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5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 律法を成就されたイエス様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를 앞 두 구절과 뒤 한 구절로 나누어서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앞 구절을 살펴봅니다.
로마서 3장 29절~30절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29節~30節
“29.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の神で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うです。異邦人の神でもあります。
30.神が唯一なら、そうです。神は、割礼のある者を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割礼のない者も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이 두 구절은 그 문장구성으로 보았을 때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29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말씀인데, 30절에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29절을 봅니다.
29절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하나님은 한국사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다르고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의 하나님은 달라요?
이는 마치 예수님은 똑같은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한국사람에게 있어서의 예수님 다르고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에게 있어서의 예수님이
다르다고 하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나요? 아니요,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외국인이나,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즉, 29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불문하고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겠습니다. 30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할례자 즉 유대인과 무할례자 즉 이방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기록하기를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기록하게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29절에서는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30절에서는 굳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표기를 했을까요.
여기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구분한 이유는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율법적으로 다루고자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면 이는 선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쉽게 말해서 유대인 부모로부터 태어나면 유대인이요, 이방인
부모로부터 태어나면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이는 유전자적인 분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유전자적인 분류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냐 하면 바로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적으로 유대인이라고 하는 증거가 바로 할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창세기 17장 12절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あなたがたの中の男子はみな、代々にわたり、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家で生まれたしもべも、異国人から金で買い取られた、あなたの子孫ではない者もそうである。
따라서 남자의 경우에는 할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 즉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표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30절에서 굳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구분을 한 것은, 이는 다른 말로 옮긴다면 단순한 유대인과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율법적인 유대인과 율법적인 이방인으로 구분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 번 정리를 한다면, 29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은 유전자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면에 30절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라고 하는 구분은 율법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30절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말 대신 <율법적인 유대인>과 <율법적인 이방인>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이는 로마서 3장 30절을 바꾸어 본 것입니다.
“30.율법적인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율법적인 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神が唯一なら、そうです。神は、律法的なユダヤ人を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律法的な異邦人も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자, 우선,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지금까지 많이 나왔지요.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이 문장을 보면 우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로 본다면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는 놀라운 두 가지 평등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평등은 인종에 있어서의
평등입니다. 율법적인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은 오로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율법적인 유대인에게만 임한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율법적인 유대인 만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평등은 바로 그 평가기준에 있어서의 평등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적인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슨 가산점을 준다거나,
아니면 율법적인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슨 감점이 된다는 말씀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평가기준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평가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적인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그 평가기준은 바로 <믿음>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자면, 29절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이신데, 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평가기준은 모두 공평하게 <믿음>이다, 이렇게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을 들었을 때,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그렇죠. 유전자적으로나 율법적인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부모는 유대인도 아니요, 나는 할례도 안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삐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겠습니까. 그렇죠. 유전자적이자 율법적인 유대인이겠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는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닙니까. 다른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구원도 그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유전자적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적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고, 그 판단기준은 <믿음>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말을 들으면 유전자적으로 보나 율법적으로 보나 유대인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바울을 뭐라고 비판하겠습니까.
“그런 주장은 율법적이지 않다. 반율법적이다.”
또는 더 심한 말로 한다면,
“그런 주장은 이단이다”
뭐 충분히 이렇게,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뭐라고 반박합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중에서 31절 말씀입니다.
31절 말씀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1.それでは、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律法を無効にすることにな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律法を確立することになります。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율법을 파기하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주장은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반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경은 어느 정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이미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天地が消え去るまで、律法の一点一画も決して消え去ることはありません。すべてが実現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같은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昔の人々に対して、『殺してはならない。人を殺す者は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兄弟に対して怒る者は、だれでもさばきを受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兄弟に『ばか者』と言う者は最高法院でさばかれます。『愚か者』と言う者は火の燃えるゲヘナに投げ込まれます。
마태복음 5장 27절~28절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姦淫し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情欲を抱いて女を見る者はだれでも、心の中ですでに姦淫を犯したのです。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율법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더욱 범위를 확대해서 해석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율법도 그렇습니다.
당시까지 사람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면 안된다고 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복음 12장 14절,
마가복음 3장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의논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예수님이 어기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율법을 어기셨다는 것인가요?
아니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왜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명확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ので、思い違いをしています。
물론 이 말씀은 당시 사두개인(サドカイ派) 이 한 질문에 대한 지적이십니다만, 이는 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들은 믿음이 좋고 율법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손가락질하고 비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즉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오해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질 대로 말씀하시고 행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 오해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결국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드는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께 두 번째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즉,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히 이루려고 오셨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누구든지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해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는 100%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을 형벌을 우리 대신
모두 다 받아 주셨어요.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모두 다 받아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벌을 받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바로 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법에 규정이 없으면 그 사람을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어긴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러셨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야, 하나님은 율법을 어기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제 내가 왔으니까 율법은 없는 걸로 치면
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거 괜히 율법이다 뭐다 해서 골치 아프게 굴지 마시고, 율법 같은 것은 다 그냥 없던 걸로 칩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내가 부탁하는 것이니까, 그냥 이번 한번만 눈 딱 감고, 특별사면. 어떻습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려고 하셨다면 이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 있어서는 가장 편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잖아요? 율법이 없었다면 죄도 없는 것이 되겠지만,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것이 있고, 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어요.
이 시점에서 율법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죄에 대한 규정도 없어지기 때문에 죄를 처벌할 근거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엇을 하지 않아도 돼요?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잖아요? 용서 받아야 할 우리의 죄가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도 없어지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정말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나 우리나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도 유대인들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에 대한 차별은 미덕이요 신앙의 기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금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약 말라기 1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1장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日の昇るところから日の沈むところまで、わたしの名は国々の間で偉大であり、すべての場所で、わたしの名のためにきよいささげ物が献げられ、香がたかれる。まことに、国々の間で偉大なのは、わたしの名。──万軍の主は言われる──
오히려 구약에 보면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땅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유전자적인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고 율법적인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오로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받기 위해서는 오로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교수님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천사가 아니라 마귀 사탄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모두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길 뿐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천국백성으로서,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이 귀한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우리 이웃과 세계 만방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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