 | 삐라살포 혐의로 경찰 제주읍내 중학생 20명 검속 제주여중 3학년생 파시즘교육 반대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 돌입 | ||||
8/13 | 수 | 조천면 북촌리에서 삐라를 붙이는 소년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경찰발포 | 3명 사망 | 이치업 중령 | ||
9/7 | 일 | 제주 식량사무소장 박태훈 자택에서 테러, 서청단원으로 밝혀짐 | ||||
9/8 | 월 | 제주민전 의장 현경호 제주 중 교장 집을 습격, 서청단원으로 밝혀짐 | ||||
11/3 | 월 | 제3대 주한미군 군정장관으로 딘 소장 취임 | ||||
12/26 | 금 | 제주도 추곡수매 실적 11%로 가장 부진(전국 84.5%) | ||||
1948 | 1/22 | 목 |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 급습 106명 검거,26일에 추가로 115명 검거로 총 221명 체포 | |||
2/7 | 토 | 전국에 비상경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해 전국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투쟁 전개 | 김익렬 소령 | |||
2/11 | 화 | 2.7사건으로 제주에서 방화1건,테러9건,시위19건, 290명 체포 | 10일이 구정 | |||
3/6 | 토 | 조천지서에서 취조를 받던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고문치사 발생 | ||||
3/14 | 일 | 모슬포 지서 대정면 영락리 청년 양은하 고문치사 사건 발생 | ||||
3/29 | 월 | 한림면 금릉리에서 청년 박행구가 경찰과 서청에 잡혀 즉결처형됨 | ||||
3/30 | 화 | 전국 일원에서 "5.10 총선거" 선거인 등록업무 개시 | ||||
1948 | 4/3 | 토 | 350명의 무장대가 새벽2시를 기해 무장봉기하여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집을 공격하여 경찰 4명,민간인 8명,무장대 2명 사망 | 14명 사망 | 4.3 사건 | |
4/5 | 월 | 100명 응원경찰 급파하고 제주경비사령부 설치(사령관:김정호 공안국장) 미군정은 해상교통 차단하고 미군함정 동원하여 해안봉쇄함 | ||||
4/14 | 수 | 제주도민 127,752명 중 82,812명 선거인 등록(최하위인 64.9%) | ||||
4/22 | 목 | 오후8시~익일 오전5시까지 통행금지 실시 무장대에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함 | 김익렬 중령 | |||
4/24 | 토 | "한국섬 폭동 발발 46명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워싱턴포스트지 첫 보도 | ||||
4/28 | 수 | 김익렬 9연대장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협상 진행 | ||||
5/1 | 토 | 무장대가 제주읍 도평리,화평리에서 선거관리위원장 살해 세칭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 파기 | ||||
5/5 | 수 | 딘 미군정장관,안재홍 민정장관,조병옥 경무부장,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9연대장,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등 이른바 5.5최고수뇌회의 개최 | 박진경 중령 | 김익렬파면 | ||
5/10 | 월 | 제주도 62.8%로 가장 낮은 투표율,북제주군 2개 선거구 과반수미달로 무효 | 5.10선거 | |||
6/1 | 화 | 제11연대(수원)에 9연대는 합편되고 박진경 대령승진 | 5천명 사살 공로인정 | |||
6/18 | 금 | 박진경 부하에게 피살(문상길 중위,손선호 하사 외4명) | 최경록 중령 송요찬 소령 | |||
8/29 | 일 | 응원경찰 800명 증원파견 제주도에 도착 | ||||
9/23 | 목 | 문상길,손선호 사형집행(신상우,배경용은 총살형 집행 전 특사로 감형) | ||||
10/17 | 일 | 제주해안에서 5km이상 지역 통행금지 발포(위반시 무조건 사살) | 송요찬 소령 | |||
10/19 | 화 | 여수 14연대(제주토벌 반대) 항명사태 발생 | (만천명 사망) | 여순사건 | ||
10/28 | 목 | 9연대 장병 100여명이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일명 '프락치 사건' 발생 | 100명 사망 | 송요찬 소령 | ||
11/7 | 일 | 구좌면 행원리 가옥 20여채 방화하고 주민 학살 | 10명 사망 | |||
11/13 | 토 | 애월면 하가리(25명 총살)소길리 원동마을(60명 총살) 이날을 기점으로 4개월간 중산간마을 초토화 토벌시행 | 85명 사망 | 송요찬 소령 | ||
11/17 | 수 | 계엄령선포, 종달리 주민 숨어있는 다랑쉬굴 발견 모두 질식사 시킴 | 15명 사망 | 송요찬 소령 | ||
12/21 | 화 | 자수한 조천면 주민 150여명을 '박성내'라는 냇가에서 집단총살 | 150명 사망 | 송요찬 소령 | ||
12/22 | 수 | 표선면 가시리 도피가족 76명을 '버들못'이라는 밭에서 집단총살 | 76명 사망 | 송요찬 소령 | ||
1949 | 1/3 | 월 | 외도지서 경찰과 군인들이 무장대로 위장 도평리 70명 가량 총살 | 70명 사망 | 송요찬 중령 | |
1/17 | 월 | 북촌사건'발생 군인들이 기습받은데 대한 보복으로 조천면 북촌리 초토화 | 480명 사망 | 송요찬 중령 | 북촌사건 | |
3/14 | 월 | 로버츠 준장 제주작전에 미군항공기 3대 투입 사실을 알림 | 함병선중령 | 유재흥대령 | ||
1950 | 2/10 | 금 | 김충희 도지사 3만여명 인명피해,가옥손실 4만여동 등 피해액 200여억원 보고 | |||
7/27 | 목 | 제주읍 주정공장,서귀포 경찰서 등 예비검속자 바다에 수장함 | 820명 사망 | |||
8/20 | 일 | 제주비행장,송악산 섯알오름 등 예비검속자 252명등 집단총살 | 350명 사망 | |||
1951 | 4/24 | 화 | 50년10/1~51년4/22까지 무장대56명,경찰17명,자위대24명,민간인42명 전과발표 | |||
1952 | 4/1 | 화 | 4월 한달간 제주지구 잔비섬멸작전 전개(무장30,비무장35 파악) |
*필자가 직접 편집 구성한 일지(너무 많아 최대한 줄여 편집 하였음을 밝힘)
◉ 1947. 3. 1 : 미군정 시절, 28주년 3.1절을 맞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치고 군중은 시가행진을
하였고,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찰인 임영관경위가 탄 말발굽에 차여 한 어린아이가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수습과 사과 없이 지나가는 기마경찰을 쫓아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항의하였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강경 진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 1948. 4. 3 :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미군정 치하의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폭력은 다른 폭력을 불러오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지면서 방화와 탈취와 살인과 학살로 이어졌다. 정부는 이때 이미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함.
*도표에서 보는 바 4.3 이전 서청단(서북청년단)의 횡포와 학살,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도화선이 됨을 알 수 있다.
3월 한달동안 김용철,양은하,박행구가 고문치사 당하니 4월3일 토욜 김달삼을 중심으로
무장대가 봉기하였다.
<김달삼 무장대 대장 1923~1950>
◉ 필자는 김달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산적두목 같은 얼굴을 떠올렸으나 위 사진을 보고 적잖게
놀랐으며, 일본 복지산(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출신으로 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48년 4·3 발발기에는 남로당 제주도 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런 이력으로 보아 정부는 무장대를 철저한 좌익세력으로 몰기에 적합한 것 같았다.
◉1948. 5. 10 남한 단독 선거에서 제주 2개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미군정은 강경진압을
계속하면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이후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9일에는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0월 17일 제주 해안선으로 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폭도배로 인정하여 무조건 총살에 처할 것 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마을(한라산 해발 200m~600m사이의 지역포고문에서 언급한 ) 전부가 해당하여
통행금지란 결국 거주를 금지한다는 의미여서 모든가옥을 방화하였다.
11월 17일에는 헌법에도 없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제주도는 '단절된 섬의 학살지'였다.
◉ 1949. 1. 17 토벌대에 의한 북촌사건이 발생하여 주민 약 400명이 학살되었으며, 10. 2 군법회의 결과
사형 선고된 249명이 총살되고 제주 비행장 인근에 암매장 되었고 정방폭포에 수장되었다.
. 이후 1950. 6. 25 전쟁 반발 제주도만은 북한군에 점령되지 않았으니 필자는 희생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
이라는 착각이 있었다.
그러나 1953. 7. 27까지 동족상잔의 6.25 전쟁 중에도 제주 학살은 계속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 1954년 9월 21일 :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알려고도 하지말고 입밖에 내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살아남은 자 대부분은 연좌제에 묶여 출세는 커녕 여권발급도 쉽지 않은 긴 세월의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2000년에 4·3특별법 공포 이후(김대중 대통령)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2003년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2003년 4월 노무현대통령이 정부수립 후 첫 공식사과를 하였으며
2014년에서야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결정되었고
2019년 오늘 국방부에서 군의 유감으로 공식사과한다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가해자는 누구인가?
필자는 피해자가 너무 많아 정리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해자는 분명 존재한다.
군정을 이끌었던 미국과 무능한 이승만 정부와 모든 것이 명령이었다고 우기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이승만을 등에 업은 극악무도한 서북청년단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을 대표하는 극악무도한 인물을 상세히 파 헤쳐보면,
1. 박진경 (1948.5.16~1948.6.18까지 33일간 토벌연대장)
48년5월 부임하자 마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제주땅이다. 30만 주민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
는 취임사를 하고 무자비한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 후 한달도 안돼 대령으로 진급하자 6월18일
축하연을 열었고 그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의해 피살 당하였다.
경남 남해에 박진경 동상이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으니 4.3사건이 풀릴 수 없다.
2. 최경록 (1948.6.~1948.10까지 4개월간 토벌연대장)
박진경이 죽자 48년6월 후임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승승장구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우리가 잘아는 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교통부장관
에서 경질된 이력이 있다.
3. 송요찬 (1948.6~1949.2까지 9개월간 토벌연대장)
48년6월 최경록이 부임할 때 부연대장(소령)으로 같이 부임하여 10/17일 제주해안선 5km외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위반시 무조건 사살한 주역이며, 49년2월까지 가장 많은 주민을 죽였다(전체학살의 76%)
사실 박진경은 피살되어 그의 죄과를 이미 받았으나 송요찬은 이제껏 아무 조치가 없어 안타깝다.
일본군 상사로 해방을 맞자 군사영어학교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 제주토벌로
중령진급하고 6.25 그해 9월 별까지 달았으며 54년 중장진급, 육군참모총장으로 4.19혁명을 맞았다.
머리가 하도 멍청하여 '석두'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별명이 무색할 만큼 처세에 능하여 62년
내각수반으로 경제기획원 장관까지 지냈고 인천제철 사장 재직시 신장이 안좋아 62세로 죽었다.
4.3사건 학살의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청양군이 선양사업 국비를 요청했다가 철회하였으며,
요즘 진보적 대표로 뜨고 있는 유시민 작가마저 "권력자들은 혁명의 위기에 봉착하면 이외적인 힘을
내부로돌려 국민의 저항을 분쇄하려 한다며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4·19혁명 때 이승만 정권이
그렇게 하려다 실패했다. 송요찬 장군이 이끈 계엄군이 시위진압 거부했기 때문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송요찬은 46년 장교가 되는것도 최경록의 조언을 받았고 석두여서 판단능력이 늘 부족하였으며,
최경록의 도움을 받아 그를 키워 주던 바 계엄군 출동도 최경록이 거부하라고 해서 최경록의
명령만 따랐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제주4.3사건 때에는 왜 출동을 거부하지 않고 무고한 국민을 학살하였는지 물어야 한다.
필자는 송요찬의 죄과를 정확히 파악하여 부관참시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 바이다.
덧붙이면 김용옥 선생도 "도올과 아인 오방간다"프로그램에서 4.3민주항쟁을 언급하였는데 박진경만
마땅히 죽을 놈이었다고 했을 뿐 송요찬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4. 그 외 이승만,조병옥,유재흥,함병선,탁성록과 경찰 최난수 등 고문전문 경찰들
<김익렬 연대장만 빼고 다 죽일 놈들이다~>
5. 서북청년단(서청)
1946년 이북에선 당시 33세인 김일성은 토지개혁을 주도하여 1가구당
15마지기(13,000평방미터/4천평)씩 분배하였다. 먹고 살기 어려운 당시에 15마지기 땅은 하늘에서
떨어진 보물이자 엄청난 토지혁신이었다.
당연히 땅을 빼앗긴 지주들의 불만은 분노를 넘어 폭도로 변하였으며, 대부분 월남하여 영락교회로
모여 들었다.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였고 어떻게 할 지 고민하던 이승만은 사설단체인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되었다.
처음에는 무보수로 경비대·경찰복장을 하고 제주도로 200명을 파견 하였다.
단원들은 바로 경사나 경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 지서주임 등을 하면서 악명이 높았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이들은 고문과 폭행,약탈,성폭행을 일삼고 아이와 여자 가리지 않고
칼과 죽창으로 찔러 죽이며 온갖 학살을 자행하였다.
결국 이들은 최근까지 국가유공자로 연금을 받고, 억울하게 죽었던 이들은 수십년 간
4.3을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사는 기가 막힌 대한민국의 현실이 되었다.
2014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사람들이 부활했다. 서북 청년단을 재건하겠다
고 말이다.
곧 빨갱이 사냥의 광풍이 불어닥칠 것이고 그 시작이 통합진보당을 빨갱이로 몰아 연관된 사람들을
다시한번 전부 토벌해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설쳐댔다. 반공을 내세운 이들에게 헷갈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필자 역시 서청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고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살았으니 4.3사건으로
죽은 영령들을 뵈올 낯이 없다.
■ 제주 4・3사건에 대한 고찰
필자는 글이 너무 길면 읽어 보지 않는다는 관념때문에 사실 1/10조차도 적지 못했다.
너무 줄이다 보니 피해자의 증언도, 군인으로서 학살을 최대한 피하려 했던 김익렬 중령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해 있던 14연대가 제주토벌 명령을 거부한 계기로 일어난 여순사건도,
박진경을 피살하여 사형에 처해진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하사도, 다루지 못 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마지막으로 " 군인으로서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재판관님은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데 고민하지 마시라. 재판관님께 원한은 없다.
박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으로 올 것이다. 우리는 그 때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 공평하다. 미국의 지휘아래 같은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나의 마지막 염원이다! " 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아 ~
손선호 하사 또한 "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으나 나는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그럴 필요가 없었다.
3천만 민족을 위한 것 인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라고 말했다 한다.
당시 불과 22살 정도 되던 젊은이들로서 이 얼마나 당당하고 명료한 말인가!
제주섬 동백꽃
생긴대로 붉은데
어이하여 붉다고
무참히 짓밟나
필자는 이 노래를 들을 때 미안해서 울었고, 억울해서 울었고, 부끄러워 울었다.
정부에서 아직 '제주 4.3 민중항쟁'이라 하지 않아 필자도 쪽팔리게 4.3사건이라 썻다.
삼촌들도 필자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은 들면서도 오늘이라도 "지슬(地實)" 영화를 한번 보자!
4.3항쟁 당시 제주 서귀포 ‘큰넓궤 동굴’로 피신한 마을 주민들의 실화를 토대로 만든 흑백 영화다.
오멸감독이 돈이 없어 저예산으로 2013년 만들었단다.(누적관객 15만)
필자는 "동백 -어이하여 붉다고 짓밟았나-" 영화를 고예산으로 만들어 천만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물론 헛된 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만들었으면 참 좋겠다.
우리는 헛 살았다.
<김익렬 중령: 48년 5월 5일 김중령의 바람대로 평화적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4.3은.......어땟슬까.어땟슬까.어땟슬까~>
게시일: 2019. 4. 3. 수요일 |
ㅡ 불교인드라망에서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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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 맞네요. 후에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야 하겠습니다
영토가 왜곡으로 가득찼어요.
말미에 도올 선생의 절절한 강의를 들어보세요. 시 한 편 건지실겁니다^^.
아픈 역사, 겉으로만 듣던 모르고 지낸 과거, 잘 보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겠습니다.
호월 선생님 귀한 발걸음 감사합니다.
시인들도 시대정신을 시로서 구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아픈 역사 이제야 소상하게 알게 되었네요.
올려 주신 자료 감사했습니다.
아픔을 연대하는 것이 시인이라죠?
아직도 진행형인 우리들의 아픈 상처, 시로서 위로가 되는것도 뜻깊다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