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8월 2일 일요일]
《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광개토왕 대마도 삼가라 정벌》 (66)
任那者 本在對馬島西北界 北阻海 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 任那 乃對馬全稱也 自古 仇州對馬 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任那 又分爲三加羅 所謂加羅者 首邑之稱也 自是 三汗相爭 歲久不解 佐護加羅 屬新羅 仁位加羅 屬高句麗 鷄知加羅 屬百濟 是也 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倭 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 然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로서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관청이 있는 곳을 국미성이라 하고, 동쪽과 서쪽 기슭에 각각 마을이 있는데 혹은 조공하고 혹은 배반했다. 후에 대마도의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칭하는 말이 되었다. 예로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세를 이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세 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란 말은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때부터 세 가라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싸워 오랜 세월 동안 화해하지 못했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며,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하는 게 이 때문이다. 영락 10년(광개토대왕 400년) 세 가라가 모두 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이 모두 임나의 통제를 받았다. 열 개의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직할령이었으므로 열제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논주] 이 기사는 임나, 대마도, 구주의 고대사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다. 고대에 한일해협은 동네 호수와 같은 해상 교통로였다. 일본열도 화산에서 분출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시대의 장신구와 생활 도구들이 남해안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발굴되고 있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물과 유적들 또한 대마도-구주 일대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다. 문화는 사람들과 함께 건너간다. 그러므로 대마도와 구주에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까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남해안과 대마도, 구주에는 원래 중국 동남부 쪽에서 이동해온 죠몬인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기원전 300년부터 한반도 북쪽에서 고조선인들이 밀려내려 오면서 죠몬인들이 한반도 남해안에서부터 차츰 밀리기 시작하여 주류가 대마도와 구주 쪽으로 이동했다. 잔류한 죠몬인들은 한반도인들과 섞이면서 소수가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대마도와 구주는 도래인들과 죠몬인들의 혼혈로 차츰 왜국화 되었다.
영락 10년 경자년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으로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고 계속하여 대마도와 구주ㅡ 본주를 정벌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한 것으로 마치는데, 계연수가 미리 탁본한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고구려군이 일본열도를 정벌하고 항복을 받았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1800년대 말에 일본군 장교가 비문에서 그 기사를 깎아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고구려국본기]는 경자년 400년의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과 1910년 경술국치 침략 때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임나일본부’ 설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현재에도 강조하며 독도 영토 수복론과 함께 일본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 그쪽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 한국에서 무어 크게 비판할 필요는 없다. 우리 한국도 이미 옛날에 대마도-구주-본주를 정벌하고 항복을 받은 적이 있다. 일제 식민지와 피장파장이다.
임진왜란 때도 문치를 정책으로 하다가 갑자기 침략을 당해 초장에 우왕좌왕했지, 1592년 음력 5월 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옥포해전에서 왜수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기점으로 조선군과 의병들이 의지와 용기를 회복하면서 전세가 서서히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명나라 군대가 들어오기 반 년 전인 음력 6월4일 평양성을 점령한 소서행장군은 더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함경도로 올라간 가등청정군도 장기주둔하지 못하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육군과 수군 그리고 의병들의 활발한 전투 활동 때문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14만 왜군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를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에 1000만 가까운 조선인들의 그물 속에 든 고기와 마찬가지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원인은 주자학 위주의 문존무비 정책 때문이었다. 또한 국왕인 고종과 순종이 매국 문서에 옥쇄를 찍었기 때문에 항일의병 활동이 공식적으로는 국왕의 정책에 거역하는 반역이었다. 그래서 사대부들과 선비들의 주류가 움직일 명분이 없었고, 백성들은 조정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왕의 권위가 사라진 식민지 1919년에는 수백만 백성들이 항일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도 국왕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지 않고 한양에 있다가 붙잡혀 항복했다면 전쟁이 즉시 끝났다. 몰론 조선은 소서와 가등 등 왜장들의 분할지로 나누어지고, 반항하는 자들이 제거되고 순종으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농사짓는 노비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일제식민지 시대 친일부역자들처럼 왜장들에 아부하며 마름이 된 양반층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 선조가 몽진하여 저항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신하들과 양반사대부, 백성들 모두가 떨쳐 일어나 왜적에 맞서 대차게 싸울 수 있었다.
지금 현재 일본인 혈통 속에는 한반도계가 많다. 한반도에서 열도로 건너간 혈통은 다수이지만 거꾸로 열도에서 한반도로 역류한 혈통은 극소수이다. 일본만 한반도를 침략한 게 아니다, 한반도인들도 일본열도를 공격하고 정벌했다. 현대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더이상 침략할 땅도 내놓을 땅도 없이 국경선이 빡빡하다. 침략하고 싶어도 세 국가 모두 국방력이 빵빵하여 어느 국가의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게 인지상정이고, 이것의 확대가 국가 정책이므로 앞으로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다시 한번 한일 간에 독도 문제 등을 두고 전쟁이 벌어진다면, 21세기의 대한민국은 1910년에 무기력하게 당한 조선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민주시대의 한국인들은 국왕의 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위해 외적에 맞서 대차게 싸울 것이다. 2026. 8. 2 장장하일 남선헌에서 개산팔경 박희용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