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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우리가 지금까지 한 20일간에 걸쳐서 희년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희년이 옴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축복들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라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2~3일 전에 희년의 생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었는데요.
희년은 좋은 땅에서 안식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좋은 땅에 풍성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마음껏 누리는
생활이라고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왜 사람이 희년의 삶과 희년의 생활이 필요한가라는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첫 사람인
아담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나 그 창조한 첫 사람 아담이 그만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을
그르치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려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타락의 결과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죄의 종 사단의 노예 포로로 전락함으로 말미암아 불행한 삶 곧 죽음과 사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에 빠지게 되었다라는 말씀을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그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만을 생명으로 취하고 그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취함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 공급으로 누릴 때 바로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곧 희년 안에 사는 삶 좋은 땅에서 안식을 하며 그 좋은 땅인 에덴동산의 풍성을 마음껏 누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 좋은 땅의 풍성을 누리는 생활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자신의 소유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육체의 죄를 가지고 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포로가
되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을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임의로 수고하며 노력하며 노동하며 고통 가운데 삶을 살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이 사람들에게 찾아온 것은 바로 사람의 타락의 결과에 따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몸도 건강하고 좋은 아내와 좋은 신랑을 만났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는
인생의 삶 곁에는 항상 고통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까이 임하여 있음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이든 부유한 자이든 간에
많은 근심들이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단의 종 곧 죄의 노예가 되어 전락한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삶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은 즐거움과 만족과 안식이 있는 그러한 희년의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 곧 희년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안식과 즐거움에 대한 마음속의 열망과 소원을 지닌 사람을
본래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이러한 열망을 지닌 곧 안식과 즐거움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창조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만족할 때만이 안식을 얻을 수가 있는데요.
이 만족은 기쁨과 즐거움에서 온다고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눴습니다.
역설적으로 만약에 이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없다면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되며 만족이 없을 때는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참 희년의 삶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진 그 아담이 타락한 이후 부터 주님이 오셔서 세상의 모든 것이 종결되어지는
그 시점까지 모든 인류는 안식과 참 만족과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 채 영적으로 육적으로 배고프고 목말라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식과 즐거움이 없는 것이 사람을 고통받게 하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과 염려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안식과 즐거움이 없는 고통받는 삶을 스스로 인위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돈을 벌어서 만족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고 좋은 결혼 생활과 또는 좋은 직장 이러한 외형적인 항목들을 통한 안식과 만족과 즐거움을 원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러한 쪽으로 관심과 마음이 쏠려 있는 것을 오늘날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을 추구하면 할수록 이 안식과 만족보다 오히려 고통이 더 크고 갈등이
즐거움보다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그러한 생활이 우리앞에 찾아옴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러한 타락의 결과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약 성경을 통하여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킨 7가지 연례 절기들 중에 레위기 23장의 기록에 따르면 이 유월절은
첫 번째 절기 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절기는 노동과 수고가 없는 온전한 휴가 곧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식의 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절기인 것입니다.
절기는 어떤 면에서 잔치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은 노동도 없고 수고도 없고 가족과 함께 담소하며 교제를 나누며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날이 마치 명절 이듯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7가지 연례 절기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절기인 유월절을 통하여 모든 수고와
노동과 일을 멈추고 참 안식과 참 만족과 참 기쁨과 즐거움의 때를 보내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신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수고와 노동과 일들을 그치고
안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의 만족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예표된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희년의 반복이요
재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 희년이 유월절의 반복과 재현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기 위한 일을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아무런 수고와 노동과 일도 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휴가의 생활을 보내는 것을 우리가 광야생활 40년에 그러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활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파종하거나 씨를 뿌리거나 낫을 베어 거두는 수고를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큰 선물인 만나와 반석에서 쏟아져 나온 생수를 통하여 수고하고 일하지 않아도 40년 동안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했고 그분의 선물 생수와 만나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을 광야생활 40년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40년 동안의 생활의 삶은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휴가를 통하여 아무 노동과 수고와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의 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 과거에 애굽에서의 삶을 동경하고 안식일날 자신들의 양식을 더 많이
구하려 하는 탐욕적이고도 정욕적인 문제로 인하여 그들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매우 불쾌하게 했습니다.
광야의 40년 동안의 생활의 삶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며 수고와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에
긴 휴가를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찬양하고 감사하며 찬미하며 그분을 온전히 누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과 더불어 참 만족과
안식하는 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언가를 하려고 분투하고 여러 마음의 염려들로 인하여 애굽의 일을 동경할 때마다 그들은 수많은 문제들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불쾌하게 하여 이렇게 멸절당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한 유월절과 광야 생활을 주셔서 희년이 유월절의 반복이며 광야 생활이 하나님께서 주신 휴가로서 희년의 참 재현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여호수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은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땅의 분깃을 주신 이유는 그들의 분깃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 좋은 땅 가나안 땅에서 참 만족과 안식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누리며 하나님을 통하여 그것으로부터 만족을 얻기를 원하셨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우리의 분깃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6편 5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분깃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그 하나님 자신을 소유할 때 우리가 참 안식하고 누리며 만족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는 젖과꿀이 흐르는 참 땅으로 희년의 예표인 참 좋은 땅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허락해 주셨음을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신 하나님은 그 땅에 참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그 참된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참 땅이라는 것이 30년 동안의 인생의 삶을 사시고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삶과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바로 이 생명주는 영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우리의 좋은 땅임을 신약 성경 27권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분깃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소유하고 있는 한 우리의 참 안식이요 만족이며 기쁨과 즐거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재현인 희년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사람의 모양과 형체를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의 삶을 통하여 희년을 가져온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참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정욕과
실족하고 실패하는 삶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분깃으로 준 그 좋은 땅을 그들은 실패하고 실족하고 가난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땅을 팔게 되었고 심지어는 더욱더 극심하고 핍절한 가난으로 인하여 그들 자신의 생명까지도 타인에게
넘김으로 말미암아 노예가 되고 종이 되는 모습을 우리가 레위기 25장 8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25:8 〔희년〕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25: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25: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25: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25: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25:13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말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찌라
49년 동안 그들은 어찌할 수 없이 자신들의 분깃이요 목숨이며 소유이며 기업인 땅을 팔았습니다.
이 땅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을 팔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의 생명까지도 마귀에게 넘겨버림으로 말미암아
곧 죄의 종이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49년 동안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분깃인 누림의 상실과 그리고 죄의 종의 속박을 체험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주권과 안배에 따라 제 50년째 되는 희년의 해를
정하시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신까지 팔아버리는 이 있을 수 없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제49년 중반부에 희년의 나팔 소리를 울렸던 그 복음의 소식을 통하여 이제 50년째
되는 해에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희년을 도래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희년은 유월절의 반복이고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젖과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 좋은 땅은 희년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로 예표라는 것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유월절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바로의 압박과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안식과 누림안으로
자유와 해방을 가지고 구출된 것처럼 희년을 통하여 이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진 모든 인류는 사단의 굴레에서
모두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통하여 안식과 누림안으로 인도되어 구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누림 안으로 들어간 후에 사람이 다시 가난해지고 더욱더 극심한 가난해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의 반복과 재현으로 희년이 필요했다라는 것을 아심으로
말미암아 희년의 해를 정하시게 하고 그리고 바로 주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성육신 하심으로 말미암아
희년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도래하는 일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의 해에는 자유와 해방의 선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장 10절에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라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굴레로부터 세상과 죄와 자기 자신의 존재와 마귀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받는 것이 바로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을 통하여 자신의 좋은 땅으로 상징되어진 그 땅에 참된 분이신 하나님의 기업과 자신의 가족에게로 되돌아갈
수가 있었던 것처럼 유월절은 바로 본의 아니게 본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었으나 애굽 바로 왕의 노예가 되고 종이 되어져서 속박 당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었던 본래 상태의 신분과 본래 그 상태를 되찾게 해주는 것을 유월절이 행했다
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잃어버린 사람들의 그 상태와 신분을 모두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마치 좋은 땅이신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는 상태와 신분 안으로 그들을 인도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활은
자유와 온전한 석방과 해방의 생활이 날마다 날마다 계속적으로 지속됨으로 말미암아 안식과 만족과 참 누림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희년 안에 살아가는 생활의 종류가 여러분과 함께 교제를 통해서 좋은 땅에서 안식을 하고 그 좋은 땅의 풍성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함께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참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자유와 해방으로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의 생활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과 만족과 누림이 있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활이며 바로 희년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며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런 말씀들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앙 안에 사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말씀을 통하여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셨는데 그 희년을 선포하신
4장 18절, 19절 이후에 기록되어진 모든 항목들, 사람들을 마주하고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모든 일들은 희년을
지배하는 원칙임을 설명하는 비유의 말씀이요 실제적인 말씀이며 그러한 실예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러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구원해 주시고 그리고 문둥병자를 구원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모든 일들은 복음의 나팔 곧 희년의 나팔을 불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소유이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누가복음 4장 이후에 기록되어진 모든 종류의 그런 비유와 그러한 항목들의 말씀들은 사람을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발생되어져서 구원시키시는 모습은 모든 종류의 굴레 모든 종류의 혼란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사탄에게 매인바 되어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통하여 굴레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그때로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 23절에서는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께로부터 영접받은 후 집에
돌아왔을 때의 삶의 그 누림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면 누림의 생활을 갖게 되는데 이 누림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 바로 탕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보여준 결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그의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그 아들 잃어버렸다가 찾은 아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를 만남으로 소생되어지는 그 미래 모습을 통해서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타내진
삶의 모습은 먼저 그 아버지와 탕자는 선제적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그 누림의 생활을 전적으로 가진
자가 탕자의 모습이고 그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을 때 그를 품에 안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버지 집에 포함돼 있는 모든 자들이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즐기고 함께 만족한 삶을 산 것이 바로 희년의 누림의 삶을 가진 자들의 모습 이라는 것을
누가복음 15장 23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계속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먹고 마시는 일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데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 것입니까? 많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것을 수없이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이 먹고 마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인식하지를 못한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 23절 말씀을 통하여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먹기위해서 잡는 것이죠.
바로 그리스도가 살찐 송아지라고 상징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살찐 송아지로 예표된 그리스도를 먹는 일이 바로 생명의 산출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신 바로 그 영을 마시는 것이 그분을 먹고 그분을 마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살찐 송아지로 먹어야 하며 필연적으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신 생명수인 그 영을 마셔야 합니다.이것이 바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 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살찐 송아지를 마음껏 먹으면 배부르게 되겠죠.
마시게 되면 그 먹은 것이 인체 안으로 들어가 소화기관을 통하여 흡수되어서 바로 인체 곳곳에 생명의 요소로
전달되어질 것입니다.
바로 살찐 송아지인 그리스도를 먹고 생명주는 영이신 그 영을 마시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의 누림을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목마름이 없고 배고픔이 없이 만족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흡족한 누림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그리고 이 누림이 어느 정도로 지속되어야 할까요? 예 탕자가 아버지 집에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한 집을 나가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집의 풍성을 탕자와 그 가족들과 모두가 즐길 수가 있는 것을 누가복음 15장 23절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부활의 영을 마시며 하나님을 누려야 하며 아버지의 풍성함을 마음껏 즐겨야 하는 것이 누림과
만족의 생활인 희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5장 8절에서는 이것을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주 특별한 명절임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누룩이 없는 떡 바로 무교병에 대한 얘기죠.
바로 이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이 없는 효소가 없는 떡으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명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고린도전서 5장 8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명절은 출애굽기 12장 15절, 16절, 19절에 기록한 유월절의
연속인 무교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12:15 〔무교절〕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12:16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제 칠일에도 성회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인의 식물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
12: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찌니라
12:18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12:19 칠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자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12:20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찌니라
이 무교절 절기는 7일 동안 계속되어집니다. 왜 7일 동안 계속되어집니까?
완전한 과정 더할 나위 없이 모자람도 미비함도 부족함도 조금도 잘못됨이 없는 완전한 과정을 나타내는 기간인 7일 동안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이 무교절입니다. 유월절이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7일째 되는 날까지 첫날과 끝날을 성일로 하여
무교절을 지키는데 이 무교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교절에는 누룩이 전혀 없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을 출애굽기
12장 15절부터 20절까지의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 있는 날에는 어둠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주 예수님을 어느 날 영접하여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회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회심한 그 날로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휴거의 날까지를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전 생활인 전 7일간의 기간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7일이라는 이 기간은 완전한 무교절의 과정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그 온전한 생활이 주님을 믿는
그 날부터 휴거하는 그날까지 계속적으로 고린도전서 5장 8절에 기록되어진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인 무교절을
지키는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이것이 명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함과 순전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삶으로 말미암아 누룩이 없이 괴약하고 악독한 냄새나는 효소가 있는
어둠이 있는 부정적인 것이 있는 그러한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영양분과 참 누림과 만족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는 7일의 기간의 절기가 바로 무교병인 것입니다.
예 일주일의 기간은 온전하고도 완전한 과정이죠. 예 긴 기간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예수님을 믿는 시점부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휴거시킨 그날까지 계속되어지는 이 삶의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갈망하시는 누림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누가복음 15장 23절에서 기록되어진 것처럼 그리스도를 살찐 송아지로 먹고 그리고 부활하신 영을
통하여 그 영이신 생명주는 영을 마시게 되며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게 되고 아버지 집의 모든 풍성함으로 즐기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 생활을 통하여 주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생이 끝나서 주님의 휴거가 있는 그 날까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만 진실하고 참되고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섞인 것이 없고 효소가 없고 냄새나는 것이 없으며 부풀게 하는 것도
없고 손상된 것도 없고 그리고 잘못됨이 없는 온전하고도 실제적으로 충만한 생명 공급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절기가 이 유월절과 함께 나타나는 무교절 절기를 통하여 우리가 누림을 위한 시간이 오늘 주님을 믿고 영접했을 때
막 반짝이는 그러한 은혜의 시간뿐만이 아니라 전 생활을 통하여 전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회심의 날로부터 휴거
날까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누림을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누림을 위한 시간을 가질 때 바로 그러한 자의 삶의 모습은 잔치의 삶이 되고 생명의 풍성한 공급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5장 8절에서 바울 선생님은 누룩이 없는 떡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명절 그 절기를 일주일 동안
그리스도의 전 생활을 통하여 전 기간을 통하여 함께 그 절기를 죄 없는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강력히 권고하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이 절기 첫날과 그 일곱 번째 되는 마지막 날을 성일로 거룩하고도 신성한 특별히 정해진 날로
주신 것은 잔치를 위한 날이지 일하기 위한 날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유교절과 무교절을 통하여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먹고 누리고 만족하고 안식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참 양식과 참 누림과 참 만족과 기쁨과
안식이어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에베소서 3장 8절에서 모든 성도들 중에 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예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파한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풍성은 바로 우리를 위한 우리의 체험과 우리의 어떤
신앙생활을 통하여 누리게 되는 생활을 위한 바로 참빛되심과 참 생명과 참 의와 참 거룩과도 같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것이 그리스도의 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인격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바로 회심함으로 말미암아 희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그 인격이 그리스도의 풍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그 어떠하신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그분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그분 하늘 위에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모자람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미비함도 없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그러한 풍성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참 본성인 빛과
생명과 의와 거룩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풍성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헤아려 볼 수가 없습니다. 측량해 볼 수도 전혀 없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측량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한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영의 공급을 말하는 것이 바로 빌립보서 1장 19절 말씀인데요.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사도바울 선생님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누림의 생활을 하는
모습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이 사도바울 선생님에게는 이 사단의 가시가 있었는데 그 사단의 가시가 육체에 있어 극심한 고통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세 번에 걸쳐서 주 예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것이 안질이라고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님의 영광의 빛을 체험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눈이 약간 먼 실명 상태 가까이
이르는 일로 말미암아 계속적인 어떤 눈물 나오는 일이 있다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육체에 있는 가시로 심하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 선생님의 그 고통을 사람들에게 믿는 자들에게 덕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치유해 달라고 세 번 주님께 간구하는 장면이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나오는데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주님께서는 그 세 번 간절한 탄원을 간구를 하는 사도바울 선생님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가시를 오히려 없애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더 큰 은혜의 풍성을 누리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육체에 있는 고통의 가시를 제거하지 않는 일이 더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희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되면 곧 누림의 생활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아픔과 고통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 고통 위에 이 사도바울 선생님이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경이 바뀌어진
것이 아니고 똑같이 이 육체에 있는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치유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똑같이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고통을 이기는 삶이 희년 안에 누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을 통하여 고통이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투옥되어지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16: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16: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이때 그들이 정말 깜깜하고 정말 습한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 감옥 안에서 사는 그 기간 동안에 전혀 고통당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실라는 그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님을 찬양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외면적으로는
고통 가운데 있는 옥중에서의 삶을 보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바울과 실라에게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만족과 참 안식과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감옥의 삶이 바울과 실라에게 크나 큰 고통의 일들이 아니었던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와 같은 육체에 있는 가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가시를 없애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는 일을 통하여 그 어떤 고통과 억압과 속박과
그러한 것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고통으로 여겨지지 아니하는 이러한 체험의 일들을 통해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누릴 때 고통당하지 않는 삶 마치 감옥에 있었지만
오히려 그분을 찬송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있었던 이러한 삶들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누림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사도바울 선생님은 깨닫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생명이 필요한 우리에게 생명이신 주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생명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줄까요? 우리의 만족과 누림과 기쁨과 즐거움의 삶을 살게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이신 주님 자신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주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이 주님의 은혜인 우리 성도들의 누림을 위하여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면서 우리에게 대체물이 되어 주신 큰 은혜의 근원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가 끝난 후에 바로 목사님의 인도하에 축도를 받는데 그때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무한하신 교통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 영 하나님의 교통은 우리의 참여를 위하여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과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안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참여를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전달이 되시는 분이 바로 그 영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영 하나님의 교통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족이요 배부름이요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참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이 누림과 만족의 소산의 결과가 안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누림과 만족과 안식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반드시 함께 병행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영 하나님의 교통에 대한 얘기를 듣지만 실제적으로
그 주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영 하나님의 교통을 매일 자기 것으로 누리는 자들은 그다지 많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매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그러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매일 수고하고
근심하며 오히려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아주 흔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대와 꿈을 가지고 이러한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마음이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한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오히려 실망과 고통으로 끝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풍랑이 일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고 비바람이 불기도 하고 희노애락이
늘 왔다갔다 하기도 하며 수고하고 근심하고 꿈꾸며 고통당하는 연속적인 삶이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고하고 근심하며 고통당하는 인생이 찾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환경을 바꿔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많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이 수고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고통당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제거되겠지라고 그러한 기대와 바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님들도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삶이 행복해진다고 좋아진다고 그렇게 설교를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그러한 고통당하는 상황들은 거의 다 비슷합니다.
거의다 근심하고 수고하고 염려하고 고통당하는 삶의 연속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가 믿는 주 예수님을 통하여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정말 건강치 못한 자가 건강하게 되고 또 이 재물에
대해서 부유해지고 또는 어떤 직장이나 또는 어떤 결혼 생활에 대하여 성공되어지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그런 얘기를 통해서 그런 가르침에 우리가 솔깃하게 되고 매혹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삶에도 불구하고 수고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정말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인생의 삶이 여전히 고통당하는 인생의 삶이고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삶이고 세상 가운데 처해진 삶 안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생계를 위하여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여서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고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직장에서 그 돈을 취하여 재물을 가지고 삶의 어떤 안위와 영예를 보존코자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도
더 큰 세 종류의 수고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있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종류의 수고가 보이지 아니하는
아주 은밀한 수고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우리의 성격과 인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그러한 수고들인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고 선한 행동을 하고자 하고 자신의 인격과 성격이 좋아지게 하려는 그런 수고들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참으로 조심해야 될 수고라는 것입니다.
이런 수고를 가진 자들은 주님 안에 있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남들과 분쟁해서도 안 되고 마찰을 일으켜서도 안 되고
늘 겸손해지고 겸비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행동을 하기를 늘 애를 쓰고 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신약 성경에서 이러한 행위들을 성격을 고치기 위하여 선한 사람이 되고자 선한 행동을 하고자 겸손해지고자 정말
사랑을 행하고자 인내심을 가지고자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자 하는 모든 이러한 행위들이 이런 것이라고
신약 성경은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 그 어떤 행위로도 인간은 절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 8절 9절 말씀인 것입니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통하여 겸손해지고 행위를 통하여 선한 자가 되기를 원하고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는 이 수고가 일하는 것이라고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게 암시하고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행위를 통하여 행동과 성격을 개선하려고 곧 이런 자신의 어떤 외형적인 행동과 외형적인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보이지 아니하는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기 위한 삶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외형적으로 아주 인내심 있고 사랑을 내보이는 것 같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정직해지는 것처럼
보이고 착한 것처럼 노력하는 것처럼 행하는 모든 그런 행위들을 보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러한 외형적인 노력하는 행위로
인하여 절대적으로 구원될 수 없다라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런 행위들이 모두 수고란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것을 행위라고 부릅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요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돈을 벌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에 따른 수고와 노동에 대한 일보다도 이러한 수고가 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큰 무서운 수고는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염려하면서 수고할 때 더 큰 힘이 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고하게 되면 그 수고한 것에 따라서 책정되어진 돈이 수고의 비율에 따라서 어떤 임금이 보장되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수고를 말할 수 없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정당한 보수가 자신의 손 안에 쥐어지지 않을 때
이것은 더 큰 마음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예 수고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염려하면서 수고하는 것 과연 내가 이렇게 일을 할 때 과연 이 일이 성공할 것인가 과연
이 일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취할 것인가라는 이런 염려하며 수고하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가장 무서운 수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염려 없이 보장된다라는 그런 원칙하에 일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조금은 건강한 사람 마음이 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것 보다도 오히려 염려하고 근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할 때 또는
건강을 위해서 애를 써서 시간을 들여서 건강을 위해서 우리의 몸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할 때 부를 소유하기 위해서
장사를 할 때 이러한 모든 우리에게 발생되는 일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염려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5절, 27절, 34절에서 염려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요. 우리가 근심과 이런 염려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할 수 있다면 또는 더 나아가 염려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일까라고 의문을 가질 때 바로 그 염려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 안에 들어가 주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먹고 주님을 마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로 그리스도를 살찐 송아지로 먹고 바로 이 생명주는 그 영 하나님으로 우리가 마시고 하나님의 그 온전한
누림과 아버지 집의 풍성을 누려야 된다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가 주님을 누리고 있을 때는 우리가
염려하지 않지만 만약에 주님을 누리고 있지 않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염려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건강한자라 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모두가 염려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근심과 염려의 반대로 참 빛을 가지고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염려에 정반대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는 수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주님을 누리는 것이 곧 희년의 삶 안에 들어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무서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고를 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찾아오는 것은 열심히 일함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결혼 생활을 통하여서도 나타나고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사업하고 장사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나고 건강을
위해서 애쓰는 사람에게도 이러한 고통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져서 나타나는 것이 이 고통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힘든 수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희년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고통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잠시 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해 드린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가시를
제거해 주십시오라고 세 번 주님께 이 사단의 가시가 떠나게 하기 위하여 간절한 간구의 기도를 하였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이 사단의 가시 육체에 있는 가시를 없애주는 대신에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지
않고 오히려 주님 안에 들어가 주님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통해서 극심한 고통을
자기가 당하고 있을지라도 이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라고 이 사도바울 선생님에게 얘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누릴 때 많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주님을 믿게 되면 우리가 재물로 인하여 건강으로
인하여 결혼생활로 인하여 직장 문제로 인하여 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인생의 삶의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주님을 믿게
되면 주님께서 이것을 없애줍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누리게 되면 사도바울 선생님처럼 육체에 있는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이 고통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었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사도바울 선생님의 육체의 외형적인 문제가 개선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환경은 똑같이 그냥 있습니다.
심지어는 욥처럼 더 나쁘게 설정되어져서 자신의 가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재물을 잃어버리고 아내가 자기 자신을 떠나고
친구와 지인들 모두가 이 욥에게 벌어진 일을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라고 얘기하는 어떤 외형적인 그러한 모습처럼 심지어는
우리에게 펼쳐진 환경들이 더 나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감옥에서 투옥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의 상황은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감옥 안에서 고통당하는 것보다도 주님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사는 주님의 희년의 삶을 통하여 전혀 고통당하고 있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 바울과 실라는 희년을 누리고 있었습니다.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께 간구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처음에 사도바울 선생님은 육체의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세 번에
걸쳐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는 간구하였지만 고린도후서 바로 16장에 들어와서는 바로 온전한 희년을 누리고 사는 삶을
통하여 오히려 바울과 실라는 찬송하며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참 누림과 참 만족과 참 인식이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우리가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봉사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주님께 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 심지어는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나아가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잘못된 환경 고통당하는 환경이 제거되고 그 고통당해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경이 변화될 것이라고 순조롭게 될 것이라는 그러한 잘못된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혀 잘못된 그릇된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요 성경을 통하여 성경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 우리가 간과하는 문제를 통하여서 우리의 환경이 순조롭게 되고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고
심지어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들이 해결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얘기하고자 한 것은 주님을 우리가 누릴 때 고통당하지 않게 된다라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고
개선되고 순조롭게 될 것이라는 그런 관념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누리는 삶을 살 때
고통 위에 초월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이 자신에게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순교당하는 장면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 복음서를 통하여 신약의 선지자인 침례자 침례 요한이 6개월 전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6개월 전에 온
침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가운데 바로 이 감옥에 갇혀서 목 베임을 당하는 그러한 순간이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침례자 요한이 자신이 감옥에 갇혀서 잠시 후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알고 침례 요한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중 두 사람을
보내어서 주님께 요청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죽을 운명에 처해져 있는 침례자 요한 주님을 위해서 산 자 주님을 위해서 사역을 한 자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곧 구원해 주실 것을 간절히 요청했을 때 주 예수님께서는 그 침례자 요한을 위하여서 어떤 구명 활동이나 어떤 구제하는
방법이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여서 그를 구원치 않으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부터 5절 사이의 말씀입니다.
11:2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다〔눅 7:18-35〕〕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 침례자 요한은 자신이 옥에 갇혀서 그 옥에서
구출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환경이 개선되길 원하였습니다.
환경이 순조롭게 되어서 그 자신을 옥에 가두고 죽게 하고자 하는 그 왕의 마음을 바꾸셔서 그가 석방되어지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족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이 그가 옥에서부터 죽음을 당하려 할 때 그 어떤 조그마한 행동도 전혀 행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히려 주 예수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이 죽임을 당하도록 옥중에 남겨두셔서 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큰 불로 오신 그리스도와 작은 불로 미리 6개월 전에 온 침례자 요한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의 시야에
그것이 구분되지 않고 혼합되어져서 온전히 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관심 있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안배
속에서 주님의 주권 가운데서 오히려 죽임을 옥에서 당하도록 남겨두시는 일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그러한 방법으로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도 그런 방법으로 순교당하셨습니다.사도 요한 선생님 보십시요 밧모섬에서 나이 100세 가까이 되기까지
정말 순교당하는 삶을 고통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순교자가 된다라는 것은 고통당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는 순교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침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가 일어나며
문둥병자가 고쳐진다 일러라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가 더 이상 침례자 요한이 실족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죽음을 고통 없이
받아들이는 침례자 요한과 사도 베드로 선생님과 사도바울 선생님의 이 죽음에 대한 일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순교는 왜 고통당하는 일이 아닙니까? 희년의 체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인 희년의 체험을 하는 것이 순교이기 때문에 순교자는 고통당하는 일을 갖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이죠.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희년의 체험, 희년 안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희년 안의 삶을 살고 있던 자입니다.
그가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 의하여 돌로 맞음을 통하여 바로 순교하게 됩니다.
이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고 마치 예수님께서 오전 9시부터 12시에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받아 순교자로서
돌아가실 때 바로 주님께서는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아닌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신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교자의 마음은 희년의 체험을 하는 자의 삶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사자의 마음과 같고 그 순교당하는
그 사람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사도 바울이 순교당할 때 그들은 전혀
고통받고 있지 않은 삶을 살게 된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이 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희년의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려 할 때 또는 사도바울 선생님이 옥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고통당하는 대신 그 고통은 그대로 변화되지 않고 바뀌어지지 않고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임한 것이지만 희년 안에 들어간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스데반과 사도바울 선생님 사도 베드로 선생님,
사도 요한 선생님 모두는 주님을 누리고 있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빛나는 삶의 죽음인지를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이 성경에서 기록된 어떤 그러한 순교자들과 같은 그런 특별한 환경에서 나도 사도바울 선생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 선생님, 사도 요한 선생님과 같은 그런 자만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테두리 안에서 특별한 이 환경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보다도 그 어떤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는 자가
바로 특별한 환경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유일하게 하나님을 정말 성품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정말
유일하게 오직 유일하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환경이 우리에게 임한다 할지라도
스데반처럼 돌에 매 맞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옥중에서 죽임 당하는 그런 일들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오히려 주님만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그 어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환경이 있다 할지라도 전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왜 아들이나 딸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왜 합당치 않다고 얘기하십니까? 왜 그분만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데요. 우리들이 부모나 자녀나 아내나 가족들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것만큼 그들을 잃었을 때 고통으로 느끼게 됩니다.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내 안에서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집을 잃게 되었을 때 고통으로 느낀다면 우리가 그 집을 더 사랑한 것이지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을 잃었다고 가정합시다.근데 우리가 그것을 잃었을 때 그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잃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와서 크게 아픔으로 여겨진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온전히 우리 안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제외한 그 어떤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면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이 아닌 그것들에게 두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었을 때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누가복음 14장 26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
에서는 누구든지 아비나 어미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한 자는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남편이나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온전히 순전히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을 온전히 그분께 드리고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만 있다면 우리의
사랑을 나누는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들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한들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 육체까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사랑하게 되면 육체가 조금 다치거나 조금 아프거나 조금 고통당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육체를 하나님보다도 육체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좋은 집 10억짜리, 20억짜리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 칩시다.그런데 그 집을 정말 사업의 실패로 인하여
뭐 어떤 실수로 인하여 집을 잃었다 칩시다.그때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만약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한 집이
살고 있다가 갑자기 잃어버렸을 때 그 집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나님보다도
그 집을 더 사랑하고 있다라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집이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집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나 자신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나 자신의 가족은 물론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우리들은 그 어떤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속에 큰 고통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집을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않고 그렇다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우리 안에 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채우게 되면 그 채우게 된 그것이
잃어버렸을 때 제거되었을 때 고통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건강이 나빠졌다 할지라도 내가 살고 있던 좋은 집이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인 아내나
남편 또는 사랑하는 부모나 사랑하는 자식들이 없어졌다 할지라도 내 안에 오직 하나님만 계시면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잃어버린 그 고통을 오히려 우리는 초월하여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그 고통을 대신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희년의 삶을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희년의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들을 심하게 사랑하는 까닭에 내 안에
터가 되어서 심어두었기 때문에 누림과 만족과 안식과 기쁨과 즐거움 대신에 그 집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집에 대한 고통,
자식을 잃어버림으로 말아 자식에 대한 고통, 건강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건강에 대한 고통을 당하게 되어 아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해지기 위하여 애쓰고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일에서 떠나야 됩니다.
일하고 수고하는 대신 우리가 선해지고 행위를 통하여 어떤 주님의 희년의 삶 안에 그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수고하는 삶 대신에 오직 우리의 분깃이신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분깃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채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집도 필요하고 높은 권세 좋은 직장 뭐 여러 가지 모든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은 잠시
삶을 살고 있는 가운데 필요한 몫일 뿐이지 참된 분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이 분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셔야합니다.
우리가 희년 안에 살고 있는 삶을 살게 되면 고통이나 염려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6장 25절과 3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먼저 마태복음 6장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염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다음에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 네 번에 걸쳐서 이 염려를 계속적으로 반복하신 이유는 바로 보통 사람들은 오늘 일들을 굉장히
고민을 합니다. 내일의 염려를 꿈꿉니다. 미래의 앞날에 대한 괴로움을 가지고 염려를 미리 빌려옵니다.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 한날에 족할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의 신앙 연륜이 얼마가 됐든 간에 오늘 일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다가오지도 아니한
내일 그리고 장차 닥칠 10년, 20년, 30년, 40년 후에 세월들을 미리 마음속에 앞당겨와 염려를 빌려옵니다.
이 일들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괴로움은 한 날에 족하고 내일 일 10년 후의 일, 30년 후의 일은 주님의 주권에 따르는 주님의 안배에 따라
벌어지는 일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뿐만 아니라 10년 20년, 30년 후 40년 뒤에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어떤 유지와 보존을 위해서 건강의 안위를 위하여 막 보험을 들고 그것도 어떤 사람은 5개 10개를
드는 사람도 있죠. 예 이런 모든 것들이 장차 후에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것들을 집어넣는 일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한낱 괴로움인 오늘과 그리고 내일 그리고 장차 후에 발생되어지지 아니한 미래의 일들을 염려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완전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들이 텃밭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완전한 터로 임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되는데 바로 하나님 대신에 완전한 하나님만이
우리의 텃밭이 되어야 되는데, 그것을 다른 어떤 재물이나 돈이나 어떤 다른 것들에게 자신의 텃밭 자신의 어떠한 귀퉁이를
떼어줌으로 말미암아 그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를 심하게 마음 아프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텃밭인 우리의 어떤 공간을 우리의 터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일이 욥처럼 수십
가지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결코 염려하거나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어떤 것들이 대체하여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누림과 만족과 안식이 되시는데 바로 그 다른 어떤 대체한 그 구석들과 공간이나 자리 때문에 우리들이
누림과 만족과 안식 대신에 큰 고통과 마음의 염려와 괴로움이 오히려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은 변할 수 있지만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만큼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타락한 본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모든 터를, 모든 공간을, 모든 구석을 모든 텃밭인
하나님께 드리기는 심히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존재 자체인 그 혼 전체가 바로
하나님을 누림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과 만족과 그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갖기 위한 우리의 존재 전체가 심하게
타락되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많은 것들을 우리의 터로 우리의 텃밭에 자리 잡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암울하게 되어서 타락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을 통하여 이 고통과 염려와 괴로움의 근원을 치료해 주실
수 있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주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누림과 만족과 안식이심을 알고 그분만을
영접하여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여서 하나하나 자신들의 분깃으로 자신들의 기업으로 자신의 소유로
만든 것처럼 정복하여서 이겨서 싸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내 안에 심어 임마누엘 땅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인 희년 안에 사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사는 생활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분들이 잘 이해를 못해서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는데 희년의 삶이란 희년 안에 곧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삶이란 내 안에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사는 삶
하나님만이 내 안에서 사는 생활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생활이요 승리의 생활이요 영적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년 안에 들어가는 삶만이 우리 안에 사는 삶이 아닌 우리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하고
수고하고 노력하고 염려하고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는 고통스러운 삶 대신에 바로 누림과 만족과 안식이 있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유하기를 갈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과 내일을 꿈꾸고 미래의 다가오지 아니하는 그러한 일들을 기대하는 것 역시 모든 것이 수고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고통의 수고입니다. 고통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괴로움으로 인하여 염려가 되어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누림과 만족과 안식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염려와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이 수고의 모든 일들로부터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취하는 것입니다.하나님만을 분깃으로 취할 때 우리가 수고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하신 주님의 외침에 따라 그리스도를 살찐 송아지로 먹고 생명주는 영이신
그 영 하나님을 마시며 하나님의 누림과 아버지 집의 풍성으로 즐길 때 우리가 수고와 염려와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죽음을 당하셨을 때 만유를 포함한 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내포한 상태에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 바로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바로 부활하신 생명주는 영이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 하나님이 넘치는 공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젖과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누리게 되고 그 누림과 만족과 안식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희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에게 이 희년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으로 필요 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우리를 바로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희년 안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말씀을 통하여 희년의 나팔을 부시고 그리고 희년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도래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희년의 자유와 누림과 만족과 안식과 기쁨과 즐거움 안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27권 전체의 말씀의 가르침은 희년을 다 포함하고 내포하고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년의 삶을 지금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미리 맛보는 삶을 살 때 장차 오는 천년 왕국이 임할 때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보다도 더 좋은 더 큰 희년을 누리게 되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할 때
영원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할 때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주 큰 좋은 희년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 안에서의 희년과 천년 왕국에서의 이 많은 희년을 맛보기 위해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희년을 통하여 우리의 만족과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맛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희년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터를 우리의 재물이나 건강이나 우리의 육체 자식이나 가족이나 어떤 일터나 직장이나 이런 것들에게
내어주지 말고 우리의 공간과 우리의 구속과 무리의 그 텃밭인 모든 터를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드리고
그분을 누리게 된다면 사도바울 선생님이 당하는 순교조차도, 스데반 집사가 돌팔매질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는 그러한
죽음의 고통조차도 더 이상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염려와 우리의 어떤 그 일들로 인하여 오늘을 염려하고 미래를 기대하기 위하여 수고함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대신 만유를 포함한 수많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성육신 하셔서 인생을 30년 동안 사시고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기간을 거치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시고 3일 후에 부활하신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신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을 우리의 누림과 만족과 안식으로 취할 때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영 하나님의
교통이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 바울 선생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예수 그리스도인 주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영 하나님의 교통은 우리의 이러한 누림과 은혜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 전달이 되시는 그 영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영 하나님의 교통이 바로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이라는 희년의 누림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마태복음: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진정 이 말씀의 의미를 이제야 알것 같습니다. 부활의 영이 되셔서 오늘 저에게 임하신 주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며
보잘것 없는 저의 마음을 귀히 여겨주신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 밖에는 제가 따로 할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무익한 죄인임을 일련의 일을 겪고 체험하며 통감하게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존귀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 계속적으로 지속되기를 기도하며 아울러 귀한 말씀을 공급해 주시는 신언자 이신 선교사님께도 늘 감사드림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는 희년의 기쁨도 맛보게 하셨지만 3가지 수고와 근심과 염려와 고통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귀한 말씀이었고 제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교만을 꺽어주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