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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계는 없고 편견만 있다, 농인 예술인이 펼친 특별한 시세계
― ‘2024년 예술단체의 예비예술인 최초발표지원’ 사업 결과물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2024년 12월에 다소 특별한 시집 두 권이 동시 출간되었다. 옥지구의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와 한재희의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가 그것이다. ‘2024년 예술단체의예비예술인 최초발표지원’이란 사업명으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가 공모하고, 장애예술단체인 <풍경놀이터>와 <출판사 핌>이 컨소시엄으로선정되어 협업한 결과이다. 결과론이지만 기성 예술인을 주로 지원하는 아르코가 예비예술인, 그중에서도 농인 예비예술인에게 기회를 준 것은 매우 특별한 이벤트였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12월 31일 기준 ‘전국 장애인 현황’을 보면 전국에는 약 43만 명의 농ㆍ청각장애인이 존재한다. 이들은 전체 장애인 중 16%를 차지하며, 장애유형으로는 지체장애 다음으로 2위이다. 하지만 음성언어 중심 사회에서 청각장애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수어 통역사, 문자 통역사 등 전문 인력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하므로 다른 장애에 비해 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 여건은 매우 취약하다. 이렇다 보니 청각장애는 장애예술인의 장애 유형 비율 중 지적장애(34.3%), 지체장애(26%), 시각장애(15.0%) 등에 비해 4.1%로 매우 저조하다(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2021년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 현장 자료(방귀희, 『장애인 문학론』)에 의하면, 장애인을 위해 구상솟대문학상이 제정된 1996년부터 2018년까지 본상 수상자는 22명, 1991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된 신인상 수상자는 24명으로 총 46명이다. 그중 지체장애가 36명으로 압도적이고 시각장애와 뇌병변장애 등이 뒤를 잇는데 청각장애는 2008년도 시 부문 수상자인 김민수, 단 1명뿐이다. 구어 소통이 불가능한 청각장애인의 특성에 더해, 청각장애인 교육 시행 시 소통을 위해 갖춰야 할 제반 사항 지원의 어려움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다음 장면은 그 일단이다.
#장면 1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삼각지’의 한 강의실. 문장력 강화 훈련 시간이다. 긴 탁자가 있고, 탁자 정면에는 ppt를 띄운 대형 스크린이, 그 왼쪽에는 문자 통역사가 ‘전문 예술인 강사’의 말을 전환한 문장을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는 스크린이 있다. 두 대의 스크린 사이에서 수어 통역사는 강사의 말을 수어로, 예비예술인 5인의 수어는 구어로 강사에게 전달해 준다. 문자 스크린과 대각선인 탁자의 맨 앞 오른쪽에 앉은 문자 통역사는 강사와 수어 통역사의 구어를 문자로 전환하고 있다(문자 통역은 수업 중 놓친 부분을 복기할 수 있도록 수업 후 파일 형태로 예비예술인에게 제공된다). 긴 탁자 양편으로 예비예술인 5인(시 2, 소설 3)이 띄엄띄엄 앉아 자신의 청력 정도에 따라 문자 스크린이나 수어 통역사, 강사 혹은 탁자 위에 놓인 ppt 복사자료를 보고 있다. 수어 통역사에 시선이 가 있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인공와우나 보청기를 착용하여 어느 정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들이다. 출입문 쪽 탁자에는 ‘진행강사’, 시 전문 강사, 행사지원 등을 맡은 작가들이 수업의 전 과정을 공유하고 있다. *2024년 풍경놀이터×출판사 핌의 ‘예술단체의 예비예술인 최초발표’ 지원 사업의 실제 장면. |
# 부연 1
문장력 강화를 위해 5회의 공통 수업이 마련된 것은 예비예술인들이 고학력이고 직장 생활을 하며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는 등 나름의 사회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언어와 문장 구사 능력이 각기 다르고, 농인이 사용하는 수어 문법과 청인이 사용하는 한국어 문법이 다른 데에 기인한다. 우선 어순이 다르다. ‘개가 빨리 뛴다’가 수어로는 ‘[개] + [뛰다] + [빠르다]’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가’가 생략된 것처럼 수어에는 ‘은, 는, 이, 가, 을, 를’ 등의 조사가 없어서 이를 글로 표현했을 때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일도 잦다. ‘숨이 잘 쉬는 게 중요하다’와 같이 ‘을’ 대신 ‘이’가 쓰인다거나, ‘가지가 자를 위기에 처한다’에서 ‘잘릴’과 ‘자를’처럼 주격조사와 목적격조사가, 혹은 자동사와 타동사가 혼동되기도 한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같은 합성어는 ‘[교육] + [과학] + [기술] + [책임]’이란 수어 단어로 표현되고, ‘형편없다’는 ‘[기술] + [없다]’로 표현되면서 ‘솜씨 없다’, ‘신통치 않다’와 같은 문장 등을 포괄하며, ‘솜씨가 좋다’거나 ‘재주가 있다’, ‘탁월하다’는 ‘[기술] + [있다]’에 포괄된다. 어휘력 확보에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수어는 일상언어의 중의적 의미나 은유적 표현을 배제해야 정확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비가 온다’가 ‘[비] + [있다]’로, ‘창문 밖에 바람이 분다’가 ‘[창문] + [밖] + [바람] + [있다]’로 표현되는 것은 ‘온다’와 ‘분다’라는 동사의 다의성과 추상성을 제거하고 시각적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력 강화 훈련은 수어 문법은 최대한 살리되 국어 문법과 문학적 비유 체계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들 대부분은 라디오 방송은 아예 들을 수 없으며, 자막이 없으면 TV 뉴스도, 유튜브도, 한국 영화도 이해하기 어렵다. 수어와 문자 통역이 없으면 정보 습득이나, 교육, 언어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문학과의 소통은 물론 대중과의 교류도 쉽지 않다. #장면 1과 같은 교육 환경이 필요한 이유이다.
#부연 2
통상적으로 책 출간은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하면서 시작해도 최소 몇 개월이 소요된다. 그러나 아르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허용된 시간은 농인 예비예술인 5인을 선발한 4월부터 출간과 북 토크를 완수해야 하는 12월까지 단 9개월이었다. 완성된 원고를 가진 사람은 없었으며, 오히려 한 편의 글조차 갖고 있지 않은 이도 있었다. 따라서 무엇보다 동선을 줄여야만 했다.
작가이자 사업 총괄 수행 책임자인 <풍경놀이터>의 구본순 대표는 아르코와 소통하면서 한편으로 통역 언어와 문학 언어의 간극을 메꿔 주는 ‘진행강사’이다. 수어와 문자 통역이 가능했기에 통역사와 별개로 1:1 멘토링을 포함한 모든 수업에 참석하였다. ‘살얼음’이란 단어를 수어 통역사가 ‘얇게 살짝 언 얼음’이란 사전적 의미를 포함해 여러 방식으로 설명했지만, 예비예술인은 ‘[살] + [얼음]’에서 ‘살’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 개입해 난관을 돌파하는 것도 ‘진행강사’의 역할 중 하나이다. 작가로서 ‘전문 예술인 강사’를 맡은 <출판사 핌>의 맹현 대표는 교육과 멘토링 부문을 총괄했다. 책 출간을 주도하면서 공통 수업인 문장력 강화 훈련 강의와 소설 부문의 1:1 멘토링, 교정ㆍ교열과 편집 등을 담당했다. ‘전문 예술인 강사’로서 나는 시와 평론 부문을 맡았으며, 시적 문법 강의와 시 부문의 1:1 멘토링, 교정ㆍ교열과 편집, 그리고 <문학 안에서 수어의 가능성>을 주제로 한 세미나의 기획과 진행, 발제에 참여하였고, 옥지구와 한재희의 시집 해설을 썼다. 작가 송현정은 소설 부문의 교정ㆍ교열 멘토링, 편집, 작가 인터뷰 및 기록, 각종 행사 지원(세미나, 예술인과의 네트워킹, 북토크)을 맡았다. 일인다역을 통해 동선을 최소화하는 데는 평소에 <출판사 핌>의 책들을 출간하면서 잘 맞는 호흡을 유지한 디자이너와 인쇄소도 포함된다. 이들 역시 9개월 만에 두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소설책을 출간하는데 기여했다. 기막힌 원팀 플레이가 아닐 수 없었다.
#장면 2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삼각지’의 한 강의실. 시 부문 예비시인인 옥지구의 1:1 멘토링 시간이다. 화면의 왼편에는 시 「할미꽃」이 떠 있고, 오른쪽에는 시에 대한 피드백이 메모 형태로 떠 있다. 시 40편 중 31번째 시로, 이미 30편에 대한 피드백을 마친 후였다. 나는 「할미꽃」과 이 시를 쓴 옥지구 예비시인에게 발상도, 상상력도, 언어도 나무랄 데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TV 뉴스나 국회 방송 등에도 자주 출연하는 박지연수어 통역사가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건지 몰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문자 통역을 하고 있던 구본순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2024년 풍경놀이터×출판사 핌의 ‘예술단체의 예비예술인 최초발표’ 지원 사업의 실제 장면 |
#부연 1
아르코 프로젝트에 임하면서 <풍경놀이터>와 <출판사 핌>이 모토로 정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청년 농인들의 일회성 ‘예술 경험’을 넘어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었다. 맹현 대표가 예비예술인들에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사용법을 설명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언제, 어디서든 독립적으로 문장력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해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 강사도, 통역사도 동반 성장하였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청각장애인 관련하여 문학과 미술 분야 등에서 협업하여 사업을 진행한 바 있는 구본순, 맹현 대표를 비롯해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나도 마찬가지였다. 농聾세계의 매력에 눈뜨게 되었고, 세미나 때 나의 발제 주제인 「문학에서 ‘수어’의 잠재적 가능성」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한국어의 관점에서 문법 체계 오류로 치부될 수 있는 수어적 문법이 오히려 글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는 화학 작용 가능성을 기대하고 실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몇십 년 동안 이어 왔던 시 관련 강의의 정수를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맛보게 되었다.
박지연 수어 통역사는 수업 초반에 특히 시에 대한 통역이 쉽지 않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의 말을 옥지구에게 수어로 전달하고, 옥지구의 수어를 내게 구어로 전달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구본순 대표도, 당사자인 옥지구도 시 부문 최적의 통역사로 꼽은 게 박지연 통역사였다. 시적 문법 강의와 1:1 멘토링 시간에 참여하면서 시에 눈을 떴다고 지난번의 고백을 갱신한 그녀가 눈물 글썽이던 시 중 하나가 다음 시이다.
#부연 2
제가 주는 꽃다발에
당신의 억척스러움이
바스락, 부실해졌습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허리가
굽어지는 것을 불허합니다
이제 이별 항공사에 문의하겠습니다
천국 명단에서 춘의 이름을 제외해 주세요
방금 아름다움을 목격했기 때문에
애증의 힘이 사랑스러워졌어요
춘이 많이 아프기엔 아직 마음이 여립니다
춘, 난 아직도 당신을 미워하고 싶습니다
꽃다발을 주지 말 걸 그랬습니다
엄청 좋아하는 표정에 오히려
동정이 부유해졌단 말이죠
춘, 거친 손으로 요리하는 음식에
어떤 세월을 보내셨는지 짐작합니다
그래도 남은 생에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요리해주세요
당신의 예민한 폭주를 용서할 테니
춘, 무뚝뚝한 내 얼굴에 울지 말아요
저 지금 솔직해지기 쉬운 마음을 밟고 있습니다
내 의견이 밉더라도
빈말을 꾸밀 줄 모릅니다
제발이라고 말하기엔
마음의 결이 이미 녹슬어버린다
―옥지구, 「할미꽃」 전문
아마도 화자의 할머니가 ‘춘’일 것이다. ‘춘’과 화자의 사이가 안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꽃다발을 처음 선물했는지도. “당신의 억척스러움이/ 바스락, 부실해”지면서 “엄청 좋아하는 표정”을 화자가 처음 보았다는 대목 때문이다. 애증은 사그라지고, 당신 마음의 여린 부분이 짚어진다. 한편 이것이 동정심이 아닌가 싶어 나는 오히려 당신을 미워하면서 꽃다발을 주지 말 걸 하고 후회한다. 이 시에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남은 생에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비록 “예민한 폭주”라 해도 “용서할”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솔직해지기 쉬운 마음을 밟고”, “빈말을 꾸밀 줄 모”른다고 앙다무는 마음이 모질수록 ‘춘’의 허리는 굽지 않을 것이며, 천국 명단에서 춘의 이름은 제외될 것이라는 역설의 성취!
#장면 3 신논현역의 한 스터디 카페. 탁자 위 모니터에는 피드백이 담긴 hwp 파일이 열려 있고, 2024년 여름의 무더위는 에어컨과 냉커피를 피해 건물 밖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재희의 1:1 멘토링 과정이 중반기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살인이나 사기, 배신 등 이슈화된 시사 문제가 시의 주된 소재로, 그녀의 시에 난무한 피와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들이 좀체 순화되지 않고 있었다. 나의 과도한 개입으로 한재희의 시가 아니라 어느새 이영숙의 시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인공와우 사용으로 어느 정도 구어 소통이 가능한 한재희 수업에는 수어 통역사 대신 단어와 맥락 등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전달하면서 수업 내용을 문자로 남기기 위해 구본순 대표가 동석했는데, 심성이 여리여리한 한재희와 시의 분위기가 너무 다른 것을 의아해했다. *2024년 풍경놀이터×출판사 핌의 ‘예술단체의 예비예술인 최초발표’ 지원 사업의 실제 장면 |
#부연 1
내가 이날 깨달은 것은 지금까지 한재희의 시적 자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폭력과 어둠, 직설적인 언어여서가 아니라 남의 것을 빌려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늦은 시각에 구본순, 맹현 대표와 화상 미팅을 하였다. 결론은, 지금까지 쓴 것을 다 폐기하고 본인이 쓰고 싶은 소재와 방식으로 새로 시작하기! 글의 초보자들로 꾸려진 팀을 이끌어 책을 출간한 경험이 있는 맹현 대표가 한재희의 러닝메이트가 되기로 했다.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교정ㆍ교열에 접어들 시기인 7월에 시 한 편도 없는 상태라니! 정해진 기한 내 시집 출간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과 내면이 거세된 시로 책이 출간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때부터 나는 소금 짐을 진 당나귀였지만, 소설 부문의 세 명과 1:1 멘토링을 진행하고 있던 맹 대표는 솜 짐을 진 당나귀가 되었다. 물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재희는 글을 써 대고, 맹 대표는 피드백을, 구 대표는 문자 기록을 하느라 3인은 2~3일에 한 번씩 일과를 마친 야간에 화상 미팅을 하였다. 결과물을 4인 단톡방에서 공유하고 있었는데, 8월 4일에 2편이 파일 첨부된 이래 10월 5일에 67편이 담긴 파일이 올라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폭발한 게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편집 과정에서 자연스레 몇 차례의 교정ㆍ교열이 이루어졌고, 최종 65편의 시가 시집 안에 담겨 12월 19일에 무사히 출간할 수 있었다. 우회가 곧 지름길이었음을 보여 준 그녀의 첫 일성이 「맨드라미의 소원」이다.
#부연 2
나비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꽃이
혼자라는 사실은
조용한 슬픔이다
소리치지 못하는 아픔이다
시냇물은 어떻게 우나
개미가 더듬는 소리까지
듣고 싶은 소원이
귀의 모양을 닮아가고
피어날수록 나를 주름지게 했다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하는
나날들
모두가 바람에 흔들리며 웃을 때
이유 모를 웃음을
애써 지어야 했던
외로운 비명이다
―한재희, 「맨드라미의 소원」 전문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목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시집 해설의 제목을 이 시에서 파생된 이미지, 곧 「낮은 곳에서 나지막한 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로 잡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저 낮은 곳에서 나지막한 시가 올라온다. “맨드라미”의 눈높이에서 시작되는 세계. “나비”와 “꽃”은 공생 관계이지만 ‘어느 꽃’은 다른 차원을 산다. 날개를 팔랑이고, 꿀을 빨아 먹고, 앞발로 번갈아 입을 닦으며 내는 “나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상상하지도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들 조용한 세상에/ 사는 줄 알았던 초등학교 일 학년” 무렵에서야 “방문 너머에 소리가 있는 세상을/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걸음에도/ 소리가 있다는 것을”(「받아쓰기」) “나”는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움직임이 있으면 “소리”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개미가 더듬는 소리”까지도 듣고 싶어 “귀의 모양”이 “꽃”의 전부를 이룬 “맨드라미”는 한재희의 시적 자아이다. 그렇다. 그녀는 시를 쓰는 농인이다.
세상에는 소리로 사는 사람(청인)과 눈으로 사는 사람(농인)의 세계가 있다. 청인은 어둠 속에서도 소리를 내서 사람 간에 소통할 수 있지만,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 내야 하는/ 나날”을 사는 농인들은 다르다. 몇 겹의 유리 방음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격리된 상황에서도 수어手語와 비수지非手指기호(표정과 몸짓 언어-필자 注)로 활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와는 달리, 빛이 사라지면 그들은 각자가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된다. (중략) 빛이 있다 해도 청인들과 섞여 있을 때 역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웃을 때”, ‘어느 꽃’은 그들이 왜 웃는지 몰라 “이유 모를 웃음을/ 애써 지어야” 한다. 이 가공의 “웃음”은 농인에게 “조용한 슬픔”이며, “소리치지 못하는 아픔”이고, “외로운 비명”이다. 사회적 제스처이기도 한 그 “웃음”을 수행하지 못할 때 농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재희의 시집은 이 마지막 문장의 질문에 대한 답과 그것을 넘어서는 감각적 행보로 충만하다.
#장면 4 두 개의 화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배수와 영양이 적절히 고려된 화분을 준비했었고, 옥지구와 한재희는 각자 자신의 말을 심었다. 우리는 기꺼이 햇빛이 되고 공기와 물이 되었다. 싹이 튼 화분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와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라는 이름의 식물이 자라났다. 잎의 모양과 색깔, 가지 뻗은 양태가 서로 다르다. 두 그루의 식물은 장차 그늘을 드리울 만큼 큰 나무가 될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내뿜고 있다. |
#부연 1
『어느 누구에게도 다정함을 은폐하기로』에서 옥지구는 수어를 사용하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비롯해 구어 사용자인 청인 사회가 시각언어 사용자인 농인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인간의 속성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또한 청인들이 가보지 않은 농인 세계라는 ‘미지’를 형상화해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20대의 여성 청년이 당면한 현실 속 개인 서사를 당차게 전면화한다.
프로필에서 그녀는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유치한 장난을 연구하는 내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유치한 장난’이 시의 주요 소재가 된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이런 태도가 비극적 감정을 휘발시키고 묵직한 주제들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 일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슬픔’과 ‘장난’의 균형추로 작동하고 있다. 그녀의 ‘슬픔’은 자신이라는 존재에서가 아니라 주로 외부에서 온다. 이에 대한 반동과 저항이 필연적인 이유는 ‘슬픔’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오디즘, 시로 쓴 최초의 분석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시집 해설을 하면서 옥지구의 시적 특성 중 하나가 ‘장난’으로서의 “연기”(「오디즘Audism」)와 “농담”(「서류를 작성하기 전에」)이며, 그 대표적 시로 「자유의 시그너처」를 꼽은 바 있다. 그 일부를 옮긴다.
Kitsh하게 살래 Hippie스럽게 춤추자
사랑은 곧 Vintage 너와 나의 이름은 High teen
나는 타인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들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생명체
나는 나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우월적인 눈빛에 첨예하게 고백하기로
발음이 왜 그렇습니까 아이고 당신의 가족이 참 고통받으셨겠네요 말씀을 잘 듣고 말 연습을 멈추지 마세요 기도할게요 우리 교회에 오실래요 아니면 제일 친한 의사를 소개해 줄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래야 소리 잘 듣지 얼굴이 예쁜데 참 안타깝군 살도 좀 빼 몇 살이야? 시집가야지 너와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정상적인 아이도 낳지
예, 감사합니다
지R
그쪽은 모른다 나는 양면적인 사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려다가 굴욕을 구토하지 못한 병으로 죽을 뻔했단 걸
창문 틈에 들어오는 바람을 잔빛이라고 부른다
불쾌한 다정함 때문에 건조한 미소를 딱딱한 침대에 눕힌다
술자리에서 처음 보는 동족들마저 아쉬운 마음에 나를 알고 싶은 척한다
너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르는 게 많아서 문제야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작정을 했니?
너 4차원이라는 기질이 강하다는 소문을 들었어 유치한 장난을 자제하렴 왜 그렇게 살아
감히 허락 없이 나의 스승이 되려고 한다 내가 싫어하는 개구리 시체를 주워서 던질까 말까
(중략)
호불호 뭐라고 호호호 간지러워라
참을 수가 없어서 난 나를 고백하겠어
좋지 않음과 좋음에 선이 없어 이 망할 것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해야 하는 제도가 없지
난 나랑 연애하는 게 더 빠르겠어
―「자유의 시그너처」 부분
시의 머리맡에 자리한 Kitsch, Hippie, Vintage, High teen에는 (이것이 자발적,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일 때 특히)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고급함에 대한, 기성 문화에 대한, 현대의 인스턴트식 사랑에 대한, 어른 되기에 대한―저항이 그것이다. 미술사나 문예사조를 보더라도 저항은 기존 권위에 대한 반동에서 출발한다. “타인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나’는 “좋아하는 것들”로 만든다. “우월적인 눈빛”을 가진 “타인들”의 육성은 편견과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처음 만난 ‘나’가 농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발음이 왜 그렇습니까”) 말투에서 예의가 사라진다. ‘나’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의 가족을 연민함으로써 ‘나’를 타자화시키며(“아이고 당신의 가족이 참 고통받으셨겠네요”), 상투적인 충고(“말씀을 잘 듣고 말 연습을 멈추지 마세요”)에, 진심이 담기지 않은 약속(“기도할게요 우리 교회에 오실래요 아니면 제일 친한 의사를 소개해 줄게”-이 대목에서 슬그머니 하대로 전환)을 하고, 잔소리(“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그래야 소리 잘 듣지”)에, 노골적으로 인신공격의 무례를 범하며(“얼굴이 예쁜데 참 안타깝군 살도 좀 빼 몇 살이야?”), 존재에 대한 부정이 서슴없이 이루어진다(“너와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정상적인 아이도 낳지”). 어쩌면 이 모욕은 상시적이며, ‘나’만이 아니라 농사회에 속한 사람들 모두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예, 감사합니다”라는 사회적인 응대와, 충고를 가장한 그 허위의식을 “지R”로 규정하는 내면의 소리에서 ‘나’의 진심은 후자 쪽에 있다. “타인들”은 “양면적인 사회”, 곧 청사회와 농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려다가 “굴욕”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나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술자리에서 처음 보는” 농인들마저 “허락 없이 나의 스승이 되려고 한다”. 말하자면 옥지구의 “4차원이라는 기질”은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타인들”에 대한 반동이며 저항이 이행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중략) 난 나랑 연애하는 게 더 빠르겠어
이 의젓한 도발은 가볍되 경박하지 않고, 무겁되 진지하지 않게 시집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옥지구는 주어지는 상황, 곧 “세 살 무렵”과 “다섯 살배기” 때 물과 관련하여 청력을 잃은 후에도 “가끔 물을 지나갈 때면/ 공포는 공포일 뿐이라고/ 소리지르는 낙을 즐겼어요/ 열다섯 살짜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중2병을 활용해서 노는 것뿐이었죠”라면서도 한발 더 나아가 “난 나에게 멋져 보이고 싶었어/ 아, 극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어/ 허세를 부리면 겁쟁이로 안 살게 될 것 같아서”(「반대편 멀티버스 지구에 사는 20대 논란의 화제 인물 인터뷰: 수심에 관하여」)라는 반동을 잊지 않는다. “돌에 걸려 넘어졌더니/ 앞니에 또 새로운 금이 갔다/ 친구 어깨에 매운 손을 날리고/ 뛰어가”다 “돌에 걸려 넘어”져 “앞니에 또 새로운 금이” 생기고, “인공 앞니를 심”(「동심 지킴이」)더라도 멈출 수 없는 이 “재미있는” 놀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삶이 십팔스러워서 온 세상이 자극적으로 십팔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스물여덟이 되면 시집만 있는 서점에서 시간과 시를 파는 시팔이”(「멜랑꼴리하고 장난꾸러기 소녀」)가 되는 게 꿈인 ‘나’의 현실 공간은 환상 혹은 4차원에 가깝다.
#부연 2
인생은 유한하고, 모든 이는 슬픔을 생의 지분처럼 나눠 갖고 살아간다.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한재희 시집 『네가 슬퍼서 참 다행이다』는 농인의 삶을 사는 한 건강한 젊음이 세상과 의연하게 마주하며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한 다짐에서 출발한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의 상처와 후유증을 혼자 글을 쓰며 달랬”듯, ‘장애’라는 과거에 자신을 은둔시키지 않고 그 상황을 돌파한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더는 “복지 카드가 없는[청인-필자 注]동기들”을 “부러워하”(「면접 결과」)지 않고, 상처 입은 짐승이 혀로 핥아 상처를 치유하듯 자신의 내면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응시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시 생각해 봐도살기를 잘했습니다”(「살자 체험」)와 같은 찬탄이 터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시집에 오롯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의 이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한재희의 시적 개성인 감각적 사유는 다음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시집 해설의 일부도 함께 옮겨본다.
태어나서 숨만 쉰 것 같은데 성인
어른, 어른.
입에서 둥글게 갈라지고 혓바닥은 윗니의 오래된 내부장치를 건드린다
몇 년 동안 함께했다고 이젠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기찻길
교정 철사가 혓바닥을 날카롭게 자극해 입안에 비릿한 맛이 퍼진다
씁, 씁, 아 그래 어른의 맛이야 비리고 쉰내 나는 맛 아픔은 입안에서 혼자 씁, 씁, 삼켜야 해 동전을 양껏 손에 쥐었던 손바닥을 핥는 쇠 맛같이 누구에게 공유할 수 없는 맛
헛구역질이 목구멍에서 올라와 위가 요동치며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데 붉은 물과 섞인 침을 밖으로 퉤 뱉는다
굶주려 있는 개미조차 물어가지 않는 침은 흙길 위에서 말라가겠지
나를 위한 쓰레기통은 길 위에 어디도 마련되어 있지 않고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힘들어? 불금에 다 같이 모여 아직 낫지 않은 혓바닥을 알코올로 푹, 푹 적셔 소독하면 월요일에는 괜찮겠지 하는 어른
고민은 씁, 씁, 감추거나 퉤, 퉤, 뱉어 버리면서 입술로는 행복하라고 한다, 우리 그래서 언제?
―「어른의 맛」 전문
시적 과장이겠지만, “태어나서 숨만 쉰 것 같은데 성인”이 될 수는 없다. 성인식을 치렀다고 절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성인”이나 “어른”은 ‘다 자란 사람’이나 ‘만 19세 이상’을 가리키는 명사이지만, 시에서 드러난 바에 의하면 “어른”이 된 지 “몇 년”이 지났어도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기찻길”처럼 시적 화자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입속의 “교정 철사” 같은 이물감, “비릿한” 피 맛, “동전을” 쥐었던 “손바닥을 핥는 쇠 맛”, 피와 “섞인 침”으로 표현된 “어른의 맛” 등은 비호감 일색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른”이 말하는 방식은 “헛구역질이 목구멍에서 올라와 위가 요동치며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 화자에게 인정과 배려가 아니라 “뭘 겨우 이런 걸 가지고 힘들어?”라는 질타이거나, “불금에 다 같이 모여 아직 낫지 않은 혓바닥을 알코올로 푹, 푹 적셔 소독하면 월요일에는 괜찮겠지”와 같이 맹목에 불과하다. “고민은 씁, 씁, 감추거나 퉤, 퉤, 뱉어 버리면서 입술로는 행복하라고” 말하는 “어른”을 신뢰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그래서 언제?”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기는 한 건가.
#결구
예술인은 세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자이기도 하다. 질문 이후를 우리는 제각각의 방식으로 답하며 살아가고 있다. 옥지구, 한재희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일부나마 제대로 답했는지 의문이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완성이라는 건 없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그 아쉬움을 담아 가정假定을 내포한 질문으로 이 글을 맺는다.
―아르코 프로젝트라는 제도적 지원이 없었다면 이 두 권의 시집(또한 세 권의 소설집 한송희 『여기는 안녕시 행복동입니다』, 최유경 『경계의 푸른 얼굴들』, 이주형 『초파리』)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비예술인에서 이제 막 예술인이 된 옥지구, 한재희에게 다시 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원팀이 되어 불가능한 일정을 소화하고 소정의 결과를 창출해 낸 이들의 내면 평수는 얼마만큼 더 늘었을까.
―한 사회의 수준을 알려면 가장 취약한 계층이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돌아보라는 말이 있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감 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예술인이 되고 싶은 숱한 농인 예비예술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미디어시in> 2025. 2. 05
#옥지구시인 #어느누구에게도다정함을은폐하기로 #한재희시인 #네가슬퍼서참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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