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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미륵반가상이 선덕여왕 닮은 사연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0]
1. 살아 숨쉬는 반가사유상
모든 예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조형예술, 즉 미술 분야에 있어서 생동감(生動感)은 그것이 있거나
없는 데 따라 그 성공 여부가 결정지어진다.
그래서 예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할 때 기준이 되는 6가지 법칙을 거론하면서 ‘기운(氣韻)이 살아 움직
여야 한다(氣韻生動)’는 것을 첫째 항목으로 꼽아왔다.
이처럼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림에서도 생동감을 중요시하는데, 입체성을 두루 갖춘 조각에서는 새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조각 중에서도 예배자의 공양을 받고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담당해야 할 신상(神像)조각은
이런 가치평가 기준이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에 수많은 인격(人格) 신상을 만들어낸 그리스와 로마 및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과
우리나라 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체 조각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예배 공양자들의 순수한 신앙심이 충만할 때 신성과 인간을 이상적으로 조합한, 생동감 넘치는
인격 신상이 탄생한다.
사람들은 이를 매개체로 삼아 현실의 고통과 불만을 승화시켜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동감 넘치는 신상조각이 만들어지려면 순수한 신앙심이 전 사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여 떨끝만큼의
의심도 내지 않는 상황이 조성돼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열정의 시기는 역사 속에서 그리 많지도 않고 또 있다 해도 길 수가 없다.
생동감 넘치는 인체 조각이 인류 미술사를 통틀어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문화 유산에서도 그 많지 않은 유례 중에 첫 손가락을 꼽아야 할 대표적인 신상 조각이 있으니,
바로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다.
<금동삼산관(三山冠)사유상>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에는 원(圓)을 4등분한 크기의 호(弧)
셋을 정면과 양쪽 측면에 비스듬히 세워 붙여서 만든, 산(山)자 모양의 단순한 관이 씌워져 있다.
그런데 이 관은 깎은 머리처럼 표현된 머리칼과 그대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머리칼 부위가 그대로 관의
아랫부분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머리칼과 화관(花冠) 모두가 사실성을 상실하여 신비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관 표현은 본래 미국 워싱턴 후리어 미술관 소장의 <공현석굴미륵보살입상>의 연화관(蓮花冠)이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소장의 <용문석굴보살두>의 연화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꽃잎 석 장을
각각 앞면과 좌우 옆면에 세우던 것을 양식화한 것이다.
연꽃잎 모양의 관틀을 고정시킬 관테가 있어야 화관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공현석굴미륵
보살입상>과 <용문석굴보살두>에서는 모두 화관의 테를 분명히 표현함으로써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서는 관테 표현을 생략한 채 바로 머리칼과 이어 놓았다.
그래서 얼핏 보면 깎은 머리에 산 자 모양의 승관(僧冠)을 눌러쓴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대담한 생략은 상반신으로 이어진다.
화관의 끈 치레를 완전히 배제하고 나서 양쪽 어깨에 걸쳤던 천의(天衣, 被巾이라고도 함)마저 벗겨냈다.
상반신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대담하게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목걸이 하나만 달랑 둘러놓았다. 아무 장식 없는 두 줄의 둥근 고리 모양이다.
속이 빈 금속제 고리인 듯 가벼운 느낌을 자아내는데, 늘어지거나 휘감기지 않고 목 둘레를 딱딱하게
외둘러 놓으니 벌거벗은 상체와 신묘한 대조를 보이면서 파격적인 장식효과가 드러난다.
뚜렷한 두 줄의 목걸이 표현과는 대조적으로 위 팔찌 한 쌍은 보일 듯 말 듯 외줄고리로 희미하게 표현하여
장식성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것이 나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원래 인도에서 비롯된 미륵보살의 목걸이와 팔찌는 복잡한 구조의 화려한 구슬꿰미였다.
이것이 중국을 거치면서 차츰 단순해져서 심엽형(心葉形, 하트 모양)의 넓은 판으로 바뀌었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서 보인 것처럼 방변원심형(方邊圓心形) 장식의 세련된
표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단순해질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생략을
보여주는데, 양식화의 극치 현상이라 하겠다.
목걸이의 강렬하고 상징적인 장식성을 의식한 듯, 목에 3줄의 음각선을 그은 삼도(三道, 불보살의 목에 나
있는 3줄의 주름선)는 그 양쪽 끝이 적당한 곳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소멸돼 사실성을 드러낸다.
사실성을 드러내는 것은 삼도 뿐만이 아니다.
한창 물오른 듯 팽팽한 얼굴에서도 마치 부끄러워 홍조(紅潮)가 피어 오르는 순간처럼 온기가 배어나며,
입은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움직이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팽팽하게 피어난 큰 얼굴과 굵고 건장한 목에 비해 상체는 가냘프다. 이는 미처 육신이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나 소녀의 몸매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깨에서 팔뚝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가슴과 허리를 잇는 유연한 곡선이 너무나
천연덕스러워 팽팽한 살갗 밑으로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물며 반가한 오른쪽 무릎 위에 오른쪽 팔꿈치를 날렵하게 굽혀 대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편한 대로
굽혀서 턱을 살짝 바치고 있는데 이르러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반가한 오른쪽 발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데, 무슨 내밀한 열락(悅樂)이 있는지 엄지발가락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고 발바닥이 한껏
긴장해 있다.
그 발목 근처에 포개 놓은 왼손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같은 감흥의 표출 현상이다.
2. 신상과 신앙인의 내밀한 교감
손과 발에서 보인 이런 사실적인 순간동작의 표출은 선정(煽情)에 가까운 관능미(官能美)의 구현이라 할
수 있으니 곧 거기서 강렬한 생동감을 감지하게 된다.
이런 발랄한 생동감은 신상 조각에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신앙인들과 신상이 직접 교감할 수 있는
활력소로 작용한다.
그 결과 신상이 민심을 결집시키는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도 이런 맥락에서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지금은 사라져 없어졌지만 머리 뒤에 붙어 있었을 광배(光背)는 두원광(頭圓光) 형태로 매우 단순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기본 형태는 후리어 미술관 소장 <미륵보살반가상>이나 <하청(河淸)3년명 미륵보살반가상>의 두원광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웃통은 벌거벗었지만 배꼽 아래로는 치마를 입고 있다. 넓은 허리띠가 치마 말기처럼 치마 뒤폭을 가지
런히 묶고 나왔으나, 양쪽 치마폭이 양 허리 뒤쪽에서 위로 비져나와 허리띠를 덮으며 앞으로 돌아나오는
옷차림으로 겉멋을 자랑하고 있다.
치마 뒷자락은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서처럼 세로 주름을 겹겹이 접어 내리긴 했으나 주름
간격의 변화는 훨씬 다양해졌다. 중앙을 크게 접고 좌우 주름도 일정치 않게 처리하면서 주름 끝이
치마폭의 굴곡에 따라 부드럽게 변화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장구통 모양의 등의자도 훨씬 세련되게 다듬었다. 상판 깔개는 엉덩이 생김새에 따라 가운데가 높고
좌우가 낮게 말안장처럼 굴곡지게 만들었다.
의자 덮개 천은 바닥까지 덮어내렸는데, 천자락 끝이 물결치듯 깔리면서 대좌 하단을 마무리짓게 하였다.
양쪽 옆구리 허리띠에서 걸려 내려온 장식띠는 극단적인 생략 기법이다.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서는 장식띠가 자리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복잡한 표현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다만 엽전 모양 고리에서 앞뒤로 들어가 서로 꼬고 나온 두 가닥의 장식띠가 모두
엉덩이 아래 자리 속으로 들어가 깔리고 만 형태다.
앞면의 치마는 반가한 오른쪽 무릎을 따라 오른편 치맛자락이 들어올려진 상태다.
이는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서처럼 치맛자락이 무릎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면서 물결
층과 날개깃층으로 이층의 무릎 받침 층을 만드는 사실성을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을 뛰어넘어 무릎 아래에서 옷자락이 딸려오다 바람결에 나부낀 듯 비스듬한 경사면을 만들어 놓고
그 아래로 딸려 올라온 치마의 끝 부분을 흘러내려 마무리지은 형태다.
얼핏보면 무리없는 사실적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실상 이런 옷주름은 무릎 밑에 방석을 받쳐주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가상적 표현이다.
그러니 양식화 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에서는 그런 양식화 현상이 다른 부위의 생동감 넘치는 사실성과 신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사실로 착각하게 하는 이상한 친화력이 발휘되고 있다.
왼쪽 무릎을 덮고 오른쪽으로 진행해간 치맛자락은 가장 긴 끝이 앞면 중앙부 의자 밑부분까지 내려와
연꽃잎 모양의 입체조각으로 물결치듯 둥글게 마무리지었다.
그 위로는 엉덩이 밑에서 빠져 나온 치마 뒷자락이 덮어 내리면서 자유분방한 옷자락을 만들어 놓고 있다.
옷자락이 복잡한 듯 보이나, 세가닥의 옷주름이 수키와 골처럼 접히고 그 사이로 두 가닥이 암키와 골처럼
접히는 단순한 구조일 뿐이다.
다만 옷주름에 중심선을 세워 팽만감을 불어넣고 바람결에 나부끼듯 옷자락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지럽게 느껴질 뿐이다.
이것도 양식화의 절정에 이르러 극도로 단순화한 상체의 함축적 생략에 대응하여 조화를 이루려는,
계산된 복잡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왼쪽 다리는 연화족대를 딛고 있는데 정강이를 따라 무릎 밑으로 나 있는 옷주름은 다만 좌우에서 두세
줄이 나오다 사라져서 사실적인 입체감을 더해준다.
왼발이 딛고 있는 연화족대 앞부분은 나중에 보수한 것이라 한다.
3. 진골은 진흥왕의 혈손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미륵반가상 양식이 인도와 중국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양식 진전을 이루어온 결과 절정에 이른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완벽한 미륵반가상이 만들어지려면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사회 여건이 성숙돼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제9회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신라 선덕여왕이 최초의 여왕이 된 것은 그가 하생한 미륵보살인 미륵선화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렇다면 이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바로 선덕여왕이 미륵선화로 지목되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선덕여왕(580년 경∼647년)은 백정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평왕과 마야부인으로 일컬어
지던 김씨 왕비 사이에 맏딸로 태어난다.
따라서 그는 석가모니불과 같은 인물이 되어야만 하였다.
일찍이 그의 증조부인 진흥왕(534∼576년)과 증조모인 진흥왕비 박씨 사도(思道)부인(534년 경∼614년)은
모두 만년에 출가하여 각각 흥륜사와 영흥사에서 승려 생활을 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기에 그들 자신이
석가족과 같은 특수 혈통을 타고난 종족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다른 왕족들과 구별짓기 위해 그들의 혈통을 타고난 후손들을 진골(眞骨)이라 부르게 되었던 듯하다.
진흥왕 이후 그의 혈통을 타고난 왕들의 왕호(王號)를 보면 진지왕(眞智王, 554년 경∼579년), 진평왕
(眞平王, 565년 경∼632년)이라 하여 계속 진(眞)자를 붙이고 있는 데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런 왕호가 돌아간 뒤에 올린 시호(諡號)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측 정사(正史)인 ‘북제서(北齊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한결같이
신라왕 김진흥이니 신라왕 김진평이니 하여 이름으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위시에 부르던 왕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고구려나 백제의 왕을 지칭할 때는 고구려왕 고아무개, 백제왕 여(餘)아무개라 하여 그 이름을 지칭
하고 있는데 유독 신라왕에게만 시호를 썼을 리 없다.
즉 신라 왕호는 사후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생전에 부르던 왕의 칭호였으리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759년) 선생도 일찍이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진흥왕 순수비에
진흥대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시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생긴 것이고 초기에는 모두 고유한 말로써 일컬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거서간
(居西干)이라 일컬은 것이 하나, 차차웅(次次雄)이라 한 것이 하나, 이사금(尼師今)이라 한 것이 열여섯,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거하면 ‘지증(智證) 마립간 15년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고
하므로 신라의 시호를 쓰는 법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듯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왕이 돌아간 후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쓰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
에서도 역시 35년조에 ‘왕이 돌아가시매, 시호를 진흥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이거늘 그 제목에 엄연히 진흥대왕이라 일컫고 있으며,
또한 북한산비에도 역시 진흥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
이로 보면 법흥(法興)이니 진흥(眞興)이니 하는 것은 장사 지낸 뒤에 올린 시호가 아니라 곧 살아 있을 때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북제서’에서는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에 조서를 내려서 신라 국왕 김진흥으로
사지절동이교위(使持節東夷校尉)로 삼았다’고 하였고, ‘수서’에서는 ‘개황(開皇) 14년에 신라왕 김진평
(金眞平)이 사신을 보내 축하하였다’고 하였으며, ‘당서’에서는 ‘정관(貞觀) 6년에 진평왕이 돌아가자
그 딸 선덕(善德)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에 의거하여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것들은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이후에 비로소 시법(諡法)이 있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당서’의 기록에
김무열(金武烈)이라 부르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하였다.
이로써 가히 알 만한 일이다.
그러니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한 것은 역시 살아 있을 때의 칭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특수 혈통 진골과 미륵선화 사상
그런데 진흥왕은 신라의 국토를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동북쪽으로 함경남도 이원 마운령과 함흥 황초령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서울 북한산에 이르며, 서남쪽으로는 경남 창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였다.
신라 건국 이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적을 바탕으로 절대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 자손들을 진골이라 부르며 그들만이
왕위에 나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에 대해 감히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신라는 시조 이래로 화백(和白)제도에 의해 귀족들이 모여 국왕을 선출해왔는데 진흥왕은 이
제도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석가족과 같이 특수 혈통을 타고난 진골(眞骨)이라는 사실을 표방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왕호를 진흥(眞興), 즉 진골을 일으킨 임금으로 지었던 것이다.
이 진골의 출현을 합리화하고 그 지지기반을 마련하려는 작업이 미륵선화의 선택과 용화낭도(龍華郎徒)의
양성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576) 조에서 그 해 봄에 미륵선화 즉 원화(原花)를 선발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군주 진흥왕이 돌아가자 보수적인 구 왕족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던 듯하다.
진지왕(眞智王, 554∼579년)이 겨우 재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행실이 음란하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 시해당하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당시에 진흥왕비인 사도부인 박씨(534∼614년)가 비구니로 아직 영흥사에 건재해 있었으므로 보
수세력의 저항은 곧 한계에 부딪혀, 동륜(銅輪, 550년 경∼572년)태자의 장자인 왕태손(王太孫) 백정반
(白淨飯, 565년 경∼632년)이 왕위에 나가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는 듯하다.
이렇게 진골 귀족이 위기에 몰리게 되자 진흥왕비나 그 손자인 진평왕은 진골의 신족(神族) 관념을 강화
하기 위해 진골 중에서 미륵선화가 출현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침 진평왕에게서 선덕여왕(580년 경∼647년)과 김춘추(604∼661년)의 모친인 천명부인(天明夫人,
582년 경∼?), 백제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善花公主, 584년 경∼?) 등 세 공주가 내리 태어나니, 이들
중에서 미륵선화를 간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막내인 선화공주가 미륵선화로 간택되었던 듯하나 백제 왕손 마동에게 유인돼 무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은
9회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자 진평왕과 진흥왕비 등 진골 집단에서는 서둘러 첫째 공주인 덕만(德曼)을 미륵선화로 결정하여
국선(國仙), 즉 화랑들의 구심점이 되게 하여 미륵보살의 출현을 기정 사실화해 나가는 듯하다.
무왕의 즉위가 진평왕 22년(600) 경신(庚申)이므로 이 해를 전후한 시기에 이런 일이 결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선덕여왕이 20세 내외가 되었을 시기다.
5. 선덕여왕 모습 담은 미륵보살반가상
백제 왕손 마동에게 미륵선화인 선화공주를 탈취당한 신라인들의 실망과 분노는 아마 극에 달했을 것이다.
자신의 나라 왕실에 하강한 미륵보살을 백제 왕손의 계략에 말려 자신들의 손으로 넘겨주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마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소문만 듣고 침소봉대하여 귀양보내자고 앞장서서 주장하던 사람들은
바로 진지왕을 내몰았던 반진골 보수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 백제 왕손이 신라의 미륵선화를 유인하여 백제 왕비로 삼음으로써 신라에 하강한 미륵을
백제에 빼앗기는 엄청난 ‘재앙’을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보수세력은 민심을 잃어 설 자리를 놓치고 만다. 진골세력이 보수세력을 제압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 사건을 처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신라사회에서는 하루 빨리 미륵선화의 공식 출현을 간절하게 소망하였을 것이다.
그런 민심을 파악한 진평왕은 맏딸인 덕만 공주를 미륵선화로 결정 공포하면서, 하강한 미륵보살의 모습을
반가사유상으로 조성하여 민심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용모는 새로 미륵선화가 되어 장차 대통을 이어갈 덕만공주의 모습이 범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선덕여왕의 20세 전후 모습이라 추정하는 것이다.
국력과 민심을 결집하여 혼연일체된 순수한 신앙심이 없고서는 이런 신상 조각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사실 이런 국민적 결집력은 국가간에 격앙된 적대감이 부추기는 경우가 허다
하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완벽한 신상을 조성해낸다는 것이 단지 사회적 열망이나 국왕의 의욕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루어낼 수 있는 문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문화가 낙후했던 후발국가
였다. 선덕여왕 시기에도 아직 문화적 성숙도가 미흡한 상태였을 터이니, 최고 수준의 미륵반가상을 조성
해낼 역량이 부족했으리라는 추측이 제기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따른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대거 유입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영토의 편입은 생활 문화 전반의 편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라의 한강 유역 장악은 백제의 옛 수도권 문화 뿐 아니라 한반도 심장부 문화의 흡수를 의미하는
것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진흥왕 이후 신라 수도권 문화의 급성장은 마치 미륵신앙이 백제를 앞지를 만큼 급신장한 것만큼이나
초고속으로 진행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6. 김유신과 미륵반가상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그 첫째가 경주 서남쪽 월성군 건천면 송선리 단석산(斷石山)에 있는 국보 제199호 <신선사 마애불상군
(神仙寺磨崖佛像群)>이다.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이 15세(609년) 나이에 용화랑(龍華郞)이 돼 수련하였다는 곳에 조성돼 있는
마애불상군이다.
이 불상군 중에는 미륵반가상(높이 110cm)이 있다.
바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 가지고 있는 양식적 기본
틀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체는 벌거벗었는데 천의 한 가닥이 둥근 목걸이처럼 가슴 근처에 걸려 있다.
배꼽 아래로 둘러 입은 치마는 반가한 오른쪽 무릎을 따라 오른쪽 폭이 들려 올라가서 무릎 밑에 깔렸다가
다시 나오며 무릎 받침 옷주름 층을 만들고 있다.
이는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무릎 받침 옷주름 층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다.
족대를 밟고 내리 디딘 왼발 아래에는 넓은 연꽃 좌대가 새겨져 있고 삼산관을 쓴 머리 둘레에는 두원광이
단순한 동그라미로 새겨져 있다.
또 북쪽 바위 절벽 맨 위쪽 왼편, 즉 동쪽에 반가좌로 앉아 있는 이 미륵보살을 향해 2불 1보살이 서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각기 왼손을 들어 미륵보살을 가리키며 무엇을 인정하거나 누구를 인도해가는 듯한 태도다.
맨 오른쪽 불입상 높이가 105cm이고, 그 다음 보살입상 높이가 102cm이며, 그 다음 불입상 높이가
116cm인데, 모두 낮은 돋을 새김으로 파서 만들었다.
9회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마 ‘법화경’ 권1 서품에서 말한 대로 연등불은 석가모니불을 수기(授記;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하고, 석가모니불은 미륵을 수기하며 문수보살은 이 사실을 인증하는 내용을
표현함으로써 미륵의 하생을 기정 사실화하는 장면인 듯하다.
따라서 미륵반가상 바로 오른쪽에 서 있는 가장 큰 불입상은 석가모니불로 보아야 하고, 그 다음은
문수보살, 또 그 다음은 연등불로 보아야 마땅하겠다.
이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이 수련하던 시기를
전후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화랑이 출현하는 진흥왕 37년(576)부터 김유신이 이곳에서
수련하던 시기인 진평왕 31년(609)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해야 한다.
만약 김유신 수련 시절에 조성된 것이라면 여기에 조성된 미륵반가상 역시 미륵선화인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을 상징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 김유신이 용화랑이었다면 덕만공주를 화주(花主)로 삼고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또 하나의 예는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김유신묘 재실인 금산재(金山齋)에 전래해 오다 1930년 경주박물관
으로 옮겨놓은, 현존 높이 125cm의 <경주송화산(松花山) 석조미륵보살반가상>이다.
머리와 두 팔이 잘려나갔으나 반가자세를 한 몸통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상반신이 나신이고 쌍가락지 형태의 둥근 목걸이를 하고 있어 <국보83호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동일
양식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머리칼이 어깨를 덮은 흔적이 있고, 장식띠가 옆구리 허리띠로부터 길게 내려와 있으며, 연화족대를
밟고 있는 왼쪽 정강이를 따라 표현된 옷주름선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등은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보다는 앞서고 <국보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보다는 뒤의 양식이라 해야 하겠다.
반가한 오른쪽 무릎 밑을 받쳐주는 무릎 받침 옷자락 표현이 분명치 않고, 반가한 오른쪽 발의 발바닥이 왼쪽
무릎 너머로 넘겨 붙은 것이나, 옷주름 표현에서 입체성이 결여된 점 등도 이 반가상 조성이 아직 습작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이런 습작품이 있다는 것은 곧 최고 걸작품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므로, <경주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
의 존재는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신라 제작설을 증명하는 부동의 증거라 하겠다.
7. 김술종이 조성한 북지리 미륵반가상
다음은 <봉화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이다.
허리 이상 상반신 거의 전부가 잘려나간 반가상이다.
그런데도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높이가 160cm나 되는 것을 보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반가사유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은 부분을 근거로 복원하여 높이를 계산하면 250cm나 된다고 한다.
가히 장육(丈六) 미륵반가상이라 할 만한 규모다.
그런데 이 미륵반가상은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닮았다.
다만 하나는 재질이 화강암이고 하나는 금동이라는 차이와, 하나는 높이가 250cm나 되고 하나는 높이가
93.5cm로 크기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선뜻 선후 구별이 안 되는데, ‘삼국유사’ 권2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旨郞)조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어 그 선후 문제를 가늠하게 해준다.
“처음 술종(述宗)공이 삭주(朔州, 현재 춘천) 도독사(都督使)가 되어 장차 다스릴 곳으로 가려는데 그때는
삼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기병(騎兵) 3000으로 호송하게 되었다.
일행이 죽지령(竹旨嶺, 지금 죽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있어 그 고갯길을 잘 다스렸다.
공이 보고 탄복하여 크게 칭찬하자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심히 빛나는 것을 좋아하여 서로 마음에 새겨
두었다.
공이 삭주의 임소에 부임하여 한 달이 지났는데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하므로 놀라움이 더욱 심하여 다음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어오게 하였다.
심부름꾼이 가서 묻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 됐다고 한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그 죽음을 알리는데 바로 꿈꾼 날이었다.
공이 이르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구나’하고 다시 군사들을 보내 죽지령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였다.
꿈꾸던 날로부터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로 인해 이름을 죽지(竹旨)라 하였다.
자라서 벼슬에 나가 유신(庾信)공과 함께 하며 그 부원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즉 이 미륵석상을 삭주 도독사 김술종이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 1 진덕왕(眞德王)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진덕왕 시대에 알천(閼川)공, 임종(林宗)공, 술종(述宗)공, 무림(武林)공(자장의 부친), 염장(廉長)공,
유신(庾信)공이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서 국사를 의논했다.”
김술종은 진덕여왕 때 화백회의를 주도하던 6인의 원로 대신 중 3번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6번째인 김유신보다 지위나 나이가 훨씬 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덕여왕(647∼654년) 원년(647)에 김유신의 나이가 53세였는데 김유신이 말석에 끼었다면 세번째인
김술종은 김유신보다 적어도 10세 이상의 나이 차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김술종이 미륵석상을 만들고 낳은 아들인 김죽지가 장군이 되어 진덕여왕 3년(649)에 태장군
김유신의 부장(副將)으로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때 김죽지의 나이가 40세 정도는 되었을 터이니 김죽지가 태어난 것은 진평왕 32년(610)
경이 될 것이다.
이 해에 김술종이 삭주 도독이 됐다면 나이가 30세 정도는 되어야 하므로 김술종이 태어난 시기는 진평왕
2년(580) 경이라 해야 할 것이다.
김유신보다 15세 정도 연상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진덕여왕 때 화백회의에서 김술종과 김유신이 3번째와 6번째가 될 만한 나이 차이다.
또 김죽지가 마지막 전공을 세우는 기록이 문무왕 10년(670) 백제 부흥군으로부터 7개의 성을 빼앗는 것이니,
610년 생이라면 환갑쯤 되었을 터라 그의 출생연도에 대한 추정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김죽지는 신문왕(681∼691년) 때까지 재상을 지내고 효소왕(692∼701년) 때까지 살아 있었다 하니 80세
이상 장수하였던 모양이다.
어떻든 김죽지가 태어난 해가 진평왕 32년(610) 경이라면 이 <봉화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의 조성
연대도 바로 그 해 어름이어야 하니,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조성연대 역시 거의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봉화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은 1965년 11월26일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物野面) 북지리(北枝里)
구산동(龜山洞)에서 신라 오악(五岳) 조사단이 발견했다.
이후 1966년 6월에 경북대학교가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담당하여 원 위치를 확인하고 <봉화북지리
석조미륵보살반가상>을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소장하고 있다.
이 상과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선후 문제는 선뜻 결정짓기 어려우나, 거의 동시에 조성된
것이 틀림없다.
김술종이 진골 귀족으로 30대 젊은 나이에 삭주 도독이 되어 3000 기병을 이끌고 죽령을 넘어 춘천으로
부임해가게 된 것은, 그때 수(隋)의 중국 통일(589년)로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변화하여 삼국의 쟁패가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남북조의 대립과 분열이 지속될 때는 그 영향이 우리에게 끼칠 틈이 없으므로 삼국은 자체의
힘겨루기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니, 진평왕 초년 경에는 진흥왕이 확장해 놓은 영토를 지키기가 여간
힘겹지 않았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 공세를 펼쳐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고구려는 수와 대결함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영양왕 9년(598) 즉 진평왕 20년에 왕이 말갈군사
1만을 친히 이끌고 요서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전단(戰端)을 열어 놓는다.
이에 진평왕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26년(604) 남천주(南川州, 현재 이천)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
현재 서울)를 다시 설치하여 고구려에 적극 공세를 취한다.
진흥왕 29년(568)에 북진정책을 포기하는 유화적 몸짓으로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로 옮겨왔던 것인데,
이제 38년만에 다시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호전적인 수양제(605∼616년)가 들어서자 진평왕은 그 30년(608)에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있던 원광(圓光)법사에게 부탁하여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보낸다.
때마침 수양제는 바로 전 해에 돌궐 가한(可汗) 계민(啓民)의 장막에 이르렀다가 고구려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고 있던 터라 이를 흔쾌히 허락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2월에 신라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춘천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
한다. 이에 진평왕이 김술종을 삭주도독으로 삼아 춘천으로 급파하여 고구려를 물리치게 하였던 모양이다.
벌써 진평왕 33년(611) 2월에는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천하에 포고한 상태였다.
그러니 김술종이 이 어름에 삭주 지방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실 측근의 진골 귀족으로 패기만만한 30대 초반의 국경 수비대 사령관직에 있던 김술종이 자신의 아들이
미륵하생시에 태어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룩하고 미륵세계를 이루는데 대공을 세워주기를 간절히 기원
하여 만든 미륵보살상이라면 그 정성과 규모가 어떠했을지 대강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태어날 자식이 미륵보살이 되기를 기원했을 수도 있다.
죽령에서 멀지 않은 봉화 물야계곡 죽지리 구산동에 세계 최대 규모의 걸작 미륵반가상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단한 화강암 재료로 총높이가 250cm나 되는 거대한 석상을 조성하였는데도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
가상>이 가지고 있는 세련된 조각 기법이 거의 그대로 재현돼 있다.
돌로 된 옷자락이 산들바람을 맞아 살랑살랑 나부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본 경도(京都)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광륭사(廣隆寺)에는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은, 높이 83.3cm(2자7치6푼)의 <광륭사(廣隆寺)목조(木造)보관미륵반가상(寶冠彌勒半跏像)>
이 있다.
누가 보아도 쌍둥이라고 얼른 알아볼 수 있는 이 미륵반가상은 최근 일본학자의 연구 결과 신라에서
진평왕 45년(623)에 만들어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추고(推古) 천황 31년 7월
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토대로 밝혀낸 사실이다.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대사(大使)로 내말(奈末) 지세이(智洗爾)를 보내고 임나는 달솔 내말지(奈末智)를
보내 함께 왔다. 불상 1구와 금탑 사리를 보내고 또 대관정번(大觀頂幡) 1구와 소번(小幡) 12가닥도 보냈다.
곧 불상은 갈야(葛野) 진사(秦寺)에 모시고 나머지 사리와 금탑 및 관정번은 모두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들여 놓았다.”
8.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의 정체
이때 보낸 불상이 <광륭사목조보관미륵반가상>이며 갈야 진사가 바로 광륭사라는 것이다.
광륭사는 일본에 하생한 미륵보살이라는 성덕태자(聖德太子, 573∼647년)가 추고 천왕 11년(603), 즉
진평왕 25년 10월에 대부(大夫) 진하승(秦河勝 혹은 秦川勝)에게 자신이 봉안하고 있던 불상을 하사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처음에는 절이 세워진 장소의 이름을 따서 봉강사(蜂岡寺)라고도 하고, 그곳 지방명을 따서 갈야사(葛野寺)
라고도 부르며, 혹은 진씨가 세운 절이라 하여 진사(秦寺)라고도 하였던 모양이다.
본격적인 절의 면모를 갖추는 것은 진평왕 43년(621)에 성덕태자가 49세로 요절하자 그의 명복을 비는
추복 사찰로 삼으면서부터라고 한다. 아마 이때부터 광륭사로 불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절을 세운 진하승은 신라계 이주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추고 천황 31년(623) 신라에서 성덕태자의 명복을 비는 조문사절을 파견하면서 이 <광륭사 목조
보관미륵반가상>을 만들어 보내자, 이를 신라계 진씨가 세운 성덕태자 추복사찰인 광륭사에 봉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주장이다. 더구나 목조반가상의 재질이 봉화군 춘양면(春陽面)에서 나오는 적송(赤松, 紅松
이라고도 함), 즉 춘양목이라는 것이다. 춘양면은 <봉화군 북지리 석조 미륵반가상>이 있는
물야면(物野面)과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다.
따라서 경주에서 조성되었을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만들어졌을
<봉화북지리 석조미륵반가상>을 연결시켜 생각한다면, 이 <광륭사목조보관미륵반가상>이 어째서
춘양목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특유의 적송으로 만들어졌으며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
같은가에 대한 해답이 절로 나오게 된다.
다만 <광륭사목조보관미륵반가상>은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외형만 충실하게 모방(模倣)
하려 했으므로 생동감이 결여돼 정지된 느낌이 전신에서 느껴진다.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에서처럼 생략과 함축 및 정밀한 사생으로 추상미와 사실미를 이상적
으로 조합해 피가 돌고 맥박이 뛰며 피부에 온기가 느껴지듯 표현했던 예술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는 탐구
하려 하지 않고 무의미한 형사(形似; 외형만 비슷하게 따라함)에만 매달린 결과다.
그래서 반가한 오른쪽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도 바람이 잔 듯 고요히 멈춰 있어 답답하고, 힘이
들어간 듯 치켜 올라간 오른쪽 발가락이나 눌러댄 왼쪽 손가락 표현도 그 의미를 상실하여 내밀한 열락
(悅樂)의 표출이라는 짜릿한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극도로 양식화한 삼산관 역시 연꽃잎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고 4분 원형의 굴곡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던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의 최후선을 넘어서서, 관틀을 높이면서 굴곡을 약화시킴으로써 연화
보관의 추상적 아름다움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다 보관 아래에 머리칼 표현을 더함으로써 보관과 머리칼을 혼연일체시키던 신비감마저 없애버렸다.
사실성도 추상성도 일시에 사라지게 한 것이다. 치마 표현에서도 반가한 무릎 아래를 바람결에 올라
떠오르듯 살짝 뒤집혀 받쳐주던 무릎 받침 부분이 무겁게 매달리게 되니 무릎과 상관없는 군더더기처럼
보인다.
왼쪽 허벅지 아래 자리 밑에서 나온 띠 장식은 이 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부분인데, 재질이 일본에서
흔히 불상 조각 재료로 많이 쓰는 녹나무 즉 장목(樟木)이라 하니 일본에서 뒷날 첨가한 것으로 여겨진다.
2단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 역시 비자나무(榧木)로 만들어져 있어 일본에서 후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광륭사목조보관미륵반가상>은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그대로 형사한 모작이 확실
하므로, 이 미륵상이 진평왕 44년(622)경에 일본에 출현했던 미륵보살, 즉 성덕태자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 보냈을 가능성은 양식사적으로 충분히 인정된다고 하겠다.
이상적인 신라의 미륵선화 형상인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본체로 삼아 무수한 분신인
미륵반가상을 만들어 퍼뜨려 나가는 분신불 전파 현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9.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고구려 평원왕 31년(589), 즉 수문제 개황(開皇) 9년에 수문제는 남조 진(陳)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동진(東晋)의 남천(南遷, 317년)으로 남북이 갈린 지 272년 만에 중국대륙을 다시 통일한다.
사실 고구려는 중국의 자체 분열과 상호 견제에 힘입어 국세를 키워나가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할
수 있었다. 남북조와의 등거리 외교로 남북조를 견제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세를 신장하여 동방의 강국
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은 남북조와 고구려를 각기 한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수나라의 중국 통일로 삼각 대권 구도에서 한 꼭지점이 무너진 것이다.
다른 한 꼭지점이던 고구려가 당장 위기감에 휩싸일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히 고구려가 두려워한 것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수륙 양면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육군이면 육군, 수군이면 수군의 공격 한 가지에만 대비하면 되었다. 육지를 국경으로 맞대고
있는 북조는 수군이 없었고, 수군 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남조와는 북조가 육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수륙 양동 작전으로 언제든지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수나라가 강력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남조를 멸망시키고 방대한 수군 세력을 흡수해 들였다.
과거에는 분리돼 고구려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수륙 양군이 이제는 통합돼 절대적인 위협으로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평원왕은 진나라 멸망 소식을 접하자 바로 전비강화에 몰두한다.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성곽을 수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문제도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양자강)보다 넓겠으며 고구려
사람이 많다 한들 진나라보다 더하겠는가”하며 고구려를 위협하고, 장군 한 사람만 보내도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평원왕은 군비 강화를 독려하던 중 병으로 돌아가고 그 장자인 영양왕이 등극한다.
영양왕은 평원왕 7년(565)에 태자로 책봉돼 25년간 태자로 있으면서 국정 운영을 눈여겨보았던 패기
넘치는 신왕이었기에 오히려 군비강화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했다.
본래 생김새가 시원스러웠으며 세상을 바로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영양왕은 8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다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영양왕 9년(598) 2월에 친히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략한다.
이 해 정월에 수문제가 강남의 여러 주에 조서를 내려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세 길 이상의 배를 모두
징발하여 관부에 소속시키는 등 수군 강화정책을 편 직후의 일이었다.
수군 강화책이 바로 수륙 양면의 고구려 침략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짐작한 영양왕은 출기불의로 기습
함으로써 수나라가 미처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전단을 열게 만든 것이다.
이에 272년 만에 천하통일을 이룬 절대군주의 체면을 크게 손상당한 수문제는 대로하여 당장 막내인
제5황자 한왕(漢王) 양(諒)을 행군원수(行君元帥)로 삼아 수륙 30만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한다. 분주하게 준비하였지만 6월에 가서야 침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양왕은 이런 침공 시기를 계산에 넣고 2월에 요서를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영양왕은 6월부터는 장마철이 돼 요수가 범람하므로 진흙밭이 인마의 발목을 묶고 뒤이어 북상하는
태풍은 서해 바다에서 전선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연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다. 20여만 군사를 이끌고 만리장성 동쪽 끝인 임유관(臨關)을 나선 한왕
양은 장마비 속에 제대로 행군도 하지 못하고 군량미도 운반되지 않아 갖은 고생을 한다.
더구나 식수 불량으로 전 군이 전염병에 걸리는데 겨우 요서에 도착한 그마저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런데다 남조 진나라 수군대장 출신으로 수군총관(水軍總管)이 되어 강남 수군 선단을 이끌고 산동반도
동래(東萊)항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던 주라후(周羅, 542∼605년)의 선단이 태풍을 만나 서해바다
속에 거의 수장되고 만다.
이 소식을 접한 한왕 양은 할 수 없이 9월에 아무 소득 없이 군사와 군비만 잃은 채 회군하고 말았다.
고구려 영양왕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30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이때 30만 군사 중에서 죽은 자가 10명 중 8∼9명에 이르렀다 한다.
뿐만 아니라 강남 수군의 주력부대를 모두 수장해 당분간은 바다 걱정을 덜게 된 것은 더욱 큰 수확이었다.
이렇게 수나라의 기선을 꺾어 놓은 영양왕은 일방 사죄사를 보내 수문제의 체면을 살려주는 외교적인 전략도
함께 구사한다.
간담이 서늘해진 수문제는 못이기는 척하고 고구려와 관계 회복을 허락하여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한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수양제(569∼618년)(도판 11)가 영양왕 18년(604)에 제위에 오르면서 사태는 일변
하였다.
그는 형인 황태자 용(勇)을 모함하여 폐위시키고 자신이 태자 자리를 차지한 다음 부황이 병들어 폐태자를
불러들이려 하자 부형을 함께 독살하고 제위에 오른 음흉한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제위에 오른 다음 고구려 정복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 준비를 꾸준히 하였다.
우선 강남의 물화와 병력을 북쪽으로 수송하기 위해 강도(江都, 남경)에서부터 낙양에 이르는 대운하인
통제거(通濟渠)를 건설한다.
그리고 즉위 후 4년 만인 대업(大業) 3년(607), 즉 영양왕 18년 4월에는 황하 물줄기가 북쪽으로 휘도는
만리장성 밖의 유림군(楡林郡)을 순수하며 내몽고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동돌궐왕 계민(啓民) 칸(可汗)을
찾아가 회유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끊게 한다.
이미 종실녀(宗室女) 의성(義城)공주를 계민칸에게 출가시켜 그를 귀순하게 하고서도 못미더웠던지
황후와 함께 가서 계민칸과 의성공주를 함께 만나보고 이들 부부에게 선물을 1만2000 뭉치나 전해준다.
또 동돌궐 추장 3500인에게는 선물을 20만 뭉치나 따로 내려준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장정 100여만명을 동원해 유림에서부터 자하(紫河)에 이르는 수백 리
장성을 열흘 만에 쌓도록 한다.
이때 동원된 장정들은 10명에 5∼6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사인 황문시랑 배구(裵矩, 547∼627년)의 계책에 따라 계민칸에게 와 있던 고구려 사신에게
이렇게 엄포를 놓아 보낸다.
“돌아가 너의 왕에게 마땅히 일찍 와서 조현(朝見; 신하가 임금을 찾아 뵘)하라고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나와 계민이 너의 나라를 순수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수양제는 동도(東都) 낙양으로 돌아온 다음 그 다음 해인 대업 4년(608) 4월에 하북 지방의
남녀 100여만명을 동원하여 낙양에서 탁군(郡, 현재 북경)까지 이르는 대운하인 영제거(永濟渠)를 건설한다.
통제거와 영제거를 연결하면 수도 장안과 동도 낙양, 남도 건강, 북도 탁군이 모두 물길로 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의 물화와 병사들이 통제거와 영제거 물길을 타고 대량으로 탁군까지 운반돼 쌓이게 되었다.
뒤이어 대업 6년(610) 2월에는 유구를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7000여명을 포로로 잡아와서 권위를 자랑
한다. 강남 수군 세력을 과시한 것이다.
3월에 양제는 남도인 강도(江都)로 내려가서 강도 태수의 지위를 장안의 경조윤(京兆尹)과 같은 급으로
올려놓아 강도의 사기를 복돋운다. 드디어 대업 7년(611) 2월에 양제는 강도의 양자진(揚子津)에서 백관을
모아놓고 대연회를 베풀며 등급에 따라 많은 하사품을 내리면서 고구려 정벌 의지를 문무백관에게 암시한다.
이에 강남 해상세력과 연결돼 있던 백제는 발빠르게 이런 눈치를 채고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보내 고구려
정벌에 협력할 것을 알리고 군기(軍期)를 정하자고 청한다. 기분이 좋아진 양제는 백제 사신에게 많은
상품을 보내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무왕과 상의하게 한다.
의기양양한 수양제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용선(龍船)을 타고 강도를 출발하여 통제거와
영제거를 거쳐 탁군에 도착한다. 거기서 고구려 정벌을 천하에 포고하고 징병령을 내린다.
10. 살수대첩
‘수서’ 권74 원홍사전(元弘嗣傳)에 의하면 수양제는 즉위 초부터 고구려 정벌에 뜻이 있어 원홍사를 동해
해구(海口)로 보내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여러 주에서 징발돼 온 부역 장정들이 관리들의 독촉으로 매를 맞아가며 쉴새없이 일하였는데, 밤낮
으로 물속에서 일하므로 허리 아래에 구더기가 생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죽는 사람이 열에 3∼4명은
되었다 한다. 물론 여기에 동원된 장정들은 배 만드는 데 익숙한 강남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1 수양제 기(紀)에서는 이때 만든 배가 300척이었다 한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이 해 겨울 탁군에서 대회를 열고 강도 출신인 효위(驍衛) 대장군 내호아
(來護兒, ?∼618년)를 수군 총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업 8년(612) 즉 영양왕 23년 정월에 대군이 탁군에 집결하자 병부상서 단문진(段文振)을 좌후위
(左侯衛) 대장군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맹장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게 하고 여러
길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격해 들어가게 하니, 동원된 군대의 총수가 113만3800인으로 200만 대군이라
일컬었다. 군량미를 운송하는 사람의 숫자는 이의 배에 이르렀다.
이들이 출발하는데 그 늘어선 길이가 960리에 뻗어 있었다.
2월에 양제가 요수 가에 당도했으나 고구려 군의 저항에 부딪혀 건너지 못하고 맥철장(麥鐵杖) 등 용장이
전사한다.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가 부교(浮橋)를 완성하여 겨우 요하를 건너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1만명을 죽였지만, 요동성을 비롯한 여러 성은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초조한 양제는 요동성 서쪽 몇리 떨어진 곳에 육합성(六合城)을 쌓고 들어가 머물면서 독전한다.
한편 동래를 떠난 내호아의 수군은 전선 수백 척이 수백 리 바다를 뒤덮으며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가 평양
60리 밖에서 아군과 마주쳐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내호아는 승승장구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쳐들어가려
하니 부총관 주법상(周法尙, 556∼614년)이 말리며 여러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정병 수만명을 가려뽑아 곧바로 성 아래로 진격해 들어갔다.
아군 대장군 왕제(王弟) 건무(建武, 영류왕)는 나성(羅城) 안 빈절에 복병을 숨겨두고 있다가 내보내
내호아 군대와 싸우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달아나게 하였다.
내호아는 이를 쫓아 성안으로 들어와서 병사들을 풀어놓고 노략질하게 하니 다시 대오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복병이 일어나자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몸만 빼 달아나매 사졸로 돌아간 자는 수천명에
불과하였었다. 아군은 선단이 있는 곳까지 추격해 들어갔으나 주법상이 군진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으
므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내호아는 군병을 이끌고 바닷가로 물러나 감히 다시 싸울 생각을 못하였다.
한편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과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于仲文) 등은 각각 여러 길로 나누어
진격해 오면서 굳게 지키는 성들은 그대로 방치한 채 빠른 속도로 압록강 서쪽 기슭에 모였다.
장마와 태풍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평양을 함락하려는 전략이었다. 남겨 놓은 성들은 양제가 거느리고
있는 대군이 차츰 함락하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있으면 자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속한 군사 이동은 가벼운 차림일 때 가능하다.
그런데 고구려가 청야(淸野; 식량이나 생활도구 및 거처를 모두 없애서 들을 텅 비게 하는 것) 전술을 펴서
고구려 영토 내에서는 전혀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 천리를 속보로 이동하는 수나라 군사들에게 제몫의 군장과 취사도구 및 식량을 각각 짊어
지게 하니 사람마다 3가마니 무게를 지고 행군해야 했다. 이에 병사들은 이를 길가에 버리게 되었고 이를
엄금하는 군령이 내려지자 땅을 파서 묻고 행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압록 강변에 30만 군사가 도착하기는 하였으나 당장 군량이 떨어져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때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그 병영으로 보내 거짓 항복하고 허실(虛實)을 탐지해 오게
한다. 그런데 우중문은 수양제로부터 만약 국왕이나 을지문덕이 나타나기만 하면 잡아오라는 밀지를 받고
있었다. 우중문이 잡으려 하니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로 와 있으면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놓아 보냈다.
우중문은 곧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다시 할 말이 있으니 왔다 가라 했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아 보내고 속이 편안치 않았는데
우문술이 군량이 다해가니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이에 우중문이 정예병을 선발하여 을지문덕을 쫓아가면 공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자 우문술이
이를 말린다.
우중문이 화를 내며 “장군은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작은 도적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무슨 얼굴로
황제를 뵙겠는가. 군중의 일은 한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데 각자가 마음이 다르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
는가”라고 한다.
양제가 우중문이 계책이 있다 하여 제군으로 하여금 우중문의 절도를 받게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이에 할 수 없이 우문술 등 여러 장수가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피곤하게 하려고 매번 싸우다가 달아나니
우문술 하루에 7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이기는 것만 믿고 바짝 따라가서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 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여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돌이키면 마땅히
왕을 받들고 행재소에 나아가 황제를 조현하겠다 한다.
이때 을지문덕이 다음과 같은 시를 우문술에게 보냈다 한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꿰뚫었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 알았네. 싸워 이겨서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할 줄 알고 원컨대 그쳐주기를.(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폐한 것을 보고 다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쉬 깨뜨
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드디어 그 거짓 항복에 속는 척하고 군대를 돌이켰다.
그러나 우문술 등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진(方陣)을 짜고 행군하였다.
이에 아군은 사면에서 치고 빠지니 우문술 등은 싸우면서 행군하여 7월에야 살수에 이르렀다.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아군이 뒤에서 후군을 공격하자 우둔위(右屯衛) 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가 함께 무너지는데 어찌 할 수가 없다.
이때 살수를 상류에서 막았다 터뜨렸다 한다.
장수와 군사들이 달아나 돌아오는데 하루 낮 하루 밤사이 450리를 달려서 압록강에 이르렀다.
수군 총관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배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수에 도착했을 때 30만50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겨우 2700명
뿐이었다.
자재와 양식 기계는 수 만으로 헤아렸는데 모두 잃어버렸으니 이런 처절한 참패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양제는 대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가지고 회군한다.
이때 백제 무왕은 국지모를 보내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고 군기(軍期)를 받아오지만 사실 뒤
로는 고구려와 내통하여 수나라 기밀을 고구려에 전해주었다.
또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건널 때도 군대를 고구려 국경에 보내 수나라를 돕는 척 소문만 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진평왕은 고구려가 전력을 다해 수군을 막는 동안 고구려 남쪽 땅 500여리를 쳐서 빼앗았다.
11. 고구려 후기 고분 벽화
수 양제의 대규모 침공을 막아낸 대수전쟁(612∼614년)의 승리는 고구려 문화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듯하다. 이것은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극적인 변화에서 추측할 수 있다.
동수묘 이래 고구려 분묘 내의 벽화 내용은 총주(塚主)의 생전 생활을 사후(死後) 세계로 연장시키려는
의도가 작용, 총주의 생전 모습과 그의 생활 환경이 재현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후기에 이르면 다만 방위를 맡아 천장이나 벽면의 한 부분에 나타나기도 하던 사신(四神; 靑龍,
白虎, 玄武, 朱雀)이 벽화의 주제가 되어 주벽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묘실(墓室)도 상자 모양의 단실(單室)로 변하게 되고, 축석으로 벽면을 구축하던 종래의 석실 구축
방법도 1매의 곱게 물갈이한 화강암 판석으로 대치하는, 전혀 새로운 묘실 구축 방법이 이와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이제는 벽면에 곧바로 사신도만 그리는 동수묘적인 벽화 기법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법도 크게 발전하여 채색은 화려하고 깊이 있고, 필선은 더욱 활기가 넘치면서 세련되고 회화적인
공간 감각이 고려된다.
산이나 나무, 구름 등 배경화도 이제는 문양적인 유치한 단계를 벗어나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다.
이와 같이 갑작스러운 변화 현상을 종래에는 사신도가 음양오행설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여 도교에 연관
시켜 생각하려고만 하였다.
이는 단순히 당(唐) 고조(高祖)가 도교(道敎)를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전해주었다는 ‘삼국사기’ 기록(624년)과
보덕(普德)화상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박해하므로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한 생각이었다.
비록 도교의 영향이 아무리 강력했다 하더라도 몇백년 지속된 전통적인 분묘 벽화의 내용을 갑자기 일신
시킬 수 있겠는가?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가지 각도에서 검토가 있어야 한다.
그 첫째가 이 벽화 고분의 주인공들이 종래의 고분벽화 주인공들과 문화 기반이 다른 세력들 아니었겠
느냐 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를 만든 시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 담당 계층의 급작스러운 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사료(史料)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획기적인 지배층의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
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 분포가 평양과 구도(舊都)인 통구(通溝) 지방에 골고루 나뉘어 있으니 이런 가설은
성립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새로운 문화 담당 계층의 출현에 의한 문화의 일변 문제는 대수전쟁의 승리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많은 포로와 노획물을 획득했으므로 이들의 사역에 의한 수 문화(隋 文化)의 직접적인 영향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만5000 군대 중에 요동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많은 군비와 기계를 모두 잃었다고
하였으며, 전쟁 이후 10여 년만에 당 고조(高祖)의 요청에 의하여 송환된 포로만도 1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고구려에 포로로 잡힌 군사가 십수만을 헤아린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가 이 전쟁을 통해서 남북조의 찬란한 문화를 아우른 고도의 수 문화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급격한 벽화 분묘 양식의 변화는 수 문화의 영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특히 화려한 채색이나 요철(凹凸)의 입체감 같은 것은 남북조 시대에 불화(佛畵)의 영향으로 장승요(張僧繇)
등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발달한 회화 기법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묘사나 극도로 세련된 힘찬 필선 따위는 고개지(顧愷之)·육탐미(陸探微)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중국 전통 화법이었다.
회화적인 구도감은 이미 남제(南齊) 사혁(謝赫)이 화육법(畵六法)에서 경영위치로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요소들이 후기 고구려 벽화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 수에서는 서역계 돌궐족 출신인 염비(閻毗, 564∼613년)와 그 아들 입덕(立德, ?∼656년)·입본(立本,
?∼673년) 3부자가 일세를 대표하는 명화가로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그 염비가 바로 수양제의 측근 내승(內丞)으로 요동까지 양제를 호종해 곁에서 숙위(宿衛)하면서 맹활약
하다가 회군 도중 하북의 고양(高陽)에서 50세로 갑자기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그림 기법이
포로가 된 염비 휘하의 화공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고구려에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서(江西) 우현리(遇賢里) 대묘(大墓)의 <사신도>(도판 12)에서처럼 섬세하고 활력이 넘치며
깊이 있는 채색이 마치 수나 당초(唐初)의 사신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통구 사신총(四神塚)처럼 화려한
채색과 복잡한 장식 구도가 육조식(六朝式) 사신도 기법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천장 층급부에 당초무늬·날아가는 신선·연꽃·산줄기·상서로운 새·용 등을 장식했는데, 활달한
필치와 입체감 있는 채색, 섬세하고 화려한 묘사법은 중기의 고졸(古拙)한 기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회화적이다.
특히 진파리(眞坡里) 제1호분은 네벽에 구름과 꽃과 나무 등을 그리고 그 중앙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바람에 날리는 구름과 꽃·나무 등에서 유연한 율동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기법이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 벽화에 연결되고 있음을 당시 고구려 문화의 주변 전파 양상으로
보아야 할지, 백제 문화의 해양적 선진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직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산경문전(山景文塼; 산 경치를 문양장식으로 꾸민 벽돌)을 비롯한 기와와 벽돌 종류의 장식문양이 고도의
회화성을 지니되, 이것이 고구려적인 회화 기법과는 상이한 양상을 띠는 것은 백제 문화의 독자성 내지
해양적 선진성으로 보는 쪽이 더욱 타당할지 모르겠다.
다만 고구려 중기 벽화 고분의 영향이 뚜렷한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의 발견(1971년)은 고구려 문화의
신라 전파를 확신케 하는데, 이것이 순흥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죽령로(竹嶺路)가 당시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문화 통로였음을 재확인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합작품 황룡사구층탑의 비밀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1]
1. 고구려침공 실패로 무너진 수 양제
수 나라 양제(煬帝, 569∼618년)는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2월, 24년 3월, 그리고 25년 7월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백수십만 명의 대군을 잃고 헤아릴 수 없는 전쟁 물자를 허비했다. 이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 感)
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등 천하는 다시 대란(大亂)에 접어든다.
그러자 양제는 영양왕 26년(615) 8월에 돌궐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순(北巡)을 핑계하여
돌궐을 찾아간다.
양제는 종실의 딸 의성(義成)공주를 동돌궐의 왕 계민(啓民, ?∼609년) 칸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궐은 원래 고구려와는 문화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나라였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해 최대강국으로 떠오르자 할 수 없이 수나라에 귀순했으나 수의 고구려 침공에
진정으로 협력할 뜻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승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형편이었다.
게다가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그 이후에 연거푸 두 번이나 통일
중국의 온 힘을 쏟아붓고서도 고구려의 성곽 하나 빼앗지 못하고 회군했으니, 돌궐은 태도를 일백팔십
도로 바꾸었다.
또 양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은 계민 칸이 이미 죽고 시필(始畢) 칸이 새로 등극했음에랴!
실제로 시필 칸은 수 양제가 북순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기병 수십만을 대기
시켰다.
이 사실을 탐지한 전(前)왕비 의성공주가 양제에게 신속하게 통보하여 겨우 화를 모면하게 할 수 있었다.
양제는 여기서 돌궐에게 포위되어 한달 남짓 공포에 떨어야 했는데, 이때 그의 기가 아주 꺾인 듯하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끝나 이미 넋이 다 나간 마당에 믿고 있던 맹방인 돌궐의 표변은
권세의 무상함을 통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 장안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순수를 핑계대며 남도인 강도(江都, 지금 남경)로 피하고
만다. 북쪽에 대해서는 아주 환멸을 느꼈던 모양이다.
본래 양제는 후량(後梁) 세조 효명제(孝明帝) 소귀(542∼585년)의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후량은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 464∼549년)의 장자인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 501∼531년)의
아들 소찰 (蕭察, 519∼562년)이 세운 나라로 강도가 그 근거지였다.
그래서 양제는 강도를 처가의 고향으로 생각하여 남조 정벌에도 앞장섰고 등극 후에는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그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기 직전인 대업(大業) 6년(610) 3월에 강도 태수의 지위를 본도인 장안의 경조윤
(京兆尹)과 같은 급으로 승격시켜 놓은 것도 강도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양제는 고구려 정벌의 총책을 맡은 좌익위 대장군 허국공(許國公) 우문술(于文述)의 진언을
받아들여 강도로 내려온 뒤 이곳을 세력 기반으로 삼아 대란을 수습해 보려고 한다.
원래 우문술은 고구려 정벌 참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마땅히 극형을 받아야 했으나, 양제의 장녀 남양(南陽)
공주가 그의 막내아들 우문사급(于文士及, ?∼642년)에게 출가했으므로 죽음을 모면하고 다시 기용된 것
이다.
그러나 양제의 최측근인 우문술이 이해(615년) 10월 병으로 강도에서 죽자, 가족을 서도 장안에 두고 온
시위무사 사이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양제가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강도에 머물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장안의 가족 걱정으로 군심(軍心)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틈에 우문술의 불초자들인 우문화급(于文化及)과 우문지급(于文智及)이 마음이 들뜬 병사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니, 양제는 영류왕 원년(618) 3월에 이들의 손에 잡혀 죽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불과 6년 전 200만 대군을 칭하며 고구려를 침공하던 그 위세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가 믿던 맏사위(우문사급) 형들의 선동에 의해 역적으로 돌변한 시위무사들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2. 당(唐) 태종의 천하통일
이에 이미 장안을 장악한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635년)은 바로 제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한
뒤 차츰 각처의 반란을 진압하여 수의 통일을 계승한다.
백성들은 근 300년에 걸친 대륙의 분열에 싫증을 내고 있었고, 나아가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권자의 출현을 갈망했다.
이런 민심을 잘 간파한 이가 당 고조의 제2자인 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 도판 1)이다.
국가 건설과 반란 진압에 큰 공로를 세운 이세민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그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元吉)을 살해하고 부왕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고조 무덕(武德) 9년(626) 8월에 즉위한 당 태종은 곧바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문치(文治)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전국을 10도(道)로 나누어 강력한 중앙 집권력을 행사해 나가니 백성들은 비로소
안도하고 따르게 되었다.
마지막 반란세력인 양사도(梁師道)가 정관(貞觀) 2년(628) 4월에 살해당하면서 천하가 통일되었다.
이렇게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 태종은 장성 밖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인 돌궐을 그냥둘 수 없었다.
정관 3년(629) 11월에 장군 이정(李靖, 571∼649년)을 보내 동돌궐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앞서 이 해 8월에 현장(玄, 602∼664년)법사가 고창(高昌) 구자(龜玆) 등을 거치는 서역 북도(北道)를
따라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데, 이것은 당 태종의 돌궐 정벌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었을 듯하다.
동돌궐 정복에 나선 이정은 정관 4년(630) 2월에 동돌궐왕 힐리(利) 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에게 의탁
하던 수 양제 황후 소씨와 양제의 손자 양정도(楊正道)를 찾아내 장안으로 호송한다.
이정은 계속 동돌궐의 힐리 칸을 추격하여 돌궐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10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세운다. 이어 계민 칸의 왕비이자 힐리 칸의 모후인 수나라 종실 출신 의성공주를 잡아죽이고 힐리 칸마저
사로잡아 돌아온다.
이렇게 이정은 돌궐과 연결된 수나라의 잔존 세력을 쓸어버림으로써 당 태종의 정통성에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사실 당 고조는 처음 나라를 일으킬 때 시필 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에게 칭신(稱臣)하는 굴욕을 감내
했던 모양이다. 힐리 칸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조의 아들 태종은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과거 국가 초창기에 태상황(고조)이 일찍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돌궐에게 신하를 일컬었다.
짐은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터질 듯 하여 흉노를 멸망시키는 데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앉아도 자리가 편안치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 않더니 이제 잠깐 한쪽 군대를 움직였는데도 가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선우가 요새 문을 열어달라 사정한다니 그 부끄러움을 씻었다 하겠다.”
3. 재편되는 삼국의 은원 관계
한편 우리나라는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안 삼국간 은원 관계가 재정립되고 있었다.
본래 고구려와 백제는 고국원왕(재위 331∼371년)과 개로왕(재위 455∼475년)이 전쟁에서 살해됨으로써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또 이후 신라가 백제 성왕(523∼554년)을 배신하고 전쟁에서 그를 살해함으로써 신라 역시 백제와 불구
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즉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삼고 생존을 위해 투쟁해 왔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비록 영토 분쟁은 있었으나 서로 국왕을 죽인
원한 관계는 없으므로 그리 심각한 적대감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는 왜와 동맹해 제해권을 장악한 백제를 공동 견제하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조를 멸망시켜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남조와 왜를 연결해 제해권을 장악하던 백제는
국제적인 세력 균형이 파괴될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서 수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 관계를
청산한다.
그래서 백제 무왕은 겉으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적극 협조할 것처럼 수 양제의 비위를 맞추
면서 실제로는 수나라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고구려에 은밀히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접경지대에 파견하여 말로만 침공하는 체 크게 떠들었을 뿐 오히려 고구려
의 남쪽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에 반해 신라의 진평왕은 진흥왕이 확장해 놓았다가 자신의 재위 기간에 빼앗긴 북쪽 영토를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구려가 국운을 걸고 수의 113만 대군과 사생 결단을 벌이는 동안 배후를 침공하여 500여 리나 되는 고구려
영토를 잠식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싸움판에 개가 끼여들어 호랑이 꼬리를 물고늘어진 꼴이 되었으니 고구려의 분노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이 판에 백제 무왕은 오히려 신라의 서북쪽 국경지대인 상주를 침공하여 신라가 고구려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의 3차 침략을 물리치고 났을 때 삼국간 친소 관계는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신라가 고립무원에 빠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전후 복구를 대강 마무리지은 뒤 백제와 함께 신라를 응징하는 일에 적극 나서 실지를 회복해
나가니, 신라로서는 양국의 침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에다 믿었던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국력을 모두 소모하고 허무하게 무너지자 신라는 이제 의지할
구석이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믿고 거들먹거리다가 호랑이가 사라지자 초라하게 된 격이었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민심 속에 천하통일의 염원이 살아 있었으므로 당나라가 차츰 각처의 반란을 진압
하고 곧바로 재통일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런 대세를 읽은 고구려는 당 고조 이연이 무덕(武德) 원년(618)
5월에 수나라 공제(恭帝)로부터 선위(禪位)받아 장안에서 즉위하자, 그 다음해인 영류왕 2년(619) 2월에
사신을 보내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
고구려에서도 대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양왕이 재위 29년인 618년 9월에 돌아간 뒤, 그의 이복아우로서
대수전쟁 중 수나라 수군(水軍)대장 내호아군을 격파한 적이 있는 전쟁 영웅 고건무(高建武), 즉 영류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당 고조도 아직 사방에 반란군이 널려 있고 돌궐이 장성 밖에서 수양제의 황후 소씨와 손자를 보호하면서
수나라 재건을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접근을 무척 반겼다.
그래서 영류왕 5년(622)에는 당 고조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 포로로 잡힌 중국 사람과 고구려 사람들의
교환을 제의하고, 고구려인 포로를 찾아내 먼저 돌려보내니 고구려도 이에 응해 1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를
돌려보냈다.
신라 역시 당이 수나라를 계승하여 중국 천하를 장악해 가는 사실을 파악하고 진평왕 43년(621)에 사신을
보내 맹방이 될 것을 다짐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견제를 호소한다.
이에 감격한 당 고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를 통해 칙서와 함께 그림 병풍 및 채색 비단
300여 필을 보낸다.
그러나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나라는 해양왕국인 백제인 듯하다.
백제는 무왕 24년(624) 정월에 대신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책봉을 요청한다.
당 고조는 기분이 좋아서 사신을 보내 무왕을 대방군왕백 제왕(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고, 내친 김에
2월에는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고구려로 보내 영류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
句麗王)으로 책봉하며, 3월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진평왕을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하는 등
3국에 균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물론 국세에 따라서 그 대접이 달랐다. 고구려에는 형부상서와 같은 대신급 인물을 사신으로 특파했다.
이때 고조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천존상(天尊像, 도판 2)과 도교 경전을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도교를
전했는데, 도사가 고구려에 와서 ‘노자(老子)’를 강하니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와서 들었다 한다.
그러나 당의 대삼국 등거리 외교는 천하제패의 야망을 가진 당 태종의 등극과 함께 막을 내린다.
당 태종은 수 양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을 반드시 성공하여 중국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무덕 9년(626) 6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잡자마자 7월에 대학자인 국자조교 주자사(朱子奢,
?∼641년)를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으로 삼아 삼국 순회 대사에 임명하고 삼국을 달래 서로 화친
하도록 종용한다.
명목은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과의 교통을 방해한다고 호소해 왔기 때문에
이를 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고구려를 고립시키려는 외교 전략의 발동이었다.
‘구당서(舊唐書)’ 권189 주자사전(朱子奢傳)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일부를 옮겨보자.
4. 주자사(朱子奢)의 삼국 순회 유세(遊說)
“주자사는 소주(蘇州) 오(吳) 지방 사람이다. 어려서 고향 사람인 고표에게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익히고 뒤에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책을 널리 보았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수나라 대업 중에 비서학사(秘書學士)에 이르렀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서 두복위(杜伏威)에게 의탁했다가 무덕 4년(621) 두복위를 따라 입조하니 국자조교(國子助敎)의
벼슬을 받았다.
초에 고려(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같이 치는데 군대를 연결하여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않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위급을 알려 왔다.
이에 주자사를 임시로 원외산기시랑으로 삼아 사신에 충당하고 삼국의 감정을 달래보라고 했다.
학식이 정관 있고 점잖게 생겨 동이(東夷)들이 크게 받들어 공경하므로 3국 왕이 모두 표문을 지어 올려
사죄하고 선물을 넉넉하게 주었다. 처음 주자사가 사신으로 나갈 때 태종이 이렇게 말했다.
‘해이(海夷; 바다 밖에 사는 오랑캐, 즉 3국)가 자못 학문을 중시하나 경이 대국의 사신이 되었으니 반드시
그 선물에 의지하여 그들에게 강설(講說)하지 말도록 하라.
내 뜻에 맞도록 하고 사신에서 돌아온다면 마땅히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경을 대하리라.’
그러나 주자사가 그 나라에 이르러 오랑캐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춘추좌씨전’을 제목으로 삼아 강의
하고 미녀를 선물로 받았다. 사신에서 돌아오자 태종이 그 뜻을 어긴 것을 질책했으나 그 재주를 아껴서
심히 꾸짖지는 않았다.”
당 태종이 우리나라가 학문을 숭상하는 것을 알고 대학자를 순회대사로 삼아 삼국을 돌면서 화친을 도모
하도록 유세했다는 내용이다.
주자사의 삼국 순회 후 그 다음해인 정관(貞觀) 1년(627)에 신라는 6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당에 사신을
보내 정성을 표시하는데, 이때 백제 무왕은 7월에 신라 서쪽의 두 성을 쳐서 빼앗은 뒤 다시 대군을 일으켜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웅진(熊津, 공주)에 진출한다.
이에 신라 진평왕이 위급을 고하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자 무왕도 조카인 복신(福信)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동정을 살피게 한다.
이때 당 태종은 복신을 통해 무왕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신라와 화친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한다.
그러는 중에 당 태종은 대장군 이정(李靖)으로 하여금 동돌궐을 정벌하게 하여 정관 4년(630) 힐리 칸을
사로잡고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고구려는 당 태종의 야망을 눈치채고 사신을 보내 힐리 칸의 생포를 축하하며 고구려의 지도를 전해주는
등 외교적인 역공세를 취하여 당에 침공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여성으로부터 서남 해변에 이르는 긴 국경 지역에 장성을 쌓아나간다.
조용한 듯하면서 긴박하게 전쟁 준비에 돌입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라에서는 진평왕(565년경∼632년)이 54년의 긴 통치 기간을 끝내고 근 70세가 되자 장녀인
선덕여왕(580년경∼647년)이 등극한다. 선덕여왕 원년(632) 정월의 일이었다.
5. 자장(慈藏)이 당나라로 간 뜻은?
정반왕, 즉 석가세존의 부왕 이름을 가진 진평왕이 돌아가자 당연히 그 다음 대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의
화신이 등장해야 한다.
그래서 미륵의 화신인 원화로 군림하면서 많은 화랑도를 거느리며 그 구심점 구실을 하던 맏공주 덕만(德曼)
이 즉위하여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다. 진흥왕이 꿈꿔 온 미륵세계가 신라에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反)진골계 보수귀족 집단의 불만이 꽤 있었던 듯 하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백제·고구려의 연합 공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위기 상황에서 선택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민심을
결속시키는 최후 수단으로 선덕여왕 체제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듯하다.
더구나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며 성장한 화랑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유신(金庾信, 595∼673년) 세대가
이미 30대 후반이 돼 사실상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실력으로도 이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또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선덕여왕이 등극하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겠지만, 진지왕자
이자 진평왕의 사촌아우이며 둘째 공주의 부마인 용수(龍樹)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미륵세계
구현을 위해 선덕여왕의 등극을 적극 지지한 것이 여왕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자신의 부왕인 진지왕이 반진골 세력들에게 밀려나 시해되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용수의
현명한 판단에 의해 진흥왕의 혈족인 진골 귀족이 미륵세계를 신라에 현실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용수의 이런 심모원려는 결국 진골 귀족의 기반을 안정시켜 장차 자신의 아들인 춘추가 삼국통일
의 영웅으로 왕위에 오르고 자신은 통일신라의 시조격으로 추앙받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튼 선덕여왕이 미륵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은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과 선덕
여왕의 막내아우인 선화공주 사이에 출생한 의자(義慈, 600∼661년경)를 태자로 책봉하여 백제 미륵의
법통을 확고하게 다져 놓는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선덕여왕을 초상으로 한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같은
최고 걸작의 미륵보살상을 만들어내 미륵이 신라에 출현한 것을 실물로 증명했다.
하지만 국제적인 공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덕여왕 3년(634) 1월에 인평(仁平)이라 연호를 바꾼 다음 당나라에 여왕의 책봉을 청하여 다음해
(인평 2년)에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란 책봉을 받아낸다.
그리고 인평 3년(636)에는 진골 출신 승려인 자장(慈藏, 590∼658 년)을 당나라로 보내 신라에서 미륵이
출현한 것에 대해 교단적 차원의 공식 인정을 받아오게 한다.
사실 김씨 왕족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서 오긴 했지만 진흥왕과 그 왕비가 말년에 출가
하여 승려가 된 것말고는 진골 출신이 승려가 된 예는 아직 없었다.
오히려 불교 수용을 앞장서 반대해온 박씨 집안 쪽에서 이차돈이나 원광(圓光) 법사와 같은 큰 인물이
나와 김씨 왕들이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가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마 이들은 김씨 왕족의 내·외척에 해당하는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진골 핵심 가문에서 승려가 출현하여 선덕여왕 등극의 필연성을 교단 차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자장의 속명이 선종랑(善宗郞)인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던 화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종이란 이름 밑에 랑(郞)자가 붙은 것인데, 뒷사람들이 그대로 선종랑이라 잘못 기록해
놓은 듯하다.
자장의 아버지가 선덕과 진덕여왕대에 화백회의를 주도한 6인의 국가 원로 중 네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 무림(武林)공이었다고 하니 그의 가문과 혈통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그가 출가했을 때 이를 허락지 않고 왕명으로 환속하여 재상 직위를 맡으라고 강요했던
모양이다.
이때 자장은 “나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목숨을 내놓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장은 자신이 물려받은 집과 전원을 모두 내놓아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만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살면서 고골관(枯骨觀, 사람의 몸은 결국 마른 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보는 생각.
육신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방법)을 닦는데, 가시방을 지어 놓고 알몸으로 그곳에 앉은 채 머리는
들보에 묶고 수행했다 한다.
조금만 움직이거나 졸면 가시가 몸을 찌르고 들보가 머리를 잡아다니게 하는 극한의 고행 수단을 택한 것이
었다.
신체적 고통의 한계를 실험하는 가혹한 난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자장은 선덕여왕의 정통성을 국제적
으로 증명하기 위해 인평 3년(636), 즉 선덕여왕 5년에 문인 승실(僧實) 등 10여인을 데리고 당나라로
건너간다. 이때가 당 태종 정관 10년이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이 등극한 이래 벌써 분황사(芬皇寺, 634년 완공)와 영묘사(靈廟寺, 635년 완공) 두
절을 지어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삼았고 636년 3월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 100인의 고승을 초빙
하여 설법하게 하는 불교의식)를 베풀고 승려 100인의 출가를 허락했다.
신라를 명실상부한 미륵불국토로 만들어 민심을 합일시키려는 통치수단이었다.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침략당해 빼앗아온 땅을 되돌려주어야 할 형편에 이런 희망
조차 없다면 국가의 지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동생의 남편이자 당숙인 이찬 용수로 하여금 주군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는 한편으로 자장을 당으로 보내 자신이 미륵임을 확인시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자장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4 자장정율(慈藏定律)을 비롯하여 권3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등에 두루 언급돼 있다.
당나라 도선(道宣)율사가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4에도 석자장전(釋慈藏傳)이 실려 있다.
그중에 가장 내용이 풍부한 황룡사구층탑과 자장정율을 기준으로 하여 당나라에서 자장의 행적을 살펴보자.
6. 선덕여왕은 문수보살이 수기한 성골
자장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를 거느리고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청량산(淸凉山), 즉 오대산을
찾아간다.
여기서 자장은 제석천이 천공(天工)들을 거느리고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
에서 기도하고 감응을 얻는데, 꿈 속에서 문수보살의 마정수기(摩頂授記, 이마를 쓰다듬으며 앞날의 일을
말해주는 것)를 받고 석가세존의 금란가사와 사리 등을 전해받는다.
이 내용은 당나라측 기록인 ‘속고승전’ 석자장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데, ‘삼국유사’를 펴낸 일연은 자장이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를 숨겼기 때문이라고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이때 문수보살의 수기한 내용은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특이한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난 문수가 또 이렇게 말했다.
‘너의 국왕은 천축의 찰리(刹利, 크샤트리아) 종성(種姓)에 속하는 왕으로 미리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러니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와 업을 같이하는 족속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너희 나라는 산천이 높고 험해서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삐뚤어져 있으므로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서 때로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좋은 법문을 많이 들은 비구가 나라 안에 있다면 이로써 군신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평화로우리라.’
그 승려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자장이 문수대성의 변화인 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와서 북대
(北臺)를 내려와 태화지(太和池) 못가에 당도하니 홀연히 신인이 나타나 어째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
자장이 보리(菩提, 깨달음)를 얻으려 왔다 하니 신인이 예배를 드리고 나서 또 묻기를 당신네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한다.
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왜인과 맞닿아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번갈아 국경을 침범한다. 이웃한 도적들이 날뛰니 이것이 백성들의 근심이다.’
신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신네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서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속히 본국으로 귀국하라.’ 자장이 묻기를 ‘귀향한다면 장차
어떻게 해야 이익이 되겠는가’ 하니 신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불법을 보호하는 용)은 내 맏아들이다. 범천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조공을 바치러 와서
왕국이 영원히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의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덕으로 이를 갚겠다.’
신인은 말을 마치고 옥을 받들어 주고는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사리와 가사의 내용은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가지고 돌아온 것은 부처님의 머리뼈, 어금니, 사리 100톨, 부처님이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 한 벌이었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한 등분은 황룡사에 있고 한 등분은 태화사탑에 있으며 한 등분은 가사와
더불어 통도사 계단에 있다.”
어떻든 자장은 이렇게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선덕여왕이 석가모니불로부터 이미 미륵보살이 되리
라는 수기를 받은 특수한 신분, 즉 성골(聖骨)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신표로 부처님
께서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와 부처님의 정골과 치아 및 사리 100톨을 받아 가지고 장안
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당 태종의 보호를 받으며 장안성 내의 승광별원(勝光別院)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에 머무
른다.
이로 보면 성골이라는 것은 진골 중에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처럼 미륵의 화신으로서 여왕이 될 자격을
부여받은 특수한 뼈대라는 의미인 듯하다.
따라서 성골 남자는 있을 수 없고 성골이 진골과 구별되는 혈연집단일 수도 없다.
뒷날 김부식이나 일연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만 부여된 성골의 의미를 고려적인 사고로 합리화하
느라 진덕왕 이전을 성골이라 했다거나, 성골 남자가 끊어져 여왕이 섰다는 등의 주석을 달아 사고의
한계를 노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최치원이 <성주사낭혜화상비문>에서 ‘성(聖)이라고도 하나 진골을 일컫는다(曰聖而曰眞骨)’고 달아놓은
비문의 주석(도판 4)도 이런 맥락에서 위와 같이 평이하게 해석해야 할 듯하다.
7. 궁지에 몰린 신라
한편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당의 천하제패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정관 14년(640) 8월에 이미 서쪽의
고창(高昌) 왕국을 멸망시키고, 정관 15년(641) 정월에는 종실녀 문성(文成)공주를 토번(티베트)왕에게
시집 보내 서쪽의 평정을 끝낸다.
이에 고구려는 바짝 긴장하여 정관 14년 12월에 왕태자 환권(桓權)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정세를 염탐하게
한다. 백제 태자 의자가 정관 11년(637) 12월에 당에 사신으로 간 전례가 있으므로 고구려에서도 태자를
보냈을 것이다.
이에 당에서도 그 답례를 빙자하여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고구려의 허실을 염탐해
돌아오도록 한다.
이때 진대덕은 고구려 사정을 탐지한 뒤 당 태종에게 “그 나라가 고창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접이 보통보다 훨씬 융숭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당 태종은 이런 말로 고구려 침공 계획을
발설했다.
“고구려는 본래 한사군의 땅일 뿐이다. 내가 병졸 수만 명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구하려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닷길로 평양으로 쳐들어간다면 수륙합세로
빼앗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 주현(州縣)의 피폐함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내가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이는 고구려 정벌이 가까워졌음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영류왕 25년(642) 10월에 당나라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세력을 키운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 ?∼665년)이 영류왕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형의 아들인 보장왕을
세우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한다.
또 이해에 백제 의자왕은 즉위 2년으로 무왕의 상기(喪期)가 지나자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7월에 군대를
일으켜 친히 신라의 대당(對唐) 창구인 남양만 일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한다.
또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신라의 서쪽 요새인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빼앗고 성주 품석(品釋)과
그 처자를 살해한다. 그런데 품석의 처고타소랑(古陀炤娘)은 김춘추의 장녀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 한번 깜짝하지않고 사람이 지나가도 모르고 있다가
깨어나서는 “아, 대장부라면 어찌 백제를 삼키지 않겠는가”고 부르짖었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자왕은 그의 이종사촌형이었다.
비록 국가간 이해 관계로 싸움은 피할 수 없다하나, 믿고 항복하는 5촌 조카딸 일족을 잡아죽여 목만 백제
수도인 사비로 보내고 시신은 옥중에 묻었다 하니 그 배신감에 어찌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김춘추는 급하고 분한 김에 앞뒤 생각없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새 왕인 보장왕
으로부터 수나라 침공 때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서북땅 500여 리를 돌려준다면 응하겠다는 냉담한 반응을
얻고 억류당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온다.
그런데 이에 앞서 8월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군과 협공으로 대당 창구인 당항성(黨項城, 남양)을 공격해
옴으로써 신라에서는 위급을 알리는 사신을 이미 당나라에 보내 놓았다.
마침 당 태종은 이해 10월에 서북의 강자인 설연타(薛延陀) 칸에게 종실녀인 신흥(新興)공주를 시집 보내
회유를 끝마쳤다.
이에 고구려 침공의 기회가 무르익어 감을 기뻐한 당 태종은 정관 17년(643) 3월16일에 자장을 환국시켜
고구려 침략에 대응하게 한다.
8. 황룡사 구층탑
자장의 귀국은 선덕여왕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므로 당 태종이 허락했다 하는데,
실제로 당 태종도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낼 필요성이 큰 모양이었다.
당 태종은 자장을 궁으로 불러 비단가사 한 벌과 각색 비단 500필을 내려주고 태자인 고종도 비단 200필을
따로 내려주며 많은 예물을 선사했다.
자장은 본국의 경전과 불상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 각종 불구와
불상을 얻어 귀국한다.
온 나라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며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의 명으로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황룡사 9층탑
(도판 5)을 건립할 것을 선덕여왕에게 아뢴다.
선덕여왕이 뭇신하를 불러 의논하니 모두가 이르기를 백제에서 장인을 청해 와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보배와 비단으로 백제의 장인을 청해 오니 이름이 아비지(阿非知; 아비는 결혼한 성인 남자의 일반
호칭이고 知는 존칭이니 백제 아비님, 즉 백제의 남자란 의미로 고유명사가 아님)였다.
백제 아비가 명령을 받고 탑 짓는 일을 경영하는데 이간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이 이 일을 총괄하였고
작은 장인 200여 명을 거느리게 했다.
처음 찰주(刹柱, 탑의 꼭대기에 세운 장대)를 세우는 날, 백제 아비가 꿈을 꾸니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이 보였다.
마음 속에 의심이 생겨 손을 놓았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며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金殿, 金堂)문에서 나온다.
겁에 질려 기둥을 세우자 노승과 장사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백제 아비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이루어 놓았다.
찰주기(刹柱記)에서 말하기를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이하의 높이가 183척이라 하고 있다.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서 받아온 사리 100톨을 삼분하여 그 3분의 1을 기둥 속에 넣었다.
위 기록은 ‘삼국유사’ 권3 황룡사구층탑조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1964년 12월 도굴단에 의해 황룡사구층탑지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도굴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
(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는 ‘삼국유사’와 약간 다른 내용을 보인다.
우선 자장이 당나라에 간 해가 선덕여왕 7년(인평 5년), 즉 정관 12년(638) 무술이고, 자장이 선덕여왕 12년
(643) 계묘에 본국으로 돌아올 때 남산 원향(圓香)선사에게 사직하는 인사를 하니 원향선사가 관심법(觀心法)
으로 신라 형편을 살피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 여러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고 하므로
자장이 이 말을 선덕여왕에게 아뢰어 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이에 비하면 ‘삼국유사’는 종교적인 윤색이 많이 보태진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간 용수에게 감군(監君)의 책임을 맡겼다든지, 대장(大匠)이 백제 아비이고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탑을 지었다는 내용은 양 기록이 같다.
또 선덕여왕 14년(645) 을사에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월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여왕 15년
(646)에 완공했다는 내용도 같다.
철반 이상 높이가 7보(步)라 했으니 1보를 6척으로 잡으면 42척이어서 이도 일치하고 그 이하 높이가
30보 3척이라 했으니 183척과 맞아떨어진다.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대략 55.25m이니 탑의 규모가 굉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십개 성이 함락당하는 등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으면서도, 더구나 적국인
백제의 명장을 보배와 비단으로 사다가 이런 엄청난 규모의 탑을 지었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이는 전쟁을 치르는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룩해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직 이 일을 해냄으로써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적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절박한 일념으로 전국민이 단합해 이루어낸 소산이라 하겠다.
이런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신라는 그 힘으로 장차 삼국을 통일해 나간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바탕이 돼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사실 자장이 돌아온 해인 선덕여왕 12년 9월에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해 대거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는 소문을 듣고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보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그러자 당태종은 “나도 실상 양국의 침략을 받는 너희 나라를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친
하라고 권했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돌아서면 뉘우침을 뒤집어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고 너희 땅을 양분
하려 하니 너희 나라는 무슨 기묘한 꾀를 베풀어 엎어지는 것을 막으려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신라 사신이 “우리 왕은 일이 궁색해지고 꾀가 다하여 오직 위급을 대국에 알릴 뿐이니 살려주기를
바란다”고 우는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자 당 태종은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꼴을 탓하며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
“내가 적은 군사를 움직여 요동으로 들어간다면 너희 나라의 포위를 1년쯤 풀어줄 수 있는데 이후에 뒤를
잇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면 다시 침공할 터이니 공연히 4국이 시끄럽기만 할 뿐이겠지만 이것이 한 계책
이다. 내가 또 너희에게 군복과 기치를 빌려주어 2국의 군사가 오면 세우고 벌려 놓음으로써 저들이
우리 군사인 줄 알고 달아나게 한다면 이것도 한 계책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군사를 태우고 곧장 백제를 정벌하고 나서, 너희 나라는 부인으로 주인을 삼아
이웃나라들이 얕보므로 내가 종실 한 사람을 보내 너희 왕으로 삼되 군사를 보내 호위하게 한다면 이 또한
한 계책일 것이다. 너는 어떤 것을 따르겠느냐?”
이에 사신은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기만 하였다 한다.
아무튼 이때 백제는 신라의 숨통을 죄기 위해 11월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는데, 신라는 절박한 그 시기에 황룡사탑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던 것이다.
9.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
정관 18년(644) 1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에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사신으로 보내 백제와 함께 신라의 침략을 그치지 않으면
명년에 군대를 보내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
대권을 장악한 막리지 연개소문은 신라가 수나라 공격 때 틈을 타 빼앗아간 고구려땅 500리 지경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당의 강요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자 상리현장은 “이왕지사를 따져 무엇하겠느냐” 하면서 “요동의 여러 성이 본래는 모두 중국의 군현
이었으나 중국이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고구려는 어째서 옛 땅을 반드시 되찾으려 하느냐”고 따진다.
이것은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찾으려는 당의 술책이었다.
정관 18년 2월에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 온 상리현장의 보고를 받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의 자리를 도둑질했으며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했고 지금 또 내
조명(詔命)을 어겼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침공의 뜻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자 초당(初唐) 3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명필 저수량(遂良,
596∼658년, 도판 6)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자격으로 고구려 침공을 만류한다.
“폐하가 지휘하면 중원이 맑고 평안하며, 돌아보면 사방 오랑캐들이 두려워 복종하니 위엄과 신망이 큰
때문입니다. 이제 바다를 건너 작은 오랑캐를 원정하시다가 이기면 모르거니와 만일 차질이 생기면 위엄과
신망을 손상할 것이고 다시 분김에 군사를 일으키면 안전과 위험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세적(李世勣, 592∼667년) 같은 무장은 돌궐계의 설연타가 들어와 도적질하는 것은 위징(魏徵,
580∼643년)의 말을 들어 이를 토벌하지 않은 탓이라 하며 이 기회에 고구려를 쳐 없애자고 주장한다.
이 말이 맘에 든 당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이는 진실로 위징의 실수였다. 짐이 곧 후회했으나 말하지 않은 것은 좋은 꾀를 막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당 태종이 이렇게 고구려 침공의 뜻을 굳히자 저수량은 그 친정(親征)이라도 막아보려고 2, 3명의 맹장
으로 하여금 4만∼5만 군사를 거느려 정벌하게 하라고 상소한다.
이에 다른 신하들도 뒤따라 친정의 불가를 간한다. 그러나 당 태종은 “요순 같은 임금도 엄동설한에는
씨앗을 싹틔울 수 없지만 촌사람이나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봄이 되면 누구나 씨앗을 싹틔우는 것은 천시
(天時)가 이르렀기 때문이니 천시가 이르면 사람이 그 공을 세워야 한다”며 고구려 정벌의 시기가 무르익었
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7월에는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 ?∼656년) 등을 양자강 중류 파양호변 강서지역의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로 내려보내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미를 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이 지역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피해가 비교적 적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염입덕은 수나라 장작대장으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시 요동에서 공성기구를 제작하는 등 많은 군공을
세운 염비(閻毗, 564∼613년)의 장자로서 역시 조형술이 뛰어나 이런 직책을 맡았다.
이어서 영주(營州)도독 장검(張儉)에게 조서를 내려 유주·영주의 양 도독 군사와 거란·말갈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요동을 건드려 그 형세를 살피게 하고, 태상경(太常卿) 위정(韋挺)을 궤운사(饋運使)로 삼아
하북의 군량미를 운송하여 요동에 이르는 요소마다 비축하게 하며, 태복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에게는
운하로 하남의 군량미를 운송하게 했다.
준비가 대강 끝나자 11월 임신(壬申)에 당 태종은 낙양으로 나와 수나라 침공시 참전하였던 원로대신
정원숙(鄭元璹) 등에게 그 책략을 묻고 갑오일에 침공의 진용을 짰다.
우선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물길에 능한 강회(江淮)와 영협(嶺峽) 병사 4만 명
및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용사 3000명을 이끌고 전함 500척에 태워 산동반도 내주(萊州)를 출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그 다음 태자첨사 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및 서쪽 난주와 하주에서
항복한 돌궐인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했다.
이어 당 태종은 천하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침공하는 이유를 밝힌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므로 정리상 참을 수 없어 응징하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것은, 백성을 잔인하고 포악하게 대한 수 양제가 백성을
어진 마음으로 사랑한 고구려왕을 쳤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자신의 침공이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5개항의 이유를 제시하는데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친다(以大擊小) △순리로 반역을 친다(以順討逆) △다스림으로 어지러움을 이긴다(以治乘亂)
△편안함으로 피곤함을 기다린다(以逸待勞) △기쁨으로 원망을 당적한다(以悅當怨)가 그것이다.
당 태종은 이렇게 진용을 짜고 천하에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반포한 다음 친히 6군을 총괄하여 요동을
침공해 들어간다.
이에 앞서 행군총관 강행본(姜行本)과 소부소감(少府少監) 구행엄(丘行淹)으로 하여금 장인들을 독려해
사다리와 충차 등 공성기계들을 안라산(安蘿山)에서 만들게 하였는데, 태종은 친히 나가 이를 점검하고
시험해 보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한다.
드디어 정관 19년(645) 2월에 당 태종이 낙양을 출발했고 요동도행 군대총관 이세적은 4월 초하룻날
요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뒤이어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신성(新城)에 이르고 영주도독 장검이 돌궐족을 거느리고 건안성
(建安城)으로 달려들어 출격한 고구려군 수천명을 살해한다.
이세적과 도종은 힘을 합쳐 겨우 개모성(蓋牟城) 하나를 함락하는데, 5월 기사에 들어서야 평양도행군총관
정명진(程名振)은 요동반도 끝 해안요새인 비사성(卑沙城)을 함락한다.
마침내 5월 정축에 당 태종이 요수를 건넜다. 요서 200여 리가 진흙탕이 돼 인마가 통행할 수 없으므로
장작대장 염입덕이 흙을 깔아 토교를 만들어 군대를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나서였다.
이때 이세적과 도종은 요동성을 맹공했으나 미처 함락하지 못했다.
당 태종은 요수를 건너고 나서 다리를 허물어버려 달아나지 않을 뜻을 보였고, 요동성 아래로 수백 기를
거느리고 가 성 밖에서 토산을 쌓느라 흙짐 지는 군졸들의 흙을 말 위에서 져다 나누어 주기도 하는 등
독려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요동성의 저항이 워낙 강해 정병을 모두 끌고 와 수백 겹의 포위 공격을 가하고 나서야 겨우 함락
할 수 있었다.
10. 당 태종의 안시성 대참패
이어서 당 태종은 6월 정미에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러 떠나는데 10일 만에 도착한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으로 하여금 15만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당 태종의 전략에 말려 참패당하고 결국 3만6800명의 군졸과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에 당 태종은 이세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듣자 하니 안시성은 험하고 병세가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주와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며 굴복하지 않았으니, 막리지가 공격했으나 떨어뜨릴 수가 없으므로 이로 인연해서 안시성을 그에게
주었다 한다. 건안성은 병세가 약하고 양식도 적다 하니 만약 뜻밖에 나타나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을 뿐이다.
이는 병법에서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세적은 이렇게 대답했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미를 운반
하는 길을 끊는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을 치며 가서 건안성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당 태종은 “이미 공으로 장군을 삼았으니 장군의 뜻대로 하되 내 일을 그르치지 말라”고 하며 안시성
공격을 허락한다. 그런데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치며 야유한다.
당 태종이 분노하니 이세적은 성을 함락하는 날 성안의 남자는 모두 죽이자고 청한다.
이 소문을 들은 안시성 사람들은 더욱 성을 굳게 지켜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고혜진이 안시성을 버려두고 오골성(烏骨城)을 친 다음 비사성의 장량 수군을 불러 평양성으로 곧장
쳐들어가자는 계략을 제시한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적극 반대하고 나선다. 그의 말은 이렇다.
“천자의 친정은 제장과 달라서 위험을 무릅쓸 수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오랑캐 무리가 아직도 10여만
명이나 있으니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모두 우리 뒤를 밟아올 것이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취한 다음 길게 몰고 나간다면 이것이 만전지계(萬全之計; 만 가지로 안전한 계책)다.”
이에 여러 장수가 급하게 안시성을 쳤으나 끄떡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강하왕 도종은 성의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올려 성 높이에 가깝도록 했다.
그러자 성 안에서도 성을 더 높이 쌓아 이를 막고 군사들이 교대로 지키니 하루에도 6, 7합을 겨뤘다.
충차(衝車)로 돌을 쏘아 올려 그 성의 층집가퀴를 무너뜨리면 성안에서는 목책(木柵)으로 무너진 곳을 막았다.
당 태종은 도종이 발을 삐자 친히 침을 놓아줄 정도로 극진히 장병을 독려하여 산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
으니 60일이 되자 동원된 인원이 50만 명에 이르렀다.
결국 토산이 이루어지고 성에서 몇 길 떨어진 토산 마루에 오르면 그 아래로 안시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에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산마루에 머물며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을 무너뜨렸다.
때마침 복애가 몰래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군 수백 인이 성이 무너진 틈에서 나와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차지하고 해자를 둘러 지켰다.
당 태종이 노해서 복애를 참수해 조리돌리고 제장에게 명령하여 3일 동안 연속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 나와 죄를 청하자 당 태종은 마땅히 죽어야 하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을 참작하여 특사로 죽음을 면하게 하며 바로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요동지방은 추위가 빨리 와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9월에 안시성 아래에서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서서 떠나는데, 성 안에서는 모두 인적을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홀로 성 위에 올라 전송했다.
이에 감격한 당 태종은 성을 잘 지킨 것을 치하하고 비단 100필을 놓고 가며 왕을 힘써 섬기라고 했다 한다.
싸움에 져본 일이 없다는 당 태종이 10여만 대군을 직접 몰고 와서 두 달 동안이나 안시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고 회군한 것이다.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당 태종의 심경은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터인데, 당장 고구려군의 추격이 두려워
이세적과 도종을 후군 대장으로 삼아 4만 군사로 후방을 방비하면서 황급히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요하 일대의 진흙탕은 인마의 발을 묶어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몰려오는 추위는 전쟁의 참패로
심신이 피폐해진 병사들의 육신을 얼려 놓으니 얼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당태종은 장손무기로 하여금 장병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깎아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삼도록 하면서 회군을 서둘렀다.
얼마나 마음이 조급한지 그 자신이 말 채찍에 풀을 매달아 풀 옮기는 일을 솔선해 장병들을 격려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때 당 태종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과는 목적과 조건이 근본적으로 다르
다며 호언장담하고, 필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조서까지 반포
하면서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선발대가 요수를 건넌 지 불과 5개월 만에 안시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수많은 군사를 잃은 채
양식이 떨어져 허겁지겁 쫓기듯 군사를 되돌렸으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영웅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이때 당 태종은 입고 떠난 옷을 갈아입지 못해 의복이 해어져 걸레 같았다 한다.
차라리 필승의 조건을 열거한 조서나 반포하지 않았더라면 덜 창피했을 텐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된 참담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을 깊이 후회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만약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길이 있지 않게 했으리라(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11. 삼화령(三花嶺)의 석미륵(石彌勒)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던 해인 선덕여왕 12년(643)은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멸망시킬 것이
라는 ‘9월 공략설’이 널리 떠돌던 불안한 해였다. 그래서 신라는 자장을 불러들였고, 당 태종은 이를 이용해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삼으려 자장에게 물심양면으로 희망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에 자장은 귀국하자마자 선덕여왕이 특수 신분을 타고난 성골로 미륵보살이란 사실을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은 사실을 공포하고,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고구려와 백제를 항복시킬 수 있
다고 선전했다. 그래서 전국민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공에 시달리는 사이 이 거대한 조탑불사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이 일만으로는 선덕여왕을 신격화하기엔 부족한 듯, 미륵보살상이 아닌 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은근히 선덕여왕을 하생한 미륵불로 승격하는 일을 진행했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삼화령미륵불삼존상(三花嶺彌勒佛三尊像)>이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주존인 미륵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걸터앉은 상)으로 높이가 160cm이며, 좌우 협시보살은 모두 입상인데 좌측은 높이가 100cm, 우측은 98.5cm
이다.
이 불상을 미륵불로 보는 것은, 중국 돈황 막고굴에서 북량(北凉)시대인 430년경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근
200년 동안 줄기차게 조성돼온 하생미륵불좌상의 형태가 거의 이런 의좌불 형식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생미륵불이 의좌불 형식으로 표현된 것은 막고굴뿐 아니라 운강석굴과 용문석굴, 맥적산석굴 등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으며 단독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런 의좌불 형태의 미륵불상 조성이 특히 600년대를 전후한 수·당 통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 시대 사람들이 통일을 이룩한 군주를 하생미륵불로 보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벽화에서도 의좌상이 주존으로 등장하는 <미륵불 삼존도>를 널리 그리고 있다.
그 결과 신라에서도 이런 의좌불 형식의 미륵불삼존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양식은 수양제 대업(大業) 6년(610) 전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돈황 막고굴 제410굴 서벽 감실 속에 모셔진 <막고굴 제410굴 미륵불의좌상> 양식을 계승한
듯한 느낌이 강하다.
4등신에 가까우리만큼 넓고 큰 동안형의 얼굴, 머리칼을 표현하지 않은 깎은 머리 형태에 나지막하고
작은 육계, 오른손을 시무외인처럼 무릎 위로 올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대 여원인을 지은 손짓 등이 한눈
으로 보아 막고굴 미륵상과 양식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만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은 시무외여원인의 본 뜻을 헤아리지 않고 조형성에 탐닉하다 보니 손가락을
모두 꼬부려 수인의 의미를 망각한 것이나, 양 무릎에 옷주름 무늬를 나선형으로 돌리는 양식화 현상을
보인 것이 중국과 다르다.
얼굴이 차지하는 비례가 더욱 커지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친근감을 보여주는 것도 차이점이다.
이마가 좁고 백호가 없으며 코가 더 커지고 볼이 풍만하며 목이 짧아지고 귀가 길어진 것도 서로 다른 점
이다. 목은 짧아졌는데 귀가 더 길어지니 귓불이 어깨를 덮어내리는 특이한 표현을 하고 있다.
옷주름을 간소화하면서 얇게 표현한 것은 신라만의 특징적인 표출이라 할 것이니,
이는 뒷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굴암 십일면보살입상>으로 이어지는 신라 고유 양식이기도
하다.
이런 차이는 오히려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 <막고굴 제410굴 미륵불의좌상>을 범본으로 삼아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만큼 서로 깊은 양식적 유대감을 보여주고 있다.
<삼화령미륵불삼존상> 주불의 양 옆에 시립한 좌·우 보살 입상은 ‘애기보살’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을
만큼 앳된 소년소녀의 모습인데 역시 4등신에 못 미칠 만큼 얼굴이 커서 동자와 같은 체구를 보여준다.
단순한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보관을 쓰고 가슴에 구슬 목걸이를 걸었다. 상체는 벌거벗은 채 천의만 두
어깨에 걸쳤는데, 천의자락이 앞면으로 내려와 배와 무릎 근처를 이중으로 가린 다음 그 양끝은 두 어깨로
다시 올라가 어깨 뒤에서 각기 양쪽 발끝까지 흘러내리게 하는 독특한 처리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몸매를 천의자락이 지탱해주는 것 같은 의외의 효과를 드러낸다.
주불의 위엄 속에 숨긴 미소와 대조적으로 두 보살은 아기 같이 천진하고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왼쪽 보살은 왼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오른손으로 연잎을 들었으며, 오른쪽 보살은 왼손으로 악기 같은
지물을 어깨 높이까지 받쳐들고 오른손은 그것을 받쳐주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다.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은 1925년 4월 경주군 내남면 월남리 산등성이에서 발견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왔는데 발견 당시 남향한 큰 고분 속에 모셔져 있었다고 일본인 학자는 기록해 놓고
있다. 발견 당시까지만 해도 땅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상호가 완전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산아래 동네 나무꾼 아이들의 철없는 장난으로 코가 떨어져 나갔다 한다.
참으로 아깝고 분한 일이다.
이때 이미 두 보살 입상은 월남리 민가로 옮겨 숨겨놓았으므로 비슷한 시기에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한다.
일인학자가 발견 당시에 고분 속에 묻혀 있었다고 기록한 내용은 광복 후 황수영 선생의 연구 결과 고분이
아닌 인조석굴이었음이 밝혀져 석굴암의 선구 형태가 이 시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 자장과 연결된 사유를 기록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삼국유사’ 권3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선덕왕 때 석생의(釋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어떤 승려가 와 남산
으로 끌고 올라가면서 풀을 묶어 표시하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남산의 남쪽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청컨대 대사는 꺼내다가 산마루 위로 옮겨 주시오.’ 꿈을 깨고 나서 친구
들과 함께 표시를 따라 찾아가니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땅을 파자 돌미륵이 있는지라 꺼내다가 삼화령 위에 모시고 선덕왕 13년 갑진(644년)세에 절을 지어
살았다. 그래서 뒤에 생의사라 했다.”
선덕여왕 13년에 돌미륵을 남산 삼화령 밑 남쪽 골짜기에서 파내 삼화령으로 옮겨 모신 것이 바로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이라는 것이다.
땅에 묻혀 있다가 꿈에 현신한 것은 종교적 신비성이니 논외로 친다 해도, 이 미륵삼존상이 적어도 선덕
여왕 13년(644)에 이미 조성된 것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자장이 돌아온 바로 다음해다.
자장은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해 여왕의 특명을 받고 당나
라로 가서 중국 오대산에 살고 있다는 문수보살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고 돌아왔다.
자장은 진골 출신으로 왕의 지친이었기 때문에 당 태종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중국 각처의 성지를 여행
했을 터이니 그가 돈황 막고굴이나 대동 운강석굴, 낙양 용문석굴 등을 참배했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하생미륵불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이를 신라에 재현할 생각을 했을 듯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필 남산 북쪽 봉우리 해목령(蟹目嶺) 아래의 작은 산마루인 삼화령에 이 미륵불 삼존상을
조성해 모실 생각을 했을까.
그 이유는 ‘삼국유사’ 권5 명랑신인(明朗神印)조에서 찾을 수 있는데, 뒷날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가
된 명랑(明朗)법사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인 남간(南澗)부인의 아들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랑법사는 바로 삼화령 밑동네인 남간 마을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다.
자장의 매제, 즉 명랑의 부친은 사간(沙干) 재량(才良)이었다 하는데 아마 박씨였을 듯하다.
박혁거세의 능인 오릉과 박씨 왕인 일성왕릉의 연장선상에 남간 마을이 있으니 이 일대가 박씨의 세습
주거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래 박씨는 반불교적인 성향이 커서 김씨 왕조가 불교를 수용해 주도이념으로 삼아가는 데 항상 견제해
온 듯한데, 김씨 왕조는 그때마다 내외척으로 혈족 관계인 박씨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결해 왔다.
따라서 이 미륵불상을 박씨들이 대물려 사는 남간 마을 뒷산에 조성해 모심으로써 민심의 완벽한 결집을
내외에 천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꿈을 꾸고 땅 속에서 파내게 하는 종교적인 신비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남간부인의 세 아들, 즉 자장율사의 생질 삼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첫째는 국교
(國敎) 대덕(大德), 둘째는 의안(義安) 대덕이 되며, 막내가 명랑법사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석생의가 혹시 뒷날 의안(義安)대덕으로 불리는 인물일 수도 있다. 더구나 명랑법사는 벌써 자장에 앞서서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자장이 당나라로 떠나기 직전인 정관 9년(635)에 돌아왔다고
하니, 외숙인 자장에 앞서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고 보아야 한다.
두 집안이 이렇게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의 조성도 이들과 결코 무관
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출처] : [촤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⑪]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