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 1919년 북간도의 실태와 상황
*북간도 인구 43만 1,198명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독립청원을 할 수 있다는 해방무드가 연변, 북간도에 흐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피압박민족 해방 약속에 독립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으로 생각하며 만세시위를 통해서 전세계를 향해서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할 능력이 있으며 독립을 원하는 것을 세계만방에 보여주고 자하였다. 북간도 인구의 5명 중 1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북간도 조선인 사회는 독립을 열망하였다. 독립에의 열망은 3.13만세로 표출되었고 세계강대국들의 무관심과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에의 꿈이 좌절되자 무저항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이 무장전쟁론으로 바뀌었고 덕립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40여개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북간도의 무장단체들은 군인 모집과 총칼의 구입을 위해서 밤낮으로 활동을 하였다.
*1월 25일과 2월 8일 훈춘, 독립운동을 위한 카나다장로회 교회 교우들의 2차 회의 소집.(국자가) *2월 18일, 20일 국자가의 박동원, 적암평의 이동식 집에서 회의 소집 – 독립의사부 설치.
*1919년 1월 25일에 국자가 소영자에서 소집된 〈기독교전도대회총회〉로부터 시발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어갈 지역 대표 30 여명의 대표를 선출하였고 2차 모임에서 김약연, 정재면, 리중집을 연해주로, 강봉우를 조선 국내로 파견하여 공동투쟁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 후 구춘선, 김영학, 고평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33인이 2월 18일과 20일에 걸쳐서 국자가 하장리 박동원의 집과 국자가 적암평 리동식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의 형식과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들은 모임에서 3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첫째, 연변 내 각 교회와 모든 단체는 단결,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다할 것, 둘째, 연변 내 모든 단체는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의 공포와 동시에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셋째,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연변지구의 각 단체는 룡정에 모여 독립시위를 전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밖에도 독립운동의사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시위행진 시 일제군경과 무리적인 충돌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광복단을 조직하고 연변지구를 연길, 룡정, 자동, 팔도구, 평강 등 5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의 적임자를 임명하였다. 연길에는 김영학, 리홍준, 박동원, 리성근, 룡정촌에는 김정이, 자동에는 백유정이, 팔도구에는 류례균이 평강에는 고동환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 후 조선의 〈3.1〉운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그들은 3월 8일에 비밀회의를 열고 3월 13일에 룡정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고 회장에 장로회 목사 김영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였으며 연변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독립만세시위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3만 명이 모이는 〈3.13〉 용정만세시위가 일어났다.
* 신민단, 3월 12일에 훈춘현에서 기독교 성리교도, 김규면, 김성배, 박승길 조직 * 카나다장로회 신흥교회 개척(이태현) * 카나다장로회 중강자교회 개척 (김관식목사)
*3.13 용정만세시위 - 2만 여 명(3만 여명) 참여 .김영학 사회, 류례군, 배형식, 서성권, 고동환, 황지영 여사 강연. (10명 현장 사망, 4명 제창병원 사망. 5명 제창병원 퇴원 후 사망)
*3.13에서 4월 말까지 연변에서 46차 항일 시위. 참가인원은 86,670명. *3.13에서 5월 1일까지 동북조선인 거주지에서 73차 항일시위. 참가 인원은 105,850명(연변 포함)
*3월 17일 시위 및 장례식 – 4000여 명 참석, 3.13 만세 시위 희생자 장례식.(합성리 공동묘지) *3월 20일, 훈춘 서대문 광장 항일시위 ,3000여 명 모임 – 황병길, 노종환, 양하구, 최병문, 김정규 지도, 500명은 무장.
*대한간도국민회는 3/21~3/31에 조직. (연길현 하마탕, 구춘선, 강구우, 서상용, 김규찬, 최자익, 유찬희, 5부총회/ 국민회군 안무, 총병력 500명 , 경호대 이용) 지회가 100여 개, 회원 8,000여 명, 산하에 서성권, 강백규의 간도청년회, 훈춘한민회, 신민단, 명월구 의민단, 왕청현 라자구 의사부와 연계. 연변전체에 영향력 막강.
*상해임시정부 성립 (4/13)
*훈춘한민회 4/23 결성. 러시아 대한국민의회의 훈춘지부로 출발, 대한국민의회가 8월에 폐지되자 훈춘한민회로 개칭, 기독교교우회가 모태. 5월 간도국민회와 연합, 지도자는 이명순, 윤동철, 김문철, 오현경, 황병길, 29개지회 *훈춘한민회 군사부 7월 결성. 결사대 모집 급진단 조직, 연통라자에서 군사훈련, 강병일의 의사단, 최경촌의 포수단, 과 연합 훈춘한민회 군사부로 개명, 황병길, 최경천, 김정, 최성삼, 병력 250명,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참여, 러시아행.
*의민단3/23에 조직. (연길현 숭례향, 현재는 안도현), 천주교교우들 중심의 단체. 방우룡, 허영진, 북로독군부에 편입.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참여.
*도독부 3월에 조직. 왕청현 가야하, 최명록, 박영, 변남길, 200여 명, 북로독군부 참여, 봉오동전투 참여, *북로독군부 5/27일 결성. 왕청현 춘명향 봉오동 국민회군, 훈춘신민회, 도독부군, 홍범도군으로 결성, 의군부, 의민단, 신민단도 후에 연합,
*의군부 3/13 이후, 공교회파 유림, 이범윤, 허은병력 200명, 위정척사, 임시정부지지 거부, 북로독군부에 연합했으나 함께 전투하지 않음. 청산리전투에 홍범도군을 따라 갔으나 전쟁 직전에 군부대 이동. 본거지는 의란구, 연화동, 왕우구, 고성촌 등지. 20년 경신대학살에 초토화, 허은 고평은 밀산으로 후퇴. 홍범도군과 함께 러시아로 이동.
*라자구 의사부, 3/13 이후 조직, 이춘범, 최정국, 병력 200여 명 훈춘사건 이후 연변의 일부 부대와 라자구의사부 연합, 문창범을 총재, 이범윤을 사랴으 최진동을 군사부장으로 하는 대한총군부 조직, 동부전선으로 이동.
*대진단 11월 결성. 안도현 홍도자 단장 김중건. 대원 200명, 무기 부족, 1921.1월에 대한군비단에 가입(장백현 무장독립운동단체들과 연계)
*북로군정서(12/왕청현 덕원리, 서일, 현천묵, 김성, 윤창현, 임도죽, 계화/ 군사령부, 김좌진, 이장녕, 나중소, 정훈, 조성환, 이범석/ 총병력 1,600명 청산리 진출 병력 600명, ), 청산리전투 참여(백운평전투, 천수동전투)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신흥학교가 모체)
#봉천군벌, 장작림 동북통치(1920~ 1928)
*카나다장로회 양무정자, 모아교회, 호천포교회, 만진기교회,국자술교회 – 숭신학교 설립
*1919년 9월, 김철훈,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 조직<적기> 잡지로 러시아 10월 혁명 선전
2023.3.4일 정리 우담초라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