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뒤꿈치
최원현
아내가 어디서인지 봉숭아꽃과 이파리를 한 웅쿰 가져왔다. 아이들은 봉숭아물을 들여 준다는 제 엄마의 말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서로 먼저 하겠노라 수선들을 떤다. 약국에 가서 백반을 사 오고 싸맬 비닐 종이며 묶을 실을 준비하고 꽃잎을 으깨기 시작했다. 금세 방안이 상큼한 봉숭아 내음으로 가득 찬다.
봉숭아꽃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는 풍속은 백여 년 전부터 성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각지에 봉숭아가 퍼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란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원나라에 가 있던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소녀가 가야금을 뜯는데 줄을 뜯는 열 손가락마다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잠을 깨었으나 마음이 스산했다. 해서 궁궐 뜰을 거닐게 되었는데 열 손가락을 하얀 헝겊으로 동여맨 눈 먼 궁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고려에서 공녀(貢女)로 붙들려 왔는데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너무 자주 울다 보니 눈이 멀어 버렸으며, 손가락은 봉숭아물을 들이는 중이라 했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손가락에 물을 들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녀는 자신의 충정을 가야금 곡조로 바쳤는데 왕은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에 돌아온 충선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찾아오도록 했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를 생각하며 궁궐 뜰에 봉숭아를 심게 하여 그녀의 넋을 위로케 했는데, 그 때부터 봉숭아가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실부모한 나는 시골의 외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딸만 셋을 두신 외조부모님께선 사위 복도 없으셨는지 맏딸과 맏사위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다. 거기에 둘째 딸까지 출가시킨 데다 막내딸마저 혼사 날짜를 받아 놨으니 허전함이 오죽 크셨겠는가. 해서 일손도 하나 늘릴 겸 큰집의 공허함을 조금이라도 메꿔 보자고 계집애 하날 데려왔다. 이름이 연실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일곱 살이었고, 연실인 나보다 두 세살 위였던 것 같다. 막내 이모가 시집을 가버린 집에서 연실이는 이모의 자리를 그런 대로 잘 메꿔 주었다.
우린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이듬해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집에 와서 연실에게 가르쳐 주면 그녀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잘 알아버렸다.
그 해 여름이었다.
마당가에 심은 봉숭아꽃이 유난히도 아름답던 어느 날, 연실인 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남자가 창피하게 무슨 봉숭아물을 다 들이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빨갛게 물든 예쁜 자기 손톱을 보여 주며 내게도 들여주마고 성화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피해 숨바꼭질 아닌 숨바꼭질을 했다. 허나 그날 밤 내가 잠이 든 사이에 연실인 내 양쪽 새끼손가락 손톱에 빨간 봉숭아물을 들여놓고야 말았고,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온종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울면서 집에 돌아온 나는 연실의 방에 뛰어 들어 그녀가 아끼는 반짇고리를 힘껏 내동댕이쳐 버렸다. 놀라서 뒤따라 들어온 그녀의 눈이 물동이만큼 커졌다. 그녀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자기는 다만 내 손톱도 그렇게 예쁘게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더 이상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다음 해 봄, 우리 집을 새로 짓게 되었다. 십 리가 넘던 등교길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녀가 더 신이 나 했다. 꿀벌처럼 부지런히 일꾼들의 새참과 점심을 날랐다.
상량이 올랐다. 그런데 그처럼 좋아하던 연실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나의 발은 어느덧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방에 누워 있었는데 온 몸이 펄펄 끓는 듯 열이 올랐고, 자꾸만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발뒤꿈치가 아프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만이 아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끝내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받아들이는 영악스러움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을까? 꼭이 발뒤꿈치가 아파 죽은 것은 아니련만, 나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새 신발을 사서 발뒤꿈치가 벗겨져 아프기만 해도 죽은 연실이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발뒤꿈치의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발뒤꿈치가 아프면 정말 죽는 걸까? 죽음의 신은 발뒤꿈치를 잡고 끌어 가는 것일까? 사람은 태어날 때는 머리부터 나오는데 죽을 때는 발뒤꿈치부터 끌려가는 것일까? 나는 동네서 사람이 죽게 되면 죽기 전에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었느냐고 할머니께 묻곤 했다.
삼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봉숭아만 보면 곱디고운 연실의 마음과 항시 잃지 않던 맑은 웃음이 그녀의 넋이 되어 꽃으로 피어난 듯 싶다. 그래 한참 보고있노라면 꽃 속에서 연실이 성큼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겠다고 나설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림자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연실이는 내게 그리움과 외로움의 작은 파문을 던지고 갔다. 그 연실을 생각케 하는 봉숭아꽃을 한 움큼 가져온 아내. 아내는 아이들에게 봉숭아물을 다 들이고는 꽃잎이 조금 남는다고 이젠 내게까지 손가락을 내밀란다.
새끼손가락 손톱 위에 백반 섞은 봉숭아꽃잎을 얹으니 시릿한 감촉이 아릿아릿 전해 오고 꽃 내음이 더욱 짙다. 비닐종이로 돌돌 싸고 실로 칭칭 감는데 아이가 켠 라디오에서 가야금 산조가 흘러나온다. 문득 원나라에 붙들려 가 가야금을 타던 궁녀 생각이 떠오르며 어린 날의 향수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바람이 인다. 마당가의 봉숭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들이 순간 수천의 작은 연실의 모습이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연실인 봉숭아꽃 요정이었을까?
내 손톱에 든 봉숭아물은 연실의 고운 마음의 색깔이 아닐까? 봉숭아물을 들이고 나니 이상스럽게도 내 발뒤꿈치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