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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막 : 전장의 불꽃
제1장 : 야생화 피다!
제1절 : 크리스마스고지를 탈환하라
양구 남방 : "양구남방 017, 양구북방 111 나와라 오버"
양구 북방 : "양구북방 666, 양구남방 017 나와라 오버"
양구 남방 : "오늘 산까치 4명, 안내요망한다."
차는 양구 백두산 부대를 나와 북으로 달렸다. 운전을 담당한 강상병이 양기된 얼굴로 물어왔다. "혹시 땅굴파는 곳 가는 겁니까?"
우린 얼마전 부대가 현충원으로 오기전에는 금천구 독산동에서 도하대대와 함께 숙식을 했다. 임시거처로 부대건물이 완성돨 때까지 더부살이를 하는건데 2006년 12월에 계룡대에서 올라왔다.
이 도하부대는 지금 도시개발에 밀려 또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데 그 당시만도 바로 극비의 비밀로 진행되고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찾아내는 발굴대대가 함께 있었다.
그러니 휴일이면 아무래도 접촉이 있고 그러다 운좋게 동향의 선후배나 안면있는 동료를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에 그리중한 비밀 사항이 아닌 것은 서로 자랑삼아 말을 조고 받게 된다.
지금 강상병이 말한 것도 바로 그 내용이다.
이미 펀치볼에 남침용 제4땅굴이 '99년도 3월 3일에 발견되어 전세계를 경악시켰던 곳이 바로 동쪽에 있다. 지금이야 개방되어 전동차를 차고 내부를 돌아볼 수 있지만 처음 개방되어 있을때는 걸어서 어느정도 들어갔다가 허리를 구부리고 실제 파놓은 그곳을 사해야 했다. 바로 처음 개방시 나는 소령의 계급과 육군대학 교육생으로 한겨울에 이곳을 찾아와 탐사를 한 곳이다.
그런데 바로 그 서쪽편 백석산 북쪽 천미리 계곡에 징후가 있어 땅굴을 확인하기 위한 시추용 천공작업이 전방 주요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그중에 한곳이 이곳에 있다.
병사들끼리 만나서 말을 하게 되면 조금 뻥을 쳐서 무섭고 험한 곳이란 인상을 풍기려 한는 법, 그러니 강상병은 당연히 상기되어 나에게 물어오는 것이다.
오늘 나는 백석산 북방의 크리스마스 고지 남쪽의 또다른 1010고지를 철책을 넘어서 탐사팀을 데리고 들어가는 중이다. 원래는 훨씬 더 철책 넘어에 있었지만 북한의 철책이 앞당겨지는 관계로 우리도 앞을로 전진하여 추진철책이 형성되게 되면서 남방한계선 바로 근처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통문에 도착하니 전팀장이 나와서 상황 설명을 한다.
"이곳은 GP막사에 이르는 진출입로인데 이곳으로부터 약 1km를 접근하면 바로 길 우측 산입니다."
"그럼 길에서 얼마나 산속으로 접근하며, 지뢰지대는 아닌지?"
"길에서 10m들어가는 곳인데 지뢰지대 입니다."
"그럼 그곳을 어떻게, 이 부대에서 홈코트 작업(지뢰 확인 작업을 말함)을 해 주었니?"
"이상업시 공병이 투입되어 안전지대를 확보해 주었습니다."
차는 안내와 경계를 제공받으며 무려 1000고지가 다 되는 능선을 달리고 있다. 우측을 바라보면 천길 낭떠러지로 현기증이 난다. 강상병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이곳은 당시 지피를 출입하던 보안관계요원이 여름날 비나 내려 우측 법면에서 흙이 쏟아져 내려서 도로 보수팀들이 흙을 제거하고 있는 가운데 이 담당관이 잠깐 그 주변을 보니 뭔가 나무토막인데 색깔이 TV에서 방영되었던 유해발굴 당시의 유해색깔과 비슷하여 작업을 중지 시키고 우리에게 신고가 된 것이다.
나는 현장에 도착하여 방탄조끼와 방탄모를 쓰고 전팀장의 안내를 받아 유해가 나왔다는 산으로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다. 뽈이라고 하는 과거 심어 놓은 대인지뢰의 안전핀을 찾아보는 것이다.
대게 이런 최전방은 이런 류의 지뢰보다는 무계획하게 뿌려버린 플라스틱류의 발목지뢰가 낙엽에 묻혀 있어 식별이 어려워 가끔씩 그놈에게 지뢰사고가 난다.
"철규야, 이게 뭐야. 미제 스픈이잖아?"
"거기에 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온전하게 발굴해 봐야 알겠습니다."
아니 내가 바라보는 유해의 좌측 가슴 호주머니 위치에 스픈 한개가 박혀 있다. 호주머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 위치에 인위적으로 수직으로 꽂아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여기에 나라위해 싸우다 숨진 용사있습니다!"
가슴이 쿵꽝거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동료의 전사사실을 알리려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하였을까?
그 숟가락이 낙엽의 쌓인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강한 햇빛을 받으며 전혀 녹슬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사실 이러한 곳에서 유해찾기란 천우신조인데 발굴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 내에서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발굴병이 올라서기도 어렵다. 겨우 한두명이 올라서서 발굴하는 위험한 곳이지만 낙엽을 다 거둬낸 모습은 유해가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모습 그대로다. 다만 좌측 다리 정강이 부분과 발목밑의 부분이 수해로 흙이 무너지면서 밑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나도 직접 트롤(전문 발굴삽)을 들고 유해주변의 흙과 낙엽을 긁어 내고 있다.
전혀 땅을 파고 묻은 유해가 아니라 전사 당시의 그 모습대로 전선에 남겨진 것이다. 전투화도 그대로 이고 그 속에 발목뼈부터 모든 발가락 뼈가 온전히 다 있다.
도착한 시간으로부터 한 3시간이 흘러 모든 윤곽이 다 들어나고 이제 수습만 하면 되는 순간이다. 내가 앞가슴에 박혀있는 스픈을 뽑았다.
"와~, 그 이름 이태윤(LEE THE YOUN), 군번 130****."
국군 제7사단 3연대 출신이다. 여기서는 통신이 제한을 받아 본부와 통화가 안된다. 수습하여 통문 밖으로 나가 정확한 병적관계를 알아봐야 한다.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용사님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목례를 올리고 수습이다.
"별 7곱게 부대마크입니다, 철규가 소리친다."
그런데 이게 웬인인가, 어깨부분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대마크인 별이 7곱게 그려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칠성부대인 7사단의 상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셨다.
이제 수습이 완료되면 약식제례를 올리고 유해는 본부로 운구하여 정확한 병적확인과 유가족 찾기를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벌써 그 보안담담관이 통문밖으로 이동하여 전화로 군번을 알려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이 동생되는 분이 대구에 살고 있다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그러니 유해를 운구하여 서울로 가는 것은 유가족과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하여 실제 싸우다 전사한 이곳으로 유가족을 모시고 와서 통문 밖에서 유가족이 참가한 가운데 약식제례를 올리기로 조율을 하고 일단 현장에 수습된 관을 이용하여 잘 모시도록 조치를 강구하기로 한다.
"용사님 , 고생하셨습니다."
"그 비바람, 천둥소리, 엄동설한 몇몇해인지 너무너무 죄송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요. 대구에서 사랑하는 동생분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는 전팀장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이왕 들어온 김에 주변을 더 탐사해 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이미 작정하기도 전에 내 발걸음은 유해로부터 10m이상을 떠나고 있었다.
"통제장교님, 그곳은 미확인 지뢰지대 입니다. 위험합니다."
해당부대의 업무담당관이 소리친다. 그런데 어떻게 하랴, 이제 나가기도 고난하게 되었는데... .
나는 용사님께 솔직히 말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숨이 아까워 이토록 높은 산에 그냥 남겨 놓고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강상병이 울먹인 소리로 나를 부른다. "과장님 어떻게 합니까!"
"괜찮다. 나는 호국용사님이 보우하사 죽지 않는다. 너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만 전해라. 호국용사님을 늦기전에 한구라도 더 찾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알겠습니다."
수습이 끝난 모두가 길에 서서 살기 위해 아니 산속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이동하며 유해를 찾기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
미확인지뢰지대에서의 10m이동은 보통 산악의 1시간을 걷는 기잔과 서스펜스가 넘쳐 옷이 모두 젖고 전투화속까지 모두 젖는다. 아니 젖는게 아니라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다.
한걸음 한걸음 옮겨 나는 지피 막사쪽으로 이동해 간다. 가면서 아무리 위험하다해도 본연의 임무는 잊지않고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 수통 하나, 여기에 철모망가진 잔해 3점, 여기에 반합 1개, 여기는 탄알이 수없이 쌓여 있고, 여기는 박격포탄이 불발탄으로 있다, 여긴 소련재 모시나칸트탄창이 있고... ."
이곳 전투는 '51.7월 유엔군의 하계제한목표공격전략의 일환으로 하계공세와 추계공세를 통해 전장의 주도권을 행사하여 방어선의 취약점을 개선하고 적의 부대운용에 균형을 파괴하고자 특별한 통제선 없이 하계에는 미 제10군단을 중심으로 밀어올리기 전술(포복작전)로 전투가 치러졌다.
이를 위해 미 제10군단은 중동부전선의 화천저수지에서 해안분지 남쪽 능선을 따라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신 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다. 따라서 해안만곡부 해소를 위해 미 제10군단은 분지 서측의 대우산(1178)을 미 제2사단 제38연대가 공격하여 7.26~30에 점령했으나 이대부터 강한 장마로 공격작전을 일시 중지하고 있다가 다시 8월중순에 국군 제7사단은 화천저수지 북쪽에서 554고지를 점령하고 미 제2사단(배속:프랑스 대대, 네널란드 대대)해안분지 남쪽에서 983고지(피의능선)-단장의 능선(931)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국군 제8사단은 서화계곡에서 남강선으로 밀어올리도록 하여 "J-바늘 능선"전투를 서화계곡에서 벌이게 된다.
이대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과 국군 제5사단은 예비로 있되 5사단은 1개연대(36연대, 이어서 35연대)를 미 제2사단에 배속하도록 통제된 전투가 시작 되었다.
따라서 8사단은 J-바늘 능선전투('51.7.20~9.17, 일명1.2.3차 노전평전투)를 성공적으로 완료하면서 피의 능선을 탈취하지 못하는미 제2사단을 동측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백석산(1142)으로 전환하게 된다. 당시 백석산은 국군 제7사단이 '51.8.18~9.18까지 바로 백석산 하단의 적 주저항선을 공격하여 확보 했으나 중과 부족으로 백석산은 탈환하지 못하고 국군 제8사단에게 인계하게 되고 8사단은 작전지역을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하였다.
따라서 8사단은 '51.9.28일에 백석산 전투를 인계받아 9.30일 공격을 개시하여 10.1일 백석산 주봉을 탈환하게 된다. 이후 군단으로부터 1050고지-1220고지-어은산에 이르는 고지군을 점령하여 좌로는 미 제9군단과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의 균형을 이루고 우로는 미 제2사단의 단장의 능선전투를 측방에서 지원토록 명령을 받고 10.6일부터 공격을 개시하는 과정에 바로 오늘의 고)이태윤 용사님이 진출하는 산능선을 통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모든 적군은 북한군 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전사에는 쌍방간의 거점이 도식되고 통상 진출로는 도식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디서 정말 우당퉁탕 싸웠는지 식별이 어려워 현장에 올라가야만 정확히 실체가 들어난다.
그러니 그곳을 들어가지않고 다음에 들어가면 그만큼 늦어지고 때로는 영영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기에 그 실체를 알고 병력을 투입하지않을 수는 없는 배수진을 나는 목숨으로 친것이다.
무거워지는 전투화 불과 30여m를 이동하는데 흘린 담은 1년내내 탐사하면서 흘린 땀과 같았다.
드디어 막사가 보인다.
그런데 막사 바로 입구 법면이 사태로 무너져 내려가는 방법이 묘연하다. '51년도에도 7월말에 억수로 비가 내려 거의 한달여간에 피아간에 전투를 못하고 오히려 비로 수몰되어 죽은 군인이 미군을 포함 쌍방간에 1,000여명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이곳이 그렇다.
나는 밑에서 유도하는대로 방햐을 잡는다. 무너내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예방하려고 폐타이어를 로프에 매달아 산 법면에 눌러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동동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인지 누가 말한 교훈처럼 나는 죽으려 했기에 이 기회가 주어져 탐사도 완료하고 살아남게 된 것이다.
나는 동동거리는 페타이어 줄에 매달려 중소위 시절에 유격대장을 하면서 익혀놓은 로프타기를 적용, 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그냥 내려오겠는가, 동동 매달려 무너져 내린 산의 푹파여 나간 자리를 관찰하니 아니 이게 웬말인가!
너무도 많은 전투 유품이 조금 보태어 산더미처럼 박혀 있다. 수통,반합,탄통,판쵸우의,탄크립 ... .
나는 그날을 잊을 수없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구에서 유가족 되는 분을 모셔와 통문 밖에서 발굴 배경을 설명드리고 유해를 보여 드렸다. 그리고 간단한 제례로 정중한 예를 올렸다.
"일동 차렷. 호국용사님께 경례!"
우리는 그분이 60여년을 누워서 달려오는 적군을 막으려 경계근무를 하신 그곳에 노랗게 핀 들꽃을 한아름 올려 드렸다. 그리고 유해는 서울 본부로 왔다.
그러나 그토록 오열하며 울고하던 그 동생분과 DNA결과 맞지 않는다.
여러가지 가족적 정황을 알아봐야 하고 생존해 있는 7사단 3연대 참전용사님을 찾아 그 당시 상황을 들어 스푼의 실제 소유자와 유해의 일치여부를 따져봐야 하고... .
그래서 이 용사님의 신원확인 과정은 진행형이다.
제2절 : 저항령에 울려 퍼진 총소리
나는 인제로 탐사를 '07년도에 발굴겸 나가 용대리로부터 하향식으로 마을을 탐문해봤다. 용대리 명태덕장에서 그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명태를 말리는 사람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조금씩 날라도 주며 막걸리 한잔도 같이 했다.
대부분 나이드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대부분이고 덕장 나무받침대 위로 올라가는 일은 그래도 젊은 사람이 하고 있는데 이것도 생각외로 힘든 과정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금하고 있는 업무를 이야기하고 설악산에도 많은 유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을 했더니 그중에서 가장 동네에서 오래 사셨다는 분이 말을 꺼내는데 전쟁직후에 대부분 들어와서 먹고 살게 없으니 산에가서 나물이나 약초를 캐는 일이라 자연스레 산을 과거에는 정말 지긋지긋하게 다녔고 한다.
"말도 말아요, 걷다보면 발에 뭐가 툭 걸려. 보면 사람 해골이 어떻게 위에서 굴러내리다 걸렸는지 나무등걸에 받쳐있다가 우리 발에 걸리는거야. 그때만해도 뭐가뭔지 알았나. 재수없다고 발로 대굴대굴 굴려버리면 내려가다 '팍'하고 깨져버리지. 정말 많았지."
"그때가 언제쯤 되시는지요, 혹시라도 그런곳에 유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지금은 못 찾을거요. 누가 그얼마 후 부터는 산에 들어가질 못했는데."
"어떤 이유로 못 들어가셨는지요."
"뭐야, 국립공원인지 뭔지 한다며 입산금지가 되었고 자주 산에 불이 나서 지금 나무가 없잖아요."
"그럼 이 주변에 설악산 내력에 알만한 사람이 없을까요?"
"저기, 백담사 입구 들어가는 좌측에 중국집이 있는데 정사장인데 그 사촌동생이 또 백담사 주차장 가다 좌측에 식당을 하고 있는데 정순덕인가 있는데 한번 가보세요"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하며 나는 차를 달려 먼저 백덤사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사촌동생이라는 정사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사장님,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유해발굴단 이용석중령입니다."
"아, 뭔하는 분인지 알아요. TV에서도 몇번 봤어요."
"저기 황태덕장 가서 물어보니까 나이드신 분이 정사장님께 가보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누구지, 하기야 최근까지 그래도 산에 오른 사람은 나하고 저기 들어오는 입구에 형님이 계시는데 우린 한 10년전까지 들어다녔어요."
"그럼 유해를 목격한 곳이 좀 있겠는데요?"
"좀이 아니라 우린 이곳 설악산 귀신이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있는 곳을 아시면 함께 동행해 주실 수 없습니까?"
"현재는 무단출입을 못해요, 법이 강화돼서 우리는등산로 외에는 다닐 수 없어요."
"그문제는 저희가 국립공단관리소와 협조하여 해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유해발굴을 위해서는 비무장지대를 제외하고는 웬만한 곳은 사전 통보만 하고 출입할 수가 있으며 문화재보호구역이나 이런 국립공원도 사전 문서화하여 협조로 조사활동이나 발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호 받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공문서가 없는관계로 입구에 가서 구두로 협조해 보기로 했다.
역시 이곳에 근무하시는 분은 뭔가가 달랐다. 까칠하지 않고 군인이란 신분에 유해발굴조사라 하니 차후 공문서를 팩스로 통보해 주는 것으로 하고 출입이 허락 되었다.
우리는 정사장을 태우고 안으로 들어가 우선 소감투봉으로 오르기 위해 작은 귀떼기골로 들어서 쉰길폭포 방향으로 오르다 우측으로 방향으로 틀어 소감투봉(972m)을 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험하 ㄴ경사도에 힘이 들어 나는 자주 넘어지기도 했지만 역시 설악동 귀신답게 정사장님은 불과 나보다 나이는 5살 많은데 육체는 30대로 특수부대 요원같았다.
말할 힘이 없어 나는 헉헉 거리며 따라가기 벅차게 자존심으로 버티며 기어오른다.
몇개의 골짜기를 넘었는지 모르는데 이렇게 가야 만이 갈 수 있지 직선 코스로는 소감투봉(972m)을 절대 가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한 3시간의 사투를 하여 꼭대기에 도착하여 가져온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뽀족하게 생긴 바위가 그리 크지는 않은데 주변은 동그랗게 마가목 나무가 몇그루 있고 주로 소나무 작은 것과 잡목이 내 키(170cm)만하게 자라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윽고 점심을 먹고 나니 원기가 돌아와 이곳을 오게된 내력을 물었다. 그랬더니 답이 거대하다.
"한 20년전에 사향노루를 구하러 이곳에 오라오게 되었는데 뭐가 하얗게 보여 자세히 보니 군인이 죽었는데 묻힌 것이 아니고 수풀위에 그대로 죽어 있고 그 위로 나무뿌리와 풀뿌리들이 얽혀져 만수산 느렁칡이 홀겨있는 모습으로 보였단다.
대검도 있고 수통도 있고 철모도 있고 정사장이 보기에도 아군임에 틀림없는데 그 당시는 누가 이런걸 고깝게 생각해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본인도 집에서 필요한 몇가지를 갔고 내려왔다면서 나중에 집에 가면 철모도 지금 있을 거라 하였다.
나는 트롤(전문 발굴삽)을 이용하여 주위를 부분 시굴해 보았는데 정말 뼈가 보였다.
나는 더이상 손을 멈추고 보존조치를 한다음 정사장과 산위의 정상회담을 하게 되었다. 먼저 말문은 정사장이 손가락으로 북쪽방향 능선과 계곡을 가리키며 시작하였다.
"저기 보이는 높은 산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리고 그 서남방으로 흐르는 계곡 이름은?"
"저머리 보이는것은 저항령같은데 황철봉인가?, 계곡은 잘 모릅니다."
"저 산이 저항령(1106m)이고 그 앞으로 높게 보이는 산이 황철봉(1380m)이고 저항령 우측으로 길게 뻗어가는 능선이 저렇게 보여도 1200고지선이고 그 우측 끝이 마등령(1327m)입니다."
"그럼 공룡능선과 나한봉은 어디쯤에 있습니까?"
"여기서는 잘 식별이 어렵고 마등령에서 동남쪽으로 있는 능선이 대청봉에 이르는 공룡능선이고 그 시작봉이 나한봉(1297m)이라 보면 됩니다."
"한번은 가보았을 거 아닙니까?", 아까 계곡이름은 곰골이라 합니다."
"예?, 곰골이라, 그러면 그곳에 곰이 살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1983년에 밀렵꾼이 쏜 총에 곰이 죽은 적이 이 설악산에 발생했어요?"
"그럼 지금도 어딘가에 있겠네요?"
"애 무서워요?, 그 놈들 왠만하면 사람 공격 안해요. 한 20년에는 몇번 보았는데 지금은 보았다는 소문이 없어요.'
"그런데 왜 저항령, 마등령, 활철봉,곰골 등을 물어보셧습니까?, 그곳에도 유해가 있습니까?"
"언제인가 형님하고 저항령하고 황철봉사이에 돌이 많아 누가 쓸만한 뱀 한마리 부탁을 하여 올랐는데 왠걸 뱀은 안보이고 바위 틈사이에 온통 사람뼈가 널려 있어요. 실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면서 소청봉과 중청봉 사이에도, 봉정암에서 소청 오르는 중간에 바위 무덤에도, 중청에서 대청봉 가는 길도 옛날에는 발에 걸리는 것이 사람뼈였다고 한다.
대승령 폭포와 안산가는 길도 그렇고 그 앞의 길건너 가리봉과 삼형제봉, 주걱봉사이에도 억수로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많던 것이 어느 한 순간에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바의틈에 남아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멧돼지나 산짐승이 먹었는지 아니면 한두번 불이 다 났는데 그 불에 타버렸는지 잘 보이지 않고 현재 제일 기억에 명확한 곳은 저항령일대고 황철봉도 잡목이 우거져 잘 안보인단다.
우린 정상 대담을 마치고 하산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또 하산길은 오르는 길과 다르다. 모르는 나야 프로 산악인을 따라 내려오는데 오는 길목마다 군데군데 개인호가 산재해 있다.
하늘이 내게 준 귀인이다. 나는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사실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꿈을 꾸어도 복권을 사지를 않는다. 이유는부정이 타서 유해를 찾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도 경사도는 없지만 내리막 능선이라 앞 발가락끝에 힘을 주고 땅을 밀면서 내려서려니 오르는 것 못지않게 정말 힘들다. 이때가 내가 두번째로 설악을 올라 본 것이다. 첫번째는 2001년도에 오세암 입구 큰바위 밑에 전우를 직접 매장했다는 참전용사님의 제보를 조사하러 갔었다.
백담사 입구 차 있는 곳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어서고 있다. 이곳은 산속이라 해가 일찍 산넘어 가버려 어둠이 빨리 온다.
정사장 집에 도착하여 이른 저녁을 먹고 언젠가 다시 저항령을 탐사하기로 약속을 하고 고맙다고 인사를 올리며 일단 떠났다. 그리고 발굴계획에 포함하여 2008년도에 발굴 하도록 하였으며 2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나는 이곳의 누가 탐사를 권팀장과 박팀장에게 알려주어 필요시 정사장님과 동행토록 주선하였다. 그러나 일정상 동생 정사장이 못가고 형 정사장이 나서서 대신 수고를 해주셨다.
나는 정사장님 형, 동생집을 한 대여섯번 정도씩 들락달락 하면서 식사도 하고 대담도 하고 많은 조언을 구하였다.설악산의 유해발굴은 이 두 형제분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항령에 올라간 권팀장이 제보대로 유해가 많이 보인다고 한다. 아예 묻힌 것이 아니라 폭격이나 포병의 포탄이 작렬하여 시신이 파열하여 갈기갈기 육신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이곳을 '11년에 그리고 '12년에 걸쳐 한계령- 대청봉-마등령-저항령-곰골-백담사 방향으로, 미시령-황철봉-저항령-곰골-백담사 방향으로, 백담사-오세암-마등령-저항령-황철봉-미시령-상봉방향으로 탐사를 진행하였다.
물론 그동안 백담사-오세암까지, 한계령에서 대청봉, 한계령-대청봉-화채봉-송암산구간을', 한계령-귀떼기청봉-대승령-장수대로, 장수대-대승령-안산, 남교리-12선녀탕계곡-안산-대승령-장수대방향으로 탐사도 해 보았지만 정사장의 구체적 제보 내용을 활용하여 탐사하는 것이 가장 많은 전투흔적을 찾는데 도움을 받았다.
이곳의 전사가 궁금해졌다.
쉽게는 비정규전으로 백골병단이 '51년 1~3월어간에 강릉 퇴곡리-신배령을 넘어 구룡령-진동리-귀둔리-군량밭-망대암산-장수대-대승령-매봉-용대리-백담사-소청봉/귀떼기청봉-박달령(단목령)-진동리 설피밭으로 이동하며 적 후방을 교란하고 적 게릴라 사령관을 체포하여 처형도 하고 300여 명의 꽃다운 젊은 피가 장렬히 산화한 혁혁한 전투가 살아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이 백골병단의 살아있는 신화의 주인공이 전인식, 당시 작전참모로써 채명신과 동거동락했던 사람이 버젖히 살아 그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나는 그분과 3차례에 걸처 용대리와 설피밭과 박달령(단목령), 북한군 유격군 사령관 길원팔 중장을 생포하여 총살시킨 필례약수터를 탐사하였고 수시로 마포의 그 집무실과 근처를 오가며 백골병단의 실체를 알아보려 노력하였고 해마다 실시되는 기념식에도
다음으로는 정규전으로 먼저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중공군의 무력개입으로 동부전선에서 다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는 과정에 동부전선 재배치를 알아봐야 한다.
먼저 국군 제3군단(배속:제9,제11사단)이 '50.12.10일 후방공비토벌작전을 종료한 후에 군단은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5,8사단을 받아 군단창설 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 무렵 2,5사단은 육군본부 통제하에 11월 27일부터 낙동강전선에서 낙오되어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하는 잔적들이 철의 삼각지대에 집결하여 이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제2사단은 '50년 7. 24일 영동 황간지역에서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해체 되었다가 '50. 11.7일에, 서울 탈환 작전후에 철원지역에서 공비토벌중인 제17연대와 새로 창설된 제31연대(철의 삼각지대, 홍천, 포천-평강-가평), 제32연대(철의 삼각지대, 의정부, 가평,화악산)로 '50.11.7일에 서울에서 재창설하여 철원과 가평지역에서 잔석소탕 및 병참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5사단은 '50.7.17일에 경남 마산에서 해체된 후에 10월 8일에 27연대(대구:영남 및 주령-봉화일대에서 청평 호명산-춘천 고성리로), 제35연대(마산: 영동지역 공비토벌-구화리로), 제36연대(부산:영동지역 공비토벌-춘천 지암리로)을 근간으로 재창설하여 가평, 청평, 춘천지역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9사단(제28연대:대전, 제29연대:공주, 제30연대:청주)이 '50.10.25일에 서울 청계국민학교에서 창설되어 전북 대둔산-경북 김천-상주등지에서 공비토발 작전을 수행하다 '50.12.8일에 원주, 강릉으로 이동하여 춘천 동북쪽의 내평리에서 인구리까지를 담당(설악산-오대산 지역 북한군 유격군 소탕전)하고 있었다.
제11사단(제9연대:대구, 제13연대:전북, 제20연대:전남)은 '50.8.27일 영천에서 창설되어 대구로 이동하여 공비토벌 작전을 계속 수행하다 '51.4월에 함양 신원리 민간인 학살사건에 연루 되어 전방으로 추진되어 대구에서 양양으로 이동 제1군단에 배속되고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시 양양-주문진으로 철수 하였다가 재반격 '51.5.5~17까지 작전간 군단의 우일선으로 설악산 전투(마등령-미시령구간)를 하다 다시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설악산(마등령)-38도선-강릉으로 철수하였다가 5.26일부터 강릉-양양-건봉산으로 진격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남은 사단이 3,8,수도사단이다. 이 사단들의 행적을 추적하면 설악산지역의 전투를 과연 누가 언제 수행하엿는가가 명백해 질 것으로 판단 된다.
우선 제3사단은 북진 작전간 혜산진-합수-나남까지 진출했다가 '50.12.1일부터 중공군 개입으로 철수를 시작하여 함흥에서 구룡포로 해상철수하여 홍천 북방으로 들어와 제9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받게 되고 제22연대는 청진-길주-성진-흥남에서 배로 홍천북방 음양리로, 제23연대는 22연대를 따라 나남에서 흥남, 그리고 홍천으로 들어온다. 제26연대는 혜산진-북청-신흥리에서 함흥동쪽-원산 마전리로 내려와 12월10일 수도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면서 양양-주문진-방내리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 변경되어 들어온 제18연대를 홍천고개, 하수내리-상수내리, 제22연대는 음양리-수리봉, 제23연대는 홍천에 배치 하였다.
제8사단은 북진 작전간 제2군단에 예속 되어 10.8일 38도선을 돌파한 후에 영원-맹산전투를 실시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11.28일부터 철수를 실시하여 신계-토산-연천-서울청량리를 경유하여 춘천-홍천으로 '51.1.1일 이동하여 제3군단의 우전방으로 화천저수지 남쪽으로 이동하여 다시 전선에 투입된다. 제10연대는 북창지역에서 시변리를 거쳐 사단을 따라 홍천 북방 자은리로 12월23일 도착하여홍천부근 전투를 실시하고 양덕언리로 빠지게 되고 , 제16연대는 10연대처럼 이동하여 '50.12.13일에 홍천고개, 상수내리-하수내리를 방어하다 양덕원리로 '51.1.7일에 철수해 간다. 제21연대는 12.31일 춘천으로 들어와 '51.1.7일에 양덕원리로 철수해 간다.
수도사단은 북진 작전간 청진-부령 및 혜산진까지 진출후 중공군 개입으로 '50.12.1일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17일 흥남에서 묵호로 배로 철수하여 양양으로 진출, 이때 함께 철수한 제3사단의 26연대를 예속받고 떨어진 18연대는 3사단으로 예속 변경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9사단의 서림-양양 방어선을 인수받게 된다. 그러다 서울 수복에 이어 재반격간 '41.4.15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5.7~13일에 설악산 일대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다 다시 '51.5.16~25어간, 중공군의 제2차 춘게공세에 밀려
후퇴하였다가 대관령선에서 반격으로 다시 진출하여 6.3일에는 향로봉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때 제1군단은 흥남에서 배로 묵호로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중인 관대리-현리-서림-양양을 연하는 방어선을 인수받게 된다.
따라서 책임지역에서 준동하는 적 유격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관대리-서림에 제9사단을, 우전방 서림-양양에 수도사단으로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군단ㅍ후방지역에는 3개 경비대대(제1~3)을 영월, 정선 미 하진부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 당시에 적 제69여단은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을 완료하고, 인민군 제2군단 패잔병들이 인제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 약 2,000여명의 패잔병들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설악산 지역의 전투는 백골병단과 수도사단 및 11사단이 주로 참여하고 제3사단과 9사단은 조금 인접에서 전초기지 전투정도 한 것으로 분석 되었다.
"영원한 용사, 현시천님 설악에 오르다."
어느날이다. 부산에 계시는 현시천님이 월간 동아에 귀떼기청봉에 관한 기사를 실렸다.
내용은 이귀떼기청봉에서 약 10분거리에 약수터가 있는데 그곳 일대에 엄청 유해가 많이 있었다는 내용과 본인이 제11사단 출신으로 설악산전투에서 동료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그 유해를 찾지 못해 매년 한번씩 설악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연락을 취하여 관련된 내용을 듣고 해당 사단의 전투경로를 파악하고 그 경로를 따라 탐사를 1차로 해 보았다. 그때가 아마 '02년도였다.
하지만 그 넓은 설악에서 유해를 찾기란 정말 낙동강 하구 삼각지에서 모래바닥에 바늘하나 찾는 것과 같이 막연한 실체였기에 차일피일 미루어 왔었다.
그러다 우리가 '07년도에 서울로 올라오고 단이 발족 되면서 정식으로 조사팀도 생기고 발굴팀도 생기어 어느정도 해볼만한 조건이 성숙 되었다 시퍼 한번 연락을 드렸더니 해외에 여행중인지 제대로 연결이 어려웠다. 우린 우리대로 바로 백골병단팀의 제보도 있어 여러 곳에서 설악산은 이제 우리가 발굴을 진행하고 있었다.
실제 백담사 입구 정사장과의 인연으로 올라가게 된 저항령, 마등령, 황철봉은 정말 지금도 그 라일락꽃 향기에 잊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저항령에서 곰골 882고지능선으로 들어와 백담사로 오는 과정에 비는 내리지 핸드폰은 방전되어 연락은 두절되었지, 어둠은 찾아와 길은 잊어버렸지 조난의 위기에서 살아온 그런 아프면서도 기막힌 추억의 장소로 각인되어 잊혀질 수가 없느 곳이다.
각 봉우리마다 그 산재한 돌무덤들, 그리고 그 돌틈에 박혀있는 유해, 제대로 된 유해는 한구도 없없다. 모두가 포탄이나 비행기 폭격으로 파쇄되어버린 부분 유해로 그 돌무덤들은 메워져 있었다.
그런데 '15년도에 그 현시천(예) 대령)님과 연락이 되고 본인이 직접 전투 장소를 나이가 85인데도 오르겠다고 하며 설악으로 직접 오셨다.
우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야 하기에 상부에 보고를 하고 용사님을 모시고 백담사 입구에서 오세암 방향으로 들어갔다. 이야기는 제11사단 20연대라 한다.
"어디서부터 작전을 해서 올라 오셨습니까?"
"무슨 저수지가 있는 강릉에서 들어간 곳인데 거기서 시작해서 대청봉으로 올라섰고 봉정암을 지나 우리부대는 좌측으로 돌아서 저항려에 오르게 됩니다."
"그럼 봉정암은 들어간 기억이 명확 합니까?"
"봉정암갔다 오세암도 갔어요. 오세암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그 능선 고지에서 돌아보면 봉정암이 어렴풋이 보였어요."
"저항령으로 가는 길이 오세암에서 오르면 마등령을 걸쳐 가는데 그곳으로는 안가셨습니까?"
"그곳으로는 대대본부가 걸쳐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실제 전사에 설악산지구 전투에 대해 명확히 나와 있는 것은 '51.5.7~5.13일까지 기록이 있다.
국군은 중공군 춘계1차공세인 4월에 임진강-양양선까지 올라섰다가 밀려서 서울 방어선인 골든선(서울 외곽선), 구파발에서 마석우리-용문산-한계리-설악산-대포리를 잇는 골든.노네임선에서 중공군의 4월공세를 저지하고 정찰대가 봉일천-의정부-포천-가평-춘천-인제-속초선가지 진출하게 된다. 여기서 수도사단이 제1군단의 좌익으로 제3군단과 가리봉밑에 있는 5번도로와 10번도로를 경계선으로 구분하여 사단의 좌측은 국군 제9사단이 매봉-한석산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가리봉과 대승령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 시키고 제1갑연대가 내설악으로 들어가 972고지와 노동, 곰골의 882고지선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제11사단은 제20연대가 설악동으로 해서 마찬가지 내륙을 이용하여 저항령으로 진출하여 좌측의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의 진출을 보장하는 것으로 순조롭게 진출하여 홍천-간성을 잇는 미조리선으로 진출이 곧 38도선 점령을 목전에 두게 되자 미 제8군사령부는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도 캔사스선으로 재진출토록 하여 문산-춘천 간과 인제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곧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를 맞게 되어 주춤하게 된다.
그로부터 중공군의 국군 제3군단의 현리 돌파를 대관령선 운두령에서 미 제3사단의 역습으로 돌파구를 차단하여 성공적으로 밀고 올라오면서 국군 제1군단은 '51.5.26~31일 어간에 제11사단은 설악산일대를, 수도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간성을, 그리고 재편성을 완료한 제3사단 제18연대는 설악산 남쪽의 가라피-마산리를 공격하도록 한다.
이에따라 수도사단은 속초 남쪽 하도문으로진출한 제111사단 제9연대의 엄호하에 제1연대는 속초북쪽 용포리로, 제1기갑연대는 삼포리로, 제26연대는 울산바위 북쪽의 토교리로 이동한다.
제11사단은 제9연대를 신흥사부근에, 제20연대를 둔전리에, 제13연대를 강선리에 집결하여 공격준비를 하고 제3사단 18연대는 송천리를 점령한다.
드디어 공격 개시일인 '51.5.29일 수도사단이 너무 쉽게 제1기갑연대가 간성에 도달하고 제11사단 제20연대는 신선봉을, 제9연대는 마등령일대에 제3사단 제18연대는 가라피를 경유하여 마산리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자 미8군사령부는 국군제1군단의 진출속에 맞추기 위해 전투지경선을 서쪽으로 10km 이동시켜 인제-간성 도로의 확보에 필수적인 전방의 향로봉-1079고지-건봉령을 점령하도록 함으로써 군단은 다시 수도사단이 현재 진출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11사단 제13연대를 배속받아 책임지역을 점령토록 하였다.
한편 제11사단은 중대별로 기동하여 제20연대는 용대리-미시령도로의 남쪽고지에, 제9연대는 설악산 서쪽능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3사단 제18연대도 마산리-가라피 도로 남쪽에 감제고지에 배치토록 하였다.
이상의 전사분석에서 제20연대가 설악산 대청봉이나 마등령, 저항령일대에서 전투한 사실은 '51년 5월초와 5월말에 2번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부처님, 우릴 보살펴 주십시요!"
"혹시 언제쯤 전투하신지 기억하십니까?'
"지금 생각으로는 둔전리라는 저수지가 있던 곳이 생각이 나고 그 앞의 고지(관모봉 혹은 화채봉)를 지나니 대청봉이 나왔는데 그놈들이 요소요소에 저격병을 숨겨두어 피해를 좀 보았어요. 진격하는 능선에 소로가 있는데 그곳에 죽어있는 북한군뿐만이 아니고 우리 전우들도 있었는데 얼마나 노무자들이 처리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기억에 명확한 것은 누구든지 이 산속에서 죽으면 사실 시체 찾기도 어렵고 찾아도 옴겨가기도 어렵고 그래서 어떤 종교를 떠나 그 봉정암을 보고 한번이라도 더 살려달라 기원하려 능선에 앉아서 뒤를 돌아 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시암에 들러 당시에 이곳 봉정암에 계셨던 원로 스님을 만나 또한 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곳에는 흑백사진도 아직 가지고 있는데 유해 사진은 아니다.
"가슴 아파하지 말고 살다 가라 하셨다."
노스님을 나는 2001년도에도 오세암에 오르며 만나 뵈었었다.
스님은 7살인가 절에 들어와 봉정암에서 시자승으로 시작하여 오세암등 이곳 일대 절에서만 평생 기도하셨다. 실제 나무를 잘라서 절을 세우고 절을 가꾸어 왔으며 봉정암의 근현대사의 증인이다.
전쟁중에 12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지냈고 전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한 박세환 예비역 대장이 제12사단장 시절에 군인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설악산 일원의 유해를 수습하여 대부분 처리하게 되는데 그때 천도제를 지내셨고 그 화장된 유해는 바로 한계리에서 한계령을 오르다 장수대를 조금지나 좌측으로 산을 오르면 충혼비가 나오는데 그 곳일대에 매장하게 된다. 그때 숫자가 약 400여구는 된다고 하였으며 산이 다 불타버려 훤하게 다 보였는데 이제 한 50년 지나니 숲이 다시 우거져 잘 않보이게 되었다 한다.
현용사님이 몇가지 질문을 하였다.
"스님, 혹시 절은 그때 불에 타지 않았나요?"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서 거적을 걸치고 큰스님하고 살았지요."
"군인들이 절에서 천막을 치고 잠자지 않았나요?"
"여기저기 바위밑 등에 치고 몇일 머물다 갔는데 그때 가장 높은 분도 있었어요."
절도 전쟁때문에 엄청큰 피해를 입었고 주변에 많은 군인이 죽었는데 그것이 아군인지 북한군이지 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큰스님과 보이는 유해는 보이는대로 주변에서 화장하여 천도를 해주는 것이 스님의 거룩한 업무였고 어차피 중생은 한번 왔다가 가는 인생, 슬퍼하거나 미련은 버려야 한단다.
아직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높은 법문같은 귀한 말씀을 들으며 살아 있을 때에 원수 맺지 말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절을 나와 오세암이 있는 길로 들어섰다.
얼마를 가니 현용사님이 길을 멈추게 한다. "여기 좌측에 우리가 잠간 머물던 곳으로 진지가 있을거요. 여기서 이름은 생각이 않나지만 전우가 저쪽 냇가 넘어로 들어오는 적을 사살해 버렸어요. 그렇게 안했으면 우리분대 다 죽을 뻔 했어요."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세갈래로 길이 그때도 있었지. 그래서 여기서 좌측으로 올라가야 아마 봉정암이 보일거야."
우린 계속하여 전진해 갔다.
또 얼마를 갔다. 좌측으로 가파른 경사인데 능선이 쭉 이어가고 있다. 용사님이 그곳을 오르겠다고 하여 위험하다고 하니 막무가내로 오른단다.
"이제 87세, 이만큼 살았으면 되었고 칮구들 다 보내고 혼자살아 죄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우린 용사님을 보호해야할 임무가 있어서 그건 불가합니다."
"누구야. 내가 통하여 올라가겠다고 승락을 받을테니."
하지만 이곳은 전화 불통지역이다. 현재 표고가 한 600여m가 되므로 올라서는대는 한 200m만 오르면 된다. 그래서 내가 독단으로 결정했다. 오르자고.
우리 일행은 6명이 되었다. 그래서 2명이 오르고 2명이 용사님을 따르며 함께 움직이고 2명은 뒤에서 따라 오른다.
"어어, 붙잡아." 할아버지가 휘청했다. 모두 식은 땀이 흐른다.
"괜찮아요. 아침에 일찍 열차로 올라와서 그러지."
한참을 올라 드디어 밑에서 바라보았던 능선에 올랐다.
올라서니 개인호가 여러 곳에 굴토되어 있어 분명 전쟁터였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시간은 11시를 지나가고 있다. 오늘 내려가는 일정을 고려하면 상당히 빡빡한 시간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안전한 탐사를 보장해야 하고 죽기전에 꼭 한번 본인이 싸웠던 곳에 가보고자 하는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먼저간 전우에게 힘찬 경례한번 올리겠다는 그 모습을 꼭 영상으로 담고 싶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가져온 김밥을 꺼내어 한줄씩 먹고 있다. 나는 인근에 있는 개인호를 한번 글토하여 보았다. 역시 탄피나 파편들이 일부 보였다.
모두가 찾아와 바라보고 있는데 용사님이 나가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다.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얼마를 가니 조금 882고지인지는 모르지만 방향상으로는 맞는 것같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주변에 유독히 개인호가 많이 있어 그럴수도 있다고 판단은 되지만 잘 모르겠다.
용사님의 이야기를 주로 듣고 우리는 그곳에서 하산하기로 하고 내려선다.
어어, 데굴데굴 두세바퀴 굴러가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낙엽이 워낙쌓여 길이 보이지 않고 마침 개인호가 크게 파 있는 곳이 있는지 균형을 잃어버렸다.
넘어져 굴러내려온 곳을 주변을 탐사하니 주변에 개인호가 많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용사님이 장소를 점지해주었다고 우리는 믿으며 지탐기를 돌려 보았다.
하지만 발굴은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
계속 내려서서 다시 오세암쪽으로 일정구간 이동해 구릉을 하나 올라섰는데 저멀리에 봉정암이 보인다. 용사님께 장소를 보여주고 혹시 이곳에서 뒤돌아 본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너무 오래 되었네요. 기억은 잡힐듯하여 꼭 찾을 것 같더니 어렵네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저기가 올라서면 저항령인가... ."
더 오를 수도 없다. 시간이 안되어 용사님은 내려가야 한다. 이 연세에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무리인데 그것도 저 높은 능선도 올랐다.
"일동 차렷, 호국용사님께 경례. 바로, 일동 묵념!" 그리고 용사님은 안내조와 함께 떠나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용사님은 나에게 귀한 편지를 주셨다.
"고맙소, 죽어도 이제 여한이 없어 설악은 다시는 찾지 않겠소"
"함께한 조사팀에 고맙다고 전해주구려. 그 따뜻한 대접에 감사한다고."
"60년만에 찾아간 설악의 저항령 가는 길은 감회가 새로웠지만 슬픔도 남았소"
"그당시 함께한 젊은 청년들의 불굴의 투혼을 잊지말아 주세요."
"우린 배우지도 못했고 먹지도 못했지만 자유를 지키려 명령에 오직 따라 충성을 다했다오."
"먼저간 전우들 정말 안타깝고 영혼이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그 영광 다 받아 행복하길 바라오."
"이과장, 힘든 일하고 있오. 누가 그 마음 알아주리오마는 우리같은 노병이 있고 호국용사님들이 하늘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걱정말고 정진하시요. 복받을 일을 하는 겁니다."
"다시한번 감사 합니다. 부산에서 현시천이 드립니다."
우리는 그 저항령에서 지금까지 바위틈에서 1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대청봉과 소청봉구간에서도 3구를 찾았다. 지금도 황철봉과 천우산, 상봉과 신선봉에서 100여구가 발굴 되고 계속하여 발굴 작전은 계속 되고 있다.
제3절 : 단목령에 흰나비 날다
한계령에서 내려가다 오색리에서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오르면 단목령인 박달령이 나온다.
바로 백골병단이 용대로로 침투해 들어갔다가 신분이 노출되어 탈출하면서 백담사에서 여러방향으로 흩어져 탈출하면서 소청봉이나 끝청, 귀떼기청봉으로 오른 인원이 오색리로 몰려들어 남쪽으로 후퇴해 가야한다.
1951년 3월 23일 아침 9시에 용대에서 산악으로 퇴각을 시작한 대원들은 백담사계곡으로 몰려들었을 때는 개인당 실탄이 5~6발 정도였다.
제11연대, 제12연대, 13연대의 700여명이 지금 전인식 작전참모의 지휘하에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 적은 얼마전 새로 편성된 북한군 제32사단이 우리 백골병단을 몰아붙이고 있다.
"회장님, 여기가 진흙동입니다."
"좌로 들어가세요, 아마도 그곳이 가칠봉에서 내려오면 나오는 골짜기일 겁니다."
나는 2007년에 서울로 우리가 올라온 후에 한통의 초청장을 받았다. 국방회관에서 백골병단 창설 기념식이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지금 제3사단 18연대의 창설식인가 했다. 내가 철원지역에 근무하며 백골부대 마크와 함께했고 18연대가 마냥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백골이 상징마크로 어디나 위치를 잡고 잇다.
유독히 3사단은 또한 뭐 38선 최선봉 돌파연대와 혜산진 입성부대 등의 자랑거리가 많이 있지만 당시에는 한명의 대장도 배출되지 않아 풍수지리가 어떻니 6.25전쟁때 부대기를 뺏겨서 벌을 받는 다는 등의 별의별 이야기가 많았던 부대였기에 기억에 뚜렸하다.
그런데 안내문의 내용을 읽어보니 전사책에 나오는 "육군 통제 유격부대"였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우리도 병력의 중과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국민방위군 설치법과 국민 총동원령 선포에 따라 대구의 육군 보충대에는 많은 애국청년, 학생,의용경찰관,철도경비 경찰관, 현역병 낙오자 등이 모여들고 이들중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공작과 주관으로 엄선하여 700여명을 선발하여 '51.1.4일 정보학교(대구 7훈련소)에 입교시켜 3주씩 특수교육을 받고 정규군과는 다른 별도의 임시계급과 군번을 부여하여 결사유격 제11,12,13연대순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51.1.30일에 채명신 중령(예,중장, 주월한국군 사령관 역임)이 연대장으로 최초 363명을 데리고 강릉의 퇴곡리로 침투해 먼저 들어가고 이어서 2개연대도 들어가 '51.1.20일에 통합된 백골병단을 창설하게 된다. 이때 인원이 이동 도중 자진 낙오 등으로 660여 명이다.
백골병단 회장인 전인식 예비역 소령은 문산탄현이 고향이다.
탄현은 문산의 서북쪽에 있으며 바로 뒤에 임진강이 흐른다. 정시에 이 탄현일대는 태극단이라고 하는 우익단체의 반공결사대 활동이 가장 강렬하게 전개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나이 17곱의 소년은 강단좋게 친구로부터 '50년 7월에 칼빈1정과 실탄 100여발을 입수하여 반공결사대 지하조직이 되어갔다.
낙동강으로 치달은 북한군은 내무서 정치보위부 조국보위 위원회 등을 구성하여 병력 보충을 위해 인민의용군 모집에 혈안이 되어 17세 이상의 청소년과 장년을 강제로 동원하여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또한 보급 투쟁이라 하여 각 벼이삭의 낱알 수를 셈하여 전체 평수에 곱하는 식으로 현물세를 매긴다는 등의 농민 낙원이 아니라 농민 수탈에 치를 떨게 하고 있었다.
지하에 숨어지내던 20세 인식이 청년에게도 기회가 왔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유엔군이 밀고 올라오고 북한군은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대 인식이도 나와서 도망치는 그놈들 중에 얼띠기 몇은 총으로 쏴서 임진가에 수장 시키고 총도 100여자루나 노획하였다가 미 제25사단이 진격할 때에 반납하고 문관 비슷하게 따라 다녔다.
그런데 다시 후퇴하는 바람에 봉일천까지 함께 내려오다 고향친구 셋이서 별도로 걸어서 12월30일에 영등포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화물열차 지붕위에 올라가 앉으니 1월 1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내려서 앞을 보니 많은 젊은이들이 50~60명씩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어 뭔지도 모르고 따라갔더니 육군 보충대였고 여기서 선발되어 지금 육군 결사대 교육을 받고 백골병단이 되었다.
군복을 지급받고 누비바지로 딘 방한복을 입고 무기는 소련제 장총과 기관단총으로 북한군에게 노획한 무기란다. 당시 육군 정보국장은 백인엽준장이라는데 보지는 못했다. 출동 당시는 이한림준장으로 되었다고 한다. 인사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훈련실시 10일 정도 지났는데 키가 큰 깡마른 체구의 소령 한명이 찾아와 훈련모습을 보고는 떠나갔다. 그가 바로 1대연대장이 되는 채명신이었다.
채명신은 1926년 평남 중화 출생으로 육사 5기를 졸업하고 6.25 전쟁 당시 제8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장으로 평북 영원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부하 2명과 황해도를 거쳐 남하하여 강화도의 민간자생유격대대의 도움으로 소형 쪽배를 타고 '51.1.14일에 충남 당진군 석문이란 작은 어춘에 잠입하여 대구로 복귀한 상태로 그후 중령을 달고 연대장으로 온 것이다.
지금도 일부의 많은 후배들은 채명신 군인의 자화상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6.25전쟁이 발발한 그 직접적인 알 수 없는 원인과 결부되지 않았을까... .
나만의 생각이니 또 오해는 하지말기를 바란다. 어쨌든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신태영,채병덕, 백선엽 백인엽형제, 정일권 등 창군원로 대부분이 북에서 내려온 분이 다수며 일본군 경력을 또한 가지고 있다.
결사유격대의 교육은 인민군 흉내 내기, 북괴군 제식훈련과 군가, 소총 취급법 등이였다.'51.1.30일에 달성초등학교(정보학교)에서 트럭으로 이동하여 영월에 들어가 적진 후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눈은 그리도 내리고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느 강추위 속에서 밤에는 걷고 낮에는 은신했다.
열심히 걸어 영월 북면을 지나 미탄으로 정선리로 들어가는데 벌서 국군 9사단이 여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병단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횡계리 방향으로 험준한 사늘 넘어 하진부리 남방까지 갔는데 비상식량이 바닥이 났다. 여기서 하진부리에 특공조를 투입하여 북한군을 생포한다.
"동무들 소속이 어드메요?"
"2군단 입네다."
이렇게 유인하여 무려 34명이나 생포 하였으나 정보가치가 없어서 모두 처치하도록 하여 경험을 쌓게 한다. 이것이 전쟁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옥수수등 일부 식량을 획득 하였다.
벌써 2월도 중순으로 가고 있다. 단은 다시 대관령 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사기막리로 들어가는데 2얼 13일이다. 여기서 상당한 비상식량과 소 3마리를 잡아 포를 떠서 절이어 확보하였는데 2월 16일에 이곳으로 수도사단 제1연대가 이번에는 들어오고 있단다.
다시 걸어서 티곡리에 도착하는데 낙오인원만 170여명이 되고 12연대 13연대 다 모이니 67명이었다. 여기서 백골병단이 '51.2.20일 창설 된 것이다.
"소10여마리, 그리고 함께 데려간 부락 청장년과 지원한 아낙 등 10여명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전회장은 지난 '92년 6월에 이곳 퇴곡리를 찾았다. 그리고 몇분의 노인을 만나 사과를 드렸다.
"그때 그들이 소 7~8마리를 잡아가지 않았습니까?"
"아마 10마리는 더 될 것이요. 그리고 ... ."
전회장은 미안함을 표하기 위해 얼마를 드리고 이곳을 떠나왔다.
"세월이 가도 아픔은 남는 것이다."
그리고 '51.2.23일에 원기충전한 병단은 신배령을 너머 조개동으로 들어가는데 사실 침낭하나 모포한장 없는 인원들이 옥수수대나 나뭇잎, 그리고 일부는 민가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2.24일 이동준비하는 단의 머리 위로 아군기가 오폭을 하여 6명이 희생되었다. 처음의 희생인데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있겠는가.
다시 구룡령입구까지 진출하여 그곳 일대의 민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그 주변을 장악하여 도로 주변에 검문소도 설치하고 오솔길에서 완전 북한군 행세를 하게 되었다.
눈이 내려 차량통행은 절대 불가하고 도보로 걷기도 힘든 이곳 광원리 일대에 적 제3군단 본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적 제69여단의 본부가 인구리에 있음도 밝혀내어 수도사단에 알려주게 되었다.
나와 전회장님은 용대리에 있는 백골병단 충혼탑을 바라보고 섰다.
분명 육군이 모병하여 특수 교육을 시키고 북한군 후방지역에 침투시켜 운용하려던 유격군에 대한 공식 인정을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난후에 그것도 35년만에 전사에 기록되어야하는 이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고 먼저간 전우들에게 고개숙여 사죄를 올릴 뿐이다.
아니 분명 명단이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계급장도 부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모른다고 버틴 그 35년의 세월이 너무하지 않은가!
이뿐만이 아니였다. 기간중 총 참전자 817명중 전사자는 364명(행방불명 170명)이나 신원이 확인된 인원은 61명으로, 동작동 현충원에 위패봉안 58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3위 외에 303명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위패안치 58명중 46명은 연고자를 전혀 알 수 없다.
아니 백척간두의 위기에 제대로 무장도 없이 3주의 교육을 시켜 강원 설악지대에 침투시켜 앞에서 언급된 적의 군단급 및 여단급의 위치를 파악하여 공습을 유도하여 무력화시킨 그 명백한 부대를 인정도 하지않했던 그 뚜렷한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당시 연대장이었던 채명신장군마저도 회피하던 그 쓰라림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인원중에는 또 군에 붙잡혀 들어가 두번의 병역의무를 이행한 불행한 전우도 많았다.
전적비는 내가 지금까지 다녔던 그 어느 전적비보다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알차게 잘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사실은 2003년에 건립하면서 1,620만원 소요중에 전회장님이 350만원, 회원 일도이 670만원을 협찬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적비를 둘러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구룡령에서 그렇게 많은 인민군을 잡아서 어떠헤 처리했어요?"
"뭘 어떻게 해, 그냥 처리했지."
"회장님, 우리가 구룡령에서 갈전곡봉, 약수산방향으로 탐사를 했는데 많은 개인호가 있어요?"
"거기 반은 우리가 파고 반은 인민군이 파고 아마 반에는 인민군이 들어있을거요."
"네?, 뭘 놀라오. 죽여야 살지. 죽이지 않고 살았겠어?"
원칙론적인 이야기지만 모두가 의미있는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 고개 밑 외청도리에 본부로 사용하던 집이 남아 있고 당시에도 살고 있던 집에 소년이 살아서 어른이 되었단다.
외청도리에서 개방천을 따라 내려오면 광원리가 나오는데 이곳도 우리가 이미 탐문활동을 다 마친 곳으로 특히 인민군의 지휘부가 있었고 지금 야산에 큰 무덤이 2~3개 있는데 그게 다 인민군이라는 제보를 갖고 있는 터이다.
"회장님, 광원리에 인민군 왕무덤이 크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 아세요?"
"그건 모르지. 우린 그곳에 머물며 사실 민폐도 많이 끼친 것이 사실이야."
"민폐라면 주로 뭐가 민폐인가요?"
"뭐 배고프니 별 수 있어. 있는 소 잡아 먹고 돼지 잡아 먹고 그러다 보니 또 뭐 그렇지."
나는 그 답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알았다고 답변도 안하고 화제를 돌려야 했다.
"광원리에 한번 가보실까요?, 언젠가 가보셨다면서요."
그래서 우린 용대리에서 광원리로 향했다. 먼저 오색리로 들어가 국민학교 자리를 보고 나와서 다시 양양 서면 상평리에서 서림으로 들어와 외길을 달렷다.
"잠깐, 이과장, 저 우측으로 난 길이 백두대간 조침령으로 가는 길 아니요?"
"맞습니다. 저기를 넘어서면 바로 회장님이 말하는 진동리 설피밭이 있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슈, 국토지리원에 근무하셨나?"
"하지만 오늘은 광원리와 구룡령입니다. 다음에 다시 진흙동에 들어가 단목령에 가지요?"
"그렇게 합시다."
우린 드디어 구룡령 정상에 차를 세웠다. 오피러스차량이 언덕을 올라서는데 나의 몸무게로 인해 상당히 거부감을 나타내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머니 거기 좋다는 차가 뭐요?" 고개 정상에 약재상들이 모여 일부 한약재를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구수하게 김이 오르는 검은 색의 차에 손짓이 갔다.
"한잔에 2000원 입니다. 드셔보면 바로 효과가 있을 겁니다. 남자에게 좋아요."
검게 그을린 주전자의 색깔, 아주머니의 구수한 농담, 회장님의 짖궂은 질문에 우린 잠시 시름을 잊고 한바탕 웃음으로 구룡령 고개를 흔들었다.
"이놈들아, 호랑이가 왔다. 다들 잘 있었느냐?" 회장님의 함성이다.
"그래 미안하다. 어쩔수 없었다. 용서해라. 나도 곧 간다."
"하지만 공산당은 싫다. 거지를 해도 내맘대로 하는 자유대한에서 할거다."
"몰랐겠지. 알고도 어쩔수 없는 놈도 있었겠지. 하지만 다 잊자. 세월이 약이다."
혼자 산천을 바라보고 말을 하는 전용사는 눈가에 눈물이 괴여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양양과 연결되는 길은 그때도 여기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양쪽 봉우리를 점령하고 검문소를 운용하여 오가는 북한군을 죄다 잡아다 주리를 틀고 문서를 빼았고 저 세상으로 보내 그 흔적을 알지 못하도록 굴토된 개인호에 밀어 넣어 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 정보에 의해 폭격이 가해져 얼마나 많은 인민군이 죽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 죽은 인민군을 모아서 집단 매장한 곳이 그 왕 묘같은 곳일거라 한다.
우린 외청도리를 지나며 그 지휘소였다는 민가를 손으로 확인하며 광원리에 도착했다.
그 왕무덤(?)은 해인농장안으로 들어가 야산에 있다.
지나는 한 노인을 만나 그 지긋지긋한 전쟁이야기를 물었다.
"말도 마슈, 우리집도 다 타버렸어. 무슨 원자폭탄을 터트리는지 이동네 그래도 50가구도 넘었는데 다 타버렸어요. 인민군 연대 지휘부가 있다가 그것도 다 날라가 버렸지."
"혹시 그때가 언제쯤 되는지 기억나시는지요?" 회장님이 질문하였다.
"잘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동란 이듬해 봄이 막 오려고 하던 대로 알고 있어요."
이 질문은 그래도 채명신 연대장이 직접 연대원을 지휘하여 유일하게 적의 지휘부를 기습공격했던 시기가 바로 '51.3월초에 있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초소병 한 20여명을 척살한 후에 이 구룡령 좌우측 산에 은거하여 몇일을 숨어 있었다 한다. 그 목숨과도 같은 귀중한 식량만을 소비하면서... .
"지금도 알 수 없다. 겁이 나서였을까?" 전작전과장의 독백이다.
그로부터 얼마후에 나는 다시 이번에는 독일제 벤츠를 타고 진동리로 향했다.
지난번 구룡령에서 빌빌거리던 차를 버리고 새로 힘좋은 벤츠를 구해 아드님이 운전하고 왔다.
우린 인제 현리 제3군단 휴양소인근에서 막국수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부대앞 삼거리근처 식당을 들어갔다. 그래도 면소재지라 그런지 사람이 제법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회장님은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진삼 전 체육부장관이 군단장시절에 바로 용대리 추모비를 세우는데 가장 많이 도와준 관계로 이곳을 들리곤 했고 지금도 부사관 몇명을 선발하여 표창하고 여행을보내주는 정말 고마운 일을 하고 계시다.
자연히 우리는 앉아서도 하는 이야기가 이곳이 '51.5월에 중공군 춘계2차 공세로 우리 3군단이 무력화된 현리전투의 심장부라는 전쟁이야기다.
그런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촌로께서 본인이 한마디해도 되느냐며 말문을 열으셨다.
오해 나이 84세로 전쟁 당시에는 17살이었는데 피난을 하다 '51년 6월에 다시 이곳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집은 지금의 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이었고 중공군이 들어왔을 때에 밀려내려가는 군인을 따라 방태산을 넘어서 저기 평창의 백적산까지 피난을 갔다고 한다.
왜 피난을 백적산으로 가는지 어쨌든 나는 그 백적산에도 가 보았다. 전쟁터였으니 말이다.
그 일대에서 많은 유해도 발굴했지만 길도 잃어서 고생도 했던 곳이다.
"피난가서 보니 다른 사람들도 많이 왔습니까?"
"그럼요,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 더 많고 얼마나 왔는지 산에 사라미 꽉 차있는데 정말 나무뿌리하나 찾기 힘들정도로 헐거벗은 민둥산으로 그 밑에 산까지 이어져 피난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피난복귀하니까 여기 현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헬기장, 비행장있지않소 , 그곳에서부터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데 제대로 남아있는 집이 하나도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죽어있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없었습니까?"
"아이고 우리집에 오니가 글쎄 빨랫줄에 인민군 목이 8명이 걸려 있지 뭐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거참 너무 잔인들 해?"
"그럼 혹시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와 있을 때에는 그런 것 보지 못했나요?"
"그때도 죽이기는 했지, 그 뭐요 지역 빨갱이들이 날뛰며 여기저기 붙잡아다 찔러 죽이고 집에 있는 것 다 가져가고 뭐라 말할까 미친놈들이 많았지."
"군인들 죽어있는 것은 본적이 없습니까?"
"저 방태산에 높은 곳이 주억봉(1449) 말고도 구룡덕봉(1388)이라고 있는데 그곳으로 해서 피난을 군인들과 함께 밀려나가는데 수없이 죽어 그대로 있고 누가 치워줄 겨를도 없어요. 상남에서 광원리, 창촌리로 가는 개울은 다 피로 흘러갔다고 하잖소."
"아이고 이제 그런 전쟁일어나지 말아야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게 어수선한게 또 몰라요."
그래도 백골병단이 들어와 민폐를 주었다는 말은 없었다.
우린 진동리 삼거리에서 마을 회관을 들러 혹시나 관련제보를 얻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곳은 당시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지 못했고 워낙 산새가 험해서 누가 찾아오지도 못했다고 한다.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곳도 이곳에서 바로 북으로 올라가면 가칠봉(1165)밑에 상치전이라는 곳에 몇가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방송을 타고 사람들이 찾아와 펜션도 들어서고 제법 사람사는 맛이 있다고 하며 들어가야 옛날 사람은 없단다.
우린 두무동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나 그 옛날 본인이 직접 매장했다는 곳을 동행하게 되었다.
당시에 할아버지는 군에 갈 나이는 되었어도 너무 작아서 나이를 속여 군대에 가지 않았다.
사실 그 이후에도 결국 군대는 가지않고 끝났다.
먹고 살기에 힘들어 매일 가칠보에 올라 약초며 나물을 뜯어 현리장이나 상남장에 때로는 봉평장까지도 가서 팔아 필요한 생필품을 사곤 했다고 한다.
그런 어느날 워낙 많은 인민군이 몰려 들어 왔다가 떠나가는데 집에 있는 된장, 고추장, 먹을 것은 다 뒤져 가버렸는데 모두 가칠봉쪽으로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어 총소리가 몇번 나고 조용해져서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벌벌떨며 하룻밤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어젯밤 총소리 난 곳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글쎄 몇 명이 여기저기 죽어 있어서 나중에 몇 삽 묻어준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진흙동 입구 두무터이고 으린 할아버지를 따라 가칠봉 골짜기로 들어섰다.
때는 7월이라 소금꽃이 반발하고 야생 나팔꽃이 피어 있고 찔레꽃이 피어나 향기를 더하고 있다.
옆 계곡에는 이른 장마에 조금 물이 흐르면서 꽐꽐거리고 있고 숲은 녹음이 짙어 숨막힐듯 여름이 들어앉아 있다.
그래도 어덯게 이런 골짜기에 산길이 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할아버지, 여기 길은 어디까지 연결되나요?"
"가다가 끊기는 곳도 있지만 따라가면 가칠봉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길이 생명선인 것이다. 먹고 살 물건을 해결하는 복 길이다.
얼마를 올라가다보니 아주오래된 산밭의 형태가 조금 남아 있고 밭둑도 보인다. 그 당시는 주로 화전민이 살며 숯이나 굽고 감자 아니면 옥수수를 심었으리라.
"어, 여기쯤 되는데 한번 찾아보세요?"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우리도 갑작스레 긴장된 모습으로 금속 탐지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흔히 우리는 "아, 10cm만 더 찾았으면"하는 안타까움의 구호가 있다. 바로 옆에 두고도 못찾는다는 비유인데 그래서 중요한 탐사가 있거나 높은 산에 오를 대는 육식을 나는 하지않는 규율을 지켰다.
물론 1999년 10월부터 전쟁터에 있는 뱀도 절대 아무리 천만냥이 되는 값이 나가도 잡질 않했다. 그걸 나는 영혼의 바램으로 보고 기도를 하고 유해를 찾아 그 영혼의 넋을 위로하려 했다.
이때다, 하얀 나비가 날아와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과장, 이 어디에 유해가 있는 모양이요. 잘 찾아 보오." 회장님의 표현이다.
지금 우리가 탐사하고 있는 이곳은 백골병단이 구룡령에서 이동해 산을 넘어서 귀둔리로 가지전에 거쳐간 곳으로 '51년3월 중순경이다.
곧 38도선을 넘어 귀둔리로 가면 그래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인민군 내무서도 있고 인민위원회도 있는 먹고 살아야할 것을 해결하는데 좋은 곳, 점봉산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골짜기를 지나다 도로 입구에서 일련의 적과 교전이 벌어져 처치하는 가운데 동료 둘이 전사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그 유해를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주변을 탐색하다 우린 두군데의 약간 볼록한 지면을 확인하고 지탐기를 가동한 결과 한 곳에서 탐지음이 있다.
실탄이든 파편이든 수류탄이든 철모든 뭐가 있다는 징후이기에 기초굴토를 삽을 이용하여 해 보기로 하고 할아버지 집에 다시 가서 삽을 가져와 굴토를 해 보았다.
"유해가 있다."
우린 별도 날을 선택해 백팀장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한 유해 1구를 발굴하여 그 날으던 흰나비의 전설을 증명하였다.
2008년부터 이곳 진동리일대에서 2009년가지 8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제4절 : "내 이름은 강철수, 저기 연백이 고향이오!"
"철수야,철수야~!"
50년만에 땅속에서 올려진 하얀 호리병에서 나온 술을 마구 먹는 장기락 5816부대원이다.
나는 유해발굴 업무를 하면서 정말 귀한 분들을 많이도 만나 내가 모르던 그 당시의 전쟁이야기뿐만 아니라 인생살이를 많이도 들었다.
강화도에서의 유해발굴은 2001년부터 시작 되었다.
정규작전이야 최초 옹진반도와 개성일대에서 밀리던 우리 독립 제17연대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병력이 이곳으로 철수하여 일부는 배로 대다수는 다시 김포반도로 유입되어 전투를 하며 철수해가는 것과 1.4후퇴 이후에 다시 유엔군이 재반격하는 과정에 국군 1사단에 배속된 해병대 일부가 들어와 지역방어를 한 것 외에는 사실 큰 전투가 없다. 오히려 김포반도는 김포지구사령부까지 편성되어 전투를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 고장이 편한하게 아무일 없이 전쟁기간을 보낸 곳도 아니다.
알고 있다시피 고려시대에는 몽고와의 항쟁이 이곳에서 이루진 곳이고 조선시대에도 많은 변란마다 이곳이 도피처로써 이용되어 많은 애환이 있는 곳이다.
강화유격대 출신인 우국형용사님의 증언을 통해, 그리고 회장직을 수행하셨던 고)이석군용사님의 애타는 절규를 통해 고향을 바로 저 강건너에 두고 한평생을 살아간 이야기가 여기 살아 있다.
선배님, 어떻게 유격군이 되었어요?
"뭐야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집이 바로 저너머에 있는 연백인데 그냥 있었지. 그런데 인민군이 마을에 나타나고 내무서원이라는 놈들이 자건거 타고 다니며 뭘 조사한다느니 난리를 쳐대는데 우린 숨어서 나오질 않했어요. 그러기를 한 3개월 하는데 분위기가 수상한거야, 인민군은 보이질않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수 없이 북으로 날아가는데 아무도 없어. 그래서 동네에서 밤이면 서성거리는데 벌써 국군이 올라왔다고 동네사람들이 태극기들고 나가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누가 와서 툭 치걸래 보니까 처음 1사단이 있을 때에 알고 지내던 배일병이 이등중사달고 나타나 얼마나 반가운지. 그래서 함께 가자고 하길래 뭐가 있어야 갈거아니냐고 했더니 칼빈총 한자루를 주지않겠어. 그걸 들고 하루는 따라 다녔지."
그때 나이가 18세로 체격도 있지만 나이가 부족해서 군에는 아직 못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서 반대하여 북으로 진격하는 배중사를 못 따라가고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연백에 남아 치안유지하는데 치안대가 자동적으로 되어 이제는 거꾸로 부역자를 찾아다니는 업무를 하고 숨어들은 못 도망간 잔적을 찾아내는 임무를 경찰과 군인 특히 미군이 있었는데 그들의 지시를 많이 받았다 한다. 이러다 보니 동네는 갑짜기 공산당을 잡아내고 숨기는 자는 처형하는 무서운 동네로 변해가는데 또 갑짜기 군인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번 처럼 몇개월 숨어 있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동네 몇몇이 강을 건너 이곳 강화도로 들어온 것이 이렇게 50년이 흘러 버리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와서 어떻게 생활을 했습니까?
"내려오니까 우리만 왔겠어. 오만 사람이 다 모였는데 좀 뻥치면 발 디딜틈도 없이 사람이많아요. 그러니 뭘 먹고 살겠어. 당연히 구걸도 좀 하고 훔쳐 먹기도 하고 하지만 한계가 있잖아. 그런데 마침 무슨 치안대같은 것이 있다고해서 가만히 보니 재부분 북에서 온 사람들이 태반이라. 보니까 고향선배도 있고 해서 들어간 것이 유격대가 된거야. 알고 보니 이곳에 벌써 군에서 유격대를 운용하여 밀려오는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처음에는 국군 제1사단의 통제를 받는 5816부대였는데 주로 북에서 온 사람들이 구성원이었지."
그럼 김동석(현재는 고인이 됨)대장이 당시 대장으로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슈, 맞아요. 하지만 그 부대만 있는게 아니고 이 주변의 섬에는 자생유격대조직과 반공청년들이 엉켜 있었지."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미군은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군과 중국의 힘겨루기, 러시아군대의 움직임등을 파악하기 위해 OSS 또는 KLO라는 특수임무부대원들이 우리 서해 도서와 서울에도 들어와 있었는데 여기에는 우리 한국인도 있고 심지어 장개석군대의 첩보원도 들어와 활동 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중공군의 무력개입으로 전투력의 균형이 무너지니 우리는 백골병단은 정부참모부에서 주관으로 편성하여 적진 후방 깊숙히 침투시켜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작전 참모부에서는 후퇴작전시 북으로부터 서해안이나 동해안으로 탈출하여 자생적 유격활동을 하고 있는 무장치안대와 반공청년을 규합하여 그들을 지원하는 형태로 을지병단이라는 이름의 유격대를 편성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동해안에 을지 제1병단을 창설하려 했으나 지원 인원이 부족하여 백골병단이 3월말 해체되자 이 인원을 받아 창설 하려다 통제권이 미 제8군으로 넘어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육군은 다시 '51.3월 27일에 강화도에서 서해안 도서를 중심으로 활동중인 인원을 규합하여 을지 제2병단을 창설하였다.
반면에 미 8군은 우리 을지 제2병단이 창설된 다음날 백령도에 이미 창설된"표부대"('51.2.15에 윌리엄 에이블기지로 창설, 3월에 정식 명칭을 '표'부대라 하였으며 4월까지 무장치안대를 유격연대로개편하고 '동키부대'라 했다.)의 작전 통제를 받도록 통제를 하게 된다. 그때 규모가 무려 7개연대 규모였다.
그러다 자꾸만 양 세력간에 알력이 발생하고 보급문제등으로 마찰을 빚게 되자 지휘통제의 원활함을 위해 을지 제1병단은 동해안에서 활동중인 미 8군의 주문진에서 활동중인 커클랜드기지('51.4.14 창설)로 통합시키고 제2병단은 '51.8월 10일에 강화도에 창설된 울프팩기지로 흡수하게 된다.
이 외에도 미 8군은 부산 동래에 '51.2.15일에 '베이커기지'를 창설하여 다ㅏㅇ시 대구에 집결된 방위 사관후보생 중에 대원을 선발하여 공수 및 특수전 훈련을 교육시킨 후에 제1기생을 배출하여 실제 이 이원이 북한지역 깊숙히 낙하산을 이용하여 침투해 들어갔다.
따라서 이 인원들도 백골병단처럼 그 명단이 있음에도 제대로 밝혀지지않고 그들만의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더구나 교육을 받다 순직한 인원이 지금 동래 교육장 산비탈 군부대 안에 몇구의 유해가 있음에도 현충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전사자 명단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 두번에 걸쳐 직접 찾아가 실태조사를 했다.
그런 2001년 어느날 여름에 장기락(교동. 강화유격대)용사님으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강화 철산리에 8구의 유격군이 묻혀 있다."
나는 당시에 국방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 통제장교인 박인영중령(해안 펀치볼 땅굴 작전 유공)과 협조하여 당시 조성태 국방부장관에게 그 발굴 필요성을 검토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우린 김동석대장, 장기락, 목성균등 당시 대원들과 현장을 조사하여 최종발굴키로 하고 해병대의 인력지원을 요청하였다.
'01년 가을, 10월의 그 어느날에 우리는 발굴작전을 개시하였다.
이곳 철산리에서는 '51년3월말에 바로 앞에 백마산(190m)이 보이는 곳으로 해평리로 들어가 장경저수지를 폭파하러 갔던 유격대원이 12명이 기도가 노출되어 그만 접안을 못하고 배에 박격포가 명중하고 말았다.
"물에 뛰어들어라, 물에 뛰어들어라!"는 선임자의 구호는 죽은지 오래다.
이걸 바라보는 뭍에서는 대응사격을 해준다고 해야 그곳까지 날아갈 박격포도 없다.
그저 공갈총인 소련제 기관총만 임진강을 향해 울어대고 있을 뿐. 하지만 살아야 한다.
고향이 저기인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사라져가는 영혼의 불빛으로 어머니, 보고싶은 어머니가 보인다.
배는 뒤집혀 물살을 따라 움직이는데 용케도 밀물이라 배는 떠 내려가다 우리측 연안으로 밀려왔다.
하지만 4명은 북쪽에 끌려가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목메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얼마있어 따르륵 거린느총소리 나더니 운명은 끝났다.
그럼 8명은 어떻게 된 것일까, 배를 띄워 주변을 수색한 결과 모두 찾아내고 말았다. 누구도 숨을 쉬는 사람은 없이 넉잃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강변에 있었던 전우, 장소대장은 울면서 달렸다.
"철수야, 철수야~!"
하지만 멈춰버린 맥은 돌아오지 않고 벌써 까마귀들이 날아들고 있다.
곧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불알친구다. 그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며 함께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친구인데 그만 얼싸안고 울어야 한다. 원 없이 울어야 한다.
장기락 용사의 연백은 평야지대다. 먹고 사는 것이 풍부하여 동네가 어느 곳보다 다정다감하다. 대부분 접경지역이라 프락치들의 활동이 심했던 터인데 오히려 반공투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바로 개성북방에서 북한군이나 소련군의 만행에 치가 떨려 넘어와 구월산 유격대처럼 자생 반공청년단이 그곳에는 활동을 경찰과 이미 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난 후에도 황해도에는 반공 유격대가 있어 아군이 진격시 많은 역활을 했다고 한다.
방법이 없었다. 이곳 지역 대장인 김동석은 장기락을 시켜 강화읍에서 관과 술 한병식을 준비하도록 명령하고 장기락은 대원들과 함께 읍에 나가 관을 구하고 호리병에 막걸리를 가득 8개를 채워왔다.
정중한 안장식이 거행디었다. 진중이니 엄숙하면서도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소를 선정한 곳에서 대원들이 모여 경례를 올리고 엎드렸다.
그런 세월, 50년!, 하지만 이들은 군번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어디에도 그 군인이라는 근거가 남아있일 않다. 오히려 백골병단은 명확히 있는데도 솔직히 말하면 군이 숨기고 있는 것이고(전인식 회장등 백골부대원의 강력한 트러블임) 여긴 미 8군의 통제를 받다보니 그 책임한계가 불명확하였고 더구나 김동석 대위가 통제하는 제5816부대원과의 구분도 불명확하여 아직도 일부는 그 신분상의 문제로 재판이 진행되는 분도 있다.
제5816부대원이 되면 특수임무부대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방의무를 지는 것이고 그 혜택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분들은 군인이 아니면서 대부분 어린 나이에 일부는 자의적으로 일부는 강제적으로 들어와 특수임무(북한지역 침투 및 교란)를 수행했기에 현재 특별법에 의하여 보상을 하고 있다.
그러니 대부분의 인원들은 다시 군인으로 들어가 병역의무를 마친 분이 대다수다.
장기락 용사님도 국군 제1사단 용사였다.
휴가차 서울에 가 있는데 전쟁이 나서 복귀를 못하여 탈영병 아닌 탈영병이 되었다.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탓으나 수색에서 내려야 했다.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걸어서 금촌을 지나는데 벌써 병력이 내려오고 잇다.
함께 걸어서 행주나루에 도착하니 피닌민, 군인, 차량 등 많은 인원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아비규환이를 이루고 있는데 뒤에서는 자꾸만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가까워 지고 있다.
비는 내리고 12연대 인원은 보이질 않는다. 물어보니 모른다는 대답뿐이고 누구는 김포쪽으로 후퇴 한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쯤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몇 척 안되는 배들이 연신 군인들을 싣고 저 방화동 개화산 있는 쪽으로 가긴 가는데 너무 많이 승선하여 조마조마 하다.
"으악, 사람살려~!"
결국 바로 눈 앞에서 배한척이 뒤집혀 타고 있던 30여명이 물에 떠 내려간다.
누구도 뛰어들어 건져줄 사람은 없었다.
누군지 군인이 총을 쏘아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서는데 아마도 사단장이나 되는 모양이다.
웅성웅성거리며 사람들이 강을 따라 마포쪽으로 가기도 하고 이포나루로 가기도 하고 떠나는 배를 두손으로 붙잡고 헤엄치며 나가는 사람도 있다.
"모세처럼 강물를 가르는 높은 군인은 누구일까?"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어느 사공이 배를 가지고 와서 일행이 올라 떠나는데 별별 생각이 든다
"하나님 아버지 구해주세요!"
"부처님 부처님 살려 주세요!"
"마호메트님 한번만 배가 오게 해 주세요!"
하지만 오라는 배는 오다말고 강물 중간에서 곤두박칠치고 있다.
용왕님이 끌어 들이는 것처럼 속 들어갔다 나오길 한두번 반복하더니 사공만 위에 매달려 손만 흔들며 못 간다는 표시다.
이때 일행 중 한명이 총을 강물에 대고 갈겨 버린다. 사공놈이 장난을 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이고 살려주시요, 갑니다. 갑니다."
못 온다던 배가 다가 오고 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난리치는데 나이드신 분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녀자위주로 한 30명을 태웠는데 배가 출발을 못하고 가라앉는다.
배가 구멍이 나 있어 많이 태우질 못한다는 사공의 말이 맞아 보였다. 그러니 어덯게 하랴 군인들이 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희생정신이었다.
그런데 한 동료가 갈대숲을 왔다갔다 하더니 노가 없는 조그만 조각배같은 것을 끌고 왔다. 동료 5명이 타니 막 가라앉으려 하는데 손바닥으로 물을 헤치며 밀고 나갔다.
벌써 밤은 오고 저 고양쪽에 불빛이 번쩍하면 꽝하고 소리가 들리는데 어쨋든 강을 건너고 있으니 일단 살아는 난 것이다.
그런데 밤새 가도 낮에 바로 앞에 보였던 개화산 바로 밑의 갈대밭이 보이질 않는다. 비가 그쳐 가는데 얄궂게 강물에 달빛이 그믈그믈거려 신세를 처량하게 하고 있다.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금방이라도 뒤집어 삼킬것처럼 으르렁으르렁 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탕탕탕,탕탕탕~"
강변인지 이따끔 총소리에 우리 5명은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그저 물이 가는대로 가고 있다. 가면은 남쪽바다겠지. 인천에 다다르리라 생각했다.
여명이 오고 있다. 여름이니 얼마나 빨리 오겠는가, 한 아침 5시나 되었는데 아니 웬 군인들이 강변을 따라 막 뛰어 달린다. 북한군이지, 아군이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두려움만 커지고 도대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는데 조각배가 뭍에 다다른다.
군인이란 이유로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은밀하게 하선하여 주변을 보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논이 보이고 야산이 있어 기어 올라가 보니 아니 이게 웬말인가, 저멀리에 군인들이 배를 타고 게속하여 건너가는데 빨간 깃발이다.
"북한군이 탄포에서 반대편 조강포로 도하작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행주나루에서 조각배를 띄웠는데 비가 내리는 그 칠흙같은 밤에 남쪽으로 당연히 가리라 믿었던 배가이 그만 북으로 흘러가 지금 김포반도 끝의 애기봉이 있는 맞은 편 개풍의 조강리에 다다랐다.
지도에서 보면 한강물이 행주나루에서 서쪽으로 가느것이 아니라 일단 북쪽으로 올랐다 다시 서쪽으로 가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인천은 보이질 않고 다시 북한군 소굴에 온 것이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는데 어떻게 잠들어 버렸다.
6월25일 저녁부터 지금 4일째 아무것도 먹질 못하고 있다. 여름이니 물이야 먹었지만.
눈을 떠보니 밤이다. 지금도 탄포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할까요?"
"살아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헤어집시다. 산다면 영등포 역에서 만납시다." 그리고 헤어졌다.
용사님은 고향을 찾아 가기로 하고 길을 따라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걸었다.
지나는 동네에는 사람도 어딜 다 피난갔는지 아무도 없다. 옷이야 휴가중이라 군복을 입지 않아서 문제가 없고 말씨도 문제가 되질 않았다. 해가 어둡기 전에 고향 뒤산에 도착하여 집을 내려다 보았다. 어머니가 보이고 여동생도 보인다. 그래도 살았다는 안심이 들어 어두워지길 기다려 집으로 잠입해 들어가 어머니를 불렀다.
이때부터 숨어서 집에서 밥을 먹고 보내는데 이따금 치안대란 어린녀석들이 집으로와서 어머니를 부러세워놓고 으름장을 놓고 간다.
"기락이형 나타나면 바로 신고하기오. 그렇지 못하면 다 죽슴네다."
자라는 논의 벼속에 숨기도하고 굴뚜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구들장을 뜯고 그곳에 용변보는 것까지 갖추어 버티는데 그래도 밥이라도 먹으니 살만하다고 한다.
어쩌다 한번씩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기도 하지만 더운 여름이라 강가의 모기가 장난이 아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머니가 급히 나와보라하여 구들장속에서 나와 하늘을 보니 비행기들이 북으로 날고 있는데 이야기만 들어던 유엔군이 올라오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 되어 어머니께 이야기하고 조금만 기디리면 곧 국군이 올거라 말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밖에서 '조국 해방전선에 의용군으로 참여해야 한다'며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이미 장일병은 송악산 비둘기 고지에서 한번 북한군과 격전을 치렀던 경험이 있고 친척들이 서울에 있어 세상물정을 그래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이거 큰일이라 싶었다.
이러다 정말 북한군이 부산까지 가버리면 어떻하나 하는 걱정이 뇌리를 때리고 있다.
답답한 나날이 가고 있는데 밖에는 벌써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고 무슨 조세를 걷는 다고 논이나 밭에는 인민 자치위원회 위원들이 낱알을 셈하고 다닌단다.노동자 농민의 천국이 온다며 김일성 장군가를 마을마다 사람들 모이면 부르게 하더니 이런 처 죽일 놈들이 어디있겠는가.
아버지는 화병에 앓아 눕고 어머니는 매일 무슨 동원에 나가곤 한다.
그래도 오후에 임진강가에 비추는 낙조는 아름답고 웅어들이 올라와 뛰어오르고 그 웅얼거리는 소리가 정말 천국이란다. 그런데 전쟁이라니... .
한강에도 그때는 갈대숲에 웅어들이 엄청나게 많이 올라와 바가지로 떠담아도 될 정도였다니 격세지감이다. 지금 웅어는 금강선에 올라온다.
그러다 갑작스레 요란한 굉음이 나기 시작하더니 탱크인지 자주포인지 북으로 올라가고 국군이 미군이랑 벌써 동네에 나타났다.
나는 구둘장 속에서 나왔는데 이미 12연대는 북으로 진출하고 만날 수가 없게 되어 동네 자칭 치안대장을 하게 되었다.
집에 찾아와 칭얼대던 놈들의 집에 찾아가니 벌써 다 튀어버리고 부모들만 있다.
"그렇지, 너희들도 나와 갔겠지"라는 생각에 으름장을 놓았다. "자수하면 살려 준다고 하세요~!"
그런데 또 군인들이 거꾸로 내려오는데 얼마나 빨리 도망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알 필요도 없다며 빨리 피난을 떠나라고 하는데 부모님을 같이 가자고 하려니 고향을 지키려는 그 애뜻한 마음을 저버리기가 곤란해 장일병만 총 한자루 들고 이번에는 제대로 강을 건너 강화도로 들어 온 것이다.
들어와 보니 고향 사람들이 자생유격대를 구성하여 치안유지 활동을 하고 있고, 육군에서는 강화읍에 제1사단 5816부대라는 특별 첩보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군인이었던 용사님은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어덯게든 강건너를 가봐야만 하는데 다시 군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자생유격대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최초의 을지 제2병단유격대가 되고 이어서 미군에 흡수되어 울프팩이 되고 타어거여단 8240부대(제1사단이 형식적 통제이고 사실은 미 8군이 직접 통제하고 보급이나 장비등 일체 지급하는 학도병으로 약 3,000여명이 됨)로 '51.7.26일 개편된다.
그러다 휴전이 되면서 한국군 8250부대로 전환되는 과정에 다시 군에 들어가 병역의무를 다하다 보니 본의아니게 억울한 두번의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향을 가보고 싶다던 어린 꿈은 산산이무너지고 말았다. 살은 것만으로 다행일 뿐, 그 이후로 부모형제는 볼 수 없었다.
'51.3월 말에는 개풍 해간포로 어선 11척을 이용하여 침투해 들어가 적 1개중대를 격멸하고 11명을 생포하여 귀환하는데 이 당시에 이 일대에 모여있던 피난민 1만여 명이 남으로 넘어오게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우들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도 입는다.
무동력선으로 물때를 고려하여 침투하고 철수하게 되는데 생사를 걸어야 하지만 실제 대부분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에 중공군이나 북한군보다도 지형을 더 잘 아니 작전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게 완벽이 없듯이 우리쪽에도 북한군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프락치가 있게 마련이고 고향땅에는 북한군의 앞잡이가 된 인원들이 다수 생겨나 어디로 침투해 올 것이라고 사전에 작전이 노출되면 당하기 마련이란다.
월포, 탄포, 홍천포뿐만아니라 상륙이 가능한 모든 곳을 이용하여 침투를 하게 되는데 바로 철산리에서 월포로 침투해 들어가던 일행이 적에게 기도가 노출되어 전사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 병력이 들어와 땅을 파기 시작하고 얼마를 있어 드디어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김동석 대장, 목성균 타이거여단 전우회 회장, 장기락 용사님 등이 눈물을 흘리며 50년만에 고향의 친구들을 , 아니 이름없이 산화한 용사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도 이분들의 이름이나 군번은 부여되지 않고 유격군으로 특별법에의해 가다로운 절차를 거쳐 인정이 된 인원만이 전사자 또는 특수업무종사자로 인정되고 조금의 보상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인후보증을 하려해도 지금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고 유가족 보상을 신청하려해도 대부분 북에 생존하고 있으니 그마저도 어려운 안타까운 실정이다.
"하얀 호리병, 그리고 따뜻한 용사임의 얼굴!"
"딸가닥 딸가닥", 어린 해병용사의 삽에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난다.
"작업 중지, 잠깐 모두 뒤로 물러나 앉아라"
전문발굴삽을 들고 나와 박선주 교수(충북대 인류학과 교수)는 소리가 나는 가매장지역 안으로 내려가 흐므러지는 여인의 숨결처럼 고요하게 흙을 긁어 본다.
하얀 것이 보인다.
"술병 입니다!"
외치는 나의 목소리에 모두가 달려와 내려다 보며 숨을 죽인다.
"깨지지 않도록 온전하게 들고 나와봐요." 김동석 대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찌 이렇게 원형 그대로 있을까, 장기락 용사님의 증언대로 하얀 호리병이다.
나는 엎드려 그 병의 주둥이에 귀를 밀착시켰다.
"찾아와줘 고맙다, 기락아!"
"적들이 어디에 있느냐, 지금 월포에 물때는 몇시에 바뀌느냐?"
"고향에 아버지,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철수가 갑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용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울면서 코를 다시 갖다 대본다.
50년이 지난 지금 그 고향의 향기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다.
장기락용사님이 울부짖기 시작 한다.
"대장님,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때 강화읍에 가져온 술병이 맞습니다."
나는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술병의 코르크 마개가 그대로 있어 정말 이것이 그때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고 흔들어보니 찰랑찰랑거려 분명 물 종류가 있음은 확실 했다.
코르크 마개가 바로 빠지지않아 실갱이를 하는 사이에 박교수가 찾고 있는 곳에서도 호리병 같은 것이 출토되어 위로 올려진다.
50년간 땅속에 묻혀 있다 나오는 이것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우린 어렵게 코르크 마개를 하나 제거하고 냄새를 맡아보니 무색무취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데요?" 그러자 장기락 용사님이 술병을 잡아든다.
"꿀꺽 꿀꺽, 단숨에 서너모금을 들이키는 용사님!"
"안됩니다." 나는 잽사게 병을 낙아챘다.
"아니 그러다 죽게 되면 어떻게 하실려고 무모하게 하십니까?'
"이과장, 내 친구야, 뭐가 문제야. 죽어도 괜찮아요. 이과장한테 책임 안돌릴테니 걱정 말아요."
"야, 기락이, 너 아직도 유격군이냐, 지금은 아니잖아. 이 사람들 통제를 따라요."
김동석 대장의 한마디에 주변은 조용해 지고 차분한 가운데 진실규명 작업에 들어갔다.
8군데의 가매장 장소에서 똑같은 술병이 발굴 되고 유해도 여덟분이 발굴 되었다.
그당시에 넣었던 술은 코르크마개의 미세한 틈을 이용하여 알코올은 다 땅속에 흡수되고 순수한 물만 남아서 흔한 맥물 그 맛이었다.
"황금돌배의 짜릿한 순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일단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해병대원들은 본부로 식사를 위해 일단 돌아가고 오후 2시부터 재 발굴에 들어가기로 약속했다.
나는 너무 기막힌 그 모습에 혼이 빠져 잠시 정신을 가다듬으려 용사님들이 묻혀 있던 야산을 둘러보기로 하고 김밥 한줄을 들고 혼자 산속으로 들어갔다.
해는 중천에 떠서 하늘을 유영하고 있고 가끔씩 갈매기 무리들이 상공을 날아 정찰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군의 정찰은 아니다.
저 강변에는 우리의 든든한 해병들이 경계근무를 철통같이 하고 있으며 강 건너에 북한주민들은 혹시라도 본인들의 형제가 달려올지도 모르기에 시선을 이곳으로 돌리고 부러움에 눈물을 흘릴거다.
산속은 정말 시원하고 해양성 기후의 영향인지 별별 식물들이 다양하게 자생하고 있다.
잡목 사이로 저기 서해바다가 아니 한강이 바라보이고 물결은 말없이 흐르고 있는 이곳!
온화한 해양성 기후에 겨울에는 하얀눈이 산더미처럼 내리고 여름에는 그리도 소낙비가 많이 내리고 황토에 물 빠짐이 좋아서 옥토중에 옥토라 일찌기 많은 유인원들이 살았을 것같은 곳이다.
지금 하도리에 고인돌기념관이 있고 멋진 북방식 고인돌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에 나도 그날의 곰처럼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코를 이용하여 땅속의 유인원의 냄새를 맡으며 걸어보고 있는데 엄청 많은 작은 무덤군들이 널려 있다.
패총도 아닐진데 야산 전체가 아기무덤처럼 올망쫄망한 것들이 마치 동게올림픽에 종목인 모글처럼 그 아기자기한 것들이 산재해 있어 분명 구석기시대의 뭔가가 있을 것같은 곳이다(?).
"아저씨, 혹시 제 모습 보고 계세요?"
"바다 멀리 저기 중국땅에서 이곳에 오다 조난되어 많이도 친구들이 죽어갔지않나요?"
"그옛날 빗살무늬 토기, 무문토기는 없나요?'
"조몬토기 나오면 안돼구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나와도 괜찮아요?"
발걸음소리도 죽여가며 나는 그 모글형상같은 작은 무덤에 말을 걸으며 이동해 가는데 번쩍하는 빛의 광란에 그만 깜짝놀라서 주저 앉았다.
"와, 드디어 선인들이 나에게 금열매를 선물하시는구나!"
내 눈앞에 주렁주렁 금열매가 매달려 그 숲사이로 뻗어오는 빛을 받으며 나를 불러 세웠던 것이다.
한참을 가만히 바라만 보며 꿈인줄 알고 꼬집어도 보았다.
아니 숲속에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고 영양분이 좋아서 그런지 한 열개정도 달렸는데 주먹만하게 가지 끝에만 매달려 그 빛이 너무 화려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 담금주를 넣어서 보관하며 선인들이 그리워지면 바라보곤 한다.
시간이 어느새 오후 2시로 달리고 있어 나는 발굴현장에 도착하여 나머지 6곳의 발굴을 통제하였다.
모든 곳에서 술병은 나오고 그 넣었다는 술도 다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강철수, 김철환의 유해다. 알아도 그것을 증명할 유가족의 DNA는 저 강건너 연백에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하랴.
전사자 명단에도 없다. 누가 위패마저 만들어 주지도 않아 그져 이름 없는 용사가 되어 이곳 철산리 외진 곳에서 50년을 기다려 이제야 고향친구를 만났다.
나는 발굴작전을 종료할 싯점에 새로운 의인을 만나게 된다.
강화도 유격군 동지회 회장이신 '이석군'님과 그 사무실의 미스터 '박사무총장'이다.
어린 나이에 연백에서 나와 15살의 나이로 강화 유격군이 되어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용사님이다.
"중대장 박영구를 발굴해 주오?"
어느날 영정리로 침투해 들어가는 무동선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두 눈만 깜박거리는 대원들 10명이 배를 밀어 나간다.
오늘은 내륙 깊숙이 들어가 적군의 동향을 살피고 부족한 쌀을 가져와야 하고 영양실조인 동료와 피난민을 위해 인삼도 가져와야 한다.
이미 사전에 미군이 좋은 양주 두병을 갔다 주었고 인민군 TT권총 한자루만 가져오면 10만원을 준다는 약조도 받았다.
소리없이 배는 반대편으로 들어가고 있고 먼저 들어간 인원들이 저멀리서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놈들이 없다는 신호일게다.
이번일만 잘 되면 이제 후임들에게 내륙침투는 물려주고 주둔지에서 행정업무와 대주민ㅇㅂㅁ무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동안 들어가서 죽인 북한군이 100명을 넘고 피난민을 한 2000여명을 소개시키는데 기여했다.
개성탈환작전에 '51.4월에 참여하여 당두포로 침투하여 여러 동지들과 한때는 개성을 탈환하여 적의 심장부를 놀라게도 했다.(당시 종군기자 동아일보 최경덕이 동행함)
중공군 생포 162명, 인민군 생포 27명, 공산당등 120여 명 사살, 군량미 3200여섬, 관염 4200여섬, 홍삼.인삼.백삼등을 노획하였고 중공군의 계속되는 반격으로 다시 강화도로 철수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이 더 어둠이 짙고 풀벌레 소리도 없이 고요한 강변이다.
별빛은 나즈막하게 내려와 물보라처럼 물결에 살랑이고 상호간에 공갈포를 소아대어 조명탄이 이곳 저곳에 훤하게 밝혀지고 있는데 누구도 움직이는 모습은 없다.
완벽한 유인작전이 성공하여 저 백마고지에 오색 신호탄이 올려지면 만세소리 크게 부르며 개선할 꿈에 잠시나마 젖어 있다.
거의 배가 다 다라른다. 이때다, 있어야할 안내조는 없고 북한군이 기관총을 난사하고 박격포가 날아와 강변이 갑작스레 대낮처럼 밝아지며 쑥밭이 되어 버렸다.
욱, 욱하는 소리가 난무하고 중대장을 부르는 목소리도 꽝광거리는 박격포 괴음을 따라 이곳 철산포까지 들려온다.
아군이 이쪽에서 대응사격을 하고 얼마를 지나 한척의 배가 월곶리 북쪽 해변으로 내려왔다.
분명한 것은 먼저 들어가 들어오라 신호를 보내기로한 인원들은 그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적진에 들어가 뭔가가 잘못되어 모두 그들에게 포로가 되었거나 몇몇이 배신을하여 탈로가 나고 일망타진 되면서 우리의 신호를 이용하여 꼬시기를 했던 것이다.
6명의 전사한 시체를 싣고 용감하게 종진이와 명재는 손바닥으로 노를 저어 살아왔다.
박영구중대장을 포함하여 대원들은 시장곡돈대 근방 공설묘지 어딘가에 쓸쓸히 남겨지고 누군가 뜻있는 동료에 의해 봉재산 양지바른 곳에 옮겨진다.
그렇게 한세월을 보내다 어느날 관청리에서 읍 방향으로, 그리고 인화-강화간 신도로 개설에 따라 다시 남산리 공설묘지 지역으로 이장을 하게 되었다.
"제2호법정 증인 참석통보"
사실 나는 이런 강화도 유격군의 일련의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철산리 유해를 장관님 승인을 받아 발굴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이석군회장과 사무총장을 만났던 사실밖엔 없는데 어느날 법원에서 증인으로 참석해 달라는 협조 공문이 왔다.
사실관계를 알아보니 유격군 출신 강종진이라는 분이 고소고발을 통하여 본인이 특수임무수행자인데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군에서 철산리에서 발굴한 유해가 바로 특수임무수행자라며 그걸 인정해서 발굴 했으니 당연히 본인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결정적 근거로 당시의 중대장이 박영구이고 지금 관청리에 6구가 공동으로 합동 매장 되었다며 그곳을 발굴하면 본인의 진실성이 더 확고해 진다고 발굴도 하여 그 사실관계도 밝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강종진용사님과 통화하여 사전에 아무런 교감도 없이 갑작스레 왜 나를 증인으로 선정했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우리 동지들을 발굴한 장본인이다"라며 언성을 높이며 본인도 그 신분인데 법원이 인정을 안해줘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한 소원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용사님 5816부대원 입니까, 아니면 8240부대원 입니까?"
5816부대원이면 병역의무 이행이고 만약에 통제를 받은 8240부대원이라면 군대를 다시 갔다 왔어야 인정이 되는데 군대에 두번 갔다 오셨느냐는 질문에 한번이란다.
아니면 연령이 아주 어린 학도병이던가, 그 조건에 맞지를 않는데 고향도 북쪽도 아닌 서울이었다면 특수임무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답변하고 증인 참석은 곤란하다 하니 너무 과격한 말씀을 하시며 막무가내로 부대로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깨스통을 들고 찾아와 요절을 내버리겠다.", 약주를 한잔 하시고 한 말씀이다.
너무 무서운 요구에 그렇다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서식으로 답변서를 정중히 법원에 보냈다. 참석할 대상이 아님을.
강종진용사는 국군 제1사단 참전용사인데 지금 살기가 좀 어려워 특수임무수행 보상금을 필요로 하고 있는 터인데 나로서는 답변할 아무런 이유가 아니라 근거가 막연하다. 할 수만 있으면 100번 보증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안되는 현실이 나도 안타까웠다.
강종진 용사님이 전화가 왔다.
"이과장, 미안하오. 사전 협의도 없이 증인으로 불러서. 하지만 박영구 중대장을 발굴해 그 유복녀 딸이 살아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현충원에 아버지를 안잔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요!"
"알겠습니다. 용사님.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린 "박영구 중대장 일행을 찾아야 한다."
박영구란 이름은 제1사단 용사님으로 사실 일병으로 8240부대 강화도 팀의 한 중대장역을 맡고 있었다. 요란한 시대라 보니 위에서 그런 호칭으로 부르다 보니 제3의 세력인 유격대원들은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나이 30세에 장군도 있고 일병도 있고 대위는 많았다.
어쨋든 유격군들은 모두 중대장으로 지금까지도 알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은 병적기록카드에서 유가족을 찾고(유복녀 생존),실제 발굴하여 유가족을 찾아 DNA검사로 신분이 명확히 밝혀졌다.
관청리에 물어물어 찾아가니 길이 나는 관계로 이장하여 아무것도 없다.
우린 이장업체를 찾아 혹시 무연고 묘를 발굴하면서 집단매장으로 나온 유해가 있는지 여부와 발굴 당시에 유품중에 군인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나온 실례가 있는지 추적하였다.
"6구가 한번에 나왔는데 바지에 사용된 고무줄이 있고 무슨 수첩같은 것이 있었는데 햇빛을 보니 사그라져서 글씨는 뭔지 모르는데 무슨 일병인지 하사인지 계급과 연관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당시 장의사의 이야기에 정말 박영구용사가 맞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바로 이장된 남산리에 공설묘지를 찾았다. 이장을 담당한 공무원이 현장에 오도록 되어 있어 기다리는데 이때 강화 유격군 동지회 회장이신 이석군님과 사무총장이 함께 나타났다.
"이과장, 여기 개장 승인 공문이요."
"회장님 무슨 말씀인지?"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벌써 동지회에서 주도하여 강화군청에 묘지관리법에 따른 절차를 준수하여 옮겨진 무연고자 묘를 개장해도 된다는 확인서를 지자체로부터 받아온 것이다.
바로 이회장님이 박영구중대장(?)일행이 전사하는 날 현장에 함께 있었던 대원들이다.
깡마른 체구에 항상 콜록콜록 하시며 한구의 유해라도 더 찾아 민주대한을 지키려 했던 유격대원들의그 진정한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각인하고 싶으신 분이다.
하지만 이석군 용사도 계속되는 적진으로의 침투작전에 찾아 올 겨를이 없이 전쟁은 격화 되고 중공군 5월공세로 서울근교까지 밀려 내려온 상황에 일부 동료들은 영국군을 지원하러 간다며 트럭으로 강화도를 떠나가기도 하고(하지만 우리 전사에는 이런 기록은 없다. 설마리에서 '51.4월에 대량 피해를 입은 유엔군은 그후에 서해 도서에 있던 유격군의 일부를 영연방부대에 유격중대로 편성하여 제일 먼저 앞에서 재 진격하는 임무를 부여했다는 것이 배천이 고향이면서 현재 생존해 있는 유격군 회장 이명식님의 증언이다. 실제 명식용사님은 영국군 따라 지금 28사단 태풍전망대 남서쪽 고왕산과 마량산으로 진출시 참여 하고 '51년 10월이 되어 다시 강화로 복귀했다고 한다.) 어수선힌 시기에 수없이 죽어가는 유해를 목격했지만 전후에 먹고 살기 힘들어 누구도 나서질 못했다고 한다.
"소주 한병 달라하소, 저 컵 이리주고"
용사님은 연백이 고향이다. 하지만 이곳 대한민국에는 일가친척은 아무도 없다.
어린 나이에 곧 돌아온다고 다짐하고 고향을 등지고 강을 건너왔는데 50년이 되었다.
용사님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그렇게 해서 정착하게된 인원이 억수로 많다고 한다.
유격군이란 신분이다보니 논전답 하나없고 있는 것은 깡다구로 버티는 배짱하나였다.
하지만 그 깡다구도 이곳 강화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유는 대다수 인원이 그런처지라 누구라도 깡다구는 다 있기마련이다. 그러니 당연히 지역 본토백이들이 많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지금 이순간 부인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게 쉽지가 않소."
때로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질 않고 프락치로 보여 총을 쏘는 것은 아무런 죄의식이 없어지게 되고 오히려 저놈들 때문에 지금 나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마음이 더 앞서기도 했다.
가져온 소주의 뚜껑이 돌아가고 한병의 반이 채워진 컵의 알콜은 그대로 용사님의 몸안으로 흡수되고 있다. 이제 나이 80이 넘어 그래도 길상면에 번듯한 집도 있고 논이 있고 밭이 있고 처자식이 삶을 함께하기에 그렇게 외롭지는 않지만 먼저간 친구들 생각에 혹시라도 하늘에 가면 동네 어른들이나 부모님께 혼이나 나지않을까 걱정도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중공군도 인민군도 하지만 한때는 친구였던 프락치 친구도 죽고 교전하는 가운데 피난하는 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먹고 살기 위해 야밤에 걸어나와야만 하는 황소를 끌고 그 숨막히는 벌판을 걸어갈 때에 정말 기막힌 것은 그 황소가 걸음소리도 내지않느다는 것이다.
그 황소를 물에 밀어넣고 무동력선을 이끌고 남쪽해안으로 들어올 때는 개선장군처럼 동료들로부터 환호성을 받지만 뒤돌아 서면 저 강건너에 소를 찾아 달려나온 할머니 할아버지의 애끓는 탄식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인간이란다.
기록에는 '51.3.9일날 연백 온정면에 침투하여 인민군 1개중대를 사살 및 4명을 생포한 것이 첫번째 작전일지로 남겨져 있지만 사실은 1.4후퇴 이전에도 자생 유격대가 황해도 일원에는 활동하여 적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적 제1군단의 동태를 파악하여 첩보를 유엔군과 국군 제1사단에 전달하였다.
그러니 1.4후퇴 이후에도 자동으로 강화나 교동도 백령도 대청도등 서해안의 도서지역에는 엄청난 인원의 자생유격대와 청년단이 조직되어 활동했고 강건너를 집처럼 드나들며 별력배치도를 그리고 지휘계통이나 그 지휘자들의 명단을 알아와 대북 심리전에 활용하도록 하여 적이 수도 서울이남으로 진격해 내려가는 것을 우회적으로 막아낸 혁혁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사살한 인민군이 1,200여 명에 포로를 100여 명, 중공군이 200여 명에 포로로 600여 명을 획득하였고 난민 3만여 명을 남으로 소개시켰으며 수많은 적의기지를 폭파 또는 위치를 파악하여 통보함으로써 폭격을 유도하고 내무서등을 기습함으로써 적의 간장을 서늘케하여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수도 서울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였다.
적진에 침투하여 작전을 하다 전사한 인원이 이름이 확인된 사람만 118명이다. 하지만 정규군이 아니라 비정규군으로 군번도 없는 무명용사와 같으며 어쩌다 제1사단 소속인 박영구일병은 유격군 겸 정규군으로 어떻게 보면 복이 많은 전사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50여년이 지나니 그 공과는 말이 없고 살기 위해 어쩌다 한번씩 소나 돼지를 갔다 먹었던 흉터만이 이 선량한 국민들 뇌리 속에는 남아서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는듯한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땐 다 힘들었다. 하지만 적과 싸워야 하는 군인이 배가 고프니 어떻게 할까?
미군의 통제에 들어가면서 그래도 보급이 제대로 되어 배고프지 않았지만 그래도 또 게중에는 못된 중간치기들이 다 빼먹고 정말 들리는 소문처럼 고기국에 덩어리는 없고 기름기만 빙빙 돌아서 오히려 시기 닦는데 고생만 했던 추억이 이제는 웃음만 나온다.
영문도 모르는 저 강너머에 형제들은 또 얼마나 시달렸을까!
유격군이 들어와 쌀 가져가 소.돼지 잡아가지 인삼훔쳐(?)가지 사랑하던 처녀 납치(?)해 가지 그러다 재수없으면 총격전이 벌어지고 박격포탄 떨어져 집이고 뭐고 다 불타버리지 저수지 뚝이 폭파되어 한 순간에 마을이 물바다 되질 않나 인민군이나 내무서원놈들이 보복작전으로 무고한 농민들을 또 얼마나 잡아다 껍질을 베끼고 주리를 틀며 부모형제간에도 고자질로 돌맹이로 쳐죽이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던 그 시절이 서럽다.
하지만 이렇게 황혼이 지나 이제 요단강 건너는 순간에 오고보니 만나리리는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아쉬움만 눈앞을 가려 제대로 눈이나 감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다.
그래서 박영구일병을 빨리 발굴하여 한명의 동료라도 유족을 찾아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하려 한다.
분묘 개장 허가서가 발급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병력을 투입하여 발굴하는 일과 그 유족을 찾아 DNA 샘플을 획득하는 일이 남았다.
유가족 찾기팀이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행정관서와 협조를 해도 그 유복녀를 찾기가 쉽지가 않다.
전사자 명부에는 유복녀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박사무총장이 나섰다. 예전에 송해에 있는 반공용사 위령탑에서 있었던 추모식에 유복녀께서 오셨던 적이 있고 그분과 연락이 되는 분이 찾으면 있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제와서 무슨 0수작입니까, 감식같은 것 안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어렵게 연락이 되어 찾았는데 박여사께서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쌓였던 설움이 너무 크셨다.
그 어머니가 어떻게 20살 나이에 딸 하나를 델리고 살 수 있겠는가?
전쟁중에도 그렇고 전후에도 우리 사회는 무척이나 보수적이기도 하고 전쟁의 소용돌이로 가족관계가 우루루 무너져 제대로 족보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물론 유자녀로 지금은 연금을 받고 있지만 몇해전까지는 받지도 못했다.
그 어머니가 존재하는데 어디 제대로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살 수 있었겠는가, 아빠의 친구를 나중에 만나 쓸쓸한 인연으로 몸만 부부로 지내고 법적인 부부가 아닌 상태로 연금을 수령했고 박여사는 어린 나이에 유복녀인지도 모르고 전전하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찾고 그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드디어 60이 넘어서야 연금을 수령하고 있으니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보면 처절하여 생각도 하기 싫은데 뭘 새로운 대우가 있는 것고 아닌데 검사야며 화를 낸다는 것이다.
아버지 생각을 하면 죽도록 밉고 왜 낳았느냐고 때려주고 싶는 심정이란다.
얼마나 쓰라진 역경이었으면 그러하겠는가!
"팔려서 식모도 했다.
팔려서 술집에도 갔다.
팔려서 가서는 안되는 곳도 돈을 벌어야 하기에 갔다.
그나마 만난 놈팽이가 빗만 남기고 요절하여 남편 복도 없었다.
자식 하나 얻었는데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여 겨우 글이나 쓸줄하는, 생각하니 너무도 미안하다.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본 적도 없다.
안 해본 장사도 없다... ."
우리는 발굴을 시작했다.
옮겨진 6구의 유해는 다른 유해들과 다란히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우리를 기다린다.
뼈의 상태가 20대 초반의 뼈의 생태학적 분류는 감식반의 전문인력이 담당했는데 발굴되는 15구의 유해중 8구에서 청년수준의 감식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일련번호 순서로 6구가 같은 젊은이라 한다.
우린 직감으로 "이분들이다"라고 확신을 하고 좀더 정중하게 수습을 해갔다.
발굴내내 또 한분의 유족이 찾아와 거의 1주일을 함께 한다.
월포 상륙작전에서 전사한 오선영용사의 여동생 되는 분과 그분의 아드님이 외삼촌을 찾겠다고 현장에 입회하여 낮과 밤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오씨 가문의 내력을 몇번이고 들어야 했다.
"해주 오씨 17대 손이란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일제시대 엘리트 집안이다.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전쟁이 나서 안 돌아왔다. 그런 어느날 북으로 올라갔던 인민군이 중공군과 다시 내려 오는데 오빠가 국군과 함께 왔다.
어머니 아버지가 붙잡고 울며불며 부등켜안고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이 생생하다. 동네에 치안을 잠시 담당해야 한다며 부모님과 여동생인 본인보고 먼저 피난을 떠나라 해서 서울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부모님은 분명 오빠가 살아 있을거라며 그때 많은 사람들이 바로 밑의 강화나 교동도로 떠났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자식은 오지않고 어느날 어떻게 유격군중에 한동네 사람이 있어 만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유격군 마저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선영이는 월포 상륙작전간 전사 했습니다. 지금 당산리에 임시 안장되었습니다."
당산리는 관청리나 월곶리하고는 조금 북서쪽으로 위에 있다.
승천포지역인데 분명 임시 매장이니 혹시 그후에 관청리로 이장되었다가 이곳 남산리로 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주려 그 여동생이 80의 나이에 자식을 데리고 여기에 출근하여 그 한명 한명을 눈으로 확인하고 눈물 짓는 모습은 뭘로 표현할까... .
신분이 확인(국군 전사자란 확인)되지 않으면 현충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 무명용사라도 국군 전사자라면 들어가게 되는데 지금 이 용사님들은 신분이 명확하지가 않다.
그런 어느날에 희소식이 도달했다. 박여사께서 감식위한 샘플 채취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송해에 있는 위렵탑 납골당에 6구을 안치하고 감식을 하기로한 박여사의 결과를 가지고 이 6분의 뼈를 일부 이용하여 비교를 해야했다.
"아니 박영구유해를 찾았다. DNA감식결과 박여사와 일치하는 유해가 나왔다."
지금까지 120여구의 신원이 확인 되었지만 유격군의 유해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그러면 나머지 5분의 유해도 분명 함께 배에 동승한 유격군일진데 이분들의 유가족을 어떻게 찾아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까?
왜냐면 대부분 황해도에 그 일가친척이 있으니 남한에서 찾기란 이북 5도민을 통해서 남한의 내려온 모두를 대상으로 감식을 하기 전에는 어려운 실정이다.
오유격군의 여동생 되는 분이 난리다. "우리도 찾아주세요, 네?"
하지만 얼마전 나는 또 다른 슬픈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석군 회장님이 화병이 악화 되어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충성, 회장님 극락왕생, 천국에 가십시요.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현재 유해발굴의 현주소다.
제5절 : "그 이름은 19살 순이~!"
어허라 배 떠난다!
어허라 배 떠난다!
두리둥실 떠나는 배는 천국을 찾아는배
에헤야 에헤야 언덕 위에 여우야 네 굴을 다오~!
쓰리림도 많다. 억울함도 맣다. 차마 글로도 쓰지못할 이야기도 많다.
"헬로우, 미스 미스 색시?"
"아이 캔 두잇, 밧 유 캐낫 두 잇 오케이?"
내 누나 순이의 당찬 대답이 목동리를 울리고, 머뭇거리는 어린 미군의 눈동자가 숨쉬는 목동리~!
'51년 7월은 무척이나 더웠다.
얼마나 비가 퍼붓고 있는지 도대체 산도 안보이고 강도 안보이고 길은 더욱 안보인다.
화악산에 숨어들은 잔당들이 잊을만 하면 동네에 내려와 고추장 된장을 다 가지고 달아난다.
벌써 유엔군은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다시 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또 한편에서는 영국군이 중공군과 내통하여 휴전이 곧 된다는 등의 소문이 무섭게 발도 없는 것이 잘도 퍼지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우리 6사단이 저 화악산 넘어에서 뙤놈들에게 포위되어 많이도 죽어갔고 이곳 목동리에 영연방군이 들어와 진을 쳐서 그나마 도망치는 군인들을 보호했다는 곳이다.
"뭐 볼 일 있나요?"
2001년도의 일이다. 계룡대에서 '99년도의 늦가을부터 이 유해발굴을 위해 전사를 연구하고 전투를 했다는 곳을 주말에도 가족을 대동하고 나는 미친듯이 찾아다니던 때였다.
사실 주중 업무시간만 가지고는 혼자서 일을 해내야 하는 그 시기에 도저히 한구라도 더 발굴하려는 나의 이상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휴식시간인 주말에도 김밥을 직접 만들어 가족가 함께 계룡대에서 함안, 창녕, 하진부리, 가평, 다부동 등 많은 곳을 함께 했다.
때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녀석(지금 이놈이 32살이다.)이 따라나서 호국용사님이 모셔져 있는 지역별 임시봉안소에 분향을 하는 영광을 함께 하도록 나는 배려(?)했다.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그 전쟁터에는 가보면 들꽃만 피어지고 혼자서 외롭게 세월을 보듬고 있는 현실이 나는 너무도 싫었다.
차라리 황량한 벌판이라면 초라하지라도 않을듯 한데 저 꽃은 저리 화려하게 피고지고 하는데 내 사랑해야할 용사님은 지금 땅속에 묻혀 숨소리도 들리리지 않는 전쟁터에 누가 찾아와 함께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하고 열심히 싸웠던 그 전우들의 속살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그래서 여기저기나니며 참전용사님들을 찾아 그 사연을 듣고 동네의 웃어른들을 만나 그 시대의 암울했던 이야기를 하시도록 함으로써 하늘에서 커다란 귀를 세우고 있을 그 용사님이 듣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보고서를 써야하는데 매일 같은 내용으로 몇구라고 써야하는 것이 식상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여 윗선에서 관심을 갔도록 해야만이 이 사업이 영구히 진행되어 내 혹시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그 선배님, 내 형님이고, 내 아버지고,내 전우이며 싯점을 바꾸면 나고 내가 거들렸던 전우들에게 떳떳하게 머리를 들고 그래도 한세상 살면서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했어도 "진정 당신만은 사랑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느 것이 적어도 제복을 입은 나로서는 최선의 길이요, 한 인간으로써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나는 믿었기에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에게도 그 길에 동참하도록 요구(?)했다.
2001년 8월의 어느날, 우린 계룡대를 새벽에 츨발하여 북면 노인정에 찾아갔다.
지도를 펴놓고 동네 할아버지께 여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유해가 묻힌 곳을 알려달라 애원하고 있는데 한참 열을 올리고 흐르는 땀이 온몸을 물벼락으로 뒤덮고 있다.
그래서 손수건을 꺼내려 몸을 트는데 누군가 내 뒤에서 굽어 보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경찰관이다. "아니 휴일날 여기 어떻게 왔나요?" 물었다.
씩 웃으며 "이중령님 때문에 휴일날 출근해서 오게 되었지요!"라고 대답을 한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다. "왜 나 때문에 찾아와요?, 난 어느 연락도 안했는데... ."
그랬더니 옆에 있는 의자에 몸을 낮추며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 계시는 어느 할아버지가 부부간첩이 나타난 것 같다고 신고를 했던 것이다.
내가 설명을 열을 올리며 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바로 옆에 있는 지서에 신고 정신을 발휘했다.
"여보슈, 여기 간첩이 나타났소?"
"네, 무슨 말씀이에요. 지금 세상에 간첩이라니 할아버지 장난치는건 아니지요?"
"무슨 말이여, 부부가 이 토요일에 저기 어딘가 계룡산(?)에서 내려왔다던가 수상해?"
"알겠습니다. 바로 갈테니 못 도망가게 이야기를 시키고 계세요."
"그럴 필요도 없어, 얼마나 열을 올려 무슨 지도를 펴놓고 신나게 혼자 이야기 다해요."
이런 사유로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며 고생하고 계시다며 꾸벅 인사를 한다.
사실 군과 경찰은 일제시대 남겨진 순사문화의 나쁜 인상으로 관계가 좋지 못하고 여수 순천 사건이나 제주도 4.3사건을 격으면서 그 골이 깊어져 상종하기에 꺼림직한 관계가 된다.
그러다 전쟁이 나니 경찰은 군인으로부터 통제를 받으며 자리싸움에 사실 지금도 썩 서로를 아름답게 보려는 노력이 부족한게 사실이다.
이곳 북면의 모든 집은 그 당시에 불타버리거나 폭격을 받아 무너져 내려 온전한 것이 없었다.
그나마 일제시대에도 화악산에 산골에 자리잡아 쓸만한 집이 없는 터에 전쟁의 화마까지 찾아와 주민들은 너무나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생활도 어디처럼 쌀농사가 아니라 주로 일제시대에 주업처럼 되어버린 산의 참나무를 이용하여 숯을 구워 파는 숯장사가 대부분이다.
이 숯이 가평읍내나 춘천읍내에 나가면 그래도 많은 돈은 아니지만 노력한만큼의 수익이 돌아와 많은 사람이 계곡마다 집시들처럼 천막을 치고 들어와 살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었다는데 동네가 두동강이 나버려 엊그제까지 이웃이 북한이 되고 남한이 되어버렸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 앞에 산악지형으로 38도선이란 경계선이 명확하지도 않아 보초를 서고 있던 국군이나 청년단(그때도 대한 청년단이 있어 활동함)의 눈을 피하거나, 아니면 북쪽에서도 북한군의 눈과 소련군의 감시를 피해 서로가 오륵고 내리는 일들이 암암리에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니 사실 사상적으로 한때는 지역이 오해를 받아 무척 힘든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또 반면에 우파에 속한다는 집안들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부모가 학살 되거나 혹은 납치되어 간 유족의 학생들이 과거 반공학생연맹을 조직하여 반공투쟁에 앞장섰던 인원들 100여명이 가세하여 '가평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흔들거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하고 때로는 확보한 총기류를 이용하여 앞잡이들의 일부를 색출하여 처단 하기도 했다.
그 한 예가 바로 북진작전간 이곳 가평에 후방지역 작전을 담당하던 제2사단 제5사단이 춘천-가평일대에 투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이곳에 화악산이나 명지산등 험준한 산악지형에 잔적들이 준동하고 있었는지 가름할만 하다.
가평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깝고 교통의 중심지로써 많은 젊은 청년들이 서울의 대학에 다니며 신지식을 습득하였고 그 시대적 산물인 좌우조직이 존재하게 되는데 제대로 배운 학생이야 별 탈없이 우익이 되어 반공대열에 앞장서지만 많은 인원이 잘못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알게모르게 좌경화 되고 국내에 침투한 불순분자들의 선동대원이 되어 6.25전쟁전에도 연일 데모가 벌어지곤 하는 서울의 축소판 이었다 한다.
신일균 학도병은 전쟁전 고대법대에 재학중에 반공학생연맹 초대 가평 지대장을 역임하게 되는데 춘천의 서천거주 학생들은 같은 기차 통학을 함께하는 연고로 가평지구 학생의용군에 편입되어 같이 활동도 하고 나중에 5사단이나 2사단 연대들이 들어 올 때에 많은 학생들이 각 연대에 현지 입대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용사님은 '52.4월에 근무중 참호 붕괴 사고로 전사하게 되는데 많은 인원이 당시의 행정미비로 군번도 없고 입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겨져 있지않아 지금도 정당한 대우를 못 받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최중경용사께서 나를 사무실에 앉혀놓고 목이 터져라 가평 학도의용대의 활동상을 설파하였다.
전자에 우리 2사나, 5사단이 '50년 10월이후 이곳에 들어 올 때에 바로 들어왔으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했어야 하는데 학도의용대가 잔적들의 준동실태를 알려주어 비정규전이 아닌 정규전으로 전환한 작전을 수행하게 되고 무고한 희생을 막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우익진영 청년들이 패잔병들의 퇴로를 지키고 있다가 다가서는 그들을 일부 사살하여 모시나칸트총으로 무장도 하고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며 투항을 권유하기도 하고 순수히 항복한 인원들은 경찰서로 보내기도 하고 서울로 호송하기도 했다.
또한 부역자나 월북자 가족의 동태를 수시로 확인하여 감시를 해왔으며 솔직히 이과정에 일부 과격한 대원들의 한풀이로 그 대상들이 죽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양민학살이니 무자비한 원한에의한 보복살인이니 하지만 박규화같은 춘천중 6학년의 대원은 면장이던 아버지와 치과의사이던 삼촌들이 모두 치안대 놈들에게 학살되어 그 형체조차 확인이 불가능하게 만든 원흉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한둘이 죽어나간 것이 아니고 경찰이나 공무원 가족들, 그리고 군인가족등은 살해되는 것은 고사하고 일부 여인네들은 그들의 성노리개가 되어 벗겨지고 찢어지고, 남자들은 돌과 꼬챙이로 처죽이고 찔러 죽이고 길바닥에 내동뎅이 쳐버려 밤에 으슥한 시간에 겨우 시체 몇토막 가져오기도 했단다.
밤마다 마을회관이나 학교에 아니면 교회당에 모이게 하여 장군가를 부르게 하고 사상 개조사업을 한다며 주민들을 불러내던 그 시절이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찔러 죽이고 동네 남동생이 동네 언니를 올라타는 그리고 누나가 엄니를 인민재판하며 남동생을 숨겨준 남조선 빨갱이라며 울거매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한다.
무슨 토지개혁으로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갔고 현물세를 내야 한다며 낱알을 세어 세금을 물게하던 그 시절에 좋아라 한 사람은 완장을 두른 일부 머슴들과 노동자, 숯쟁이 들이고 건물 안에서 거드름 피우며 호의호식하는 자들은 조금 어설프게 배웠다고 하는 일부 학생이나 선생(사실 그 당시에 선생들이 프락치가 많았다고 한다.)들만이 판치고 다녔지, 결국 그들도 북군에게 죽고 남군에게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전쟁의 비극이다.
아니 북한의 사상이 좋았으면 대다수 인원들이 찬성해야지 그렇지않다는 것이다.
매일 마이크에 선동하고 다니고 해방이 곧 된다더니 이를 위해 의용군으로 가야한다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잡아 가고 무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을 밤에 모이게 하여 봇짐하나씩 메고 산넘고 물건너 심지어 문경세재까지 걸어갔다 살아온 인원도 있다고 한다.
그러한 복잡한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 가평이나 보니 우리가 증언이나 제보를 구하는데 쉽지가 않아 마을회관부터 노인정, 나아가 일터에 나가서 어르신들을 만나야 했다.
그런 와중에 이곳 북면 노인정을 가족과 함께 휴일날 찾아 왔다가 부부간첩의 오해로 경찰이 출동하는 희극도 벌어지게 되었으며 이곳을 거쳐 소법리 마을회관에 찾아오게 되었다.
"여보, 상남교에 묵념하고 다시 오쇼?"
"네?, 바로 저기 마을 입구 들어서는 곳에 있는 콘크리트교량 말씀입니까?"
"그렇소, 군인들은 여기 올려면 그곳부터 찾아가 묵념을 하고 용서를 빌고 와야 합니다!"
퉁명스런 할아버지의 강압적인 모습에 기가 죽어 나는 슬며시 문을 닫고 다시 나와 영문도 모르고 다리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묵념을 했다."유주무주 모든 영혼들이여 극락왕생 하소서, 천당을 가소서. 신들이여 우리를 보호하고 영혼들을 보살피사 안식을 얻게 하소서!"
나는 자존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유해의 묻혀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다.
지금 이곳은 상남종이라 하고 2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 70대 이상의 어른들이 살고 있다.
논에 쌀과 가을 배추, 고추를 길러 서울에 사는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보람으로 알고 불평없이 서로를 우애하며 잘 단합된 마을이다.
전쟁때는 대부분 집이 다 타버려 그후에 새로 지은 집들이고 그래도 망르 앞에 가평천이 화악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데 이 마을 앞에서 조금의 강폭이 주어지며 S자로 돌아서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바로 그곳이 금강유원지 지역으로 바위가 수직으로 가을엔 단풍진 모습이 겨울엔 얼음폭포가 일품인데 인공 낚시터까지 자리잡은 동네로 시골치고는 화려하다.
맥주집도 있고 펜션도 있고 커피집도 자리잡았다.
"어르신 가서 묵념을 올렷습니다."
"그래요, 그럼 물속에서 누가 나타나 아무 말 안합니까?"
"네?, 아니 물속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까?"
이 지경이 되자 다른 동네 어르신이 그만 하라며 자리에 앉으라고 하신다.
나는 영문을 모르며 멋적게 자리에 앉아 찾아온 이야기를 드렸다.
"혹시 이 지역이 전쟁지역이라 군인들이 전사하여 묻혀져 있는 곳이 있나해서 왔습니다."
"그럼 군인이 아니면 찾지않나요?" 조금전 그 호랑이 어르신이 또 말을 꺼내신다.
"네, 죄송합니다만 아직 여건이 그 정도는 안되고 우선 군인부터 찾도록 법이 만들어져 저희는그 법에 따라 발굴 임무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조그-ㅁ 지나면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에이 여보슈, 군인이 도망가고 억울하게 민간인 다 죽게 하고선 누구 먼저라고 합니까?"
해는 쨍쨍 내리쬐는데 대낮부터 건하게 한잔 하신 어르신같다. 하지만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단다.
어색한 분위기가 회관안에 가득하다.
나로서도 뭐라고 즉답을 드릴 아무런 준비된 변명거리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동지거리쪽도 들어가 봤습니까?"
계속하여 나를 몰아 붙이는 어르신의 저의가 두렵다. 가평읍내 학도병 사무실에서 최중경용사님이들려 주었던 이곳에 좌익이 많이 기생하고 있었다는 그 말이 머리속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물러나면 큰 코닥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험한 제주도 4.3사건의 피해자들도 만나 보았고 여수.순천에서 국군과 경찰에 당한 사람, 폭도와 반란군에 당한 사람도 만나 보았고 하동에서는 이현상 부대의 마지막 모습과 화개장터에 남겨진 가슴아픈 사연도 들으며 유가족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죽인다는 아저씨가 공기총을 가지려간 사이에 도망친 적도 있고 전북지역 공비 소굴본부인 회문산이 있는 임실 덕치면 회문리에 가서 5.18광주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국가유공자들의 선정에 대해 공분하는 수명의 할아버지틈에서 못먹던 막걸리도 같이 마셔야 했던 기억이 있는 나다.
"어르신, 제가 오늘 온 것이 잘못 된 것 같습니다. 국가에서 민간인 희생자도 발굴하는 법이 만들어지면 다시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리를 일어나 밖으로 나온 나는 걸어서 그 남종교 다리에 다시 갔다.
도대체 어떻게 물속에서 사람이 나온단 말인가?
태양은 더 뜨겁게 내리쬐고 있고 여름철 먼저 지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화악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회도리를 치며 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다.
눈물도 조금 나려 하지만 참는다.
저 어른들이 나 아니면 누구에게 화풀이를 하겠는가!
조금 있으니 이장 된다는 분이 옆으로 다가와 이해 하라며 대신 미안하다고 한다.
"아닙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자랑스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아마 이제는 조용하게 '순이 언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네, 순이 언니요?"
"그렇습니다. 그 양반이 물었던 것이 '순이 언니의 비극'을 말 하고 싶어서 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들을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어르신의 한을 들어주려 들어 갔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강물 속에 아무리 봐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데요?"
"어허, 이 양반 고단수구먼. 괜찮아요. 게의치 마세요. 그래도 이선생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입니다."
이곳의 역사적 비극은 많이 있다.
일제시대 순사들의 횡포, 3.1운동이 일어나고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인다며 무고한 조선인을 잡아가더니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때부터 이곳은 서로를 밀고 하는 배신의 반목질시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다 해방이 도었는데 반쪽짜리 해방이 되니 같은 동네가 두동강이 나 버려 하루 아침에 친인척간에 생이별하는 비극이또 벌어지고 사상이 다른 놈들이 어떻게 침투하여 밤마다 공작을 하고 이러다 전쟁이 터지니 마을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되어버렸다.
피난도 너무 순식간이라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월북했거나 전향된 놈들이 완장을 차고 나타나 큰소리치며 인민재판하는 모습에 또 뒤에서 '올소올소' 박수를 치고 치근덕거려야 살 수 있는 광란의 3개월을 보내야 했다.
"전쟁때는 전공을 세워도 그것이 빌미가되어 집안이 다 죽는다."
무슨 의용대니 청년대니 치안대니 하도 많은 조직원들이 부딪치며 세력 다툼을 하고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모르는데 또 국군이 들어오고 경찰이 들어오고 부역자를 잡는다며 다시금 동네는 서로 손가락질로 인간성이 무너져 모두가 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북으로 도망가야할 많은 적들이 산속으로 숨어들고 일부 지역민과 결탁하여 먹고 살면서 후방교란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 '50.11월 말, 상천휴게소 방향에서 가평읍으로 넘어오는 빛고개를 방어해야 보급로와 기동로가 보장받기에 이곳을 지키라는 지시로 학도의용대가 진출하여 먼저 이곳에 잠입하여 매복하고 있던 놈들을 처치하는 과정에 이동네 의용대가 제일 많이 참여한 전공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전사한 인원은 그 유족들이 나중에 중공군이 들어왔을 때에 다 끌려가 그이후 한명도 본적이 없고 그러니 자동적으로 전사했던 학도병도 전사자로 등록도 안되었단다.
당시 북면 파견대 김홍식님은 서울 경신중학교 5학년 재학중에 의용대에 들어와 '50.12.30일에 북면일대 의용대를 철수시키라는 명령으로 제령리 방면으로 들어 갔으나 이미 다 철수한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포위망속에 농가에 숨어서 은신하고 있다가 지역 빨갱이가 신고하여 적군에게 죽고 말았다니 이곳의 국민정서는 반공의식이 매우 높았다. 그 당시에 적군에 동조적이었던 놈들이나 집안은 모두 중공군 5월공세이후 밀려 올라갈 때에 저 홍적령으로 해서 매봉으로 올라 어디로 갔는지 지금까지 그 씨앗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얼마나 훌륭한 마을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억울한 마을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렸다.
"미군이 들어왔다. 저 개울가에 늘어선 색시 집... ."
하지만 이리 처절한 민족의식과 반공의식으로 무장된 동네에 평화의 시기에 평화가 아닌 인간시장이 열리고 있었으니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고 그러나 우리 꽃다운 누이들만 죽어갔다.
미군이 들어온 것은 '50년 10말에도 잠깐 무슨 탱크같은 것을 몰고 다니는 부대가 잠깐 들어왔다가 길이 없어서 다시 나가 서울로 갔는지 춘천으로 갔는지 떠나 갔다.
유엔군이 왔다고 태극기 들고 만세도 불렀다.
이 어른의 할아버지는 언제 준비했는지 벽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길가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만세를 부르고 어르신은 옆에서 신기하게 생긴 군인들의 눈동자를 바라 보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다시 적군이 내려왔을 때는 할아버지는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았고 살아서는 왔지만 오래살지 못하셨다. 누군가 고자질을 한 것이다.
중공군이 왔다.
그러다 동란이 발생하여 중공놈이 들어오는데 별 큰 문제 없이 할아버지만 고초를 당했지 조용하게 지나갔다. 물론 이때는 대부분 피난을 떠나 동네에 남아 있는 사람도 어른들 위주와 어린이만 남아 있었는데 중공군이 말을 타고 다니기도 하고 먹을 것을 들고와서 집에서 죽같이 해먹고 가는데 어찌된 일인지 절대로 주질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있는 것도 달라고도 안한단다.
북한놈하고는 질이 다르고 국군하고도 질이 달랐다.
그러다 '51년 3월에 가장 많은 유엔군이 이곳으로 들어와 사창리로도 가고 춘천으로도 넘어가고 아예 이곳에 주둔하여 천막을 치고 시끌벅적하게 난리다.
알고 보니 그게 영국군도 있고 뉴질랜드군도 호주군도 미군도 각양각색의 피부와 눈을 가진 사람들이 북적대는데 중공군이나 북한군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떠들고 뭐라뭐라 하는데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큰 천막을 치고 지금 보는 커피를 물먹듯이 먹고 있고 요즘 군인들이 어쩌다 갔고 나타나 동계훈련을 하던데 참치캔같은 깡통에 불이 살아 여기에 수통을 올려 놓으면 물이끓어 올랐다.
우유도 있고 옥수수가루도 있고 시레이션도 그때 처음 보고 먹기도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요즘 아프리카의 난민처럼 쌔까만 손을 들고 코를 질질 흐리며 나타나 손을 내밀고 "기브미 껌, 기브미 초쿄릿"하면 하나씩 던져주는데 그걸 가질러 달려가다 고무신이 벗겨져 뒹굴리고 하고 그러면 그 양키들이 좋아라 웃어대던 모습이 뚜려하게 기억되는 하루다.
어린애들을 모아서 짖궂은 카츄사가 이상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애들이야 뭘 알겠는가, 그저 먹을 것 주면 신나서 하라는대로 하는것이 그들의 생리다.
교육을 시키고 나서 껌을 주던가 건빵을 주던가 하면 신나게 먹는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정말 둘이 있다 한명 죽어도 모른다.
이렇게 양성된 꼬마부대를 동네에 풀어놓아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색시 색시'를 연호하고 앞집 뒷집 언니들이 뭐하는지 알아서 군인한테 알리는 첩보원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이들은 콘돔을 주어 마치 풍선처럼 불어서 집에 물고 다니며 자랑을 하고 조금 영리한 아이는 몰래 골방으로 갔고 들어가 흉내를 내고 끼륵끼륵하는 웃지못할 풍경이 미군이 진주한 곳에는 생겨나고 태평양을 건너 자유수호를 지키려 온 그 어린애 군인들의 향락아닌 향락을 도와주고 담배를 갔고 나와 팔고 시레이션을 갔고 나와 나눠먹고 얼마 안되는 달러를 아랫배에 숨겨서 집으로 보내 남동새 ㅇ학비에 보태고 어머니 아버지 속옷을 사서 입게했던 불쌍한 누이들이 많았다.
굶주림의 아픔은 굶어보지않은 사람은 말하면 안된다. 3일 굶으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속설이 있듯이 포로로 잡힌 중공군이나 북한군도 가장 좋은 심문 방법이 굶기는 것이란다.
물론 두둘겨 패고 고문이야 기본 메뉴에 속한다.
더 심하게 하는것은 한 일주일 굶겨놓고 여성동무를 데리고 앞에서 밥을 주면서 걸식들린 개가 먹듯이 먹는 공비또는 여군에게 옷을 벗으라하고, 섬섬옥수를 나오도록 애무하라 하고 남자의 장군대를 꺼내 그 옥류관에 넣는 짓을 반복하게 되면 남자포로는 미쳐버려 대부분 하라는대로 다 분다.
"동무,난 인민군 4사단 군관동무 이팔만 대좌올씨다."
그렇다고 배불리 밥을 주지 않는다. 몇숟가락 주고 밥 그릇을 저만치 발로 차버린다. 그 맞은 편에는 동료인 여자는 미친듯이 밥을 먹고 그 짓을 연출하다 열이 오른 취조군인과 결국은 계곡으로 들어가는데 나오는 모습은 보질 못했다니 요즘 여성들아 너무 남자들 장난감으로 취급하지 말라~!
"역사는 돌고 도는 물레방아처럼 그 비린내 나는 과걸르 잊어버리면 또 버림을 받게 된단다."
거기에 카츄사라는 한국인이 끼어 있어 뭐라고 하고나면 횡재수가 생기는데 시레이션이 던져져서 그걸 들고 마을로 들어와 가족들과 먹었던 기억도 살아난다.
하지만 마을마다 큰 문제가 잠시지만 생기기도 했다.
카츄사군인이 앞장을 서고 동네로 들어오는 까만 군인이나 노렁머리군인들이 '색시 색시'하며 히죽히죽 웃고 다니는데 고마들을 시켜 뭘 알아오라고도 하는데 여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국군이 잠시 머물고 갈때도 일부 그런 문제가 발생하여 곤장으 ㄹ맞는 군인도 보았고 북한군이 있을 때는 아예 그놈들은 얼씬도 안하는데 그 빨갱이 새깨들이 혈안이 되어 잡아다 홀딱 벗기어 뭘 조사도 한다하고 흉흉한 소문이 많아 모두 다 숨어지내느라 여자있는 집안은 이중고를 치러야 했는데 어찌 서양놈들이 이런 짓을 하려할까 약간의 분노가 생겼지만 그래도 우리를 구해주려 왔는데 하는 약간의 동정심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란다.
이 가평은 미 기병사단도, 2사단, 3사단, 7사단, 40사, 45사단등 많은 사단들이 휴전전후에 이곳에 일시적 주둔하게 되고 이로인해 제2의 명동처럼 휘황찬란한 명소가 되었다.
미군이 머무는 기간은 그 일대를 적 게릴라의기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의해 밤에는 대낮처럼 불을 밝혀놓아 그당시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전기불이 있는 곳이 되었다 한다.
그런 지역은당연히 바로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기에 좋은 것들이 누가 통제하지 않아도 너무 자연스레 그것도 너무 빠르게 부대인근에 생기게 되는데 이때는 워낙 피닌민등으로 위장한 북한군 육ㄱ대원들이 잠입해 들어와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하며 테러를 하는 일들이 많아서 정부나 지방관청에서 나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엄선하는 일도 솔직히 있었다고 한다.
어르신 이야기가 아가씨를 미군차량에 실고 들어왔다가 실고 나가는데 누가 그것을 통제하고 있으니 진행되는 것인지 아가씨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거래하는 것은 아니잖느냐고 되묻는다.
때는 '52년 7월의 그 어느날이다.
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거짓말이 아닌 실제로 한질 높이로 비가 쏟아져 왠만한 다리는 다 끊어지고 없다. 사실 그때의 다리는 일분시대 만들어진 몇개를 제외하곤 없었다. 그런 것이 전쟁이 나면서 불도져가 들어와 이렇게 저렇게 밀고 다니며 겨우 차량이 다닐 정도의 길이나 흙다리가 만들어지는데 조금만 비가 내려도 다 씰려서 흙이 사라지기 때문에 비록 개울이라 하더라도 큰비가 오면 위험한 곳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평읍내 자리는 유엔군 부대와 국군의 일부 부대가 부대정비나 교육훈련을 목적으로 짧게는 2~3주, 대부분응 4~6주간씩 머물다 가는 후방지역이 되었다.
그러니 불야성을 이루고 아무리 전쟁통이지만 주말이라던가 일부 인원이 외박이나 외출, 휴가를 나오기도 하기에 이 인원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가 판을 치게 되는데 가장 잘 되는 장사가 첫번째가 담배장사로 이득이 가장 많이 남는단다.
그 다음이 먹는 장사로 어디서 구했는지 쌀을 이용하여 떡장사가 가장 많이 길거리에 판을 깔고 있고 여기저기 포장마차같은 허름한 곳에는 술장사도 꽤나 잘 되었단다.
여기에 빠지지않는 것이 가장 요사스런 여자장사가 빠질순 없는 법, 그래서 아예 보건소같은 을 설치하여 워낙 임질이나 성병이 유행하다보니 주사를 맞고 보건증을 휴대하게 하여 건강한 성문화를 보장하게 해야만 하는 그런 시기나 지역도 있었다.
이 시간에 가평은 비가 엄청 퍼부어 길이 망가져 사람뿐만이 아니라 차량도 기동하기 곤란하다.
전방은 이미 휴전에 대한 헛바람이 불어 언제나 될까 그날 만을 기다리다 적의 불의의 기습으로 전초기지를 빼앗기게 되고 또 그걸 빼앗으려 진지전이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다.
서부 전선의 미 제1군단 미 제45사단이 지난 6월에 소규모 제한공격인 소위 카운터 작전을 실시하여 역곡천 북안의 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 티본고지를 점령하고 역곡천 남안의 포크찹고지, 불모고지 등 11개 목표를 탈취. 장악함으로써 고지 쟁탈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다 7월 중순에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의 미 제2사단이 서부전선 미 제45사단 자리로 들어오고 미 제45사는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에 배속 되어 인제의 서화북방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장마로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다 장마가 끝나면서 8월부터는 다시 고지쟁탈전이 판문점 근처의 미 해병 제1사단의 벙커고지, 임진강 지류인 하구쪽 사미천강에서 미 해병에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가 역곡천 남안 불모고지, 포크찹고지, 티본고지, 아시널-이리고지 등에서는 미 제2사단이 주로 중공군과 전투를 8월부터 11월 어간에 실시하고 고양대-임진강부근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후방지역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다시 올라와 연천에서 이곳으로 10월1일 미 제3사단으로부터 지역을 인수받아 텟시, 닉키, 베티, 노리고지등에서 고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 당시에 국군은 미 8군사령관 벤플리트의 배려(?)로 사단단위 부대훈련을 위해 각 부대들이 교대로 일정기간 예비대 지역으로 내려가 부대정비 및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저격능선 및 삼각고지 전투는 중서부 전선의 국군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이,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제9사단이 '52.10월에 대 혈전ㄴ을 하게 된다.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 예하 부대들은 금성천 북방의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에 수도사단이 , 북한강 동안 북쪽의 독수리고지 및 피의고지 전투에는 국군 제3사단이 전투를 7월부터 10월어간에 실시하고 있다.
소양간 북방 중동부 전선은 미 제10군단 예하국군 제7사단이 1090고지-크리스머스고지 지역을 아 8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아 이곳에서 중공군과 끊임 없는고지 쟁탈전을 계속하고, 국군 제8사단이 백석산전투-1090고지-어은산지구 전투를 한후에 후방지역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 되었다가 '52.3월에 올라와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만 1년만에 다시 들어 옴)하여 인제 양구 지역의 854-812고지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동부 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의 제5사단이 남강 연안의 351고지전투(월비산은 이전에 피탈당함)에서 한치의 양보가 없는 고지 쟁탈전을 줄곧 해 오고 있다.
하지만 먹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뭐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기본 생리다.
이미 홍적천변으로는 많은 학고방이 만들어지고 연일 방역도 이루어져 하시라도 손님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손님들은 비내리는 날에는 훈련도 없으니 얼싸좋다고 바지 춤으로 손을 밀어넣으며 하나 둘 몰려들어 줄을 서고 있다.
그러니 당연지사 차량이 밖으로 나가 가평에 가서 어여쁜 언니들을 태우고 돌아왔다.
"욕하지 말아요 이과장, 그때는 놀이나 유희가 아니고 죽기살기 생계였어요!"
나는 보릿고개를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언니들을 용산에서도 보있고 양동에서도 보았고 영등포에서도 보았다. 때로는 잡혀 들어갔다가 오히려 양주 한잔 대접받고 빼앗겼던 모자도 깨끗하게 손질하여 들고 나왔던 아픈 시절의 우리 누나들을 잘 안다고 했다.
얼마나 그 비내리는 강변에서 광염소나타가 춤을 한바탕 요란하게 추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 트럭에 올라가는 언니들을 동네 고마들이 달라붙어 어떤 녀석은 자꾸만 치맛속으로 들어가려 몸부림치고 어떤 녀석은 벌써 껌한통 받아들고 좋다고 뛰면서 친구들을 부른다.
부-ㅇ,부-ㅇ, 물속에서 까만 얼굴의 묵직한 군인이 운전대에 앉아 있는 차량이 미끄러진다.
저기 줄서 있는 미군들은 빨리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다리를 꼬며 트위스트를 추고 있어 어린 우리 애들도 그걸 보고 배우니 부모님들이 매를 들고 나와 보지못하도록 이름을 불러 세우지만 어디 한번 휘청한 모습이 쉽게 돌아오겠는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누구도 문제 삼지않았다.
그런데 갑짜기 기어가던 트럭이 물속에 드러 눕는다.
미군 헌병차가 달려오고 동네 사람들이 달려오고 하지만 누구도 물속에 뛰어 들지 못한다.
순식간에 차량은 물살에 굴러서 밀려나가는데 타고있던 아씨들이 모두물속에 빠져 허부적 거린다.
워낙 물살이 거세 함께 하고 있던 흑인들도 한둘은 그만 물속에서 보이질 않았다.
미군이 용감하게 물속으로 로프를 몸에 감고 들어가 보려 하는데 발을 내디딛는 순간 붕 떠버려 접근조차 못하고 있는데 이미 열넷명의 아가씨는 한명도 보이질 않았다.
미군은 그래도 남자라고 어떻게 물에서 일어서 살아 나오고 못 나온 사람은 한명이라 한다. 그래도 결국 시신으은 건져 올려졌지만 우리 언니들은 아무도 건지지 않는다.
누굴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저렇게 분통스럽게 눈으로 보는 가운데 운명해 버린 그 영혼들의 한을 누가 들어줘야 하느냐고 나에게 물어온다.
난감한 입장으로 나는 그저 그 다리위에 서서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그냥 눈물만 흐린다.
이런 이야기는 지난 20여 년 동안에 처음이자 마지막 이야기였다.
어르신이 다시 회관으로 가자고 하신다.
나는 슬픈 사슴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따라서 들어갔다. 그리고 이유야 어디에 있던 "이건 지옥입니다"라고 한소리 하고 준비된 소주 한잔을 마셔야 했다.
나는 소주를 들고 밖으로 다시 나가 그 다리 위에서 한잔 올려드리고 무릎을 꿇어 명복을 빌었다.
19살 순이는 내 누나였다.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 실제 존재한 역사이고 나는 그걸 알고 있는 세대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너무도 많은 사연을 만들어 낸 전쟁은 고독한 결과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알아야 하고 잊으면 다시금 나라가 망한다고 했지만 동서고금에 어느나라도 그걸 실천한 예가 없다.
그러기에 또 다시 흔들거리는 이념의 대립과 지역감정의 골이 패이고 남북한의 평화공존이 어느 한쪽으로 힘의 균형이 쏠릴 때 과연 그 전쟁의 소동돌이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망설여 진다. 요동치는 국제정세의 변화, 군과 정치의 역학관계를 지난 과거속에서 꼼꼼하게 잘 따져보고 정말 이땅에 전쟁이 없도록 제2의 징비록을 남기어 두고두고 참고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말 우리는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 냄비문화의 표본인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너무서글프고 아프니까 전달을 안하고 혼자 안고 삭히는 미련함일 것이다.
옳바른 도덕은 그 시대의 윤리이며 얼굴이다. 변하는 산물이다.
그러니 비교평가가 되도록 옳바른 엳사를 왜곡되지 않게 그대로 전수하는 기록이 있어야만 한다.
선택은 나 개인이 그 시대의 주인들이 하라고 남겨놓아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못딘 것인지 안다.
우리 많은 인원들이 일본하면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로 치를 떨고 36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억울함을 따지며 마치 일본은 이티처럼 외계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뒤를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일본으로 제일 많이 여행을 떠나고 언젠가는 모든 집에 일본 전자제품 없는 집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삼국시대에서 통일 신라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 당나라군대가 들어와 백제나 고구려를 유린하였으며 그 시대에는 여자는 전리품처럼 이용되었다.
그 후손이 우리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더구나 고려때는 원나에 패하여 그 많은 남성과 여성이 팔려가면서 말보다 못한 놈이란 속설이 생기게 되는데 급기야는 고려왕이 왕비를 고려인으로 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고 그 원나라에 빌붙어 관직을 사고 팔았던 시기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조선시대에 환향녀가 생겨나 중국땅으로 갔다가 돌아와 저 홍제천가에 앉아 중요한곳을 씻고 환생했다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몸이 찜찜하다며 그 여인들이 모여서 마지못해 생계를 이어가려 문을 열었던 곳이 장안촌이고 미아촌이고 양동이고 지금의 홍대 연대등이 있는 신촌지역이라 하면 우리 뭐라 할 것인가.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보다도 병자호란이 더 엄청난 국토의 초토화와 인명의 손실, 나아가 수 많은 여인들이 붙들려 갔다고 왜 목소릴 내지 않는지 모르겠다.
동북삼성이 우리 것임에도 지금 중국은 자기 것이라고 성을 뜯어고치고 고구려 발해의 흔적을 지우려 혈안이 되어 있는데 왜 우린 독도 하나에 목숨을 걸고 왜놈들하고 말 장난 하는지 모르겠다.
독도는 우리 것이다. 우리 수비대가 있고 그렇게 해왔으니 말없이 역사적 사실을 집대성 하여 국민들에게 돌리고 정치권과 학계는 여기서 큰소리치지 말고 밖으로 나가 논리적으로 맞서서 코를 납죽하게 하라.
우리 그 할머니들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역사가 그래서 중요하다. 잊어서는 안되며 기록되어야 하디 진실되게 사실 그대로 남겨져야 그걸 보고 읽는 후대들의 피빛서린 분개와 확연히 저 만주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인의 후손이란 영광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진영논리에 빠지고 이념에 함몰되어 일제시대에 말달려 싸웠던 우리의 독립군은 없다며 마치 말 달리는 모습은 오랑캐 또는 일본군이나 순사들만 타고 다닌 것처럼 그래서 자기편이 아닌 독립군이나 애국지사의 공적을 없애려 하고 마적단을 이끌고 얄팍하게 어쩌다 일본군과 싸우다 소련으로 도망친 김일성의 업적은 인정해야 된다며 그 무리들을 역사앞에 크로즈업 시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현대사의 가장 아픈 사건인 광주민주화 운동의 유공자가 4,400여 명이 된다느니 아니니 논란이 있고 그 명단을 밝혀 헤아려보자는데 법이 아니라고 못보게 하고 마치 하느님의 몸통인듯 말조차도 못하게 하는 것이 또 현실이다.
나는 그당시에 소위를 달고 계엄군이며 수도 서울의 상황실에 근무하여 그 시절을 조금 안다.
아니 적어도 서울바닥에서 내 눈으로 보고 직접 처리한 것은 사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의 한명이다.
아니 독립유공자니 전쟁참전자등 모두 법으로 보호받고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되었다. 허나 지금 그분들의 인정은 비밀스런 광주사람들만의 심사위원 선택으로 좌지우지 되는 그래서 그 지역이 아닌 지역에서는 그 엄청난 국세를 보상금이나 , 그 가족들의 만대까지 연금과 직업선택등 혜택이 부여되도록 한다는 등의 루머에 나쁜짓이라고 하는 견해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저변에 도사리고 있다.
왜 공개를 못하는지, 그 한분 한분이 민주화의 영웅이라는데 당당히 이름을 밝히고 '나 이런 사람, 나 이런 사람 후손'이란 말을 안하려는지 나도 사실 의아한 맘이 있다.
나는 광주에 있는 그 묘역도 현역군인이 못들어 가던 시절에 당당히 들어가 고개를 숙였다. 그당시 그곳을 지키고 있던 분이 당신 현역이 여기 들어왔다가 불이익을 받으면 어쩌려고 하느냐기에 "내가 내나라 사람을 못 만나면 누가 만나겠습니까, 그런 불이익 받으면 고맙지요. 할 일을 했는데 하늘이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라고 들어가 많이도 울었고 치를 떨기도 했고 묘역에 올라서서 꿇어 엎드려 극락왕생을 천국에 환생을 빌었다.
그 벽에 붙어 있는 사진 하나에 눈을 고정하며 참담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 동료들이 이곳에서 10여 명이상 죽어가고 어떤 동기는 날아든 돌에 안면부가 함몰되고 어떤 동기는 장갑차에서 쏜 총탄에 철모를 쓰고도 철모가 뚫리고 죽어갔는데 그런 사진은 있는 곳이 없다. 처음의 실황뉴스 비디오에는 그런 못습들이 가감없이 다 있었는데 지금은 편집되어 오직 군의 악랄한 진압(?)모습만이 담겨진 것이 시중에 돌고 있는 실태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분명 잘못된 것이다. 군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의 한 텀에서는 오직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 군의 또한 생명이고 집단의 정의가 된다.
사실 규명에 북한군 비정규군이 들어왔느니 아니니 하느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말도 안되는 논리다. 그러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입장에서 교도소를 습격하고 경찰서나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하여 총을 쏘아대고 방산업체를 습격하여 탈취한 장갑차에 무장을 하고 다니며 가두방송으로 길거리에 나와 달라 하여 세력을 키우고 여기저기 무장한 군인들에게 총을 쏘아대는 그 모습은, 그래서 내 전우가 숨져가는 그 실상은 현실인데 어디로 갔는지 이건 옳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나는 다시 태어나도 말 할거다. 판단은 후손들이 한다. 그러기에 가감없는 실체를 잘된것은 잘된대로 잘못된 것은 잘못된대로 역사앞에 드러내 놓아야 하는 것이라고... .
그러나 이 유해발굴 사업으로 돌아다니며 같은 전남이나 전북지역에도 그 민주화 운동은 인정하지만 보상관계는 깨끗하게 공명정대해야 한다며 너무 인원이 많고 너무 혜택이 크다는 이야기를 하는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누가 어떤 혜택을 받는지 모른다. 나만 나라를 지키려 그 당시도 어린 약관의 17세부터 39세까지의 남자들이 싫든 좋든 자발적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 강제로 징집되어 아니 끌려가서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13만 4천이란 어머어마한 호국용사의 시신을 저 전쟁터에 내버려둔체로 무려 7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건 해방전쟁이 아니고 미제 앞잡이 전쟁이고 이승만 지시로 한 것이지 김구선생이 한 것이 아니니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 식의 비아냥거림도 들었을 때에 내 마음속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저씨, 총 잡고 전쟁터에 나가봤어?, 아저씨 고향이 삼부연이지, 아저씨 조상은 깨끗한 단일 혈통이야"라고 묻고 싶었다면 또 많은 사람들이 나의 흠집을 찾아 갈기갈기 찢어놓으며 주둥아리 닥치라고 몰매를 때릴 것이다.무서운 나라다.
"내로남불"이란 용어의 의미를 돼세며 보고 싶다.
나도 꼭 아니다라고 하기에 무거운 부분도 있을 것이고 참 인생살기 힘들다.
그 옛 성현들이 부럽다.
아니 진돗개는 언제 들어왔으며 제주의 말은 언제부터 살았기에 토종이고 만주에 말 달리는 것은 소련군이나 일본군, 중국군이다는 논리로 또 한 생명을 폄하하는 작금의 3.1운동 백주년의 방송사들의 시국선언 스토리에 반감이다.
우리 조상은 말족이다. 만주벌판에서 말도 타고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멋지게 흙을 일구며 살아 그게 중국의 진시황이 벌벌 떨었다는 흉노족도 되고 원나라도 청나라도 건설하고 조선반도에서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취하여 반만년의 단일 민족의 피를 뿌리며 살아온 자랑스런 종족이다.
동해바다에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대왕암에 들어가라.
그 문무대왕 수중능 앞에 있었다던 '나느 흉노의 자손이다'라는 푯말이 있었다는 삼불의 양심선언을 우린 다시금 찾아봐야 한다.
백의민족이니 남의 나라를 한번도 침범하지 않았다는식의 쓸데없는 역사인식이 아니라 좀더 크게 광활한 대륙성 기질과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품의려던 혜초의 꿈과 장보고, 홍길동이 내 선조라고좀 큰소리로 가르치면 독도는 우리 땅이란 교육은 않해도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러니 후손들이여 다시금 중국 대륙을 나아가 유럽대륙을 지배하던 그 기개로 나아가라며 하찮은 섬나라 일본이야 밑에서 깔짝깔짝하니 형제의 우애로 문물도 알려주고 성내면 조금 참고 달래며 형의 도리로 함께하라는 유언은 안될까!
어느 국가나 잘 나가다 한순간 이탈하여 벌 받으며 사는 경우도 있다.
사라져간 역사가 어디 한 둘인가. 지금 몽고를 봐라. 우리 제주도에 와서 말 달리며 죄값을 치르고 있지않은가. 지금 원나라 금나라 청나라가 어디 있는가. 티벳이 국가로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중국이 단일 민족이고, 일본이 단일 민족인지 묻고 싶다. 중국에는 서양의 피도 있고 우리의 피도 섞였고 몽고 금나라의 피도 들어가 지금의 중국이다.
가까운 일본은 몇대 천황인지는 백제사람, 백제의 후손이란 말도 있고 오키나와에는 홍길동의 유적도 있다고 하지않는가!
민족이 아니고 나라의 존엄을 기르고 지역을 극복해서 저 드넓은 곳으로 진출하는 기상을 일캐워주는 후련함을 보여주는 역사학자는 아니 방송이나 정치집단의 선언은 없을까!
야생화의 슬픈 사연을 안고 전쟁은 무려 1129일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면 그 숨막히는 순간순간 지역별로 전쟁은 어디서 벌어졌으며 그 당시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는지 쫒아들어 간다.