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번째 마운투어(Mountour) 스케치(한라산)

[늙은山나그네]

프롤로오그(prologue)

한라산은 지리산과 더불어 나의 건강 검진센터다.
매년 1월 셋째 주말과 설 전후에 한라산과 지리산에서 체크한다.
전년에 비해 이상이 없으면 한 해는 무사하리라 믿어도 된다.

이 버릇은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전 해 봄에 교통사고로 입원한 99일간이 남긴 후유증을 한라산과
지리산을 통해 치유한 이후 고착된 방식이다.

그 이전에도 두 산을 무수히 올랐으나 당시에는 한(恨)풀이 정도
외엔 별 다른 뜻이 없었다.
목발의 한이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쨋 날

1954년 음력 4월 8일, 석존 탄일에 목발 짚고 유달산에 오르다가
굴러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배로 삼학도에 건너가서 이 유달산을 바라보며 하염 없이 울었다.

6. 25 칼부림, 총질이 멎은 다음 해라 지금처럼 안전한 등산로가
아니었고 삼학도가 뭍(陸地)이 되었을 리 없던 때의 일이다.
이후 목포엔 수차 들렀으나 또럿이 남은 기억은 이것 뿐이다.

이 목포를 경유해 제주에 가게 한 이가 있다.
백두대간 금대봉에서 만난 최동진이다.
만면에 익살끼가 유난한 그에게 인력(引力)이 있음일까.

이 인력에는 목포 ~ 제주간 전천후 여객선의 매력도 가세되었다.
재작년에 경험했던 13시간 반의 긴 밤 항해(인천 ~ 제주)에 비해
낮이 포함된 5시간에 불과한데다 저렴성까지 갖췄으니까.

기대했던 바다의 낙조에는 실망했으나 예전의 유배자들이 관복을
벗는 기준점이 되었다는 관탈섬을 어둠속에서나마 더듬고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참담한 자신을 비로소 깨닫게 했던 섬이다.

외우 하산(霞山)도 자기의 시 <관탈섬에 가서>에서 그리 말했다.
관을 벗고 / 끈적끈적한 탐욕을 벗고 /  무거운 죄업을 씻어내고 /
자랑도 미련도 훌훌 털어 버리고 / 이름마저 버리고....

이러고 있는 내게 다가온 고마운 분의 성함은 제주인 고병호.
같이 하선한 그는 대중교통편이 없다면서 내 애로를 풀어주었다.
마중나온 자녀의 차를 멀리 돌아가도록 해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북상하는 1번국도와 남해를 따라

부산까지 동진하는 2번국도의 기점이 여기란다(목포시 유달동) 

날로 비대해 가는 여객선터미널 따라 들어선 번잡스런 건물들로

가려진 유달산

원래는 이랬는데(출항하여 선상에서 보는 뒷모습)

카훼리 레인보우 선상

둘쨋 날

<일출불가마>와 <광양해장국>, 그리고 성판악 넘어가는 첫 버스,
작년의 재판이었으며 아마도 한라산 등반과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매년 되풀이 되지 않을까.

10시 정각에 백록담 정상에 섬으로서 기록이 갱신되었다.
근래에 가장 자유로웠고 가장 양호한 오름이었다.
일행이 없는데다 체증 또한 아직 없는 시간대여서 였을 것이다.

정상마저도 바람 없고 영상인 최적의 날씨였다.
그러나 한라산 등산로를 계단화한 이래 처음으로 눈 없는 계단을
밟고 오르내리는 유감스런 기록도 갖게 되었다.

늘 그러하듯 관음사쪽은 그래도 겨울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작년의 폭우로 피해 입은 등산로 대부분이 복구되었으나 사라진
용진각대피소는 어찌 하겠다는 건지 아직 빈 터 그대로다.

너른 주차장을 대형 버스로 꽉 메운 것으로 보아 이 시각(13:00)
쯤의 반대편(진달래대피소 쪽)은 또 북새통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날에 당연히 그러겠지.

뒷풀이 약속 시간(17:00)까지는 너무 많이 여유로웠다.
착시현상으로 이해되는 신비의 도로까지 3km쯤을 다시 걸었다.
봄기운을 느끼게 하는 남녘 들바람 맛이 감미로웠다.

용두암 바닷가의 우리 넷은 이심전심인가 동시적이었다.
으례 하는 버릇대로 소주를 가득 채운 맥주잔들에 구멍이 났나.
꼭 1년 만의 재회인 것 처럼 다시 1년 후를 기약했다.

한라산 / 1)해발 1.500m 진달래대피소  2)~4)1.950m 백록담

             5)작년의 폭우로 사라진 용진가대피소의 빈 터

             6)삼각봉

일명 도깨비도로라는 신비의 도로

 셋쨋 날

09시 30분 김해공항 안착은 전 일정이 순조로움을 의미했다.
열차를 제외한 교통편(선박, 항공편은 물론 고속버스까지도)은
기상에 민감하기 때문인데 남은 것은 서울행 열차이용 뿐이니까.

간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에도 계속되었으나 내 여정을
마무리하는데는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한라산의 눈 갈증을 풀어
줄 듯하니 다행이라 하겠다.

김해공항에서는 4년만의 재회가 쌍으로 이루어졌다.
낙남정맥의 해후 순서대로 신현양에 이어 강석민까지.(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백두대간 낙남정맥 편에서 하기로 한다)

우리의 반가움은 공항 주변의 한 식당에서 만찬으로 이어졌으며
좀 늦게 합석한 신현양의 부인이 운전하는 차로 그들은 부산 동래
온천장까지 나를 배웅했다.

아주 불편한 몸인데도 손수 만든 귀한 약재를 들고 온 신현양과
장기간의 해저생활을 목전에 두고도 천금에 다름 아닌 시간을
할애한 강석민, 두 젊은 이의 성심에 감동할 뿐이다.

2002년 12월 24일에 끝난 낙동정맥 마감일의 분위기는 해를 6번
바꾸며 이어지고 있다.
S.J.G.영어 이니시얼이 똑 같은 손자근, 송장길과의 인연이.

오후 2시에 시작한 생맥주 판이 하마터면 밤 11시 열차를 놓칠
뻔 하도록 길어졌음에도 아쉬워 했으니 늙은 이들의 저력이라고
해야 하나.

신현양(우)과 늙은山나그네 / 낙남정맥 용추고개 아래 우곡사
 

강석민 / 낙남정맥 새터재

늙은山나그네(상,하) / 낙남정맥 새터재
 

에필로오그(epilogue)

다시 시작된 5시간여의 나홀로 여행을 마쳤다.
고속버스로 시작하여 여객선과 항공기, 그리고 심야 열차에 의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정까지.

26번째의 한라산 등반은 이처럼 지금껏 없었던, 새로이 디자인한
여정이었으나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2008년도 1차 검진이 거뜬히 끝났음을 의미한다.

곧 있을 23번째의 지리산 과정 또한 알차고 다양하게 전개해도
무사히 통과할 것이다.
스티븐 코비가 말하는 시너지(synergy)효과를 믿으니까.

[별자리]

Congratulations!

[바부산]

점점 읽는 맛이 깊어지네요... 재밌고 흐뭇합니다. 건강하시고요...

[늙은山나그네]

바부산님께서 잘 봐주시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지리산 다녀와서 뵙기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