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흔히들 말하는 이름 없는 꽃이란 사실은 이름 모를 꽃일 뿐 저마다의 향기와 생김새에 어울리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름을 통해 배운 사물들은 부를 때마다 그에 알맞은 이미지와 함께 연상된다. 풀잎하고 소리 내어 보면 아직은 피지 못한 동그랗게 말린 순한 잎처럼 입술 끝이 닫히면서 입안 가득 여린 바람이 고인다.
자연만 그런 게 아니다. 간결하면서도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는 명함 한 장 받을 때면 따뜻한 속마음이 건네 오는 듯하고 어렵게 장만한 집의 분양계약서에서 날인된 붉은 印에는 그간의 고생을 잊게 하는 마법의 힘이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이름은 있고 소중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 내 이름은 南貞任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당신이 사모했던 배우의 이름을 딸에게 붙인 듯하다. 얼굴도 모르는 남 정임이란 배우 얘기를 하며 이모들은 내게 〈범띠 가시내〉란 노래를 부르라고 손뼉을 치곤 했다. 지금도 집안의 어른들은 정임아! 하고 부르신다. 어린 시절 부름의 말끝에는 어머니와 내가 동시에 예! 하고 달려가곤 했다. 정임아! 하는 부름의 말을 들으면 순박하고 동글납작한 패랭이꽃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후 호적에는 태희(泰喜)란 이름이 실렸지만, 사람들은 의례 泰嬉려니 생각한다. 공무원의 실수로 끝 이름이 기쁠 희로 바뀌기는 했지만 난 계집 희, 보다는 기쁠 희가 마음에 든다. 기쁨보다는 슬픔을 먼저 배운 내게 운명처럼 주어진 선물로 느껴서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글로 적을 때 나의 성격을 닮아 구르지 않고 쫙쫙 뻗어지는 글씨의 생김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또한, 마흔 해를 한참 넘게 사용했음에도 금방 바른 시멘트 냄새처럼 도회적인가 하는 혼자만의 도취 된 감정도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신세대 탤런트 김태희 씨의 이름이 자꾸 불리는 덕분이 아닌가 한다.
딸아이의 이름에도 나름 유래가 있다. 결혼한 무렵 순수 한글로 아이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도 아이를 가졌을 때 태명처럼 이름을 지었다. 남편의 성과 어울리고 남녀 구별 없이 사용가능한 이름을 짓다가 보니 정겨운, 정다운, 정수리 같은 이름이 떠올랐다. 정다운은 당시 스님이 사용하고 있어서 먼저 제외하고 나니 정겨운과 정수라가 남았다. 흥겨운, 기쁨에 겨운 할 때의 겹다란 형용사도 마음에 들었지만 맨 꼭대기란 의미의 정수리란 이름도 마음에 들어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국, 남편은 수리란 이름은 놀림의 대상이 된다며 정겨운이란 이름으로 하자고 했다. 그렇게 딸아이는 아버지가 내게 기대했던 마음 이상으로 많은 재롱과 어여쁨을 방울꽃처럼 달고 왔다.
요즘은 일의 특성상 날인된 이름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럴 때면 세대별로 명의에 따른 세태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젊은 신세대부부의 경우는 집을 공동명의나 아내의 명의로 하는 경우가 많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는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여도 세금의 혜택이나 배우자 모르게 보증을 해주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공동명의를 당당하게 요구한다.
오륙십 대 이상의 중년 부부들은 대부분 남편의 명의로 집을 구입한다. 그들은 아직은 가부장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또한, 둘이서 같이 움직여야 하는 번거로움을 마뜩잖아, 한다. 간혹 사업을 하는 사람의 경우 아내의 명의로 해
두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야무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노년에 집을 장만하는 경우를 옆에서 지켜볼 때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삼사십 년 이상의 결혼생활 동안 고생한 아내를 위해 남편들은 기꺼이 명의를 양보한다. 언제 불러보았을지 모를 까마득한 처녀 시절의 아내의 이름, 처음으로 문서로 날인된 이름에는 함께 저문 황혼의 꽃이 피어난다. 자신이 혹 먼저 삶을 마감하더라도 집문서를 방패 삼아 세상에 자식에 대접받으며 살라는 무언의 배려라 여겨진다. 특별한 인감도장이 아닌 햇내 나는 막도장이 찍힌 문서라도 두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이 족적처럼 찍힌 이름을 나직하게 읽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지금은 자기 알림이 대세인 시대다. 개인의 이름뿐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브랜드 마케팅을 한다. 스스로 이름값을 높이는 일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조기 축구회 회장 직함부터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의 직위까지 총망라한 명함을 받을 때는 덕지덕지 전단지를 붙여놓은 전봇대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 종류의 명함에는 이름보다는 처세와 욕
심만이 눈에 보인다. 알맹이 없이 겉치레만 요란한 세상 풍속이 명함 속에서조차 살아 기웃기웃한다.
내게도 요즘 고민이 생겼다. 글의 서두를 앞질러 나오는 허릅숭이가 원인이다. 길지도 않은 딱 석자 이름이란 놈이 나의 운신의 폭을 좁힌다. 예전처럼 함부로 말할 수도 적을 수도 없다. 엉덩이를 실룩이며 노래 한가락의 재롱으로 피해가기는 너무 잔인한 나이다. 김태희처럼 CD만한 얼굴에 모래시계 몸매로 타인을 사로잡기는 애초에 글렀다. 까닭 없이 요리조리 도망 다니고 있다. ‘저 사람의 글은 뻔해’ 하며 지나쳐 버릴까, 겁이 난다. ‘영 아니네’라는 뒷말을 들을까 숨어 버리고 싶다. 전에는 아무런 겁 없이 해대던 말과 글이 맷돌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그래서 감히 문단에 제안하고 싶다. 글의 말미 한참 아래에 아주 깨알처럼 세 글자로 이름을 적으면 아니 될까요? 그리하면 서너 줄은 우선 읽어주지 않을까 떼를 써 봅니다. 아니면 정말 저 남정임으로 돌아갈래요.
첫댓글
데이빗님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