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삼상 15:24~31
제목: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다
● 기독교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지존하시며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기초 이해의 시작입니다.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
위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근본 바탕인데요.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결코 ‘변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다른 말로 절대적 속성인데, 절대적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절대자’라고도 부릅니다. 비공유적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은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에게 하나님과 유추하고 공유할 만한 요소가 없는 신적인 완전성입니다. 이방종교나 세속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속성과 활동을 보면 인간과 매우 유사해서 더럽게 살고 죄를 지으며 간음도 합니다(예: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불교의 석가모니나 힌두교의 신들을 보면 거룩하거나 단순하지 못하고 복잡하고 변태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본 건국신화의 주신(主神)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기원과 행적을 보면 그 족보가 복잡하고 여러 신들이 나와서 헤아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더 분류하면 독립성∙불변성∙무한성이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어로만 보면 지루하니까 해당되는 성경구절을 조금 제시하겠습니다. 독립성은 자존성이라고도 합니다.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이십니다. 구약교회는 물론이고 신약교회가 믿는 유일하신 자존자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서 자존성을 잘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은 영원히 동일하시고 변개하지 않으시는 것인데요. 그 불변성을 쉽게 설명하는 성경구절은 오늘 묵상의 요절입니다.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시102: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
불변성은 하나님께 어떠한 움직임도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약속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시 성경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고 말할 때 이는 인간의 이해에 맞춘 표현방식에 불과한데요. 실제로는 하나님께는 변화가 없고 인간이 변질되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변화가 있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본문(삼상15:24~31) 앞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것처럼 나오는 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에 불과합니다.
삼상15:11 내(하나님)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이런 표현은 인간 편에서 이해를 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개하지 않았지만, 잔머리를 굴리고 믿음이 없던 사울이 변개하고 변질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문단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더 세분하면 완전성∙영원성∙광대성∙단순성인데요. 완전성∙영원성∙광대성은 명칭만 들어도 이해하기가 쉽지만, 단순성은 초신자는 물론 기성신자에게도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단순성(simplicity)은 자존성과 불변성에서 유추되는 속성인데요. 하나님께서 혼합적이시지 않고 분리되시지도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한 본질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단순성은 이해되는 부분까지만 알고 넘어가셔도 되겠습니다.
● 앞 문단에서 하나님은 변개하시지 않았지만 믿음이 없던 사울이 변개하고 변질되었다고 했는데요. 그의 변질은 말씀을 청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삼상15: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14.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
사울은 믿음은 적거나 없었지만 합리화와 변명에는 능한 자였습니다. 단순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삼상15:1~3에서 이미 분명한 명령을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하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징벌하는 아말렉의 모두를 진멸하라! 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을 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일부를 살려두었다고 그럴 듯한 종교적 합리화를 시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모순과 딜레마가 어설픈 종교적 위선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말씀을 불순종한 주제에 종교적 위선을 하면서 드리는 제사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역하고도 드리는 제사나 예배는 우상숭배나 마찬가지로 간주됩니다. 그러한 가증한 위선적 예배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이유가 됩니다.
삼상15: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
위 말씀을 보면 일제 치하 신사참배가 연상됩니다. 신사참배를 하는 자들은 나름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교회 문이 닫히고 교회에서 예배를 못 드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하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괴이한 종교적 논리를 개발하여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먼저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것은 배교이며, 마치 라마 불교의 초야권과 같은 것입니다. 신혼 초야에 처녀 상태의 신부가 라마 승려에게 먼저 몸을 바쳐 간음을 하고나서 신랑과 부부관계를 갖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행태입니다. 그런 부부관계는 이미 파탄이 난 음행이 되고 양심이 파괴된 것입니다. 그런 더러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에 노이로제 걸린 듯이 집착하는 것이 사울과 같은 위선의 예배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이미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히 확인하고도 하나님께 기어코 우상숭배로 간주되는 예배를 드리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삼상15:30.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31.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말씀을 청종하지 않은 주제에 어떻게든 예배를 드리려는 위선자들의 종교적 저의(底意)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저의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삼상15:30). 성도인 우리들도 때로는 실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예배 만능주의의 종교적 위선으로 머리를 굴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회개 자복하고 통회해야 합니다. 통회하는 진정성이 예배에 선행해야 합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지 아니하시리이다 |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최선이고, 혹시 불청종했다면, 빨리 상한 심령으로 깊이 통회하는 것이 차선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차선이라도 합시다. 아멘!
첫댓글 사실 위에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초신자는 그것도 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급자 이상이나 시간이 많은 분들의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추가 댓글과 주석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22
사울의 불철저한 회개(사무엘 상 15:24-31)
사울은 회개하는 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만 행동뿐이요, 또 불철저한 회개임이 분명하였다.
Ⅰ. 사울은 너무나 천박하게 회개하였다. 그는 그의 잘못을 아노라고 법석을 떨기는 하였지마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무엘이 그에게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는 말을 낳은 뒤에야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말했다(24절). 그의 고객은 자유롭고도 솔직한 것이 못되었다. 고문이나 폭력에 의해 강제된 고백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회개가 위선적이었다는 표시를 몇 가지 찾아 볼 수 있다. 아합의 경우도 그렇게까지 심한 것은 아니었다.
1. 사울은 사무엘에게만 좋게 보이려고 하였으며 그의 덕을 보려고 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평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사무엘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사무엘이 선지자이며 사울을 왕으로 발탁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그의 고백 속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나이다. "라고 말했다(24절). 그것은 마치 사무엘을
하나님 대신인 것처럼 여기는 말투였다. 다윗은 비록 나단의 책망을 들었지마는, 그의 고백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였지 결코 나단을 의식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51:4). 그러나 사울은 무식하게도 그의 죄가 사무엘의 말을 거역한 것으로 고백하였다. 그때의 그의 말은 "여호와의 명령" 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 사울에게 용서를 빌었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25절). 하나님만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투였다. 자기를 속이는 자들은 소문이 흔히 좋지 않게 난 죄를 범했을 때, 눈에 보이는 그럴 듯한 회개의 모양을 하는 것으로 교회와 그리고 목사하고만 화해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성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사울에 대해 가장 관대한 해석을 내린다면, 그가 사무엘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중보자라고 여겨서, 사무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호소하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것은 매우 약하다.
2. 사울은 고백을 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였다(24절).
그것은 결코 참다운 회개의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 자신의 행동이지 결코 백성들의 행위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백성들이 아무리 그런 일을 하고자 하여도, 전에 읽어본 바에 의하면,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권세가 사울에게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그의 변명은 거짓되고 경박한 것이었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그는 사실 백성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면서, 그것은 그 자신의 마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심을 잊어버리고 있다.
3. 사울이 관심을 가진 것은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며, 백성들 사이에서의 자기의 이권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를 반역하거나 기만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처럼 열심히 사무엘에게 자기와 함께 가서 공적인
승전 기념제를 도와 달라고 매어달렸다(25절).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아 그 겉옷자락이 찢어지도록 까지 성가시게 한 것은(27절), 사무엘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자기를 버릴 때 백성들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버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만 그들 자신들의 이익과 명성을 위해서 훌륭한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에게서 열심히 영향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울이 "내가 범죄 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여 주소서" (30절)라고 한 것은 매우 천하고 야비한 표현이었다. 이것 회개하는 자의 말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정반대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부끄럽게 여겨 주소서. 내게 속한 것이 모두 부끄러운 것뿐이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미워하나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도 얼마나 많이 사울의 위선을 따르고 있는가? 유죄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일 수록 사람들 앞에서의 그들의 명예를 걱정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다. 순결하다는 명예를 잃어버린 자는 다만 회개의 모양을 함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그런 자의 회개는 그에게 오히려 부끄러움을 더 가져다 줄 뿐이다.
Ⅱ. 이러한 천박한 회개의 모양으로 사울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회개를 통해 사울이 얻은 바가 무엇인가?
1. 사무엘은 앞서 말했던(23절) 선포를 되풀이 할 뿐 그 선언이 취소될 수 있는 희망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26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 (잠 28:13). 사무엘은 사울과 함께 돌아가기를 거절하고, 자기 갈 곳으로 "가려고 돌이켰었다" (27절). 왜냐하면 사무엘이 우선 볼 때, 하나님께서 내친 사람을 따라가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울의 탐욕을 만족시켜 준 그 승전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갔다(31절).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다른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 제사가 사울에게 영광을 돌리는 제사가 되지 못하게 또 나가서 아각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실시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32절) 돌아갔을 것이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였지마는
31절, 사무엘이 그 예배를 주관하였다는 말이 없다).
2. 사무엘은 그의 선언의 내용에 알맞는 하나의 상징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상징은 사울의 난폭함이 계기가 되어 나타났다. 사무엘이 그를 떠나가려고 할 때 그는 사무엘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사무엘의 옷을 찢었다(27절). 사울은 그만큼 선지자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사건에 대해 선지자만이 내릴 수 있는 해석을 내렸다. 사무엘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왕국을 그에게서 떼어 내리라" 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이 그것이 사울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란 다윗을 의미하였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어내게 되었는데(삼상 24:4), 이에 대해서 사울이 말하기를 (삼상 24:20),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아노라" 고 하였다. 아마 사울은 자기가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찢어지게 하였던 것을 기억하였을 것이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언은 변개치 못한다는 말을 통해 그 준엄함을 재천명하였다(29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말이 없으시다"
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 란 말이 영어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힘(Strength)" 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스라엘의 영원하신 자 또는 승리하신 자" 라고 읽는다. 아랍어역에서는 "거룩하신 분", 시리아역에서는 "가장 고귀하신 분" 이라고 번역했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이 말을 "이스라엘의 승리의 왕" 이라고 읽었다. "하나님은 그대를 내치시기로 결심하셨는데, 그는 결코 그의 뜻을 변개치 않으시리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그래서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인간들은 변덕이 많아서 쉽사리 그들의 마음을 변개시킨다. 또 연약하여서 그들의 목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다. 그들의 방법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이를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때로 죄인의 회개를 보시고, 그에게 내리려고 하셨던 벌을 돌이키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여기 사울에게서는 회개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도 저를 거들떠보시지 않으셨다.
@장코뱅 <--- 매튜 헨리는 '회개하는 척'을 '불철저한 회개'로 평가하는데요. 회개하는 척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고 위선과 가장에 불과합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 불철저한 회개보다는 위장이나 가장된 회개로서 실질적으로는 회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사무엘상>
=====15:24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운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 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 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다(Keil, Fay, Smith).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 (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 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repentance of the lips)였다"
(Keil & Delitzsch, op. cit. p. 157).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13:14 ; 행 13:22).
=====15:25
지금 내 죄를 사하고 -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돌아가서 -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이다(21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30절>.
=====15:26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단호히 선포한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인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Leon Wood).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 사무엘의 이 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 (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 여기의 '겉옷'(* , 메일)은 몸에 꽉 붙는 옷을 가리킨다(R. Payne Smith).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한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sign)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 , 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15:28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 , 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 행 13:22). 주셨나이다(* , 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15:29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지존자(* , 네차흐) -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 ,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 ,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Keil, Fay).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15:30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 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미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5:31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 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O.V. Gerlach).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C.F. Keil).
--------------------------------------------------
<--- 필자(장코뱅)는 성경 묵상을 작성할 때 주석을 결코 베끼지 않습니다. 다만 머리와 마음에 저장돼 있던 신앙과 지식이 글에 스며들어 나오기는 하는데요. 호크마 주석은 종종 저와 방향이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당연한 결과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진리이고 정상적인 신자라면 대개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작성되기 때문입니다.
@장코뱅 매우 공감해요. 성경 본문 안에서 일상언어의 용법을 따라서 본문 문단 앞뒤 전후를 파악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노베 매우 공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변하고 배신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죄악이 자행됩니다. 좋은 내용의 글에 공감합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중 단순성의 개념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한 본질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씀이 잘 와닿습니다. 단순성이 하나님의 자존성과 불변성에서 유추된 속성이라는 것도 말씀하시니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단순성의 속성이 인간의 죄악과 거짓됨, 변개의 속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군요.
사울 왕과 다윗은 매우 대조적인데요. 사울은 외모가 준수하고 힘이 있어 사람들의 뜻에 따라 왕으로 세워졌고, 하나님의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일부만 순종하는척 하는 얄팍하고 교만한 마음, 위선과 거짓됨, 계명을 변개하는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 같았고, 하나님보다는 백성들의 말을 더 신경쓰고 무서워하였고, 내면적 회개보다는 외형적 제사에 더 비중을 두고 몰두하였던 육체적인 사람, 즉 예수께서 비판하였던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사울에 비해 다윗은 선지자의 질책을 받고 통회하고 자복하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의 진수를 보여주었죠.
오! 추가적인 깊은 분별에도 공감합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수양의 기름과 제사가 아니라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입니다.
사울의 행위는 예배 만능주의, 우상숭배와 다름 없는 죄악된 행위였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라마불교승들이 자행하는 초야권 등도 거룩함을 가장한 더러운 우상숭배이며, 인간의 얄팍한 변명과 거짓됨이 드러나는 일이었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신자들 개개인의 삶과 일부일 것으로 바라지만 한국 교회의 예배 만능주의 같은 문제들에 성찰을 주는 좋은 말씀에 은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네, 공감합니다.
깨달음과 성찰을 하게 하는좋은 묵상을 올려 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요.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